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운동을 하고 있는 동생이 수년 전 부탁을 하나 해왔었다. 목회자의 재정 문제 등으로 교회분쟁을 겪 교인들이 모여 작은 교회를 하고 있단다. 그분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해달라는 것이었다. 한 번만 겪어도 치명적인 경험일 텐데, 두 번 연거푸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당시 나의 여러 여건이 허락질 않았고 무엇보다 이런 분들을 위한 치유라면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에게 사기나 모욕을 당하고, 부당한 모함으로 법정에 섰다 해도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억울함과 분노를 평생 안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하물며 그 목회자에게 당한 모욕과 모함, 거짓과 기만이라면. 신앙인들에게 목회자는 영적인 아버지상이 투사되는 대상이다. 때문에 목회자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은 단순한 용서나 화해의 치유를 넘어 영성적인 치유과정이 필요하다. 그 목회자를 신뢰하고 따랐던 자신의 과거와 화해해야 하며, 동시에 일그러진 하나님 상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쉽지 않은 과정이다.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홀로 서는 신앙의 단계로 가야 하는, 성장의 여정을 걸어야만 하는 분들이다. 단지 프로그램이 아니라 목회자에 대한 신뢰회복과 함께 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런 이유로 동생의 부탁을 거절했었다. 덜컥 떠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올해 3월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그때 그분들과 ‘영성치유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곡절 끝에 목사인 남편이 바로 그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된 것이다. 남편이 부임하던 첫날에 노 장로님께서 쓰신 기도문의 끝에는 "오늘 지금은 장에 가신 엄마를, 혼자서 집을 지키며 기다리던 아이에게 그 엄마가 돌아온 시간입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남편은 ‘돌아온 엄마’로서 살기로 했다. 목사라는 엄마의 사랑을 1도 믿을 수 없는 교우들에게 '믿을만 한 엄마 목사' 되는 일을 소명으로 사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후반기 16주의 ‘치유와 성장 세미나’를 진행했고 오늘은 종강모임이었다. 에니어그램을 이정표 삼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타자와 나를 분리하지 않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 했다. 몇 년 전 동생에게 ‘집도 멀고, 그런 프로그램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하면서 거절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 신비로운 일이다.


교회 분쟁을 겪은 분들은 한때 신천지로 몰리고, 고소고발을 당하고 분노와 슬픔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냈다. 그 모든 일이 지나고 멀쩡한 일상을 살지만, 죄 짓고도 여전히 목회하고 추앙받는 목회자들 또한 멀쩡하니 늘 잠재적인 억울함 속에 산다. ‘목사를 대적하면......’ 이 미신 같은 말에 휘둘리기도 하는데, 본인들은 인식조차 못하시는 무의식적 두려움을 볼 때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서는 악을 그대로 두신다. 예배의 자리를 빼앗긴 교인들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그 자리를 빼앗아 꿰찬 목회자는 기고만장하여 승리의 개가를 부른다. 거짓으로 지은 예배당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거짓으로 일군 영적 지도자의 자리는 더욱 견고하며, 세습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을 그대로 두신다. 


오늘 종강 뒤풀이를 하며 옆에 앉으신 권사님께서 가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더 큰 신앙에 눈을 뜨고, 이렇게 행복한 오늘이 있으니 그거면 되지 않은가, 싶다고도 하셨다. 그렇다, 눈 먼 자들의 땅에서 눈을 뜬 분들은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그 길은 치유의 길이고, 성장의 길이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는 곳까지 자라야 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다.





채윤이가 꽃친과 함께 누린 일 년의 방학은 벌써 작년 이야기입니다. 채윤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친구들이 일 년 늦게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올해 채윤이는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고, 이제 서서히 본격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겠지요. 꽃다운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이 여러 편 제작 되었는데, 이번엔 진짜 다큐입니다. 3부작 다큐 중 3부에는 부끄럽고도 영광스럽게 제 얼굴과 목소리가 많이 등장합니다. 





1부의 제목은 "멈출 수 있는 용기로"입니다. 무엇을 멈춘다는 것인지, 용기는 어떻게 발휘되었는지 원조 꽃친 은율이 가족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2부는 "저마다의 향기로"입니다.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아이들 각자의 이야기, 그리고 더불어 어우러지는 이야기입니다.





3부 "꽃다운 마을의 작은 시작"입니다. 꽃친이 여타 청소년 인생학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동행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꽃친을 하는데 아빠가 달라지고 가족이 변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꽃친의 끝은 가족과 가족이 연대하는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연애 강의를 오래 하면서, 사랑하는 사이에 왜 그리 서로 상처를 줄까 고민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난항에 빠지는 관계 문제에 대해 골몰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사랑에 대한 실용적인 정의 하나를 발견했다. 사랑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사랑'이라고 해야 '사랑'이다. 내가 네게 해 준 것이 얼만데, 울부짖어도 소용 없다. 받은 사람의 기억 속에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인 경우가 허다하다.


멸치, 다시마, 양파, 무 등을 넣고 지극 정성으로 육수를 낸 국을 끓여 먹이고, 당근과 버섯과 양파를 우격다짐으로 먹이는 것이 엄마의 사랑인데. 아이들 편에서는 사랑은 커녕 그저 고역일 뿐임을 안다. (흐흑) 


한 놈은 며칠 전부터 "엄마, 유부초밥 먹고 싶어." 또 한 놈은 "엄마, 나 떡갈비에 계란 올린 거 먹고 싶어." 했다. 이 욕구들에 즉각적으로, 인스턴트 식품으로 응해주었다. 건강이고 뭐고 아이들은 어깨춤을 추며 행복해 한다. 엄마가 자신을 돌봐준다고, 자신에게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며 사랑받는다고 느낀단다.


