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내적여정 세미나를 심화2과정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기보 1,2 과정과 심화 1,2과정. 총 4일, 28시간의 만남이었습니다. 어떤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살아 남고 견뎌낸다는 것을 빅터 프랭클은 깨달았습니다. 다른 곳 아닌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결국 살아 온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라고 하지요. '아이고, 의미 없다' 이 얼마나 쓸쓸한 말입니까. 


 심화2과정을 마치고 남겨주신 후기를 한 자 한 자 읽자니 '의미로다, 의미로다, 한량 없는 의미로다' 노래가 나오겠습니다. 좋았단 말, 고맙단 말이 백 천 천 번 듣는다고 싫겠습니까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살아온 것, 삶을 나누는 것이 '의미'가 있구나 싶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함께 하신 선생님들도 '여기까지 잘 왔다!' 칭찬과 격려 받기에 마땅합니다.   


'정직성’과 ‘자발성’은 진실한 만남의 토양입니다. 에니어그램은 우리 자신에 대해 가차 없이 정직해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리처드 로어) 이런 만남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닌데,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에니어그램 세미나는 ‘만남’의 신비와 기쁨을 일깨우네요. 한 분 한 분, 마주 앉은 분들의 의미가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손수 세 종류의 샌드위치를 만들고, 푸딩을 만들어오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저 유명한 동막골 이장 님의 말씀 '뭐를 좀 마이 멕이야지'을 확인시켜 주셨지요. 정성 담기 수제 샌드위치가 입맛을 무장해제 시키며 마음의 긴장까지 풀어주고, 서로를 향한 따뜻한 환대의 태도를 갖게 했으니까요.에니어그램이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신박한 도구임이 확실하지만 환대로 마주하는 '사람의 얼굴'만 할까요. 참 감사한 만남입니다.


남겨주신 후기들입니다.


* 멘토 님 추천으로 에니어그램 평일반을 듣게 되었는데 휴가를 4일 쓰고 일정을 끝까지 마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쉽지 않은 저의 이야기와 다른 분들의 귀한 나눔으로 나와 타인을 더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고, 앞으로 저의 일상 속에서의 성장이 더 기대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본다는 것,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많은 것 같네요. 힘들고 슬픈 순간에 그 누구도 탓할 수도, 변명이나 해명을 들을 수도 없지만..... 다만, 그때의 나에게 몇 마디의 말이라고 건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오늘 밤에라도요.


* 심화단계는 정상에 올라 탁 트인 하늘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불완전한 내 성격과 삶과 내면의 부조리를 담담하고 용기 있게 직면하고 견딜 수 있는 힘(그 힘이 무엇인지는 형용하기 어렵지만)이 느껴진다. 내적 여정의 영적 여정임을 상기하고 공감하는 과정이었다. 참 감사하다.


* 깨달은 것을 확인받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반응 감정 재해석하기 / 수퍼에고와 성령님의 목소리 /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생명 없음과 소망 없음을 느끼고 경험하며 현재 나의 기도제목인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축복수련이자 불리는 축복기도의 패턴들.
잘못 가고 있는 길이 아님을 확인받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한 발짝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함이 공존합니다. 성급한 마음 탓일까요? 귀한 만남들 감사하며 또 만나길 소망합니다.


* 제가 지금 어디 쯤, 어떻게 서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그전의 모임 때와는 다른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과 다시 하나님과 깊이 동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요즘입니다. 돌무더기 같은 마음을 깨닫고, 오늘 살짝 말랑할 정도의 마음이 되었어요.


* 이 여정이 가도 가도 깊고, 멀고, 보고 싶지 않으나 먼저 가신 분들이 끌어주시고 함께 가는 분들이 계시고, 다음 세대에게 멋진 어른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또 한 발 내딛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 들으면서 좋았지만 여전히 내 속에서 지배하는 수퍼에고의 목소리가 괴롭기도 했습니다. 조금씩 유리천장을 뚫어가고 있는 중에 힘을 얻었습니다. 기도로 이 여정을 더 깊이 가봐야겠어요.


* 여정을 지내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참 ‘나’가 되는 것,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살고 싶은 열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유형인지, 또 타인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지 생각하기 이전에 그저 하나님 창조하신 그대로, 자유의 삶을 살고 싶고 그 자유로 관계를 누리고 싶네요.


