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10시 30분.

주중 피로를 풀기 위해 늦잠을 자거나, 아니라면 그에 준하는 여유를 누려야 할 공식 ‘잉여의 시간’.

이 시간 교회 청년들과 ‘커피&메시지’란 이름으로 핸드드립 커피와 함께 메시지 성경 읽기 시간을 갖는다.

맛있는 커피가 있고, 이야기처럼 읽히는 메시지 성경이 있다.

무엇보다 '자발'적 모임이다. 공식적인 인도는 내가 한다.

‘목사님, 저희 성경공부 해주세요. 토요일에 목사님 설교준비로 바쁘시면 사모님이 해주셔도....’라는 청년들의 요청이었다. 아하하, 사모님을 원하는구나! 직관적으로 느꼈고. 목사님은 주일 설교 덕분에 ‘가오’는 챙겼으니 됐고.

커피, 이야기 책 같은 성경, 자발성이 있고, 없는 것은 강압.

매주 진도가 있지만 다 읽어오지 않아도 된다.

일이 있거나 늦잠을 잤을 시에 빠질 자유가 있다.

일주일 내내 이런저런 강의와 소그룹 상담을 이끄는 내게도 가장 편한 모임이다.

애써 준비할 것도 없이 가서 커피나 내리고 듣는다.

마음껏 문제제기 하고 의문을 품으며 함께 답을 찾아간다.

별다른 준비는 없어도 은혜가 없는 시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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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0

 


 

아무렇지 않았던 여자(남자)의 신상이 갑자기 궁금해졌다면 내 쪽에서 막 켜지기 시작한 그린라이트인 경우가 많다. 알고 싶어 하는 것, 더욱 자세한 내용이 듣고 싶다고 몸을 바짝 기울이는 것은 호감의 표현이다. “너에 대해 알고 싶어.” 이것은 사랑의 그린라이트이다. 알고 싶고, 더 잘 듣고 싶어 다가가게 되는 것, 혼자 있을 때도 어느 새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린라이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면 알았어. 알겠다고!”하는 말은 그에 반하는 뉘앙스이다. 대화나 관계의 단절을 알리는 사인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는 궁금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엔 가능성이 느껴지나 네가 말하는 거 다 알겠어.’라며 쌩 돌아선 사람은 다시 와 내 말에 귀 기울일 것 같지가 않다. 오래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여전히 너를 모르겠어. 네 얘기를 들려줘.’ 신비로 남겨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확실히 알겠어!’ 이 얼마나 교만에 찬 위험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시작하는 찬송가 310장은 강렬한 메타포를 가진 찬송 중 하나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뜨겁게 불러 본 기억 있을 법한 찬송이다. ‘은혜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을 인간의 경험이란 없으니 말이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한 소절 신파조로 부르고 이어지는 후렴의 음악적 반전이 유발하는 감정의 폭발과 감동도 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의 멜로디는 점핑판을 딛고 솟아오르듯 높이, 멀리, 확신 있게 튀어 오른다. 주먹을 꽉 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를 수밖에. 그리고 마지막은 한 옥타브 높은 종결음이다. ‘나는 화~악 씰히~ 아 네에에에에!’ 이것은 아멘을 남발하지 않을 수 없는 피날레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주일 예배에서 이 찬송을 부르던 중, 나는 (박차고 나오는) 후렴이 아니라 그 바로 앞의 가사, 그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송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난 알 수 없도다.’가 좋겠다. 단지 멜로디 진행의 기술로 감정이 불러일으켜진 것이 아니다.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시시때때 성령의 감동으로 나를 만지시지만, 느낄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음. 조금은 알 것 같지도 하지만 온전히 알 수는 없음. 더 명확하게 알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의 고백이 확실히 아는믿음의 진정한 시작이다. [난 알 수 없도다 - 나는 확실히 아네] 이 급진적인 도약의 점핑판은 알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기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소망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간절히 찾을수록 그분의 부재가 더욱 크게 다가올 뿐이어서 당혹스러운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예수님 당신 스스로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6:6, 새번역)이라 칭하셨으니 그분은 인간 앞에 부재로 현존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주님, 나는 당신에 대해 오직 모를 뿐입니다!) 불가지(不可知)의 실존을 겸허히 인정하고 얻는 신적인 확신, 이것이 은혜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우리 국토 구석구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일깨운 책이 있다. 그 책 서문에 나온 문화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책을 읽고 가 본 변산의 내소사에서는 보이는 것이 많아 감동이었다. 반면 우리는 아는 만큼 무시한다. 문화재를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감동받을 수도 있지만, 아는 만큼만 보고 보이는 만큼만 가지고 경멸을 할 수도 있다. 역시 안다는 것, 아니 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랑과 성장으로 가는 문을 닫는 일이다. 문화재도, 사랑하는 너도, 심지어 나 자신도, 신앙에 관해서도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여전히 다가가고 귀를 기울이며 숙고하는 것이다.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며 무엇을 확실하게 안다고 하는 이들을 경계할 일이다. 내가 기도해보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확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인간은 모를 뿐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는 날이 많지만 술래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숨은 곳을 다 알고 계신다. 우리가 그것만은 화악~씰히 안다!




