이탈리아 여정을 떠올리며 점심으로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었다. 근래 보기 드문 '폭망 요리'였다. 제대로 삶아지지 않은 파스타에 간도 맞지 않고, 총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실패였다. 무거운 몸으로 요리하느라 진을 뺐는데, 맛없는 걸 먹으면서 진이 더 빠졌다. "와하!" "오오!' 첫 입에 나오는 이 감탄사, 맛있게 먹는 즐거움이 요리하는 노고를 한 번에 씻어내는 법인데. 셋이 머리를 박고 맛없는 걸 꾸역꾸역 먹자니 피로와 졸음이 막 밀려왔다. 숟가락 놓고 바로 잠에 들어버렸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김치찌개 끓여 놓고 기다려주는 우리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늘 하지만. 엄마가 한 요리 먹어본 때는 10년도 더 전의 일이고, 심지어 집에는 김치 한 톨이 없다. 독일 출국 전날 자다 일어나서 묵은지 포함 김치 3종을 주문했다. 점심의 실패를 극복하자는 의미로 저녁에 김치찜을 했다. 와, 실패할 수 없는 요리가 김치찜인데 이걸 실패했다. 착한 현승이가 김치 때문이라고 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맛있게 만들어진 요리는 기쁨이고 활력인데. 시차로 인한 피로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꾸역꾸역 먹었더니 하릴없이 배만 부르고. 해가 넘어가고 곧 어두워질 텐데 다짜고짜 집을 나섰다. 걸어야겠다. 탄천의 들꽃 친구들에게 아직 귀국 인사를 못했지. 탄천은 온통 금계국 세상이 되었다. 작은 봄의 들꽃들이 사라지고 뜨거운 여름을 견뎌줄 금계국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옆은 모내기를 끝낸 논이다. 걷다 보니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산뜻해진다.  

 
아카시아 향이 가고 밤꽃 향기가 왔다. 이렇듯 성실하게 계절이 제 일을 하고 있다. 두어 주 사이 달라진 탄천 풍경을 느끼자니 무거웠던 몸이 발걸음과 함께 더욱 가벼워진다. 

"JESUS LOVES YOU"
저 간판도 성실하다.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요즘 대세 금계국 개망초와 함께 여전하게 서 있다. 헤롱헤롱 메롱메롱 시차 적응을 응원한다며 나 하나를 두고 피켓팅 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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