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마음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자꾸 푹푹 꺼지는가 했다. 밥도 뭣도 하기 싫고, 장도 보지 않고, 꾸역꾸역 최소한의 일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고보니 해마다 엄마가 우리집에 와 지내시던 7말8초 동생 휴가 기간이다. 늘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맴도는 그리움과 슬픔이 새롭게 불러 일으켜지는 이유였구나 싶다. 그것만도 아닌데... 가만히 귀기울이니 어떤 노래 또한 마음에서 오토리버스로 재생되고 있다.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가자... 내가 아주 어릴 때였나 우리집에 살던 백구...  김민기 님을 그냥 떠나보낼 수 없는 슬픔이던 것 같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사에서 강론 하나를 접했다. 아름다운 강론이라 깊이 위로가 된다. 읽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적에 남편이 청년부에서 이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설교 안에서 아주 짧은 언급했었던 것 기억이다. 그 일로 당회에 불려가 사과를 해야 했었다. 예수님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죽음이 슬프고, 그립고, 새롭게 마음이 아프다. 괴물이거나 괴물과 싸우느라 괴물을 닮아가거나... 그 둘만 보이는 조국교회와 거기 담겨 크게 다를 것 없는 나의 처지에 무력하고 자괴감만 든다.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한 사람... 
 



지난 주일, 7월 21일에 돌아가신 김민기 님은 오늘 아침 8시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장례식을 끝으로 우리 눈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그분처럼 살다 간 모든 분, 그 맨앞에 계신 우리의 주님이 가신 곳으로 가셨지요. 바로 우리 가슴,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수녀원에서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나 수녀님들로서나 이런 장례 미사는 처음입니다. 어떤 수녀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분 신자셨던가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보통 신자보다 훨씬 더 신자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는 이방인 백인대장을 두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김민기 님의 한평생은 자신이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분이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분과의 대담에서 사담처럼 한 이야기한 토막을 들어 봅시다.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우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 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대.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 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어.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 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그거였을까?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얼른 막걸리 잔을 비웠다. ('한겨레와의 대담'에서)

 


김민기 님은 서울 대학로에 ‘학전(學田)’이라는 소극장을 열었는데, 그분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말 그대로 인재를 키워 내는 ‘못자리’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과연, 오늘 <JTBC> ‘사건 반장’의 표현을 빌자면, 음악계는 물론, “송강호, 최민식, 황정민 등, 요즈음 영화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다 학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양희은 씨를 비롯해서 대구에 가면 큰 거리에 그 동상이 서 있는 김광석 등 수많은 가수와 다른 연예인들 또한 학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김민기 님은 그런 인물들을 ‘앞것’들이라 하고, 자신은 ‘뒷것’이라고 했답니다. 사람들 앞에 화려하게 나타나는 일은 그들이 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은 뒤에서 그들을 키우고 돕는 역을 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뜻이랍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며 생각나는 성서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점점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말입니다.