* 월간 [빛과 소금]  7월호, '하지 못한 말, 미안해'라는 꼭지에 쓴 글입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마치고 맞은 겨울방학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친구가 집에서 축하모임을 한다고 초대를 해왔다. 교회 동기들이었고 예닐곱 명의 남자아이들과 함께 나는 유일한 여자였다. 시험 결과야 어떻든 자유로움으로 붕붕 뜬 시간을 보내는 중에 한바탕 놀 기회라니. 신나게 달려갔을 것이다. 친구 어머니께서 떡 벌어지게 차려 내놓으셨다. 기분 좋게 떠들며 식사를 하려던 찰나, 상 밑에서였는지 아니면 밖에서였는지 맥주병과 잔이 함께 들어왔다.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이미 주()를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깽판을 치고 나온 것이다. 센 여자 하나에 착한 남자 친구들이 모인 집단이라 당시 내 별명은 꼬맹이였으나 영향력이 작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밥맛, 술맛, 놀맛이 싹 다 떨어졌을 것이다. 다시 떠올리기도 부끄러운 바리새인 같은 짓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다른 친구도 아니고 교회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더 큰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당시 회심이 필요한 모태 바리새인이었다.

 

입장 바꿔 누군가 내가 한 그 짓을 했으며, 나는 그 엉망이 된 자리에 남겨졌었다면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겨진 친구들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고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이후 다시 문제 삼지 않았다. 여전히 만나면 찧고 까불며 오랜 시간 좋은 친구로 지냈다. 실은 이런 진상 바리새인 짓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름 수련회 가면 숙소 뒤편 으슥한 곳에 숨어 담배 피우는 친구들을 잡아 전도사님께 고발했다. 바리새인에 어용 경찰(‘짭새라 부르는 게 제격)이었다. 한 번은 수련회 기간 중 식사시간이었는데 친구 녀석들이 보이질 않았다. 악랄한 경찰관으로서 느껴지는 촉이 있어서 수련회 장소였던 교회를 빠져나와 가게들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어느 식당에 모여 닭볶음탕을 시켜놓고는 희희낙락하고 있는 친구들을 현장범으로 체포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한 마디에 착한 친구들은 보글보글 끓는 닭볶음탕을 입에 넣어보지도 못하고 줄줄이 수련회장으로 연행되었다. 이런 짓을 했다. 친구들아 미안했어, 라고 말하고 싶어 글을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그것이 아니다. 당시 믿음은 내가 일등이지.’ 하는 우월감으로 살았지만 인간적으로 더 성숙한 쪽은 오히려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아, 그때의 나를 받아줘서 고마워, 못 이기는 척 당해줘서 고마워.

 

바리새인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교회의 청년부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주일, 청년부 모임 후 장애인 시설 봉사를 마친 후였다. 선배 한 사람이 주도하고 몇 사람이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우르르 치킨 집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자연스레 치맥타임이 되었다. 걸걸한 여대에 다녔고 직장생활도 하면서 술과 술자리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때였다. 그럼에도 고3 겨울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불편함으로 마음이 일렁거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편하게 마실 일이지 굳이 교회 사람들과 술을 마셔야 하나?’부터 시작해서 믿음이 연약한 후배들이 시험 들면 어쩌려고까지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결코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도 아주 잘했다. 문제는 돌아와서, 그 이후 마음에 쌓았다 부수고 쌓았다 부순 정죄의 모래성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향해 보이지 않는 집게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차라리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했던 폭력적 태도가 솔직하여 순수한 듯. 얼굴을 마주하고 한 마디 비난의 말을 한 적 없지만 마음이 한 짓은 어마어마하다. 겉으로는 큰 갈등 없이 그 시절을 지냈다.

