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마지막 주일에 예배가 없다는 말을 한참 전에 들었다. 일명 ‘흩어지는 예배’. 식사 당번 팀이 네 팀이라 다섯 째 주 식사문제 때문인가, 이러저러 그러한가 보다 싶었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들어본 적이 있어서 그다지 신선한 느낌은 아니었다. 두어 주 전 설교 시작 전에 흩어지는 예배에 관한 안내를 들었다. 아하, 이러저러한 뜻이 아니라 요래요래한 뜻이 있었구나! 싶었다. 광고 내용이며, 교우들 카톡방에 정리되어 올라온 내용은 이러하다.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우리 이우교회는 <흩어지는 예배>를 드립니다. ‘모여서’ 무언가를 듣거나 배우는 게 아니라, ‘흩어져서’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이 예배가 성도님들 각 개인마다 남다른 의미와 은혜가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개교회주의에 중독된 우리의 혼미한 정신을 흔들어 깨워 그리스도의 몸을 좀 더 광대하게 체험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혹시 주일 본교회에서 헌신하여 섬기다보니 부모님 또는 자녀들과 뿔뿔이 흩어져 예배드리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이번 기회에 가족들과 함께 예배드리시길 바랍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이니, 이참에 타교단 예배를 드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성결교, 순복음, 장로교, 여러 교단 교회가 있지요. 좀더 다른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교회를 가보는 것도 꽤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작은교회에서 힘겹게 섬기는 친척이나 친구가 있나요? 그런 교회에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 함께 했던 선배가 사역하고 있는 제천의 작은 교회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흩지 않고 불러 모으셨습니다. 지난한 여정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여기 이삭의우물에 모였습니다. 이제 한 번 흩어져 보려 합니다. 더 잘 모이고, 우리의 소명에 더 충실코자 함입니다. 주님께서 동행해주시고 은혜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 그리고 말씀 드렸던 세 가지 기억하시죠?


1. 10분 일찍 가서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

(우리 교회인양 기도합니다)

2. 교회 밥 주면 밥 먹고 오기

(식구는 같이 밥을 먹는 것입니다)

3. 헌금 꼭 하고 오기

(평소보다 더 많이 하십시오)


내겐 특별히 세 가지 숙제(지침)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렇지! 내 교회 네 교회가 없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어느 교회 가서 예배 드리더라도 가르고 경계 세우는 버릇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살짝 감동이 밀려왔다. 이후 교회 모임에서 간간이 들리는 대화. “집사님은 이번 주 어느 교회 가?” 허용된 일탈을 계획하는 대화가 신선한 설렘으로 들렸다. 한 집사님은 어머님 다니시는 교회에 가신다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시겠냐신다. 수십 년 교회 생활 하면서 주일 봉사 같은 것에 매여서 다른 교회 가서 예배 할 수 있다는 상상을 못했다며. 수십 년 만의 색다른 효도가 되는 것이다.





우린 제천 의림지 옆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예배 드렸다. 20년지기 친구 M의 남편 K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이다. 작은 교회 앉아 예배 드리며 어릴 적 자랐던 충청도의 교회가 생각났다. 그때의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처럼 시골의 작은 교회를 오랜 시간 섬기며 살아가는 친구와 목사님. 친구에 대한 마음 떄문이 이미 남의 교회 같지 않다. 그것이 아니라도 이 땅의 모든 교회, 내 교회 네 교회일 수가 없다.


덤으로 얻은 것이 많다. 제천의 가을에 머물러 20년 전 청년 시절 함께 했던 추억을 걸었다. 내겐 친구, 남편에겐 누나인 M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 시절 번뇌 가득한 얼굴로 기타 치던 종필이가 다시 살아오더군. 목회자 커플 네 사람이 주일 아침 예배로 시작하여 밤늦도록 함께 했다. 함께 탁구 치고 밥 먹고 수다 떠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주일을 이렇게 함께 보내다니! 믿어지질 않네. 흩어지는 예배, 좋네!” 형편과 처지는 다르지만, 답이 없는 얘기지만 비슷하고도 다른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시간 동안 마음이 펴지고 얼굴이 펴졌다. (주름은 안 펴진다 ㅠㅠ)


친구가 챙겨준 잘 익은, 밥을 부르는 맛있는 김치 한 통은 덤앤덤.




흩어지는 예배의 복을 밤 늦도록 누리고 청풍호를 내려다보며 일박. '자드락길'이라는 처음 만난 길을 걸었, 아니 기어 올랐다. 포기하지 않고 가장 높은 전망대까지 올라 만난 멋진 풍경은 덤앤덤덤. 걷는 길인 줄 알고 시작했으나 등산 길이었다. 꽃길만 걷고 싶은 인생길, 언제 한 번 상상한 그대로의 꽃길이었던 적 있었냐며, 되돌아 내려가지 않았다. 여러 번 뷰 포인트를 만났다. '이 정도면 됐네' 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는데 이왕 내딛은 길 힘들더라도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어머어머, 중간에 포기했으면 어떡할 뻔 했나! 멀리 뵈던 바로 그 전망대에 올라서 본 풍광은 웬만했던 아래 쪽 풍광과 비교할 수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얻은 안구정화 풍경 안에 그림자로 안긴 저 사진 한 장은 덤앤덤덤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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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별로 놀라지 않으시겠으나 깜짝 놀랄 일이 내게 일어났다.

잘 우러난 사골국물을 맛있게 먹은 아침이었다.

사골 우러내는 고소함에 취해 잠든 식구들이 모처럼 다같이 일찍 일어났다.

넷이 둘러앉아 냠냠짭쨥 후루룩후루룩 맛있게 먹었는데.

