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마치고 수제 쿠키 몇 개를 신경 써서 챙겨왔습니다. 다음 날,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이 아니었지만 굳이 명품 접시에 담아 커피와 함께 먹었습니다. 1월에 에니어그램 1단계 강의 들으신 선생님께서 재수강으로 오셨는데 손수 구워오신 쿠키입니다. 지난 번 강의가 너무 좋아서, 라고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강의 후기에는 '지난 강의 후에 기도 시간이 더 늘었고, 영적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을 경함하고 있으며, 기도 시간이 괴롭고 힘든 만큼 소중하고 귀하다'고 써주셨습니다. 참 감사하고 마음에 힘이 되었습니다.


에니어그램이 뭐라고 제가 이렇게 목숨을 걸겠습니까. 잠시 그것을 도구 삼아 자기 마음을 비춰보고, 정직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며, 차차 기도가 깊어진다면, 그리하여 조금씩 진리에 다가서는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면..... 단 한 분이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제게 오늘을 사는 가장 큰 의미 하나가 됩니다. 한 사람의 존재에 의미를 확인시켜준다는 것, 그것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이 고마운 쿠키에 저의 그 의미를 담아 경건하게 먹어본 것입니다. 다른 한 분도 계십니다. 에니어그램을 처음 접하시는 호기심과 겸손한 눈빛으로 제가 하는 모든 강의를 다 수강하셨지요. 1단계 강의 재수강을 한달음에 달려 오셨습니다. 헌데 이미 10년 넘게 에니어그램을 공부하고 심지어 강의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제게 허락된 이런 만남들이 참으로 과분합니다.


그리고 이런 걸 글로 쓰는 것은 오글거리는 일입니다. 자랑이며 동시에 선물로 오는 마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는 탓입니다. 오글거림을 무릅쓰고 씁니다. 자랑임을 인정하며 공개합니다. 강의에서 떠들떠들 했던 것과 반하는 행동인 것도 압니다. 유형 설명을 하며 이렇게 교만하게 떠들떠들 하곤 하지요. '남들이 아무리 인정해주고, 사랑해준다 해도 우리 영혼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알아주고 사랑해주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궁극적으로 채우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진리인 줄 알고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지는 못합니다. 진리를 알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오, 주님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우리 영혼엔 진정한 안식이 없나이다' 어거스틴의 고백 또한 진리입니다. 이 상황에 바꿔 고백해본다면 '오, 주님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머무를 때까지 우리의 영혼엔 진정한 사랑받음이란 없습니다' 이 역시 내 영혼의 고백입니다. 문제는 누구라도 지금 당장 그것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당장 이루어낼 수는 있지만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까이 존재하는 작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끝없이 그 사랑을 찾아가야하는 실존에 놓여있습니다. 아주 고갈되지 않도록 사랑을 채움받는 관계가 꼭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 하나님 사랑으로 비약하는 것은 보통 사람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비 온 후 물웅덩이를 일부러 밟는 어린아이처럼, 엄마에게 혼날 것을 알면서도, 혼날 것을 알기에 더욱 그 웅덩이를 밟아 신발과 바지를 더럽히는 아이처럼 우리 마음은 부정적인 것에 더 빨리 달려갑니다. 상처받을 곳을 더욱 지향하고, 해도 안 될 일에 집착하고,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당장 품어내겠다고 주먹을 꽉 쥐곤 합니다. 사랑을 주는 것보다 먼저 오는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게 사랑을 채워주는 벗을 둬야 하고, 그런 장소를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준비할 때는 늘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하면서 신파조 넋두리를 하기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과분한 신뢰가 제 존재에 사랑을 채우고, 의미를 채우는 시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임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과 교만이 내 소중한 사람들을, 무엇보다 나 자신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 잘 압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받음이 필요한 나를 그대로 두고 채찍질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실은 매일 모진 채찍질을 가하려는 제 팔목을 붙들어 두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수련입니다. 사랑의 훈련입니다. 잘 해보겠습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4

 