이런 요한을 두고 우리는 선구자(先驅者)라고 하지요. ‘선구자’라는 노래도 있지만, 이 말은 본래 하느님의 아들, 인류의 구원자 ‘앞에’ 와서, 그분의 길을 닦아 놓을 사명을 띤 세례자 요한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지요. 옛날 임금님의 행차 때, “물렀거라!” 하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길을 비키게 하는 이를 생각나게 하는 말로, ‘앞에서 달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이 남을 제치고라도 자신이 앞에 나서고 싶어 하고, 남이 이룬 공적까지 제 것으로 돌리려는 경향을 보이는 세상에, 자신이 양성한 사람들을 앞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 있는 삶을 끝까지 살아 내신 이분은, 어떤 분의 표현대로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였다면, 이분은 후구자(後軀者)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앞에’ 온 이가 선구자라면, 그분 ‘뒤에’ 온 김민기 님은 후구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후구자가 왜 필요한가? 김지하 씨가 쓴 연극 '금관의 예수'에 김민기 씨가 작사 작곡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금관을 쓴 예수'라니 무슨 뜻이겠습니까? 가시로 엮은 관을 쓰고 거기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이 본래 예수님의 참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 그분의 머리에 금관을 씌워, 옛날 로마 군사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그분을 모욕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가시관을 못 견뎌 하는 내가, 금관을 씌워야 마음이 편해지는 모든 이가 한 일입니다. ‘준주성범’, ‘주님을 닮는다’라는 뜻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5)  당시 동족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비록 그가 종이라 해도 시킬 수 없을 만큼 비천한 일을 하시는 스승의 행동을 보고, 베드로가 깜짝 놀라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며 보인 반응은 너무 당연했지만, 바로 다음 날, 그분은 대야에 담긴 물이 아니라, 당신 몸속에 있었던 피와 물을 모두 쏟아 그들과 우리를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이 아니라, 당신의 살점으로 닦아 주셨지요.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분을 닮고 싶지 않은 우리는, 황금을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에 따라 그분의 머리 위에 황금관을 씌우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분의 모습에 따라 자신을 바꾸는 대신, 내 모습을 따라 그분을 바꾼 것입니다. 하느님과 황금은 한꺼번에 섬길 수는 없는 일이어서, 한쪽을 종으로 섬기면 다른 쪽은 종으로 부려 먹게 되는 것은, 천 길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중력 법칙만큼이나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가시관을 쓰고 사는 무지렁이들에게로 가시려는 그분의 발길을 막아서 있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시 가시관을 쓰고, 보실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루가 15,20)을 느끼셨던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 ‘얼굴 여윈 이들’에게로 언제나 다시 오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김민기님이 작사 작곡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의 노랫말을 들어 봅시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로 가리라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못 견디겠네
이 차디찬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사람들이 이렇게 간절히 찾는 그분은 정말 어디 계시는 것일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뼈아픈 말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머리에 금관을 씌웠고, 금관을 쓴 예수는 이미 하느님의 아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신 그분이 아닙니다.

첫 자리, 사람들의 박수와 각광을 받는 곳만 좋아하는 우리의 비뚤어진 경향에 김민기 님은 앞으로도 계속 외칠 것입니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우리 구원하실 그 분
어디 계실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에 젊었을 때부터 놀랍도록 충실하셨던 김민기 님은 우리 마음속에 오래 남아 우리와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를 일으킬 것입니다.

인간 세상과 모든 생명의 어머니 지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듯한 오늘날, 후구자로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신 김민기 님을 주께서 “나를 참으로 닮았구나!” 하며 안아 주시고, 이 뒷것의 목소리와 모습이 우리 가슴에 언제까지나 남아 메아리를 일으키게 해 주시라고 구합시다.

이병호 주교(빈첸시오)
전 전주교구장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후구자의 목소리와 모습, 언제까지나 남아 있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 글은 이병호 주교가 지난 24일 전주 인보성체수도회 총원에서 봉헌한 김민기 장례 미사 강론 전문입니다. 지난 주일, 7월 21일에 돌아가신 김민기 님은 오늘 아침 8시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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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처럼 달콤한 신학자라 불리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합니다.

첫 번째, “나를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두 번째,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세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네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많은 경우 ‘나를 사랑하는 이기적 동기’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돕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 체험이 깊어질 때 우리의 사랑은 자랍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이 아니라 그분 그 자체로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눈을 떠서 다시 나를 바라볼 때,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두려움 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어떠함’에 있지 않음을 알고, 그 사랑을 신뢰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자기 함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사랑에 닿아 자기 개방과 자기 증여로 이어지는 여정이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입니다. 2024년도 하반기 내적 여정에 초대합니다. (하반기에는 대면으로만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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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종합비타민 먹어. 

엄마, 진짜 종합비타민 먹을 거지?

엄마, 종합비타민 먹어.... 내가 주문했어.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출간하고 났더니 갱년기 증상이 몸으로 제대로 오는 느낌이다. 글을 쓸 때와 달리 사람들을 만나 중년의 몸과 영성에 대해 '말'을 하고 보니, 역시나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었네, 싶은 것이다. 정말 잠을 잘 자는데... 남편 안식월 여행으로 시차로 인한 불면증이라 생각했었다. 생각해 보니, 이거 갱년기 증상이네! 다른 증상으로 병원에 갔는데 "갱년기 증상이에요. 갱년기는 아무거나 갖다 붙여도 다 설명돼요. 종합비타민 드세요? 잘 챙겨 드세요." 했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노라, 종합비타민이든 뭐든 잘 챙겨 먹고 몸을 잘 돌보겠노라 공표했다. 그 말을 들은 현승이가 눈만 마주치면 종합비타민 타령을 하더니, 제가 알아보고 주문한 것이다. 