* 에니어그램은 나를 아는 것과 동시에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ㅎ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심화2과정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번 강의는 특히 ‘아하’ 체험이 풍부했습니다. 홀로 기도하면서 혼돈스럽고 모호했던 부분이 선생님의 강의로 이론적으로 확실해져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함께 수업 들으며 솔직하고 진솔하게 내면을 열어 보여주시는 강의 같이 들으신 분들을 통해서도 유익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재미있고 흥분되게 심화단계를 마칠 수 있어서 정신실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주님 참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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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놀이터가 하나 생겼는데 서현역에 있는 알라딘 중고매장이다. 걸어서 왕복 5km라서 운동 삼아 다녀오기 딱 좋은 거리이다. 가족들의 주문을 접수하여 백팩 따악 메고 비오는 길을 걸어 알라딘중고매장을 다녀온다. 돌아오는 길,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깨에 맨 가방에 누가 작은 돌멩이 하나 씩 티 안나게 집어 넣는 듯. 걸을수록 무거워진다. 무거울수록 뿌듯함은 더 크다. 식구들 각자에게 꼭 필요한 책을 구했고, 도합 이만 몇천 원이라니~ 이것 참, 무겁지만 가볍다. 



수년 전 아주 무기력한 날('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도 하지)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책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때 우연히 손에 잡은 책이 <책만 보는 바보>였는데, 영락없이 내가 책만 보는 바보였다. 요즘은 전에 없이 소설에 빠져 보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소설 <잠>이 '꿈'에 관한 내용이라는데 낚여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예약주문을 했다. 이 책을 손에 잡으면서 뭔지 모르게 마음을 못잡고 있는 터에 '소설만 보는 바보'의 삶이 시작되었다. 밀렸던 소설읽기 숙제 아니고, 놀이나 몰아서 하자.


옆에서 힐끗거리던 현승이가 <잠1>을 집더니 휘리릭 읽고, 2권 어서 읽어내라고 성화였다. 그러더니 '베르나르 베르베르, 완전 내 스타일' 하고 빠져들었다. <웃음> 1,2권을 금세 읽고 <뇌>를 비롯한 다른 작품 사내라고 자꾸 주문을 넣는데. 일단 사와서는 기말고사 마치고 읽기로 하고, 몰래 책을 감춰 버렸다. 거실에 분 소설 열풍에는 아빠의 부채질도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을 사들고 오는 바람에 이래저래 뽐뿌질이 된 것이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글쓰기 강의를 하였다.  글쓰기 강의, 그것도 비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서 내심 혼자 짜릿했다. 쓰는 얘기를 하자니 읽는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글을 쓰고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어떤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아이들이요?! 

TV 없는 거실 18년 째이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천장 보고 누워 있던 시절부터, 보행기를 타고 기동력을 가진 때도, 네 발로 기어다니던 때도, 그 이후에도 배경은 늘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이었다. 그런 거실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서 엄마 아빠는 '세트로 책만 보는 바보'였다. 아이들 독서교육이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 있는가?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아닌가. 헌데 현실은 그 반대. 책에 멀미가 난 것이다. 게다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뺏어간 책은 나쁜 놈! 한동안 두 아이 모두 그 어느 집 아이들보다 책에 관심이 없었다. 아, 환경의 역습이구나!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진즉에 '책 읽는 아이'로 키우는 것은 포기했다.


인생이 그리 짧지 않으니 뭐든 속단 내릴 필요는 없지 싶다. 어젠가부터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 책에 관한 한 덕후 기질이 있는 현승이는 꽂히는 책에 깊이 꽂히고. 작년에 꽃친을 했던 채윤이는 그때 그때 꽂히는 대로 짧은 흥미를 가지고 읽는다. 요즘 거실이 조용해서 둘러 보면, 넷 중 셋은 책을 들고 있는 그림이 많다. 이게 웬일이니! 아빠, 엄마, 현승이는 비슷한 소설을 돌려 보는 동안 채윤이는 의외로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반지성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채윤이의 요즘 취향이 살짝 적응이 안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제가 좋다니까! 큰 기대는 없이 '글이 그렇게 좋으면 하루 한 편씩 필사를 해봐' 했는데. 대박, 얘가 그 말 듣고 꾸준히 필사를 하고 있다.