내가 말이다, 국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반 백 년 인생 동안 국, 특히 파가 들어 국을 먹고 깔끔한 바닥을 본 일이 없다.

늘 최후까지 살아 남는 파. 

그렇다. 파를 못 먹는다. 어릴 적엔 아예 못 먹었다.

어른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씹지 않고 숨쉬지 않고 넘기는 것으로.

헌데 이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전혀 이물감 느끼지 않고 파와 밥을 함께 떠 먹었다.

다 먹고나서 깨달았다. 깜짝 놀랐다.

전자동으로 파와 파 사이를 비켜서 밥알만 뜨는 신공이 50여 년인데.

(태어나자마자 숟갈질 했다 치고)

흰밥과 초록파를 차별없이 뚝뚝 떠서 입에 넣고 냠냠짭짭 씹었다니!


엄마의 주제가 이런 데 차마 아이들에게 '편식하지 마라' 소리를 못한다.

아이들과 함께 밥 먹을 때 남은 파는 조용히 숟가락 아래 숨기는 신공을 발휘할 뿐이다.

내가 파를 아무렇지 않게 먹다니! 탄성을 지르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그동안 파를 먹지 않았다는 고백을 먼저 해야 하니 꾹 참았다.

남편과 단둘이 있을 때 말했다.

"여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어. 내가 아침에 파를 다 먹었어. 그것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그냥!

당신 모르지? 내가 전에 부모님과 살 때부터 숟가락 밑에 파 감추고 그랬던 거"

"왜 몰라, 내가 먹어주기도 하고 그랬는데"

라고 말하지만 남편은 내게 일어난 이 어마어마한 일에 심드렁하다.


나 어쩌다 어른이 된 것 같다.

2017년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어느 가을 아침에,

나 사골국에 밥 말에 깨끗하게 배우고 어른이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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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1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소개 받을 때가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무얼까. 친절한 사람, 합리적인 사람, 잘 돕는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유연한 사람 등. 나는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부를까 생각해보니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에 둘러싸인 삶은 행복하다. 위선적인 사람, 위협적인 사람, 비열한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산다면 불안이고 불행일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싶고,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꿈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좋다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눈동자를 그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을까? 민망함도 두려움도 없이 오래오래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연민과 사랑을 잊을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다 알고, 이미 받아주는 듯한 그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눈빛 교환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또한 세상의 모든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다 담은 소리이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 대답을 기다린다. 재촉도 추궁도 없이 내가 준비되어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내 말을 다 들은 후 말없이 자기 몸의 일부를 보여준다. 처참한 상처의 흔적이다. 놀란 내게 그 목소리가 말한다. ‘당신을 위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렇듯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를 옥죄던 사슬이 풀어졌다. 내 영혼을 꽁꽁 묶어 더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가던 그 사슬, 죄의 사슬이 말이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1)

 

그 사랑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신이 그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자국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는 말

네 지은 죄 사했다 하시니 나의 죄짐이 풀렸네 (2)

 

찬송가 134장은 나를 꿈꾸게 한다. 그리하여 2000년 전 갈릴리로 이끈다. 거기서 어떤 사람, 어떤 남자, 참 좋은 사람을 만난다. 그렇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난한 동네의 한 남자로 이 땅에 오셨다. 어떤 좋은 남자, 한 좋은 사람으로! 일상의 언어로 쓴 하나님 말씀이라 일컫는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그 사람예수를 읽어본다. ‘둘러앉은 사람들을 일일이 쳐다보며 말씀하셨다(3:34).’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정한 종교에 노하여, 그들의 눈을 하나씩 쳐다보셨다(3:5)’ 사람 예수님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손으로 병자의 몸에 손을 대며 스킨십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의 앞에 앉아 거짓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르침 받은 사람들은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메시지 속으로 들어간 나도,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찬송 가사에 잠긴 나도 그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 역사 속으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는 자주 사람의 몸을 입고오셨다고 말하면서 잠시 사람으로 둔갑하신 신화 속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사나운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 했네

그 파도가 주 말씀 따라서 아주 잔잔케 되었네

 

그렇게 사람 좋은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는 능력, 병을 고치는 치유력,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까지 보여주신다. 게다가 가난한 백성을 율법의 짐으로 옭아매는 종교 지도자들을 도통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눈 똑바로 뜨고 하실 말씀을 하셨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 천하다 멸시받는 이방 여인까지 일일이 눈 맞추던 따스한 사람 예수님은 풍랑 앞에서, 종교 권력 앞에서 누구보다 강하고 물러섬 없는 사람이었다.

 

꿈이 아니다. 한 밤의 꿈일 수 없다. 그 만남은 꿈을 깨서 2017년 가을을 걷는 나의 일상에서 오히려 생생하다. ‘좋은 사람의 기준을 몸소 제시하셨기에 그에 따라 오늘을 살고자 한다. 갈릴리 사람처럼 살고자 하는 나의 오늘에 그분은 살아 계신다.


나 주께서 명하신 복음을 힘써 전하며 살 동안 그 갈릴리 오신 이 내 맘에 항상 계시기 원하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통일 찬송가 번역) 곧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4)

 


< QTzine> 11월호





니어그램 내적여정의 마지막 과정인 영성과정 안내입니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
나는 문제를 일이키지 않는 평화의 사람이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잘 돕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무엇이든 잘 해내는 유능한 사람이다.
나는 무엇인가 남과 다른, 고유한 사람이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다.
나는 충직한 사람이다.
나는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다.


자아 이미지, 자아상이란 것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에니어그램 아홉 가지 유형도 각각 다른 자아상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자아상의 안경으로 타자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심지어 자아상은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상을 만듭니다.