 

세심한 아들, 마음 따뜻한 아들 자랑은 아니다. 물론 남다른 따스한 성품이긴 하지만, 저 행동에 담긴 '분노'도 나는 안다. 몸이 자꾸 아프다는 엄마 걱정이 되어 죽겠는데... 병원도 잘 안 가, 꼭 필요한 것 챙겨 먹는 거도 잘 안 해. 말로는 늘 하겠다 하고 가겠다 하면서 실행은 안 해. 머리로 사는 엄마를 보는 답답한 아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부끄럽다. 고집스럽게 살던 방식을 고집하는, 말 안 듣는 노인 같은 엄마인 나다. 이런 것 챙겨 먹는 것이 내게는 사소해서 더 힘든데, 사소한 이 일을 성실하게 하기로 했다. 종합비타민 두 알 먹는 것을 기도처럼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현승이는 내게 내게 비타민 같은 아들이다. 아이가, 아니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마음이 깊고 따스할 수가 있지? 싶다. 자칭 엄마 중독자(https://larinari.tistory.com/2835)였던 아들이라 내게 유난하지만, 내게만 그렇지 않다. 현승이는 아빠나 누나, 친구들, 심지어 제게는 싫은 어른들에게도 기본적으로 연민의 마음을 거두지 않는다. 이 아이의 이 아름다운 존재의 빛깔을 비타민 정도로 소비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기쁨이 되기보다 자기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착한 아들보다 자기 존재를 먼저 돌보고 '되어야 할 자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나는 종합비타민 두 알을 성실하게 먹을 예정이다.

 

 

지난 달 말에 모처럼 가족 여행을 했는데,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독특한 커피에 독특한 사장님을 만났다. 핸드드립 훈제 커피를 내리더니 어느새 기타를 잡고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니, 부르는 모든 노래가 현승이 음악 저장함을 턴 것처럼, 김현승을 위한 플레이 리스트였다. 엄마 아빠 누나가 서로 "대박, 대박" 하면서 눈빛 교환하는데, 당사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귀와 온 정신은 음악에 가 있었음)다. 까딱까딱하는 다리를 나는 보았지! 

 

현승아, 누구의 비타민이 되려 하지 말고 너 자신이 되어 살길. 그러면 그냥 너는 존재 자체가 세상의 비타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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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공연하고 오후 느지막이 들어오신 따님께 좋아하시는 호박전을 해드림. 호박에 밀가루 옷을 입히면서 옆에서 조잘거리심.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도 본인은 외향형인 것 같다고,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은 편) 집에서 쉬는 것도 좋지만 나가서 에너지를 소비하니 더 에너지가 나온다고 하심. 딸이 에너지 충전 되었다는 말에 엄마도 조금 충전이 됨. 우리 딸은 호박전을 좋아하심. 내 덩치로 (저 덩치 딸에게)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호박전 좋아하는 우리 딸 참 귀여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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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음터의 사랑하는 벗들이 기도 피정에 가 있다. 그 피정이 시작되었다는 포스팅을 페이스북에서 보고 '좋아요'를 누르며 잠시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 베란다 쪽에서 뭔가가 부르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쌍무지개가 펼쳐져 있다. 이렇게 선명한,  '대놓고 무지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무지개는 약속이다. 피정에 간 벗들의 기도와 삶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공동체에 관한 꿈이 있고, 고민이 많은 오랜 친구가 오랜 고민 끝에 우리 교회에 등록을 했다. 나를 알고, 남편을 알고, 우리의 기나긴 인생 여정을 알고, 목회자가 되어 살아온 나날들을 아는 친구이다. 감사와 염려가 교차하여 알 수 없는 마음이었는데... 무지개가 떴다. 약속이다. 친구의 길을, 친구의 가정을, 교회를 섬기는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유학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알바도 해야 하고... 갑자기 어른이 되어 생의 무게를 져버린 채윤이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내 가난한 젊은 날의 막막함이 생각나고, 그때의 나보다 더 강하고 성숙한 딸이 대견하지만 가엾고 안쓰럽다. 어린 날의 나를 안아주듯, 한참을 안아주었다. "내가 안고 있듯 성령님, 이 아이를 안아주세요. 저와 이 아이를 함께 안아주세요."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냥 안아주었다.  