 

나이를 먹었고 나도 이제 중년이다. 인생의 정오를 지나 오후로 접어든 어느 시점,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신앙하며 살아온 모든 나날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에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긴 터널의 끝에서 내가 다시 보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율법의 우산 속을 더 안전하게 느끼며 살아온 바리새인, 내가 보였다. 아픈 깨달음과 함께 두 번째 회심의 순간이었다. 그즈음 문득 청년 시절 치킨 집에 함께 둘러앉았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주도했던 선배, ‘가끔 이렇게 알코올로 내장 소독을 한 번씩 해 줘야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애썼던 후배, 그리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조목조목 따졌던 내 마음의 소리가 부끄럽고 아프게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어떤 배역으로 등장했는지 상상도 못하겠지만 이렇듯 기회가 주어졌으니 미안했어요.’ 속으로 말해본다.

 

자신을 일컬어 부랑아라 했던, 그리하여 부랑아 복음을 설파했던 브레넌 매닝은 바리새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자신에게 아무 결함도 없다는 믿음이 그의 결함이다. 그는 남을 경멸한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자기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의에 빠져 불의하게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다.’ 과연 그 시절 나는 내가 옳다, 나만 옳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주일에 며칠 씩 교회 가서 청년부, 주일학교, 성가대 등에 남다른 봉사하며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 등 근거 충만한 자부심이었다. 말 그대로 나의 의에 빠져 죄책감 없이 누구든 정죄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 미안해해야 할 대상은 어린 날의 나, 젊은 날의 나 자신인지 모르겠다. 종교적 우월감으로 자아에 도취해 있는 동안 가장 외롭고 불행한 것은 나였으니까 말이다. 대입 시험 마치고 가장 홀가분한 시절, 신나게 먹고 놀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박차고 나와 씩씩대며 걷는 어린 나를 상상해본다. 마음의 법정을 열어 이 사람 저 사람 돌려세우며 기소하고, 선고를 내리던 젊은 날의 나를 떠올려도 그렇다. 정작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율법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내적인 자유라고는 맛보지 못했으니 정작 못할 짓은 나 자신에게 한 것이다. 어쩌다 어린 시절부터 바리새인이 습성이 몸에 딱 붙어 그 누구보다 나를 괴롭게 했다. 친구들과 이웃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켰고 그것은 다시 왜곡된 우월감이 되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우월감은 내면 깊은 곳으로 감추고 겸손한 말투와 태도로 위장하는 방식은 세련되어 간다. 어린 나, 젊은 날의 나, 아니 어제의 나에게 미안하다 말해본다. 아픈 직면과 회심을 통해 다시 그러지 말자 다짐했건만 여전히 입은 줄도 모르게 이미 입고 있는 바리새인의 갑옷이다. 미안할 줄 알면 다시 하지 말아야지! 나 자신에게, 나의 이웃에게 미안할 짓 하지 않는 오늘을 사는 것, 나의 기도는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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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김현승翁의 어릴 적 일기를 빌자면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이다. 똑같은 일과 비슷비슷한 염려, 여전히 감내해야 할 것들이 반복되는 하루이다. 이런 일상 속에 심장 뛰는 일이 생기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심장 뛰는 놀이가 생겼다. 발품팔이 온라인 중고매장 찾아가 득템하기. 열정 솟아나는 새로운 놀이이다. 절판 도서 한 권을 노리고 있었다. 사람들 취향이 다른 듯 비슷해서 내가 찜한 절판 도서들을 나만큼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사람들이 있다.  습관적으로 오프라인 중고매장을 검색하던 어느 날, 기다리던 책 <남성성과 젠더>가 합정점에 떴다. 채윤이 레슨 가는 날 잡아오라 하기엔 늦을까? 무리해서 돌아돌아 다녀올까? 고민하는 와중에 이미 판매되고 사라짐. 허망. 딱 한 권이 알라딘 중고매장 전주점에 살아 있다. 주일에 전주에서 강의가 계획 되어 있었다. 터미날 투 강대상까지의 픽업 의전을 마다하고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지. 중간에 알라딘 매장에 들러야지,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런 와중, 잠실 신천점에 한 권이 또 떴다. 지하철 타~아고, 버스 아고 달려가서 체포했다. 몇 번 책꽂이 몇 번째 칸 찾아가 눈알 굴리며 더듬다 동공 고정. 떨리는 손으로 책을 뽑는 느낌. 말로 표현 못함. 으아아아.