“하느님에 대한 일반적인 서구의 생각은 대개 산타클로스와 교통경찰이 합쳐진 것이다. 친절하고 관대한 늙은 괴짜노인, 하지만 교통위반자를 찾으려 눈을 크게 뜬 사람” - 윌리엄 그림 <엔도 슈사쿠의 실수, 우리의 잘못>

영성적 의미의 치유는 결국 왜곡된 하나님상의 치유입니다.

에니어그램 마지막 세미나 영성과정은 왜곡된 하나님상 치유와,

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기도에 대한 안내입니다.

* 에니어그램 세미나 1단계 수강하신 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일시] 2017년 12월 20일(수)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5층
[참가비] 12만 원
[문의] 010-4235-8020 (수진 쌤)
[신청] 바로가기 클릭






여보, 당신은 앞으로 새로 산 이 통에 넣기만 해. 

음식 쓰레기 나오면 여기에 넣어. 쓰레기 봉지에 담고 치우는 건 내가 할게.

그냥 여기에 딱 버리고, 밑에 있는 음쓰 봉투에는 손대지 마. 알았지?


어머, 뭐야 뭐야. 아침부터 '꽃길만 걷게 해줄게' 영화 찍는 거? 나 사랑받는 여자야?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의 저자가 이름 값 못하게 만드는 주방의 구조와 환경이었습니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할 때면

앞으로 자꾸 꼬꾸라지는 수전 때문에 쌓이는 스트레스로 지옥문이 열릴 지경이었지요.

좁은 주방, 보기 드문 오래된 낡은 싱크대이지만 옆으로 난 창문이 있기에,

그 창으로 멀리 불곡산이 보이고, 해질녘에는 노을빛이 쏟아지곤 하기에,

창틀에 작은 화분을 두고 키우는 맛으로 근근이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을 유지하고 있는데

고정 안 되는 수전은 정말!


이렇게 손 대보고 저렇게 만져보던 남편이 '사람 불러야 돼' 하는 말도 집어 넣고 직접 해결했습니다.


'당신은 전문 연애강사도 아니고, 에니어그램 전문가도 아니고, 전업 작가도 아니고

일상 전문가야! 정신실은 일상 전문가!'

평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었으니 일상 전문가의 주요 연구실 환경의 열악함에 적잖이 신경이 쓰였을 테고.

손수 수전을 갈아 끼우더니 불편한 쓰레기통도 개비, 음식쓰레기 처리 방식도 바꿔놓았습니다.

그렇게 며칠 주방환경 정비에 혼신을 다하더니 급기야 오늘 아침의 감동 발언입니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저자의 자격 있는 남편 같으니라구!



여보, 당신은 앞으로 새로 산 이 통에 넣기만 해. 

음식 쓰레기 나오면 여기에 넣어. 쓰레기 봉지에 담고 치우는 건 내가 할게.

그냥 여기에 딱 버리고, 밑에 있는 음쓰 봉투에는 손대지 마. 알았지?


어머, 아침부터 '꽃길만 걷게 해줄게' 영화 찍어? 

나 당신의 애기! 나 사랑받는 당신의 애기! 아, 나는 사랑 받는 여자!

(감동감동, 황홀황홀)


뭔소리야. 당신이 음쓰 봉투에 손대면 여기저기 묻히고 더러워져서 안 되겠어. 

(손으론 부지런히 쓰레기 정리하는 중)

(버럭) 아놔, 진짜 이거 누가 재활용 분류 안 하고 여기다 넣었어. 당신이야? 진짜, 정신실.

앞으로 음쓰 봉투에 절대 손대지 마.


야!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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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가 예정되었던 토요일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취소했지요. 말끔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생긴 휴일이니 한결 더 여유로운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몇 가지 일과 더불어 꼭 산책을 해야겠다, 산책 하다 어느 벤치와 눈이 맞으면 거기 앉아 책이나 한 권 끝내야지 싶었지요. 고급인력 조교인 수진 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형사고가 터졌다구요.


세미나 취소된 걸 모르시고 한 선생님이 포항에서 오신 것입니다. 착오와 착오가 교차하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 번 신청으로 영성과정 신청까지 다 된 걸로 아셨고, 취소 문자는 신청하신 분께만 보내드렸으니까요. 게다가 페이스북도 안 하시니 통 소식을 모르셨던 거지요.


마포도 아니고, 포천도 아니고, 포항에서 오셨어요. 이걸 어쩌나! 두 시간만 기다려 주십사 하고 일단 준비하고 튀어 나갔습니다. 명동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죄송하고, 점심식사라도 대접해야지 싶었습니다. 반갑게 만났습니다. 명동에 오셨으니 명동칼국수 어떠시냐고 제안했습니다. 16년 미국생활에 한국 들어오신지 3년 지나는 동안 명동에 처음이시라구요. 미국에 계실 때 비오는 날에 명동칼국수 생각이 났었다네요. 뭔가 시작부터 좋았습니다.


식사하고 한 사발 가득 라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제 책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읽으셨다구요. 읽으신 후에 저자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다네요. 책으로나 만나지 저자를 직접 만나고 싶은 생각은 처음 드셨다고 합니다. 5유형이십니다. 직접 만날 기회가 있어도 부러 피하실 분들이죠. 글로 만나는 게 제일 편하신 분들 ^^ 책을 읽고 쓴 사람이 궁금해졌다는 것, 그 누구도 아닌 5유형의 말이니 제가 많이 고무되었습니다.