교회 울타리 안에서 공식 비공식적인 상담한지 오래다. 그 사이 내 귀에 깔때기하나가 생겼다. ‘사모님, 공동체가 뭐죠? / 저 올해 리더 그만 둘래요. /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이 뭐죠? / 사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가 너무 약한 것 같아요.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로 가야겠어요.’ 여러 정황 속에 나온 말이지만 대부분 사랑받고 싶어요의 다른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시쳇말로 관종이라고 한다. 관심이 필요한 종자들이라는데 실은 우리 모두 관종 아닌가. SNS에 사진 올리고, 일기인 듯 일기 아닌 일기를 올리는 이유도, 심지어 갑자기 프로필 사진을 제거하는 이유조차도 나 좀 봐 주세요일 터. 단지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선한 관심 즉, 사랑을 보여 달라는 뜻이니 SNS 타임라인에 울려대는 알림은 그저 이 노래의 가사 자체일 듯하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네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 하도다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찬송가 503세상 모두 사랑 없어’. 교회에서 흔히 불리는 찬송이 아니다. 곡의 길이나 특유의 늘어지는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지 싶다. 이렇게 적나라한 가사는 불편하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노래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것은 나도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로 시작하는 가사는 내 깔때기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세상이 너무 추워. 나는 사랑이 필요해!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불편하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적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무력함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에두르는 방식으로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괜히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토라지거나, 일의 성공에 목숨을 걸거나, 방어막을 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거나. 이 대목에서 다른 찬양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나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그들를 대입했다가 다시 한 발 물러나 그들을 그들로 부르기를 반복한다. 주님, 아니 사랑이 필요한 그들을 온전히 타자로 세울 수는 없는 탓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사랑이 필요한 존재이며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채워줘야 하는 딜레마에 놓이는 것이다. 내 코가 석자인 주제에, 누구 못지않은 관종인 주제에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오늘의 찬송이 등을 떠민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 하겠네

저들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쥐어 짜내서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리는 비에 장독대 뚜껑을 열어두면 빗물이 가득차고, 가득 찬 후에는 흘러넘친다. 흘러넘치는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랍시고 쥐어짜 내주고 난 후에는 내가 너에게 해준 게 얼만데본전 생각나기 십상이다. 우리 영혼은 장독대 같은 빈 그릇일지 모른다. 장독대가 스스로 자신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생성해낼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가페라 불리는 오는 사랑이 가득 채워질 때 흘려보내는 유통자,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부어져 있다. 우리 존재에 이미 부어져 있는 사랑을 믿는 것은 사랑이신 분을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C 님께서 제작한 짤들입니다.

엔돌핀 폭발 선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한다. 췡!)

설명이 필요 없는 정신실적 짤입니다.

'너 자신이 되어라'





작년 북토크에서 우연히 출시한 대사 '여보, 나 당신 버릴 거야'를 그렇게들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

북토크 반응 보고 <새롭게 하소서>에 나가서도 해봤거든요.

눈물 찍어내는 장면도 있었는데,

역시나 가장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반응 보여주신 부분입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으나

선천적으로 잘 되지 않으시는 분들은

가져다 쓰셔도 되겠습니다.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안면 근육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짐 캐리도 비슷한 선물을 받았다고요.

저의 안면 근육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정말 입니다.

정말 정말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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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햇살 받으며 책을 앞에 두고 앉았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허공을 헤매고 다니던 시선이 커피장의 빨간색 원두 봉투에 꽂혀 머문다. 폰을 꺼내어 커피봉투를 찍었다. 그 옆엔 빨간색 카플라노가 있다. 그래, 너도 찰칵! 소파 옆 빨간 스탠드, 마주보는 책꽂이의 어스시 전집, 그릇장의 빨간 나비 커피잔. 빨강에 홀려 왔다갔다 찰칵찰칵했다. <자기 결정>, <아니마와 아니무스>, 알랭드보통의 <불안>, 오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빨간 책들만 골라 뽑아 읽어본다. <신이 된 심리학>의 빨간색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벽에 걸린 액자 <탕자의 귀향> 속 아버지의 겉옷으로 빨간 색 마침표를 찍는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찬양연습을 위해 교회에 있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단다. 아는 얼굴조차도 아직 낯선 이곳에서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이 애매한 시간에, 이 낯선 곳으로? 멍한 표정으로 '찾아온 이'를 맞았다. 하도 멍한 상태라 빨리 알아보지도 못했다. 코스타 K간사님이시다! 아, 맞다. 이 근처에 사신다고 했었다. 그렇다 해도 이 얼마나 상상 밖의 시간과 공간인가. 교회 건물의 약국에 오셨다 혹시나 하고 들르셨단다. 나로서는 주일 아닌 날 낮에 처음으로 교회 있어본 것이었다. 어쩌면 이 시간에 찾아오셨나요! 찰나 같은 만남, 반가움에 감탄사만 연발하다 짧은 몇 마디 나누고 끝났다. [사모님, 올해는 못 오신다고요./네. 간사님은 올해도요?/네, 저는 물론...... 아, 그렇군요.] 이 짧은 만남이 추억의 빨간색을 소환해냈다.