 
이 또렷한 무지개가 떴을 때는 비가 오는 중이었다.
비가 온전히 그치고 화창하게 갠 하늘이 아니었다.
약속이다.
흐리고 비오는 날에도 사랑의 약속을 잊지 말자는, 그런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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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때, 인생 선생님 두 분을 만났는데 영어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이었다.
영어 선생님은 "작은 연못"을,
국어 선생님은 "아침 이슬"을 가르쳐주셨다.
 

두 선생님 덕에 김민기와 김남주 시인을 먼저 알고, 먼저 의식화되어 대학에 들어갔다. 의식화는 되었지만, 패배의식으로 무기력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운동하는 친구들, 선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집에서 혼자 기타 치며 김민기의 노래만 불렀던 기억이 난다. 멜로디와 가사가 내 마음에 새겨졌다. 아무것도 안 하고 노래만 불렀지만, 마음에 새겨진 노래들이 나의 무엇을 형성했다. 슬픈 날이다. 슬퍼만 하지 말고 고마워해야지... 그의 노래를 들으며 추모한다. 많은 노래 중 <아름다운 사람>이 유난히 마음을 울린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사람(김민기)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 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 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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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안녕, 곧 만나요!  (1) 2024.06.06


가톨릭 신자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산다. 부모가 준 이름 뒤에 데레사, 마리아, 티모테오... 세례명이 따라붙는다. 가톨릭 신자들과 친분을 맺고, 신부님 수녀님께 배우면서 농담처럼 "저도 세례명 하나 지어야 할까 봐요"  했었다. 김영미 데레사입니다, 박선영 카타리나입니다, 문재인 티모테오입니다.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내 순서만 오면 라임이 딱 끊어져 단절되는 것이다. "정신실입니다. 저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세례명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유익이 있는 것도 같다.  평생 자기 이름을 따라다니며 하나님을 매개하는 신앙의 선조 한 분을 갖는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도 아녜스, 세레나, 안젤라 형님, 베로니카 형님... 하면서 바로 어떤 유대감으로 연결되는 것도 좋아 보인다. 세례명으로 부르는 관계 안에서 '라임 단절자'로 앉아 있던 시간이 길다. 좋은 분들을 꽤 많이 만났는데, 어쩐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세례명으로 부르고 불리는 사이에서 세례명 없는 존재였다는 것은 아닐까,  이번 순례 여정에서 어떤 세례명이 친구의 이름처럼 느껴지는, 그런 경험을 했다. 
 