여하튼 그러다 검색하여 세미나를 발견하셨고, 지난 번 1단계에 참석하셨었죠. 이번에는 세미나 시작 전에 도착하시고자 하루 전날 올라와서 주무셨다는군요. 여하튼 결론은, 5유형이 시도하기에는 정말 어려운 일(특별한 주제 없이 직.접. 만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선생님께는 물론이고 제게도 꼭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내적여정, 영성에 관해 공부하면서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겠지요) 틀어진 계획으로 인해 꼭 필요한 강의를 듣게 되고, 꼭 만나야 할 도반들을 만난 경험이 많습니다. 꼭 듣고 싶은 강의가 인원 미달로 취소되었다 하여 낙심하고 돌아선 적이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전혀 다른 곳에서 개설된 강의를 찾았지요. 정말 좋은 배움이었고, 만남이 깊어져 스승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한참 뒤에 얘기 나누다 보니 몇 년 전에 취소되어 놓친 그 강의의 강사이셨어요.


오늘 꼭 이렇게 만났어야 했구나! 싶었습니다. 강의 취소로 10여 분들께 아쉬움을 드렸지만 단 한 분과 얼굴과 얼굴로 만나야 했던 모양입니다. 적잖은 위로와 기쁨이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값지고 신비롭습니다. "취소되고 착오가 일어난 데는 다 뜻이 있었네, 하나님 뜻이 있었네" 라고 말하면 쉬운데 저의 큰 아이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아우 참, 정말. 아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모든 걸 다 그렇게 말해? 뭐든지 다 하나님의 뜻이야? " (얘도 교회는 다닙니다.)


산책 따위! 산 책(alive book)인 사람,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신비로운 대형사고지요?





* 에니어그램 세미나에 관한 내용은 페이스북 페이지 [상처 입은 치유자들]을 통해 소통하고 있으나

한 개 더 애정하는 블로그 고객님들께도 페이지에 올린 글 그대로 복사하여 알려드립니다. 



신청하신 분들께만 말씀 드리고 스리슬쩍 넘어가려 했는데, 공지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반기 예정되었던 2단계, 심화1, 심화2과정 세미나를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신청하시고 마음과 함께 시간을 비워두고 기다리셨던 분들, 죄송합니다. 특히 코앞의 2단계를 기다리시던 분들께는 더욱이요. 개별 문자에는 인원이 적어서 취소했다고 했는데 실은 단지 인원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다섯 분 신청해주셨는데 개설하고도 남을 인원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두 분, 세 분을 앉혀 놓고도 (심지어 한 분도 해봤어요) 하루가 걸리는 에니어그램 1단계 설명을 수도 없이 해봤습니다.


인원은 핑계일 뿐, 저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가 고갈된 탓입니다. 가끔들 그러시잖아요. 감기같이 찾아오는 무기력과 ‘아이고 의미 없다’, 무의미 병에 걸리시곤 하시죠? 저도 그러네요. 돌이켜보니 에니어그램 지도자과정 공부한지 만 10년입니다. 불혹의 40을 앞두고 일...찍 찾아온 중년 병에 한참 늦은 영적 사춘기가 겹쳐 2년 정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난 끝이었습니다. 나도 싫고, (멀쩡히 살다 뒤늦게 목사가 된)남편도 싫고, 아이들도 거추장스럽고, 무엇보다 교회가 제일 싫었습니다. 그때 소가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잡는 격으로 우연히 만난 에니어그램이었고, 그로부터 몇 년(아니 지금까지 10년) 정말 에니그램과 내적여정, 영성공부에 미쳐 살았습니다.


요즘 슬슬 드러나는 증상이 12년 전 무기력 병과 비슷하네요. 50 지천명의 고개 앞에 서서, 하늘의 뜻을 깨닫는 숙제를 받아든 탓인가 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을 빌면 ‘황폐한 마음’의 계절이 온 것 같기도 하고요. 마음의 움직임을 황폐함(desolation)/위안(consolation)으로 구별하여 자신의 마음 상태를 깨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다. 황폐함의 상태는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위안이 넘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듯 황폐함이라고 늘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요. 황폐한 마음상태로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하는 에니어그램 집단여정을 이끄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 고심 끝에 결정했습니다.


2단계 신청하신 다섯 분의 성함을 들여다보고 오래 고민 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1단계를 들으신 분도 계시고, 수강료를 우해 알바비 열심 모으는 대학생도 있고, 각각 사연과 목마름은 우주과 같을 것임을 알기에 너무도 죄송합니다. 취소를 결정하고 메시지를 드리고 나니 혹시 취소자 없냐며, 티오를 묻는 문의가 이어집니다. 결국 수강인원은 다 채워질 상황이었으니, 제 마음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실은 힘을 얻는 것은 심화과정에서 언급하는 앤소니 드 맬로 신부님 책의 이 한마디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내가 도우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 절대로, 내가 여러분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만일 도움을 받는다면 여러분이 그러는 겁니다. 진실로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실은 저도 수없이 다양한 강의를 하고,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이끌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 준비된 학생에게만 선생이 존재하는구나. 내가 1이라도 가르쳐 전할 수 있는 것은 들을 준비된 분, 오직 듣고 스스로 도울 힘이 있는 분이 있기 때문이구나.