사실과 전혀 다르게, 나는 K간사님 입고 오신 옷이 빨간색 조끼라고 저장했다. 그리고 집에 와 거실 탁자에 앉아 책을 읽지 못하고 집안의 빨강들을 찾아 헤맨 것이다. 작년 코스타 준비를 위해 K간사님께 연락이 왔을 때, 당연히 미국에서 온 메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계시다기에 잠시 다니러 나오셨구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한참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컨퍼런스 기간마다 휴가를 내어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간사님들이 그러하듯 일 년 내내 코스타에 연루되어 보이지 않는 일들을 하신다는 것. 코스타 다녀올 때마다 한 번 제대로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제대로 소회를 남기지 못한 이야기가 빨간 조끼 간사님들에 관한 것이다. 갈때마다 강렬한 질문으로 안고 돌아오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간 내내 느껴지는 저들의 헌신인데, '헌신' 앞에 붙일 형용사가 마땅치 않다. 열정적인? 수준 높은? 보이지 않는? 전문적인? 어떤 말도 20% 부족하다. 


강사가 자비로 항공료를 부담하고 날아왔다고 하면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래진다. 코스타가 비난을 받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강사의 자비량보다 더 놀라운 것은, 비할 수도 없는 것은 간사의 자비량이다. 솔직히 강사들이야 '코스타 강사'라는 타이틀 하나 얻는 것만으로도 크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교계에서 청년 상대로 강의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기관이나 교회에 속해 있지도 않는 나같은 강사는 무리데쓰네 하면서, 남편 상에게 아리가또 스미마생 스미마생 하면서 다녀오게 된다. 남모르는 엄청난 희생이라 여기며 참석하곤 했었다. 그러나 실은 얻는 것이 훨씬 많다. 내가 굳이 강사 이력에 쓰지 않아도 검색하면 다 나오는 세상인지라, 알아서 알아주기도 하며, 일주일 진하게 유학생들과 부대끼고 오면 일 년 울궈먹을 강의 컨텐츠를 득템하는 것이 사실. (영업비밀 다 밝힘) 그런데, 간사님들은 무엇을 얻을까? 도대체 무엇을 얻기에 저렇게 앞뒤 안 가리고 가진 것을 내어놓는 것일까?


K 간사님은 단지 코스타를 섬기기 위해서 여름마다 휴가를 내어 날아간다니!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다는 내 명분이 부끄러웠다. 코스타의 빨간 조끼는 나의 이런 자기기만을 일깨우는 레드카드이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재의 입을 빌어 안도현 시인이 묻는 것처럼 빨간 조끼는 내게 묻는다. '너는 한 번이라도 사심 없이 너를 내어준 적이 있었느냐' 희생이라는 포장지 뒤에 감춘 내 사심을 묻는다. 여기까지가 빨간 조끼에 대해 풀어 놓지 못한 그간의 이야기이다.