아침 먹고 설거지 가득 쌓아 놓은 채 소설 한 권 붙들고 앉아 하루를 보내는 요즘, 소설만 보는 바보'다. 꼭 써야 할 글에는 손도 머리도 움직이지 않고, 사는 게 자꾸 씨리라라라(아, 이거 오랜만! 재방송 링크 한 번 더! ㅎㅎㅎ ), 될 대로 돼라, 약간 핀이 나간 상태이다. 그러니까 바보라는 건데. 이런 날도 있지, 이 또한 지나가리, 힘이 나지 않을 때는 힘 내지 말자, 하며 살고 있다. 거실에 나말고도 바보 셋이 더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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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아, 다 싸써~어. 어어엄마아, 다 싸따고오오.

똥 싸고 뒤처리 하는 것, 옷 입고 단추 잠그는 것, 요플레 뚜껑 따는 것.

제 손 두고 엄마 손 가져다 처리하던, 그럴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까마득하여 흐릿한 기억이지만, 분명 그랬던 때가 있었지.

이제 두 아이 모두 엄마보다 키가 크고, 힘도 더 세고, 음 또..... 더 세련되고.... 에...... 그렇게 되었다.


# 딸


채윤아아, 이리 와. 저기 싱크대 2층에 접시 꺼내줘.

채윤아아, 이 병 좀 따봐. 와, 너 손 힘 쎄다!


그리고 가끔 코스트코 같은 대규모 장을 본 후에는 집 근처에서 전화를 한다. 

채윤아, 다 왔어. 내려와.

어마어마한 머리숱의 긴 머리 휘날리며, 백수 향기 또한 휘날리며 1층 현관에 대기해준다.

짐을 드는데 이건 뭐, 수박 한 통 번쩍번쩍 들고,

엄마 손의 짐까지 뺏어서 양손 가득 어마무시한 무게를 들고 3층까지 한달음이다.

우와, 우리 채윤이! 아들이야? 우와아아아아.

주님, 이렇게 힘쎈 딸. 과연 제가 낳았단 말입니까?



# 아들

토요일 아침. 설거지 담당 누나가 레슨 가고 없다.
세 식구 식사를 하고 났는데 책 들고 소파에 터억 앉으면서
설거지 내가 할게. 이거 조금만 읽고 내가 할게.
오아아아아. 고마워!
그리고 점심. 아빠도 나가고 엄마랑 둘이다.
떡볶이 맛있게 해서 먹고 그대로 앉아 스마트폰 보고 있는데
벌떡 일어나더니 제 그릇 가져다 싱크대에 놓고, 또 내 그릇까지 거둬가며 식탁을 정리한다.
엄마, 설거지 내가 할게.
야, 아침에도 니가 했잖아. 연달아서 설거지를 하다고? 진짜?
현승이 며느리야? 왜 혼자 일을 다 할려고?
아니, 앞으로 주말에는 내가 아예 설거지를 맡을게.
<82년생 김지영> 독후 뒤늦은 효과?



딸은 자라서 아들이 되었고, 아들은 커서 며느리가 되었다.
자랑입니다만......
참 좋군요. 똥 닦아주며 키운 보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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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7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미덕이긴 하지만 그러다 생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안타까운 일이지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고백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할까 말까 생각만하다 상대에게 청첩장 받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상상만 해도 아쉬움의 산사태가 밀려오는 사태네요. 좋은 생각은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 이럴까요, 저럴까요? 묻고 기도합니다. 꿈에라도 주님께서 나타나서 이래라, 저래라응답 주시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기도하고 난 어느 시점에서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숙고하고 기도하되 반드시 어느 시점, 생각의 언덕을 떠나 체험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나는 젖지 않겠다, 작심을 하고 바다에 첨벙 뛰어들어 노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 정경, 서로를 빠트리고 도망가고 파도를 타며 노는 친구들. 바라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몸을 하고 친구 여러 명이 내게 몰려옵니다. ‘갈아입을 옷 없어, 나는 빠트리지 마물에 빠지지 않으려 도망 다니다 결국은 잡혀 빠지고 맙니다. 에라, 이미 버린 몸! 하고 깊은 곳으로 헤엄쳐 나가고, 친구 목을 껴안고 물을 먹이고, 그러다 나도 짠물을 들이키고. 이것이 살아있는 체험입니다. 물가에서 앉아 바라보는 것과 차원이 다른 체험이지요.