무엇보다 여러분 안의 목마름이 더딘 시간을 지나며 구원으로 이끌 것을 믿습니다. 하루 띡 듣고 마는 내적여젓 세미나가 아니라 의식성찰 일기를 쓰고, 쓰다 답답해 포기하고, 다시 질문을 던지고, 영적 독서를 하고, 도통 모르겠는 채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참된 배움이 있을 것임을 저는 압니다. (해봐서 압니다) 2단계와 심화 1.2 과정은 내년 상반기에 다시 열도록 하겠습니다. 2017 12월 20일(수) 예정된 영성과정(장소는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은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신청링크 : http://bit.ly/2vJI8Su)


내적여정 강의의 마침표를 찍을 영성과정에서는 거짓자아가 궁극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관계를 다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조차 유형의 포장지를 나갈 수밖에 없는 우리, 우리 안에 있는 왜곡된 하나님 상을 찾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고요. 1단계부터 수도 없이 질문하셨던 ‘그래서 어쩌라구!(내 성격이 거짓자아라면? 어릴 적에 이미 형성되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듯 죽는 날까지 벗을 수가 없다면?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과녁을 벗어난 죄라면? 쓸 수도 벗을 수도 없는 성격의 가면을 도대체 어쩌라구?’)에 대한 답을 기도,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로 드립니다. 향심기도에 대한 안내와 실습으로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특히 이번 영성과정은 1단계만 들으신 분께도 열어두고 함께 하겠습니다. 2단계와 심화과정 듣지 않으신 분들도 신청해주세요.  긴 글이 되었네요.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 드리며, 늘 기도 속에서 여정의 동반자이신 여러분을 품도록 하겠습니다.



"언니, 서울역이서 만나"


86세 이모가 93세 엄마에게 말했다. 사랑 깊은 자매가 그리움 가득 안고 서울역에서 만난다? 특별할 것 없는 설렘이겠으나 실현 불가, 환상 같은 일이다. 그래서 눈물 겹도록 황당하다. 93세 엄마는 타인의 도움 없이 현관 출입도 못하신다. 86세 이모는 그 연세에 건강하고 씩씩하여 엄마 생신 때마다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지하철 타고 충청도 공주에서 김포까지 찾아 오셨었다. 등에는 콩, 고추 같은 선물 가득 짊어지고 말이다. 이제 그 이모의 기동력조차 쇠했다. 혼자 김포까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신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이모는 공주의 쓸쓸한 집 안방에서 전화로 안부를 묻고, 기도제목을 나누며 눈물짓는 일상이다.


엄마를 모시고 있는 동생이 '언니, 서울역이서 만나' 자매의 눈물겨운 통화 내용을 듣고 명절 끝에 93세 엄마를 모시고 공주에 다녀왔다. 허리 아파서 긴 시간 차 탈 수 없다는 엄마를 설득하고 설득하여 모시고 내려갔다. 마지막 만남이 아니겠냐며.


"느이 엄마는 나한티 언니가 아니라 엄마여. 언니라고 헐 수가 옶어" 이모는 늘 그렇게 말씀하신다. 엄마는 평생 신산한 삶을 사는 이모를 떠올릴 때마다 "너머 불쌍허다. 너머 불쌍혀' 하며 눈물짓는다. 93세 이모와 86세 이모의 눈물 없는 만남은 이땅이 아닌 천국, 그곳이 더 가까운 실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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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잡지 청탁으로 급하게 쓴 글인데 편집 과정에 불편한 일이 있어서 '싣지 않겠다' 강짜를 부렸습니다.

(보기보다 성질 있어요) 여기,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싣는 걸로!



아흔을 넘긴 친정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신다. 돋보기 끼고도 글을 읽지 못하고,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하며, 간간이 용변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신다. 그나마 느리게 쇠락해가는 것이 이 아닌가 싶어 엄마의 말을 붙들고 싶다. 물론 말수는 많이 줄었고 말투는 많이 어눌하다. 흔히 노인들을 묘사할 때 총기는 여전하시다, 라고 할 때의 그 총기, 반짝임이 묻어나는 엄마의 말이 있다. ‘고맙다, 복 받어라.’ 언제부턴가 엄마와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전화 할 때는 끊어대신 고맙다, 복 받아라인사 하신다. 마주 앉아 하는 대화가 끊어질 때마다 그 침묵의 여백을 채우는 엄마의 말은 역시 고맙다, 복 받아라이다. 이제 이것은 아들 딸 손주들에게 엄마(할머니)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려, 고마워, 복 받어라.’ 외할머니의 사투리를 흉내 내며 자주 못 뵙는 할머니를 기억하곤 한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기는 엄마소리 하나로 모든 감정, 모든 요구를 다 표현한다. 배고플 때 부르는 엄마다르고, 두려울 때 다르고, 기쁨을 표현할 때 다르다. 마찬가지로 노모에게 남은 몇 마디 또한 상황에 따라 뉘앙스가 다르다. ‘고마워, 복 받어역시 자세히 들어보면 단 하나의 뜻이 아니다. 식사 잘 하시고 기운이 좋을 때, 당신 좋아하는 간식을 사들고 가면 주름 가득에 생기까지 가득한 얼굴로 고맙다, 복 받아라하신다. 구루모(영양크림) 떨어진 것 사오라는 심부름을 해드리고 바빠 죽겠는데.....’라며 생색이라도 낼라치면 살짝 삐쳐서 영혼 없이 던지는 고맙다, 복 받아라.’ 어떤 뉘앙스가 됐든 기본설정은 무력함인 것을 안다. 조금씩 무너지는 육신으로 자녀들에게 짐이 될 뿐 해줄 것은 말로 복을 빌어주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은 때로 미안하다로 들린다. 아주 가끔은 너무 오래 살어서 자식들 고생이다. 미안하다.’ 하시기도 하는데 고맙다, 복 받어라와 다르게 들리질 않는다.