헌데 K 간사님이 잠시 교회에 다녀가신 오후, 빨간색과 더불어 '열정'이란 말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열정이란 말에 애증의 감정이 있다. 강의를 하거나 특히 지휘를 하고나서 '열정적인'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많았다. 왜 그렇게들 말하는지 알지만 나도 모르게 그 단어를 자기비난으로 가져오곤 했다. 사람들을 몰아부친다, 에너지가 과하다..... 이런 평으로 듣기 때문이었다. 내가 열정적인 것을 스스로 잘 안다.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지 않고 빠져들지 않는 방법을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열정이 클수록 그림자가 짙고 크다는 것을 알기에 갈수록 머뭇거리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러하다. K 간사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빨간 조끼 간사님들을 향해 부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 것도 돌아오는 것 없지만 그저 나를 내어줄 (사람이든 일이든)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열정의 강사, 열정의 지휘자가 타인의 열정을 부러워하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새로운 열정에 대한 목마름일 것이다. 앞뒤 안 가리던 젋은 날의 열정이 아니라 불을 향해 날개짓 하는 열정이 아니라 말이다.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을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가 가졌을 열정, 메마른 땅에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 어제 엄마에게 다녀왔다. 총기는 여전하지만 많은 것이 가물가물해지는 엄마가 '신실이가 나이 몇이여. 니가 마흔 둘이여?' 해서 한참 웃었다. '엄마, 이제 신실이가 오십이여' 하니까 '얼라, 오십이여?' 하신다. 우리 엄마 입으로 듣는 내 나이가 새삼스럽다. 추억의 열정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나이에 맞는 오늘의 열정을 매일 새롭게 배우고 일깨워야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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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의 긴 방학 이야기, '방학이 일 년이라서'는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채윤이는 더 이상 꽃치너가 아니라 검정고시 준비하는 외로운 청소년 백수입니다만.


그녀의 꽃다운 나날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일의 포스팅이 남은 까닭이고,

아직 나의 글빨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포스팅 하나에 자랑과, 

포스팅 하나에 뽐뿌질과,

포스팅 하나에 어머나, 어머나....

일 년 방학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어?! 


꽃친에서는 지속적으로 시리즈 영상물을 제작 중입니다.

3편부터 차례로 공개되고 있는데,

2편의 1부가 따끈하게 나왔습니다.

[여행]편인 이편은 '꽃친의 재미'란 부제로 만들어진 예능다큐입니다.

베트남/홍콩 해외여행 밀착취재 영상이기도 합니다.


인생, 한 번 멈추어 다짜고짜 쉬고 놀아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 일곱 청소년이든, 중년의 아빠든, 엄마든.











아끼고 존경하는 목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보다는 '두 시인'이라 부르면 좋을 사람들입니다. 배움을 얻지 못하는 만남이란 없지만, 만나 대화할 때마다 내 마음에 특별한 깨달음의 씨앗을 뿌리는 분들입니다. 나이는 우리 부부보다 한참 어리지만 존경이란 말이 아깝지 않습니다. 합정동의 화력발전소 앞 오래된 주택에서 백만 볼트 배터리 장착한 두 아들을 키우고 살았습니다. 내외가 둘 다 천생 시인이었고, 집사님(이라 쓰고 사모님이라 읽어야)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라서 흙과 햇볕과 바람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공간에 갇혀 에너지 폭발하는 아드님들을 키운다는 것은 우울감을 부르는 일이다 싶어 늘 조금씩 걱정이었습니다. 이사 하라고, 이사 하라고, 남편이 시인 목사님을 찔러대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살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집을 짓는다는 주인의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남편과 나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교회사임하고 쉬던 어느 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시인의 집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밖에서 보던 집이 아니었습니다. 현승이가 살짝 옆으로 오더니 '엄마,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이나 아니면 일본 영화에 나오는 집 같아.' 소곤소곤합니다. 에너지 백만 볼트의 아드님들 덕에 멀쩡한 가구가 남아 있을 리 없고, 번듯한 인테리어 소품 따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멋스러운 집이었습니다. 꿈이 꿈틀대고 있다고 할까요. 광목천으로 가려진 선반, 책꽂이도 없이 멋대로 쌓여 있는 시집을 비롯한 책들. 바로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집입니다. 집은 집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새롭게 실감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가족은 한 달 만에 합정동의 좀 더 넓고 쾌적한 빌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좋은 가격에 한 달 만에 집을 구하고 이사.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걸 보면서 옆에서 얼마나 부러웠는지요. 석 달이 넘도록 집이 나가지 않아 마음 졸이던 우리 상황과 비교되었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차별대우에 섭섭하고 화가 났습니다. 내 일처럼 기쁘면서도 진정 내 현실을 떠올리면 괜스레 마음에 찬바람이 불었습니다.