 

왜 너 인생을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상념에 젖어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바닷물에 젖는 것이 참다운 체험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헌데 오늘 찬송은 은혜의 바다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그 바다가 바로 그 바다라고 할 때. 고통의 바다인 인생은 동시에 은혜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은혜의 체험은 다름 아닌 고통과 두려움의 한 가운데라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에게 청첩장 받는 그 순간까지 대시할까, 말까 물가에 앉아 모래성만 쌓았다 부수고 쌓았다 부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절당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고 있지요. 연애든 진로든 하다못해 오늘은 뭐하지? 일상의 작은 선택이든 풍덩 뛰어들어봐야겠습니다. 고통의 바다임을 알기에 두렵지만, 바로 그 고통 속에 뛰어들어봐야 비로소 은혜의 바다를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의 모래를 털고 출항합시다. 지금, 바로 지금 갑시다.

 

거절당할 수도 있지, 반반의 확률이니 고백하자. 그리고 결과는 감수하는 거야!

100% 흡족한 조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일단 시작해보자!

내가 공부했던 부분이니 맡아보자, 몰랐던 부분이 드러난다고 내가 바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내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자. 반대의견이 있지만 어쩌겠나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면 감수할 밖에!




올봄, 남편은 들꽃과 사랑에 빠졌다.

'갔다 올게' 하고 나가면 한 30분 안에 카톡, 카톡, 카톡, 카카카카..... 카톡.

길가의 흔히 보던 꽃들이 줄줄이 폰으로 들어온다.

입만 열면 새로 발견한 꽃, 그 꽃의 이름을 읊어대며 헤벌쭉 하는 것이

꼭 첫손주를 본 할아버지 같다.


사랑 하라, 에만 골몰하느라 사랑을 그저 '하면' 되는 줄 알지만.

사람은 사랑을 제조할 수가 없는 존재이니 사랑을 한다는 것은 받아서 전하는 일이다.

그래서 주는 사랑에만 골몰하다 보면 말라 비틀어진다.

쥐어 짜내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닌 것이 허다한 이유일 지도.

주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오는 사랑을 받아 담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일이다.


올봄, 남편은 길가의 작은 꽃들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촉촉해졌다.

나도 길 위의 작은 꽃들로부터 사랑을 채운다.

'꽃 중의 꽃은 인꽃이여'

아기 하나를 두고 어른들이 죽 둘러 앉아 웃음꽃을 피우는 장면을 해설하는

우리 엄마의 말이다. 나처럼 아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아기들을 '인꽃'이라고 불렀다.


키 큰 나무가 푸르게 둘러 싼 율동공원 산책길에는 심장 뛰게 하는 인꽃이 흔하다.

유모차에 갇혀 형언불가의 멍멍한 표정으로 팔을 흔드는 인꽃,

어구구구구...... 넘어질라, 넘어질라, 아장아장 인꽃,

일상의 근심 걱정 한껏 지고 묵직하게 걷던 발걸음이 1g으로 가벼워지는 순간이다.

이 작은 인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 깊은 곳에 고여있던 평화가, 사랑이 풀려나니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어제 산책 마지막 코스에서는 할아버지 품에 안긴 인꽃 한 송이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길 오른쪽으로 공원 매점이 있는데 매점 앞에 풍선과 장난감이 있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다.

시무룩, 할아버지 품에 안겨 가던 아이가 눈이 커지면서 급해서 말도 못하고 손가락질을 한다.

매점이다. 매점 앞 풍선이다.

꽃을 든 할아버지는 당황.

가자, 가자..... 하며 직진이신데 꽃이 뒤틀린다. 뒤틀려 품을 빠져 나오려 한다.

그 뒤를 걷던 더 연세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껄껄 웃으신다.

"볼 일이 있다잖아요. 꼭 가서 볼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쳐. 껄껄껄"


급하게 생긴 막중한 볼 일을 피하지 못하고

꽃을 운반하던 할아버지는 발길을 돌려 매점으로 가셨다.