 

한 계절을 보내고 오는 계절을 맞는, 계절의 고개를 넘는 것이 노구의 엄마에겐 힘겨운 일인가보다. 여름 끝 가을을 부르는 찬바람과 함께 엄마의 몸도 서늘해져 푹 꺾어졌다. 장에 탈이 나서 배변 조절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늘어진 살과 긴장감 없이 흔들리는 근육은 볼 때마다 안쓰럽다. 긴장이 풀린 살과 근육은 엄마를 괴롭히고, 모시는 자녀들에게 짐을 안긴다. 수 년 전 고관절 수술 후 처음 간병하던 밤을 잊을 수 없다. ‘미안하다, 내가 얼른 회복혀야지, 미안혀서 어쩌냐하시며 당신의 무력한 몸을 그렇게나 부끄러워 하셨었다. 그 후로 적어도 기본적인 신변처리만큼은 스스로 하시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자녀들에게 짐이 되는 미안한 몸이 되지 않게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온다. 생명력 빠져나간 근육에 의식의 온기를 쏟아 부어도 더는 조절이 불가능하여 아기처럼 기저귀(,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단어란 말인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지는 마음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엄마를 찾았다. 드실 수 있는 간식도, 필요한 것도 없으시니 엄마를 위해 들고 갈 것이 없다. 엄마의 미안한 몸을 지고 망가진 일상을 사는 동생 부부를 위해 장을 본 것으로 허전한 손을 채운다. 오랜만에 보는 딸과 사위를 맞는 엄마의 시선이 텅 비어있다. 반가운 웃음도, 사위를 볼 때마다 짓는 수줍은 미소도 없다. 엄마의 텅 빈 시선이 따라잡을 수가 없다. 마치 몸만 여기 두고 의식과 함께 어딘가로 유랑을 떠나 있는 듯. 용변을 처리를 해야 하는 순간, ‘어머니, 이쪽이요. , 됐어요. 이제 똑바로요. , 다리 드세요며느리 손에 내어맡긴 몸이 기계처럼 착착 반응한다. 수 년 전, 처음으로 당신 몸의 통제력을 잃으셨던 그때 끊임없이 미안하다, 고맙다, 아이구 미안하다.’ 어쩔 줄 모르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체념, 그렇다 체념이다. 미안한 몸조차 체념하고 비워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텅 빈 시선은 비워서 텅 빈 마음인가보다.

 

엄마를 뵙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고맙다, 복 받어라주문 같은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떤 뉘앙스를 풍기든 엄마의 이 말이 참 좋았다. 여기 담긴 무력한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때 직장 다니는 딸을 대신하여 손주를 키우고, 수십 포기 김장을 척척하여 나누고, 오징어 껍질 새하얗게 벗겨 맛있는 초무침을 만들어 나를 감동시킨 엄마. 내게 흘러들던 엄마의 사랑. 복을 빌어주는 기도 뿐 아니라 이렇듯 실제로 도움이 되었기에 더욱 고마웠던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다. 더는 엄마의 김치를 먹을 수 없고, 더는 엄마가 만든 환상적인 맛의 오징어 초무침을 맛볼 수 없지만,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시리지만 서서히 힘을 내려놓는 엄마의 노년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제 더욱 무너진 육체로 인해서, 더불어 내려앉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인해 고맙다, 복 받어라는 말조차 내놓지 못하시지만 내겐 아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다. 더는 줄 것이 없고, 짐만 될 뿐이며, 받기만 하는 당신의 삶이 곤혹스럽겠으나 엄마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CF의 대사가 있지만 사랑은, 적어도 사랑의 모양은 한없이 변한다. 씻기고 먹이고 입히며 돌보는 것이 사랑인 시절이 있는가 하면(내가 세상에 처음 왔을 때 엄마는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었다.) 씻김을 당하고 입힘을 당하고 돌봄을 당하는 사랑이 있다. 처음 기저귀를 하신 엄마는 아들 며느리를 돕겠다는 뜻으로 혼자 해보겠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하셨나보다. 그러다 일이 더 커져 며느리의 수고가 더해지곤 했다. ‘어머니, 가만히만 계시면 힘들지 않아요.’ 이 말을 수차례 들으신 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뭐라도 해보겠다는 힘을 내려놓으셨다. 그리고는 착착 움직이는 기계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 다리 드세요. 똑바로 누우세요.’ 사소한 말에도 전적으로 따라주는 것이 노년의 엄마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다. 인생의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몸으로서 무너지는 자존심이야 끝이 없을지라도 받아들이는 것. 텅 빈 시선으로 조금 도망치더라도 이 무력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어맡기는 것이 자녀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일지 모른다.

 

엄마의 오늘은 나의 내일이기에 나 역시 새로운 사랑을 예습해야지 싶다. 책의 작은 글씨들이 뭉개져 보이기에 눈에 뭐가 끼었나, 자꾸 비볐는데 다름 아닌 노안이다. 중년에 접어들어 전에 없는 몸의 변화를 겪는 친구들은 운동 열심히 해서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늙어서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해선 이런 전런 준비를 해둬야 한다며 주먹을 불끈 쥔다. 운동도 해야 하고 좋은 것도 먹어야 하지만 불끈 쥔 주먹을 풀고 타인에게 기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는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힘을 줘도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을 근육으로 어쩔 수 없는 몸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엄마의 미안하고 무력한 육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이런 노년의 어느 날? 더 상상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지만 인간의 길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육체는 포기하되 사랑만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엄마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인간에게 사랑이 끝나는 날은 자궁이라는 무덤, 무덤이라는 자궁으로 가는 그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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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갈이 시점은 어떤 변곡점이다.

무성한 잎을 보아하니 보이지 않는 뿌리가 숨 쉴 공간이 부족하겠네,

생각하며 화분을 갈아줘야지 싶어도 쉽게 되질 않는다.

분갈이 할 시간이 없거나, 갈아줄 더 큰 화분이 없거나.