운동 삼아 서현역의 온라인 중고서점에 다니며 쏠쏠한 재미를 보기 시작. 쏠쏠쏠쏠한 재미를 위해 중고매장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된 것이다. 새로 생긴 동탄점에, 분당 야탑점에도 가 착한 가격으로 위시리스트에 있는 책들을 낚아왔다. 아주 급한 책이 아니라면 중고가 나올 때까지 검색질을 하며 기다리기로 한다. 하루 한 번 정도 검색창에 제목을 치고 엔터를 누를 때마다 (얼마 만의) 뛰는 가슴 한껏 즐기면서 말이다. 남편과 서로 책 사는 문제로 은근 갈구고 눈치 주고, 갈굼 당하고 눈치 보는 일상이다. 당신 책 또 샀어? 어, 이번 설교에 꼭 필요한 책이야. 정신실, 책 또 주문했어? 아아, 준비하고 있는 강의가 있는데 주제에 딱 맞는 책이 있더라고. 피차에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으며 책을 사들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고서점에서 엄청 싸게 샀어' 이것은 기분 좋은 면죄부가 된다. 


책 읽는 즐거움이 없다면, 책을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이 깊은 공허감과 결핍감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누군가 내 어릴 적에 진로 코칭을 잘 해줬다면' if로 시작하는 상상의 나래를 자주 펼치곤 한다. 중고등 때는 영어가 정말 좋았다. 모두 평등하게 과외를 할 수 없었던 중학교 시절에, 시험 때마다 영어과목은 더 공부하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달달 외우고 또 보고 또 보곤 했다. 틀릴래야 틀릴 수 없는 상태로 시험을 치곤 했으니. 영어가 재밌고 좋았다. 영어를 전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학 2학년 때는 사회학을 세미나 수업으로 듣고 '아, 내가 사회학이 딱 내 체질에 맞는구나!' 싶었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 여성학을 공부하겠다고 대학원 준비를 한 적도 있다. 화해 불가능으로 보이는 기독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길을 찾고 싶었었다. 포부는 컸으나 사소한 일로 포기하고 말았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아쉽지만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다. 아쉬움이 꼭 나쁜 것은 아닌 것이, (영어, 사회학, 여성학, 심지어 철학까지) 미답의 전공지에 대한 결핍감이 땔감이 되어 오래도록 독서열을 불태우고 있는 지 모르니까. 덕분에 이 나이에 이런 설렘도 누리고 있으니까.


도서 구입비 지출에 대한 부부 상호 갈굼도 독서열을 활활 태우는데 한 부채질 하고 있다. 훔친 사과과 맛있다? 몰래 하는 일이 짜릿하고 더더더 갈증 속에 몰입하게 되는 법. 몇 달에 한 번씩 '우리 이제 당분간 책 사지 말고 있는 책 다 읽고 사자. 읽은 책 또 읽어도 돼. 사실 다 까먹잖아. 맞아, 맞아' 남편과 다짐하곤 한다. 연기하는 듯한 말투며 필요 이상으로 꽉 쥔 손을 보면 '저거 저거 오래 못 가지' 피차에 이미 알고 있다. 그 과장된 약속이 그어놓은 선을 넘는 맛에 몰래 또 책을 주문하곤 하지. 보고 싶은 책 마음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면 이렇듯 맛있는 책읽기를 누릴 수 없을 테다. 절판 도서를 찾아 헤매면서 '책을 쓰려면 이런 책을 써야지. 내가 낸 책들은 한 번 읽히고 책꽂이 자리나 차지하는 책. 나무야, 미안해. 지구야, 미안해' 자조의 심정이 되기도 한다. 그것도 어쩌랴. 내 수준과 한계가 여기까지인 걸.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젊은 날의 결핍이, 일상 속 결핍이, 결핍감이 독서의 즐거움에 이르게 했으니 부족함과 한계는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남편 쉬는 날에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함께 보았다. 후기 수다를 떨다 '안 되겠다.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싶어 중고매장 검색을 하고, 가장 싼 책이 동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달려갔다.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남편이 붙들더니 이틀 새 읽어 버렸다. 이제 내가 읽을 차례. 책만 보는 바보 부부, 스튜삣! 이렇듯 경제적으로 독서라니, 그뤠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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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커피를 마시다 충동적으로 화분 정리를 했다.

'충동적'이란 말이 좋다.

갈수록 주먹 불끈 쥔 '의지와 치밀한 계획'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특히 멋진 결기로 대단한 것을 이루는 것이 좋게 느껴지질 않는다.