'이 녀석아, 내가 누구냐! 네 하나님이다.' 다 시기가 있다는 듯 우리집 이사 역시 해결되었습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손놓고 좌절한 시점에 적절한 만남, 적절한 다리놓음, 고마운 배려로 된 일입니다. 남편이 무척이나 원했던 교회 앞 동네, 걸어서 5분 거리입니다. 3개월 체증이 내려가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과 기쁨도 잠시. 이사할 집의 치수를 재러 가서 자세히 보니 처음 슬쩍 봤던 것보다 더 낡았고, 각이 안 나오는 공간이며, 뭔가 상당히 견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실 가득한 책꽂이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지, 주방과 거실이 하나인 휑한 공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근심이 많아진 찰나, 새로 이사한 시인의 집에 잠시 들렀습니다. 역시나 평범한 구조의 빌라는 이야기거리 꿈틀꿈틀 하는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부럽다, 부럽다 하면서 우리 집 공간 배치가 걱정이라는 얘기며 이사 이야기로 수다를 이어가는 중이었지요. 내 귀를 뚫어 마음과 영혼까지 헤치고 들어오는 시인의 목소리입니다.


"그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본 시점이었어요. 그 공간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이 바닥 났을 때 이사를 하게 된 거예요."


아, 상상력! 볕도 들지 않은 좁은 집을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만들었던 것은 끝없는 상상력이었구나!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로 온갖 선입견의 성들이 무너져내립니다. 반듯한 사각형의 아파트 거실, 자본주의적으로 획일화 된 집의 형태에만 고착된 그림이 사라지고 온갖 상상력의 풍선이 날아 오릅니다. 일단 이사 하고 짐을 넣어봐야 할 일이지만, 상상력이 뭔가 크게 일을 낼 것 같은 예감입니다. 이사 전날에 집사님 두 분의 도움으로 아이들 방에 페인트 칠을 하게 되었습니다. 벼르고 벼르던 일인데, 마음에 쏙 드는 거실 탁자를 마음에 드는 가격에 구입해 놓은 터였고요. 이사 당일, 짐을 들이며 순간순간 막막함을 견뎌야 했습니다. 포기하고 않고 상상력의 풍선을 날려대다 보니 아주 마음에 드는 거실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한 통속이던 거실과 주방이 분리되기까지. 벽에 붙어 있던 그릇장이 등판때기를 드러내며 주방을 가려주었고, 쓰던 컴퓨터 책상은 안성맞춤 아일랜드 식탁으로 거듭납니다.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이런 거실이 나오다니! 나의 상상력이 대견하여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직 거실만 살려놓은 상태입니다. 채윤이는 나무틀 창문이 한 벽을 차지하고 있는 제 방에 도통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오래 된 싱크대에 좁고 꽉 막힌 주방이며, 세탁기 들어 앉은 화장실 등은 정을 붙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상하라, 끝까지 상상하라! 채윤이를 데리고 2001 아울렛에 가 마음에 드는 커텐을 고르게 하고 달아주었습니다. 칙칙한 창이 가려지니 비주얼이 달라집니다. 토요일 오후에 비데 설치하러 오신 기사님. '토요일인데 오후까지 일하시네요.' 한 마디 건넸는데. 쌓인 게 많으신 모양인지 토요일 근무에 대한 고충을 쏟으십니다. 급 친해진 형국. 화장실을 보시더니 '와, 한 벽이 창문이네요' 하십니다. '그러게요. 이런 화장실 처음 보시죠?' 했더니 '좋죠. 습하지도 않고.....' 그 말에 다시 귀가 뻥 뚫립니다. '아, 맞다! 창문 열고 건조시키기 좋고, 욕실이 늘 뽀송뽀송하겠네. 다음 날 아침에 창문 가득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하고 (우리 집에서 해가 제일 잘 드는 곳이 화장실) 일을 보는데, 해.....행복하대요. 자, 이렇게 화장실도 애정으로 접수.