2000원 짜리 두 개(어쩌면 세 개)를 사서 주먹만 한 화분에 심어 키운 스파트필름이다.

몇 차례 분갈이 하며 몇 년을 지났다.

뭔가 꽉 찬 느낌이라 갑갑해 보여 신경 쓰이고 미안했지만 마땅한 화분도 없고, 시간도 없고.

개국 이래 최장 휴일이라는 2017년 추석이라 시간이 많아졌다.

어머니 모시고 율동공원 나들이 다녀 오는데 집앞 나무 사이에 멀쩡한 키다리 화분이 서 있다.

'제 아이를 부탁합니다. 사랑으로 돌봐주세요' 누군가 놓고간 아기 같이 말이다.

냉큼 주워 와 분갈이 작업을 했다.

언니가 더는 못 입는 옷을 동생이 물려받고, 도미노처럼 그 다음 동생도 득템하는 형국이다.

빈 화분을 그 다음 큰 아이가 차지하고, 그래서 생긴 자리에는 또 다른 녀석이 심겨진다. 

아침에 걸레질까지 해놓은 거실은 흙대밭(?)이 되고....... 

그리하여 작은 옷을 입고 숨도 못 쉬던 스파트필름은 화분 서열 2위로 등극하였다.

1위인 벤자민이 사춘기 지나 키 다 큰 성인으로 입양된 놈이니,

실질적으로 1위라 해도 무색하지 않다.


비좁은 거실에 어디 둘 데도 없지만 없는 공간 만들어내는 재능을 타고난 엄마 덕에 좋은 자리까지 잡았다.

해질녘이면 붉은 저녁 햇살이 깊숙하게 들어오는 길, 

노트북 앞에 앉은 엄마의 눈길이 가장 많이 닿는 명당자리이다.

한 잎 한 잎 물로 닦아주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눈을 뗄 수가 없다.

에고 이뻐라, 에고 이뻐라. 주먹만 한 화분에서 어찌 이렇게 자랐는가, 기특하기도 하여라.

혼자 간직할 수 없는 감동에 이 녀석 자랄 동안 물 한 번 주지 않았던 김종필 아빠에게 강요한다.

"여보, 얘 좀 봐줘. 큰 박수가 필요합니다! 박수 쳐! 세게 쳐!" 


성.장.

가끔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어오는 질문, 나도 내가 왜 그럴까 생각해 보는 나에 대해 이 단어를 찾았다.

성장하고 싶은 욕구, 욕구가 지나쳐 집착이 되고 이것은 결국 중독이 아닐까 싶은 열정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히 쓰는 열정, 나답게 강의하기 위해 배우고 공부하는 열정.

내 마음 그대로 투사가 되어 꾸준히 자라는 식물이 예뻐도 너무 예쁘다.

사람에게도 투사가 되어 성장하는 사람은 다 예쁘다.

이미 훌륭하여 더 자랄 것도, 배워야 할 것도 없다는 사람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다.


감.사.

말 없는 식물에게서 감사의 태도를 느낀다.

이것도 역시 내 마음을 비춘 감정이지만 말이다.

아이들 어릴 적에 많이 불러줬던 노래, 정말 귀여운 노래인데 부르다 자주 울컥했던 노래가 있다.


포도밭에 포도가 땡글땡글 땡글땡글땡글땡글 잘도 열렸네

자기 혼자 컸을까 아니 아니죠 정말 혼자 컸을까 아니 아니죠

위에 계신 하나님이 키워주셨죠


우리 아이들 어릴 적에는 물론이고 주일학교 찬양 선생님 할 때도 많이 불렀다.

'가사 바꿔 부르기'로 사과, 배추, 호박, 고추, 딸기.......에 의태어까지 바꿔서 참 재밌게도 불렀다.

어떻게 가사를 바꾸든 '자기 혼자 컸을까 아니아니죠'에선 늘 은혜를 받았다.

누워서 빽빽 울던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사람 되기까지,

오늘의 내가 이나마 사람 구실 하면서 살기까지,

나 혼자 크질 않았다.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이 계셨는가.

위에 계신 하나님이 연결해주신 수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고, 자기의 것을 나눠주며

지금 여기의 내가 있다.


공들여 키우는 창가 책꽂이 위의 화분 중에는 그런 놈이 없다.

자라지 않는 놈, 제 혼자 큰 줄 아는 녀석은 없다.

사람은 너나 없이 제 혼자 이룬 줄 알기에 감사치 않는다.

쑥 자라 어른이 된 화초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침 저녁으로 보듬은 나의 공을 생각하고,

나 몰래 내게 사랑과 인내를 베푼 수많은 손길과 공로를 상상해본다.

감사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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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제목을 스토리에 맞게 바르게 고쳐 쓰시오. (정답 : 기억을 틀리다)


원제 <The Sense of an Ending>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우리말 제목이 되었다. '혹시 내게도 저런 치명적인 기억의 오류가 있진 않을까?' 막 더듬어보게 하는 영화이다. 극장을 나서는(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관객(독자)의 머릿속에 '기억'이란 두 글자가 포인트 40으로 새겨질 것을 예상한 원저자가 더 멀리 던지는 화두일지도 모른다. 'The Sense of an Ending'은. "바보 관객들아, 기억 얘기가 아니야!" 기억의 왜곡으로 인한 충격적 반전으로 사람 놀래켜 놓고선 '기억'이 아니라 '예감'의 문제라고? 아무튼 나는 원제목(동명 소설)과 번역된 제목 둘 다 마음에 든다. 한참 전에 예고편과 함께 무엇보다 제목에 끌려 목록에 담아 둔 영화이다. 결국 영화 속에선 예감은 있었으나 기억은 틀렸다. 예감은 그러니까 결말에 대한 예고는 영화 곳곳에(원작인 소설에선 더더욱 정교하게) 흩뿌려져 있다. 다만 그것을 읽어낼 감각이 없어서 결말에 관해 잘못 짚은 것이다. '잘못 짚은'의 주어는 주인공이고 '나'이며 또한 우리이다. 말하자면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인생에서 제가 무엇을 뿌렸는지 모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짚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독(毒)을 뿌려놓고 선(善)을 뿌렸다고 착각할 수 있음이다. 착각점이 정확히 (기억의) 왜곡점이다.