나이 탓일 수 있다. 아니 단지 나이 때문이 아니다.

마음과 마음의 병, 그리고 신앙에 관해 질문하며 물고 늘어지다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렇다.

'내가 했다고, 내가 했다니까'

이루어 놓은 것, 성취감, 드러냄, 돌아오는 찬사, 가 참 좋은데.

그러느라 잃어버린 것을 알아채지 못함으로 우리는 단절과 외로움의 바다에 허우적댄다.

나는 갈수록 주먹 꽉 쥔 의.지.가 쓸모 없다 느껴진다. 


**

화분 정리 했다, 하면 될 일.

의지니 충동이니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뭐 캥기는 것이 있는 모양.

(예, 자수합니다)

충동적이라고 했지만 계절이 바뀌면 으례 하는 일이다. 

해야 할 일 목록에 있던 걸 갑자기 하게 된 것 뿐.

충동적 화분 정리가 아니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 아니 살초(殺草)의 찜찜함 때문이다.


***

여름 내 말라버린 화초의 시신을 하나를 수습해서 화분을 비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멀쩡한 난초 하나를 쑥 뽑아서 쓰레기 봉투에 (처)넣었다.

멀쩡한 난초 화분이었다.

잎은 다 바닥에 붙어 있고 지지대로 꽂아둔 굵은 철사에 의지하여 삐죽하니 서 있지만,

그래서 살아 있는 느낌(생기)이라곤 느껴지지 않지만  때가 되면 꽃을 어김 없이 피우곤 하였다.

꽃이 피면 반가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꽃이 '이게 웬 조화냐!' (생화냐!)

꽃이 피어도 생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

뭐 했다고 저 분위기도 안 맞는 난을 집에 들였을까? 

몇 년 전 망원시장 입구 트럭에서 산 것이다.

화분 여러 개를 사면서 꽃이 핀 난을 5천 원만 더 내고 가져가라 기에 생각 없이 들고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 화분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다.

으리으리한 교장실 창가에 핑크 색 리본을 매달고 즐비하게 서 있는 난 화분.

그 방의 주인인 교장은 전교조를 탄압하고 참교육을 가로막는 적폐, 이런 각이다.

또 모시 옷 한 벌 빼입고 난초의 잎을 닦으며 "마, 니만 믿는다. 알아서 하기라'

차분하고 고상한 어투로 살인교사하는 조직의 큰 형님, 이런 그림도 있고.


*****

설거지 하다 문득 '도통 애가 자란다는 느낌이 없어. 그러니 살아 있는 것 같질 않지'

라고 혼잣말을 했다. 생매장한 난초 말이다. 

신혼 때부터 우리 집에서 죽어 나간 화분이 셀 수도 없지만 살아 멀쩡한 화분을 버린 적은 없으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꽤나 신경질이 쓰이는 것이었다. 

자란다는 느낌, 성장하고 있다는 표식이 없는 것이 참 싫구나. 그랬구나.

'성장'은 내게 참 중요한 말이고 의미이지. 

죽을 때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믿고, 자라고 싶잖아. 난.

성장 가능성을 보이는, 자아의 숲이 헐렁한 사람을 무조건 좋아하지. 난.

빽빽한 의지와 완고한 자아로 숨이 막힌다면 화분 하나 희생양 삼아 숨통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지.

멀쩡한 화분 생매장 한 죄를 스스로 사하기로 한다.


******

다육이 화분 여러 개가 겸손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육이를 사랑하는 집사님께서 주신 것, 

지난 학기 교회 에니어그램 여정 마치고 선사받은 것들이다. 

지난 봄 민맘이 가져온 잘 자란 다육이가 든든하게 서 있다.

조르르 섰는 아기 다육이들의 엄마같다.

새벽마다 드리는 한결같은 기도의 효능이 친구가 두고 간 화분에까지 미치는 것일까.

의연하여 믿음직하고, 바라볼 때마다 힘을 준다.

에어컨 바람 바로 옆에서 추운 여름을 이겨낸 초록이들과 가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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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몇 년은 '휴가' 아니라 '피정'을 다녔었다.

일주일 쉬는 것은 같은데 어디서는 '휴가'라 부르고 드물게 '피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차피 쉬는 것은 같으니까 그게 그것이기도, 말은 단지 말이 아니니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딱 일 년 전, 둘이 다녀왔던 '인생 피정'을 복기하고

아이들 어릴 적 함께 했던 여행들을 추억하며

여러 번 계획을 바꾸다 결정 또는 지른 것이 제주 가족여행이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여행을 가면 더욱 너그러워지는 아빠, 또는 남편.