공원을 빠져나올  때까지 올라가서 실룩거리는 입꼬리가 제자리를 못 찾는다.

마음이 간질거리는데 웃음을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작은 사람 꽃. 그 꽃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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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년생 김현승이 <82년생 김지영>을 잡더니 거의 앉은 자리에서 읽었다.

독후소감 한 말씀 합쇼 했더니.

"아, 됐어." 하고 돌아서버렸다.

"뭐 이렇게 슬픈 삶이 다 있어!" 혼잣말식 독후소감을 흘리며.


휴일 아침 식사를 하고 00년생 김채윤은 설거지를 한다.

03년생 김현승은 소파에 뒹굴뒹굴.

"현승아, 82년생 김지영은 소설 속에만 있는 게 아니야. 어디에나 있어."

"알아. 그런데 왜? 나 뭐 일 시키게?"

"우리집에도 있어."

"그러니까. 뭐? 엄마도 김지영이라고. 뭐 일 시킬 건데?"

"엄마만이 아니야. 00년생 김채윤이 설거지를 하고 있어."

"어쩌라고! 아, 짜증나. 책 괜히 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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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자의 기도


배움을 더해 갈수록 느끼는 것은
제가 무지하다는 것,
제가 배울 수 있는 영역들이 얼마나 무한한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움이 깊어갈수록 깨우치게 되는 것은
지식이라는 나무의 가지들이 그리도 무성하고
그리도 오묘하게 뻗어 있다는 것이며
일생을 통해 배운다 해도 여전히 초보자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깨우치고 배워야 하는 분야들을 잘 터득할 수 있도록,
결코 실망하거나 싫증내어 배움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게 가르쳐주십시오.
제가 배울 수 있다는 것, 배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잊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배움을 소중히 하고 제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우치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터무니없는 야망을 지니지 않고 다만 근면할 수 있도록
성공이라는 물신을 숭배하지 아니하고,
다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어진 일들의 바른 순서를 찾으며,
주어진 재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배우는 것보다 무한한 것을 볼 수 있는,
제 개인적인 성공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볼 수 있는
넓은 안목을 주십시오.

일생을 통해 배움을 멈추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무리 많이 배울지라도
항상 발견해야 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가 삶 그 자체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당신이 비추시는 빛을 외면하지 않도록
저를 지혜롭고 강하게 해 주십시오.



2008년 5월에 이 기도문을 블로그에 걸었던 적이 있다. 본격 영성 공부에 발을 들여놓고 어느 강의 시간 시작 기도로 낭송되었던 기도문이다. 꼭 10년이다. 그때는 그 시작이 '본격적' 시작인지 알지 못했고 10년 후인 오늘을 상상하지 못했다. 저 기도문이 예언처럼 나를 이끌어가 '일생 통해 배움을 멈추지 않는 길' 접어든 것이다. 에니어그램 연구소에 발을 들여놓은 그 학기부터 이번 학기까지 무엇이가를 배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책이 그 다음 읽을 책을 끌고 나오듯, 어느 강좌는 그 다음 강좌로 나를 이끌었다. 매 학기 새롭게 열리는 배움의 문은 그분의 이끄심이라 해야 비로소 설명되는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난 10년, 20학기 동안 3학점 짜리 강의를 한 학기도 쉬지 않고 들었다. 총 60 학점을 이수했으니, 아니 한 학기에 두 과목 수강도 했으니 60학점 그 이상. 남편이 '야야, 니네 엄마 박사과정 한다. 박사 공부한다.' 놀리던 것이 장난이 아님이다. 