친할 뿐 아니라 선망하던 친구 아드리안이 헤어진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구 아드리안이 직접 편지로 알려온다. 주인공은 '그러든지 말든지'라는 식의 엽서를 보냈다고 기억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영화의 반전이다. 지질하게 비아냥거리고 저주를 퍼붓는 내용을 주절주절 써서 답장을 보낸 것이다. 노년이 된 토니. 베로니카 엄마의 유언장이 등장하며 자연스레 수십 년 전 애정사를 복기하게 된다. 물론 추억 속 그녀 베로니카를 만나게 된다. 추억(기억)을 더듬고, 사실(나 아닌 상대의 기억)을 확인한다. 알고 보니 편지에 담은 저주처럼 친구 아드리안은 여친의 엄마와 섹스를 하고, 그리하여 여친의 동생을 낳았고, 그 때문인지 어쩐지 친구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주인공은 토니는 평생 쿨하게 보낸 엽서의 기억만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틀린 기억을 가진 주인공은 그 일과 무관하게 무난하게 살아왔고, 그가 잊은 기억을 사실(현실)로 살아야 했던 여자 친구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추측된다). 고교시절 전학생 아드리안이 수업 시간에 했던 인상 깊은 말들이 고스란히 영화의 명대사로 남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패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죠." 


영화든 현실이든, 영화같은 현실이든 갈등은 뿌린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튀우는 싹이다. 잘 짜여진 화에서는 반전이 있고 다소 충격적인 볼 만한 이야기가 되지만, 현실의 왜곡된 기억과 파괴적인 결과는 흔하디 흔하며 고통이다. 불편한 관계 풀자고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화는 얼마나 흔한가.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걸 그렇게 이해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아니야, 너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정말 그랬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무슨 소리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어린 시절 상처받은 기억으로 오래 아파하다 '미안하다' 한 마디 듣고 싶어 용기를 내는 딸들을 안다.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어린 애한테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어? 어저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어? 과연 사과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미안하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어. 그땐 엄마도 어렸단다. 정말 미안해. 엄마를 용서해주겠니? 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얼마나 될 것인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제 와서 트집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서, 사랑 밖에 준 것이 없다. 더 큰 상처로 끝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차라리 내 기억을 수정하는 것이 그 사람과 화해하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주인공 토니는 어쩌다 그런 (너무도 단순하여) 치명적인 왜곡된 기억을 가지게 되는가? 이 질문 끝에 영화 <윈터 슬립>이 생각났다. 착하고, 이웃에게 해 끼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면에서 두 주인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윈터슬립의 주인공 아이딘이 가진 것이 많아서인지 더 견고한 자기의(義)의 성을 쌓은 것 같기도. 토니는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사람, 충실한 사람이다. 임신한 (싱글맘) 딸의 출산교실에 함께 가주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불평 없이 하는 사람, 이혼했을 망정 전부인과도 그럭저럭 잘 지낸다. 그런데 딸과 부인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지금 내 앞에서 내게 일어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흔하디 흔한 자기 몰입의 사람이다. 고등학생, 대학생 때도 그랬을 것이다. 올바르고 친절하고 다소 소심하게 살지만 나무랄 것 없는 삶이기에 더욱 반성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바운더리 안에서 착하고 충실하지만 아침마다 만나는 집배원에게 보통의 사무적인 친절 그 이상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다. 영화 마지막에 집배원을 향해 말 한 마디 건네게 되는 변화는 전부인에게 사과하는 장면보다 더 큰 회심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의 독백처럼 그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상처를 기피하며 그것을 생존능력이라 부르는 사람'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승자도 패자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라 오직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억 위에 색을 칠하고, 덧칠하며 생존을 유지할 뿐이다. 


내적 성장을 위한 에니어그램 여정을 이끌며 '기억의 치유' 없이 성장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기억이 사실이서가 아니다. 기억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문제이다. 해석의 틀에 갇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찾아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틀, 어떤 경험도 묽은 밀가루 반죽으로 해체시켜 부어버리는 자기만의 붕어빵 틀을 발견해야 하는 문제이다. '기억도 그렇습니다. 옛날 일이라는 것은 벌써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라는 우치다 타츠루의 통찰에 동의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그야말로 개정판으로 다시 써가는 일이다. 토니가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확인하고 베로니카에게, 전 부인에게 진심의 사과를 건넬 수 있었을 때, 그의 일상이 달라졌다. 저주의 편지를 썼던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의 기억으로 살아온 존재 자체에 대한 회한일 것이다. 참된 자기성찰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수용으로 향함을 안다. 내 붕어빵 틀이 이토록 터무니없이 확고하다면 당신이 찍어내는 기억의 붕어빵 역시 견고한 고유함이리라. 내가 모르는 아픔과 기쁨이 담긴 화석 같은 것이리라. 당신도 나처럼 상처를 피하기 위해 한 조각 기억을 붙들고 그 위에 색칠하고 덧칠하며 살고 있구나. 황혼을 사는 토니 일상의 작은 변화, 집배원에게 건네는 커피 한 잔이 내게는 참 좋았다. 그 변화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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