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하게 잘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 있을 때의 느낌이 있다. 백화점 의류 매장의 마네킹 사이를 걸어 아이쇼핑할 때의 기분도 비슷하다. 날아갈 듯 가벼운 봄 신상 사이에선 그럭저럭 괜찮았던 내 겨울 코트가 한 물 간 듯싶고 둔하게만 느껴진다. 여기저기 일어난 보푸라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비교를 하자면 나와 나를 비교할 수도 있다. 제일 좋은 정장을 차려 입고 결혼식 가는 나와 무릎 나온 운동복 차림으로 라면 사러 가는 나는 내 눈에도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잠시 옷을 바꿔 입어 신분까지 뒤바뀌어버린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이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몸의 자세는 물론 마음의 당당함도 달라진다. ‘왕자와 거지처럼 신분이 달라지기도 하고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다르게 매겨지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삶이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1)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 오신 예수님 참 내 구세주 (후렴)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역설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이 성화에서 보는 번듯하고 빛나는 옷이 아님을 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견디셨도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2절 가사에 힌트가 있다. 십자가 지신 그날의 옷을 상상해본다.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에 흠뻑 젖었고, 다시 마르고 또 젖고 했을 것이다. 땀에 피가 배어 나오도록 고통스럽게 기도하셨다니, 핏자국이 있을 지도 모른다. 빌라도 판결 후에 군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체취로 얼룩진 옷을 벗긴다. 그리고 왕의 옷이랍시고 자색 옷을 입힌 후에 네가 왕이냐조롱을 해댄다. 예수님의 사람 냄새로 얼룩진 옷은 결국 찢겨져 모멸의 천 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그런 예수님의 그 옷이 아름답다고? 내 기쁨이 된다고?

 

내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 열어주실 때나는 이 부분에서 눈물이 터지곤 한다. 그 영광은 몸소 당하신 고난과 수모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 수고로운 생의 끝에서 그분이 열어주시는 문을 통과할 때, 나 역시 영광의 새 옷을 입을까. 부끄러움과 외로움, 끝없는 실패로 누덕누덕 죄 된 옷을 벗어 던지고 천상의 옷을 입을까. 그 소망이 멀고도 가깝고, 아스라하며 또렷하다. 그 영광의 옷 입을 날을 그리며 이 땅을 사는 내 영혼의 누더기 옷을 직시하자니 눈물이 난다. 내가 오늘을 살 듯 역사 속에 들어와 33년을 사신 예수님, 리얼(real) 인간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셨을까. 평생 집 한 칸 없이 번듯한 옷 한 번 입지 못하셨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메마른 땅을 걷고 또 걸으시며 다니시던 그분의 행색은 영락없는 노숙자이었을 터. 하지만 권세 있는 말씀으로 어디서든 군중을 몰고 다니셨다. 예수님에 열광하던 군중은 금세 예수님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침 뱉는 자들이 되었다. 그들이 뱉은 침으로 내 주님 입으신 옷은 마지막까지 오욕으로 얼룩진다.

 

결국 옷의 문제가 아니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는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 신분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지지만 예수님은 무엇을 입어도 예수님이셨다. 땀에 절어 냄새 나는 옷을 입고도 왕이셨고, 모조품 왕의 옷을 입고 조롱당할지라도 하나님 아들이셨다. 명품 옷 입은 사람과 앞에서 추레한 옷 모양새를 셀프 스캔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나와 달리 그분은 당신의 존재로 그 입으신 옷을 영광되게 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사랑받는 자’, 이 한 마디로 이 땅을 사신 예수님을 정체성을 규정한다. 요단강 세례식에 울려 퍼진 하늘 아버지의 목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 이 천한 세상(후렴)’ 오셔서 짓밟히고 버림받아도 결코 손상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모멸과 수치의 옷을 입고도 사랑을 잃지 않는 당당함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랑받는 자, 이미 사랑 받는 자! 반대로 입은 옷에 스스로 규정당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존재의 가치가 오르락내리락 하여 흔들리는 나는 사랑받는 자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불신앙이다.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보았(3)’으니 나도 그리 살자. 몸에 걸친 옷, 사람들의 시선,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 사랑받는 자의 중심, 아름다운 중심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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