견주어서,

평소에도 그렇지만 어딜 나가면 더욱 잔소리가 많고, 쪼잔해지고는 엄마, 또는 아내.

넉넉한 아빠를 누리는 아이들을 은근히 질투까지 하는 엄마 또는 아내는

의문의 일패, 이패, 삼패를 당하다 왕따를 자처하여 '스따'가 되기도 한다.

가진 어둠이 많은 엄마는 늘 그렇다.

통과의례처럼 지나는 감정에 이름 붙이고, 흘려 보내야 비로소 칠렐레팔렐레 에헤랴디야 제대로 놀기가 시작된다.



제주도는 숲이지.

여행은 걷는 거지.

는 엄마 아빠 생각이고, 중2는 그러려면 나를 왜 데려왔냐!이다.


좋아, 비자림, 사려니숲, 곶자왈...... 나도 걷고 싶어.

 흔쾌히 따라나서는 딸은 다 컸네, 다 컸어.

하긴 검정고시 합격하여 당당한 고졸이 되었고, 곧 민쯩도 나오니 다 컸지.




결국 중2는 숲을 걷는 대신 비자림 입구 카페에서 혼자 영화를 보기로 했다.

차에서 보겠다는 걸 '영화 보다 더워서 죽는다' 설득하여 아이스티 한 잔 사주고 카페에 집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지고 10분 띠리링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엄마, 나 그냥 차에서 있을래. 안 더워'

도대체 왜? 그 시원하고 편한 카페를 두고 땡볕 아래 찌는 자동차 안?

이유는 하나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쪽팔려서'

카페에 들어온 사람, 길을 걷는 사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님'에게 1도 관심이 없단다.

이걸 납득시키려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블랙홀에 빠지고 말테니 입을 닫자. 




하긴 중학교 입학식에서 '단지 사진 찍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쪽팔린다는 이유로입이 댓발 나왔던 딸이 폰카를 붙들고 살고 있지 않은가. 

사춘기 블랙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이~이리 오너라 앞태를 찍자,

저~어러리 가거라 뒷태를 찍자,

들이대거라 셀카를 찍자.

우리 딸은 사진 100장 찍어 한 장 건지는 것으로 행복한 여행이다.

  


아, 사진 얘기가 나왔으니 고발하고 지나갈 일이 있다.  

중딩은 벌써 개학을 했고 학기 중이다. 해서 '체험학습'을 내고 합류한 여행이다.

(이걸 결재하며 또 얼마나 뻣뻣하게 굴던지!

이유는 친구들 다 등교하는데 학교 한 가는 것이 튀니까,

튀는 건 쪽팔리니까!)

체험학습 보고서를 써야 하고, 거기엔 꼼꼼하게 사진을 붙여야 한다.

이 중2가 삐딱하게 굴다가도 간판만 보면 '나 사진 안 찍어?' 하고 차렷자세로 선다.

이 국회의원 같은 놈을 보게! 




비행기 시간 기다리며 공항 근처를 맴도는 마지막 날 오후에는 해변의 카페다.

꺼내 놓은 책들을 보니 책 제목으로는 임자 찾기기 쉽지 않다.

음료 종류를 살피는 것이 더 빠르겠다.

그러고 보니 마법천자문, 메이플스토리, 슈가슈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책들이 눈앞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책만 보면 성인 넷이구나.

우리가 이렇게 되었구나.

이렇게 커버린 아이들을 두고 자꾸 어릴 적 추억만 떠올리며 그리워 한다.

어린 아이 취급하며 잔소리 하는 엄마, 아직 '어제'를 살고 있는 엄마를 좋아할 리가.

유유유.



꿈같은 시간 보내고 돌아왔다.
삼 시 세끼 밥 할 걱정
없는 시간이었다.
거실 탁자에 소국 화분 하나가 우리를 기다린다.
지난 주일 쭈네 가족이 우리 교회 예배 드리러 오며 들고 온 것이다.
화분이 너무 예뻐서 이걸 두고 휴가를 가기가 아쉽다며 물 듬뿍 주고 아쉬운 발걸음을 했었다.
쭈가 미리 들고 온 가을이, 가을바람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이다.

여름의 끝을 잡고 충분히 놀았으니
떠나야 할 여름 떠나게 두고
코앞에 다다른 가을을 온전히 받아들여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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