지난 주에는 4학기 짜리 공부를 하나 마쳤다. 지난 시간 낯선 공간 낯선 문화를 찾아 헤매며 외롭게 배워왔던 것들을 '철학'이라는 실로 한 줄에 꿰는 시간이었다.  2008년 3월, 첫 강의 자기 소개 시간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저는 가끔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걸 다 깨달아도 되는 걸까? 나는 너무 훌륭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왔습니다.'라고 했다. 선생님 한 분이 그 말에 빵 터졌던 기억도 난다. 농담이었지만 살짝 진심이었다. (자아팽창, 갑 중의 갑었지) 배움을 더해 갈수록 느끼는 것은  제가 무지하다는 것, 제가 배울 수 있는 영역들이 얼마나 무한한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내 인생 처음으로 이 고백을 하게 되었다. 껌 씹으면서 할 수 있는 고백은 아니었다. 캄캄한 무지의 밤을 여러 날 보내며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하던 막막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 사이 책을 출간하고, 또 출간하고, 여기 저기 얼굴을 알리면서 뭔가 한 방 해보겠다는 남모르는 야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행히 결코 놓지 않았던 배움의 끈이 나를 잘 붙들어 주었다. '터무니없는 야망을 지니지 않고 다만 근면할 수 있도록, 성공이라는 물신을 숭배하지 아니하고, 다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며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다. 앎의 한계에 부딪히면 또 책을 읽고, 새로운 저자를 만나고, 또 공부하고, 그러다 글을 쓰고, 새로운 강의를 만들어내며 살아 있다고 느꼈다. 배움과 가르침 사이에서 야망이 꿈틀대고, 타인과 비교하며 조바심 내는 순간도 많았지만 갈수록 내 속도와 한계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이 시점에 다시 읽어보는 '배우는 자의 기도'는 한 자 한 자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온다. 


# 누구신지 참 기막힌 커리큘럼으로 10년 학사관리 해주셨다.

# 그분 참! 그동안 퍼부은 시간과 돈을 생각해서라도 박사학위 하나 하사 하실 일이지.

# 야망은 없다. 그렇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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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시작마다 '지난 한 주를 지내며 지은 죄를 회개'하는 시간이 있다. 몇 주째 같은 내용의 기도이다. 그 시간, 회개의 자리에서면 비로소 생각나는 죄목이다. 지난 주에는 그 반복 패턴이 인식되어 화들짝 놀랐다. 반복하는 회개가 참 회개인가!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러고도 다시 그럴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기도했다. 남편을 강압하려는 욕구, 남편을 통제하지 못해 안달하던 분노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음을 인식한다. 맨 앞자리 앉은 남편의 뒷통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프고도 슬프다. 기도의 자리에 서서 주님 얼굴 앞에 서면 차거운 분노로 딱딱해진 내 깊은 마음이 드러나고 만다.


매일 아침 남편은 큐티 본문에 따라 짧은 묵상글을 교우들에게 보내곤 한다. 지난 주 어느 날에는 이현주 목사님의 글을 인용하여  '슬프고 착하게 한세상 살다가고 싶다'고 했다. 허세 부릴 줄 모르고, 강압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이미 충분히 착하여 충분히 슬픈 그의 삶이 내겐 너무 아프다. 둘을 알면 하나 정도 안다 하고, 하나를 알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며 자기를 감추고 또 감추는 이 사람을 자꾸 다그치게 된다. 목회자들 앞에서 '진실한 나'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의한 적이 있으면서 정작 남편의 진실함, 진실함의 댓가로 슬픔 가득한 얼굴을 보는 것은 힘겹다.


교인들은 설교 중 적절한 타이밍에 '아멘'을 외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남편은 설교의 논조를 우~ 몰고 가다 아멘이 나올 클라이막스에 몰고 힘을 탁 꺾어버린다. 분위기로 아멘을 조장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러는 걸 안다. 토요일 저녁이면 여느 목사가 그렇듯 설교를 놓고 씨름 한다. 밥 먹고 하는 일이 마음 들여다 보는 일이라 아무 말 안 해도 그의 내면의 전쟁터가 보이는 것 같다. 아멘을 조장하지 않지만 깊은 곳의 아멘을 끌어내고자 하는 그의 높은 기준을 나는 안다. 남편은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으려 하는데 나는 남편을 통제하려 한다. 치얼업 베이비, 치얼업 베이비. 좀 더 힘을 내!! 응원이 아니라 강압이다. 설교는 물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강압할 줄 모르는 남편에게 '강압하라'고 나는 강압한다.