춥고 비오는 뮌헨 공항에서 독일 일정이 시작되었다. '춥고 비 오는' 정도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루 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덥고 목마르다 투덜거리지 않았던가. 비행기로 겨울 나라로의 이동이 된 것만 같다. 추운 날씨가 더 춥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내 캐리어에는 추위를 방어할 옷이 없다. 독일의 기온이 계속 이렇다면, 망했다! 추위에 취약한 나는 순례고 뭐고 잔뜩 움츠린 어깨와 쪼그라든 마음으로 남편을 원망하며 남은 일정을 지내게 될 것이다. 짐을 싸며 패딩을 챙기고 있는데 "여름 날씨야. 그거 필요 없어" 지나가는 말로 남편이 한 마디 했다. 여행지 날씨는 늘 예상 밖에 있는데... 싶으면서도 그 말에 의지해 가벼운 짐을 싸기로 했다. 에라, 잘 걸렸다. 남 탓, 남편 탓을 하자. 원망의 불길로 이 추위를 이기자! "당신 때문이잖아! 뭐가 여름 날씨야?!" 온기라고는 없는 이 차가운 불길, 분열과 미움을 유발하는 원망의 불길을 잠재운 것은 세례명 안나, 세례명 오틸리아 두 사람이었다. 덜덜 떠는 내게 입고 있던 패딩조끼를, 바람막이를 벗어주더니 내복까지 내어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만 추운 게 아닐 텐데, 그들도 따뜻한 옷이 필요한 날씨인데 말이다. 따뜻한 옷을 많이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틸리아의 캐리어는 내 것과 반대였다. 아, 여름 날씨 로마에서 시원한 옷이 없어서 반팔을 사야 했었지!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는 마음, 아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사람에게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내어주는 마음이었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내어준 옷을 입고 몸과 함께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남의 옷이니 내 옷이니 따질 겨를도 없고,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옷에 꽤나 연연하는 사람이다. 예쁜 옷 보면 못 참고, 시의 적절하게 옷 입는 것에 집착까지는 아니어도 매어 있는 사람이다. 가톨릭 학교에서 신이 나서 공부하는 내게 아이들이 "엄마 수녀님 되고 싶어?" 하고 물어보는데, 수도자로 살고픈 마음은 늘 있지만 극복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옷이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엄마는 옷 갈아입는 맛에 살기 때문에 옷 한 벌로 사는 수녀님 생활은 어려워.  내게 옷은 시의 적절하게 나를 드러내고, 나를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건네준 옷은 "보이기 위한 옷"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옷"이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연연하는 내게는 드문 경험이다. 보이는 것보다 속은 훨씬 더 까칠하고 예민한 내가 남의 옷을 덥석 받아 입는 것 역시 흔한 일이 아니다. 기꺼이, 덥석,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입었다. 집을 떠난 순례지였고, 내 캐리어에는 추위에 맞설 옷이 없었고, 무엇보다 기꺼이 자기 옷을 내어주는 동료 순례자의 마음이 거침없었기 때문이다. 내 평생 옷을 나눠 입은 친구로 오래 기억될 이름 안나와 오틸리아이다.


비바람 속 찬 공기를 뚫고 도착한 독일의 첫 수도원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다. 이곳에 성녀 '오틸리아'에게 봉헌된 작은 경당이 있었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렇다, 내게 옷을 내어준 '세례명 오틸리아'의 바로 그 오틸리아이다. 7세기 경의 성녀 오틸리아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다. 후작이었던 아버지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머지 이 딸을 죽이려했고, 어머니가 몰래 수녀원에 맡겼다. 수녀원에서 자라던 오틸리아가 12세 되었을 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중 성유聖油를 눈에 바르자 눈이 뜨였다고 한다. 이제 더는 '장애인'이 아닌 딸을 곡절 끝에 받아들인 아버지는 귀족과 결혼시키려 한다. 눈을 뜸과 동시에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겠다 결심한 오틸리아가 받아들 일 없었고, 강제할 수 없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큰 성을 딸에게 양도하고 수녀원을 지어주었다. 오틸리아는 거기서 남은 생애 40여 년을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산다. 이런 이야기에 나는 늘 마음이 끌린다. 특히 "평생, 그 후로 남은 여생... 기도하며 은수생활을 했다..." 같은 지점에 그렇다. "눈이 멀다, 눈을 뜬다" 말은 영성생활에 관해 얼마나 많은 상징을 담는가. 앞을 보지 못했던 오틸리아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였다. 돌봐야 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가 세례를 받으며 눈을 뜬 열두 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영적인 눈을 뜬 성녀는 남은 평생 기도로 살고자 한다. 장애를 가진 딸을 매질하고 버리고 학대했던 아버지도 함께 눈을 뜨게 된 것인가? 재산을 양도하며 수녀원을 지어준다.
 
"눈 먼 이에게 빛을" 
 