문제는 주방입니다. 거실과 분리되기는 했지만 가 서고 싶지 않은 싱크대 앞입니다. '나의 성소 싱크대'는 다 틀렸다, 싶지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부엌 한 벽의 장식용(으로 추정되는) 기다란 창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1도 기대하지 않고 밀어봤습니다. 어, 혹시 열리는 거 아냐? 아, 아니구아. 열리지 않습니다. 혹시? 하고 옆으로 밀어봤더니...... 대애박! 옆으로 밀리며 창이 열리는 것입니다. 소리 지를 뻔했습니다. 주님, 밖이 보이는 주방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육이 두 개를 가져다 창틀에 세우고 포스트잇에 몇 글자 적어 싱크대 문에 붙이니. 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입니다. 주방까지 애정으로 접수. 이로써, 집의 구석구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심심하면 남편과 마주앉아 작명놀이 하곤 하는데요. 몇 년 전에 지은 이름입니다. 내 집 그리스도의 마음. 물론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의 패러디이고. 내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셔야겠지만 내 집 구석구석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영적이라는 것이 물적인 것과 반대개념이 아니기에, 영적인 삶은 고통과 혼란을 포함한 일상의 모든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내 집구석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된다면! 제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누추하여 거룩한 현재'를 삶이 아니겠습니까. 결혼 후 열한 번 이사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수월하게 된 적이 없다며, 좌절도 낙심도 했지만. 그 어떤 집보다 더 애정하는 내 집이 될 예정입니다. 내 집 그리스도의 마음, 내 집구석 그리스도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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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모르는 것처럼 어려운 병이 있을까요. 영혼을 팔아서라도 자기 안에 갇혀 있겠노라 결심한 사람에겐 약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기를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브레넌 매닝의 말처럼 '죄의 본질은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이니 말입니다. 정신적 건강과 영적 성장을 위해 진짜 자기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진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진짜가 아닌 나를 알려주는 지혜의 거울입니다.


2017년 상반기 에니어그램 세미나 일정이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수강자가 2단계를, 1,2단계 수강하신 후에 심화과정 수강하실 수 있습니다.



[일시]

. 기본 1단계 : 2017년 3월 29일(수) 오전 10시~오후 5시
. 기본 2단계 : 2017년 4월 26일(수) 오전 10시~ 오후 5시
. 심화과정 1 : 2017년 5월 31일(수) 오전 10시~오후 5시

[
장소]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5층 세미나실(합정역 7번 출구에서 3분)

[인원] 각 강좌 선착순 15명  

[수강료] 각 강좌 12만 원

[문의] 010-4235-8020   larinari.tistory.com

[신청]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1단계 : 마감 되었습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2 신청하러 가기

에니어그램 심화과정 신청하러 가기



아울러 페이스북에 페이지 개설했다는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누구랄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사람입니다.

상처와 고통은 인간의 조건의 조건입니다. 

그런 의미로 온전히 건강한 사람도, 온전히 아프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상처를 보듬을 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더 아픈 이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페북 사용하시는 분들은 페이지 '좋아요'를 눌러주시면

세미나를 비롯하여 함께 하는 여정 안내를 바로 받아보실 수 있고, 

여정의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 페북 페이지 바로 가기



정신실의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의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강의 내용

1단계

  선물 또는 덫으로서의 성격 :

  에니어그램의 9 유형

 2단계

  적응 또는 방어로서의 성격 :

  에니어그램의 날개와 화살 / 공격, 의존, 움츠리는 유형들 

 심화단계

  습관이 된 정서, 패턴이 된 생각 :

  에니어그램 유형의 어린 시절

 영성단계

  성격 너머, 하나님 형상인 나 :

  에니어그램 유형의 왜곡된 하나님 상




대안학교도, 홈스쿨도 아닌

그저 푹 쉬기로 작정하고 일 년을 보내는 청소년 인생학교 '꽃다운 친구들'입니다.

채윤이는 일명 꽃친 1기로 일 년 푹 쉬는 행운을 얻었었죠.


꽃친에서는 작년 1년의 긴 방학생활을 꼼꼼하게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왔습니다.

그것들을 모아모아, 3부작의 영상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3부작의 영상물을 차례로 공개하게 되는데

3부 [방학이 일 년이라서_꽃친의 마음]편이 먼저 나왔습니다.

청소년과 관계 없는 생의 주기를 사는 분이라도 눈여겨 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나오고, 남편도 나오고, 채윤이도 나오니까요. ^^


아울러 저는 1기 최대 수혜자 채윤이 엄마로서 꽃친과의 연을 끊지 못했습니다.

올해 꽃다운 친구들의 '공동대표'로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영상, 즐감하시고 카톡이든 어디든 널리 공유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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