그것을 회개한다. 진실해지려는 그를 진실하지 말고 허세를 부리라고 강요하는 내 못된 강압을 회개한다. 지난 주에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기도했다. 오늘 토요일, 남편이 채윤이에게 '서현역에 가서 책 하나 사다줘' 빌듯이 부탁을 한다. 채윤이는 지금 알바로 바쁜 아이. 설교준비에 필요한 책인가? 싶어 내가 사다주겠노라 했다. 그건 아니고 꼭 읽고 싶은 책이 있단다. 어차피 밤새 설교준비 해야 할 텐데 책 읽을 시간이 어딨어? 알라딘에 주문해줄게. 했는데 아니란다. 간절함이 마음으로 다가와서 기꺼이 책을 사러 나갔다. 도종환의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않는다>이다. 요즘 도통 책이 읽히질 않는데 이 책은 읽힐 것 같단다. 걸어서 걸어서 서현역에 다녀왔다. 오는 길에 하도 다리가 아파 중간에 마을버스를 탔다. 도대체 무슨 책이야? 책을 펼쳐 서문을 읽었다. 읽다가 눈물이 터져 교회 앞 공원을 울며 걸어왔다.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서문 일부를 한 땀 한 땀 쳐보기로 한다.  남편을 향한 참회록이다. 내일 주일 예배에서 드릴 회개기도를 미리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삶, 나의 시>   도종환


나는 권세 있고 유복하고 많이 배운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선한 심성을 불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마웠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친척 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어 편지를 자주 썼습니다. 편지 앞에 계절 인사를 쓰기 위해 바람과 별과 구름과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살폈고, 그래서 자연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해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참고서 한 권을 사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매일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하면 보내줄 수 있는지 상의할 부모가 옆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이 면제되는 지방 국립사범대학에 진학했고, 화가가 되고 싶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 좌절이 문학으로 방향을 틀게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내 문학을 밀고 가는 가장 큰 힘은 좌절입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 속으로 들어가기보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눈 밖에 나고 미움과 따돌림을 받았지만 도전하고 깨지고 다시 시작하던 열정이 있어서 청춘의 날들을 뜨겁게 보냈습니다.

나는 뛰어난 실력이나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눈에 띄는 특별한 인물이나 앞서가는 사람도 아니어서 나를 눈여겨봐주는 이들도 없었습니다. 이른 봄에 피어 사랑받는 봄꽃은 아니지만, 가을 들판의 구절초처럼 늦게라도 혼자 꽃피고자 했습니다. 늦게 꽃피어도 오래오래 아름답고자 했습니다.

(중략)

아직도 내 시를 제대로 된 문학으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평론가와 문인이 많다는 걸 압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약점과 부족한 점이 내 시에 있다는 걸 나도 압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 흔들리면서 꽃을 피우는 겁니다. 흔들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꽃 한 송이를 피우듯 그렇게 살았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벽을 만났습니다. 어떤 벽도 나보다 강하지 않은 벽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벽에서 살게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벽에서 시작하는 담쟁이. 원망만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잎을 찾아가 손을 잡고 연대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는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과 방황과 소외와 고난과 눈물과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내 문학은 시작되었고, 그것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많은 아픔의 시간을. 거기서 우러난 문학을. 나의 삶, 나의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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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거실 세미나'로 시작한 '정신실의 내적여정 세미나'가 조금씩 꼴을 갖추어가고 있습니다. 엊그제 심화과정을 준비하면서 도반 수진 쌤이랑 '이렇게 준비가 널널해도 되나?' 했습니다. 거실에서 튀어나와서 진행했던 첫 세미나에서는 뭐 빠트린 거 없을까 심장이 두근두근 쫄깃쫄깃 했었지요. 단지 강의만이 아니라 핸드드립 커피며 나름 정성을 다하는 간식이며 이 모든 것에 담긴 환대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진정성이란 상대에게 피력함이 아니라 내게 충분히 그러한 진정성이기에 참 기쁜 일입니다.  


내게 필요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필요한 샘물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별다른 욕심 없이, 힘 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대적으로 알릴 방법은 없지만 필요한 분 눈에는 띄게 되어 있나 봅니다. 어디서들 오셨는지 귀인들이 오십니다. 그저께 했던 심화과정 사진을 보니 '먹자 모임'인지, '음식 영성'모임인지 싶네요. 몸과 영혼이 충만해진 만남이었습다. 수강하신 선생님 한 분이 손수샌드위치와 티라미수를 만들어오셨습니다. 감동의 티라미수 맛이었습니다. 입과 몸이 즐거우니 마음이 절로 열려 나눔은 더욱 풍성해졌고요. 