오틸리엔 수도회는 오틸리아 연합회(Ottilianer Kongregation) 또는 선교 베네딕도회라고도 불린다. "눈먼 이에게 빛을"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선교를 위해 설립된 수도회이다. 한국에 베네딕도 수도원이 시작된 것도 이 수도회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내가 여기 낯선 땅 독일의 수도원 뜰에 서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논문 지도교수님이신 신부님 덕에 '요셉 수도원'에서 처음 수도원 피정을 경험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을 그대로 사는 분들을 보았다. 불과 30분 전, 여느 농부처럼 밭에서 일하시던 분이 기도 시간에 들어가면 어느새 수도복을 입고 앉아 계신다. 요란할 것도, 성스러울 것도 없는 기도하고 일하는 일상을 보았다. 하루 일곱 번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수도원의 기도 리듬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고, 심지어 언젠가부터 그리워하던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게 수도원 영성을 접하고 한 발 한 발 깊이 들어가다 오늘 여기 수도원 순례 여정에 닿은 것이다. 요셉 수도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닿는다.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분리되어 나온 요셉 수도원 역시 베네딕도 수도원이다. 우리나라에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이 시작된 것은 1907년인데 바로 이 상트 오틸리엔의 선교 덕분인 것이다.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원인 백동 수도원(지금의 혜화동)이 북한의 덕원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폐쇄되었다. 전쟁 후 1952년에 왜관에서 다시 수도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역사의 흔적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마주했다. 독일 수도원에서 우리나라 전통 가옥을 보게 되다니! 성당 옆에 박물관이 한국으로 아프리카로 나간 수도자들이 현지에서 수집해온 것으로 채워져 있다. 크지 않은 박물관의 한국관이 어찌나 알토란 같이 꾸며져 있던지. 베네딕도 수도생활에 선교의 소명을 더하여 생긴 이 수도원에서 현지 유물을 수집한 목적은 다름 아니다. 멀리 있어 그려지지도 않는 선교지를 이해하고자 함이고, 이해할 뿐 아니라 이해시키고 더 잘 알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스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는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문화인류학과 문학에 밝았던 그는 일제 강점기를 겪는 조선이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잃어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사진과 영상을 찍어서 남겼다고 한다. 그 자료를 가지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과 영상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 당시 '겸재 정선 화첩'을 구입하여 독일로 가져갔는데, 나중에 이 작품이 고미술 전문가들에게 알려졌고 시가 50억을 호가했단다. 그런데 2005년 이 수도원에서 무상으로 한국에 반환한 것이다. 돈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이 정도 가격의 유물이라면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문화유산이 아니겠는가'하는 판단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성베네딕도 수도원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청빈을 서원한 수도원의 일일지라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교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다. '선교'보다는 '전도'라는 말에 더 그렇다. 주일학교 시절에 '포도알 붙이기' 시상에서 전도상이 가장 컸었다. 전도하면 한 명으로 포도송이 반을 채울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어쩐지 전도에는 젬병이었다. 요절을 외우고, 예배 시간에 바르게 앉아 있는 것은 할 만한 일이었는데 전도의 열매는 맺을 수가 없었다. 자라면서 보니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라, 교회 가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것에는 내 기질에 더하여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들러붙어 있었던 것 같다. "눈먼 이에게 빛을"이라는 깃발을 들고 선교지나 선교대상에게 공격적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어릴 적에 부르면서 뭔가 두렵고도 불편하지만 대충 "택함 받은 은혜"로 포장하여 종교적 열정에의 연료로 삼았던 찬송도 생각나고.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 물속에 빠져간다 /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 지금 곧 건지어라) 눈 뜬 자의 자의식이 선민의식이나 영적 우월감에 닿는다면  말이다. 전도에의 열정이 지나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전도 대상자로, 그야말로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있다. 사랑이 먼저이고, 사람이 먼저이지 전도가 먼저인가. 

 
'선교 베네딕도회'라니 두 단어가 조화롭게 들리지 않았다. '수도원'과 '선교'를 나란히 이어붙이면 더욱 그렇다. 수도원은 물러남으로 다다르는 곳이고, 선교는 '나아가는 것' 아닌가.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수동성과 능동성, 침묵과 말의 차이로도 느껴진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어쩐지 이름만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인 것 같다. 수도원을 소개하는 모든 글에 '선교'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흐릿한 선입견은 수도원 안에 들어서자마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입구에 있는 수도원 서점에 짐을 두고 발걸음을 떼어 처음 마주한 것은  Erika Grube라는 치료사의 기념비였다. 이 수도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 생존자들을 위한 병원과 재활 센터로 사용되었단다. 해방을 맞아 수용소에서 나온 유대인들, 거의 모두가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어가는 몸이었을 것이다. 전적인 돌봄이 필요했을 텐데 즉각적으로 그 일을 한 곳이 여기 상트 오틸리엔이었다니. 무엇보다 여기에는 유대인 임산부들을 위한 출산 센터가 마련되어 수도원 경내에서 유대인 아기가 태어났다고 한다. 수도원 게스트룸이며 당시 병원으로 쓰였던 건물 앞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6년 6월부터 1947년 5월까지만 350명의 아이가 상트 오틸리엔에서 태어났다. 생존자들에게 '베이비 붐'은 삶에 대한 희망의 신호였다. 국가 사회주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이 승리하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아이들이 미래를 보장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독일 수도원이 유대인 생존자를 위한 병원이 되고, 유대인 아기들이 태어나 보호받는 생명의 요람이 되었다. 수도원이 병원이 되고, 수도원 독방이 분만실이 되는 것이 선교구나!  다시 이곳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올 수 있다면 수도원 손님의 방에서 며칠 머물러 보리라. 