또 다른 도반 하정 쌔매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보물이다'라고 평을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 했지만 진실하게 자기를 보여주는 말은 보배입니다. 함께 하신 분들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 큰 배움이 돼서 제가 강의를 하는 건지, 배우러 온 건지 헷갈리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갈수록 이 자리가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배우는 자리가 되네요.


수강 후 남겨주신 후기입니다.

* 감당하기 힘든 내적여정으로 정신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심중을 찌르는 통찰이 있던 것 같습니다. 웃으며 마쳤지만 제 속에 있는 어둠은 오직 나와 신만이 알고 있고 이걸 어떻게 다뤄야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부디 길을 찾아가는 중에 좋은 이정표가 나타나길.

* ‘아직도 가야할 길’이란 말이 다시 상기된다. 내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o, x를 가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것들을 겸손히 들여다볼 용기가 생긴다.
그간의 내 일상에 일어났던 일과 나의 내적 동요, 반응에 대해 의식성찰을 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 거짓자아의 형성을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조각조각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최근 내가 일상이나 관계에서 마주친 갈등, 흔들림, 혼돈의 근원적 원인을 확인할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나눔 속에서 내 혼돈의 실체가 명료해지고 조금 정돈되었습니다. 솔직하고 진솔하게 삶의 경험을 나눠주신 선생님과 함께 영적 여정을 걸어주신 벗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진심으로.

* 주일마다 만나는 유아유치부 아이들과 좀 더 친해져야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내면아이, 성인아이에서 경탄할만한 아이로 나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더 진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이상(페르소나)와 그 이면의 이유들을 적으면서 마음이 떨렸고 내 모습의 또 한 부분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저를 돌아보게 되고, 저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되어서 기분이 좋고, 앞으로의 여정이 기대가 됩니다. 깊이 공부할수록 혼란과 실망감과 피로함이 느껴지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여 참된 기쁨을 느끼고 싶습니다.
좋은 강의 진행해주셔서 감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얘기에 사랑의 마음으로 청취해 주시는 것이 느껴져서 더 감사했습니다.

* “참자아, 페르소나, 그림자”
나는 늘 괜찮지 않았고, 늘 부족하다고 공허하다고 느끼며 살아왔는데.... 나의 생각과 감정, 반응과 행동을 늘 관찰하며 점검하며 살아온 것 같은데.....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길인가보다. 생각을 관찰하는 것, 이것 또한 균형 잡아가야 할 과제인 듯하다.



세미나 마치고 돌아가시는 분들의 등에서 저는 '근심하며 돌아가니라' 이런 글을 읽습니다. '답을 찾으러 왔는데 더 복잡한 질문이 생겼다, 고민의 마침표를 찍으러 왔는데 이제야 뭔가 시작해야 하는 느낌이다.' 이런 말씀을 남기고 떠나니까요. 세미나 마친 다음 날에는 다른 일정이 없으면 거의 하루 내내 수강하신 분들을 마음에 품고 지냅니다. 오늘 아침에는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긴 아침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자, 고민하지 마시고 내 말만 들으세요. 제가 다 겪어봐서 압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서, 이러이러하게 하시라!(안 그러면 다 죽어)"라고 확신을 갖고 끌어당기고 싶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함께 걸어갈 수 있을 뿐이지요.


저는 6월 한 달 특별한 기도 여정을 시작했는데 오늘 읽은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근심하며 돌아간' 한 분  한 분을 떠올리며 묵직한 마음으로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 같습니다. 나 자신과, 다가오는 사람들과, 내 안에 계신 그분과 만나는 진솔한 만남이 오늘을 사는 이유가 됩니다. 참 좋은 날입니다.



하느님과 만나기 위한 기술은 없으며, 그 까닭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만남의 주체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자동으로 불러냈다 들여보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기도는 바른 자세를 갖춘다거나 기도하는 데 적합한 장소, 또는 제대로 만트라를 배우는 것과 같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를 마법같이 만드는 것이다. 마법의 요점은 하느님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좋은 종교가 아니다. 마법과 미신은 우리가 하느님을 부리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은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분이라는 점이다.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 토머스 H.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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