 

숙연해진 마음 때문인지 걸음걸이가 느려진 것 같다. 자꾸 무리에서 뒤쳐지게 된다. 어느새 보면 사람들이 간데없고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 일어나니 아무도 없다. 뒤늦게 박물관으로 들어가 감동을 나누며 관람했는데, 다 돌고 나니 남편을 비롯한 순례객 모두 온데간데없다. 현실감각이 사라진 탓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상황이 무섭게 느껴졌다. 쫓기듯 서둘러 전시관을 나오는데 안내실에 수사님 한 분이 빙그레 웃고 계신다. 무슨 말인가 건네시는데, 잘 봤냐? 같은 인사겠지 싶어 웃으면서 끄덕끄덕 했다. 그리고는 바로 알아들었다. 통역기 반납하라는 말씀이었다. 민망해서 자꾸 웃으며 돌려드리니 따라서 계속 웃으신다. 용기가 불끈 나서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청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선교 박물관에서 나와 부슬부슬 오는 빗속에서 수도원 여기저기를 걸었다. 문지기 수사님과의 짧은 만남의 여운으로 마음이 왈랑왈랑 가볍고 기분이 좋다. 다들 어디로 가고 이 넓은 수도원을 전세 내고 독차지 한 느낌도 좋다. 조금 걸어 나가니 초록의 밀밭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농사짓는 수사님들의 일터일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하고, 이대로 멈췄으면 싶기도 하다. 

 
<수도 규칙서>에는 문지기 수사에 대한 규칙도 있다. 문지기, 문을 지키는 사람. 베네딕도 성인이 말하는 문지기는 문을 지켜 누구를 들여보내고, 막고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말을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 환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순하고 착한 마음으로 찾는 이에게 응대하는 사람이란다. 생각해보니 수도원에는 담장이 없다.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빼앗길까 두려울 때 사람들은 담을 쌓는다. 마음에도 담이 있다. 높고 낮은 담이 있어서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선교란 어쩌면 담을 넘어가는 행동이다. 독일 수도원에서 유대인 생존자를 돌보는 일, 동방의 먼 나라에 수도원 개척을 위해 수사를 파견하는 일은 담을 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도 담을 허는 일이었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내어준 호의는 낯선 개신교인을 친구로 받아주는 담을 넘는 일이었다. 아니, 애초 담을 쌓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순례기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내 마음에 세워진 높은 담을 본다. "개신교 목사 부부가 순례단에 참여하여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는 그럴듯한 말 뒤에는 담이 있다. 담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제도로, 교리로 세워진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담 자체는 말이다. 문이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기꺼이 환대할 마음으로 양순한 얼굴로 앉아 있다면. 낯선 이가 문을 두두릴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분에게 강복하소서!" 하고 맞이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내게 옷을 빌려준 오틸리아는 어릴 적 개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성인이 되어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았다. 신심이 남다른 것은, 버스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이끄는 목소리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세례명을 정할 때는 성녀 오틸리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그저 "주님, 제가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하니 이 역시 신비로운 일이 아니겠나 싶다. 신앙의 눈을 뜨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눈을 뜨는 것이다. 나도 기도한다. 주님, 저도 눈을 뜨게 해주세요. 매일 사랑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수도원의 정문에는 말을 주고받을 줄 알고 또 (인격이) 성숙하여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일이 없는 현명하고 연로한 사람을 둘 것이다. 문지기는 정문 옆에 방을 가져, 방문자들이 언제나 응대할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 문을 두드리거나 가난한 사람이 외치거든 즉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거나 또는 "강복하소서" 하고 대답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온갖 양순함과 사랑의 열정으로 재빠르게 응대할 것이다."
<수도규칙>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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