사랑 이렇게 쉬운 건데. '그래도 건강을 생각하면, 그래도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래도 사람 노릇하려면..... ' 하며 내 중심의 관점, 에고이스트적 사랑을 놓지 못한다. 인스턴트 유부초밥과 떡갈비로 열여덟, 열다섯 두 아이가 춤을 추는 저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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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를 손질하다.


손질이 어려워서 내 손으로 사지는 못하는데

아이들은 참 좋아하는 생선이다.

어릴 적 외할머니 밥상에 꼭 오르던 생선이라 일찌감치 맛을 들인 것.

조기가 한 무더기가 생겨서 비늘을 긁고 내장을 빼내어 소금 살살 뿌린다.


김창완의 어머니는 고등어를 손질하여 냉장고에 넣어 두셨고,

우리 엄마는 조기를 손질하여 냉장고에 넣으셨다.

소쿠리에 신문지를 깔고, 아무것으로 덮지 않은 채 냉장고에 두셨다.

꾸덕꾸덕 말리기 위해서다.


[꾸덕꾸덕]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채망에 널어 창가에 두고 꾸덕꾸덕 말린다.

현승이 저녁 반찬으로 몇 마리 구워주는데 다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

[까노롬하게]

가스불을 까노롬하게 해서 타지 않게 굽는다.


꾸덕꾸~더억 말려라.

불 좀 까노롬하게 줄여라.

우리 엄마표 말들.


엄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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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는 현승이는 금요일 밤엔 무조건 영화 한 편이다. ‘피아니스트(2002)’를 보고 나오더니 괜히 카펫을 발로 차고 심술이 난 것처럼 왔다 갔다 한다. 혼잣말인지 들으라는 말인지, “도대체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어. 그렇게, 그런 걸..... 그런 홀로코스트 그걸 겪고 어떻게 하나님이나 신 같은 걸 믿을 수 있어! 김주혁이..... 연예인이 한 사람 죽어도 우리가 그렇게 충격받고 그러는데..... 세월호에서 삼백 몇 명이 죽고 우리가 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그것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종교라는 걸 믿을 수 있어” 했다. 곧 울어버릴 것처럼 울분에 차서 말했다. 무고하게 고통 당한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음을 포갠 현승이 자신이 믿을 수 없다는 얘기인 줄 안다. 그런 하나님을 가슴으로 믿기는 어렵다는,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다는 뜻임을.  


별 말을 할 수 없었다.


꼭 계셨어야 할 순간에, 당신이 꼭 필요한 곳에 왜 계시지 않냐고 물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이 시작되더라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부재로만 현존 하시는지, 당신을 찾는 타는 목마름 속에 희미하게 드러내시는지, 울분에 찬 물음 속에 신앙의 길이 있더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현승아, 엄마가 읽은 책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하느님께는 증오나 폭력이 없으시다. 역사에서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절대적으로 허용하신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폭력적일 수 없으며, 징벌을 내리시거나 심지어 통제하시지도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만일에 하느님께서 폭력적인 분이라면,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폭력으로 막으셨을 것이다.-역자 주). 하느님은 종교재판의 고문이나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을 막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 우리들 자신의 실수, 심지어 악 자체를 이용하셔서 우리 모두를 온전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재난으로 우리를 벌 주시지 않으며, 심지어 재난을 막지도 않으신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에 대해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 9:3)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완전히 사랑에 헌신하시는 것은 완전히 자유에 헌신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강제와 통제를 포기하셔야만 했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분명히 경찰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우리가 지불해야만 하는 큰 대가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달리 행동하실 방법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8, 16).

리처드 로어 <불멸의 다이아몬드> 중에서


어때? 알아 들어져? 실은 엄마인 나도 이 말을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었다 해. 알겠다가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은데 조금 알겠고... 이렇게 비틀비틀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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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은 학생, 중학생, 중2.

주업은 아이패드 들고 탁자 밑에 들어가 음악 검색, 영화 검색, 영화평 검색, 그리고 감상.

쟝르는 늘 예측 불가. 

오늘의 선곡은 이문세의 소녀.

아아아, 난 이 노래가 너무 좋아. 내 취향이야.


# 아빠 끼어들기

야아, 현승아. 아빠가 중학교 2학년 때 저 노래를 들으면서 시험공부를......


# 엄마 끼어들기

캬아, 현승아. 엄마는 대학교 1학년 때 저 노래를 들으면서 짝사랑 하던 어떤 남자를......


# 푸하하하,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도대체?!


# 아빠의 소원

내가 다시 현승이 나이가 된다면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기타를 치고, 

(현승 끼어들기) 자전거를 타고?

그렇지! 아, 너무 약올라. 김현승은 그걸 다 하고 있어.


# 엄마의 소원

현승아, 엄마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야.

방바닥에 널어 놓은 옷을 옷걸이에만 걸어줘.

그거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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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중앙공원의 단풍이 운전을 방해한다. 운전하며 틈틈이 곁눈질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다.  원두가게에 들러서 원두를 사고 서비스로 주는 커피 한 잔을 얻어서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벙개로 만난 친구처럼 들뜨고 설레며, 동시에 호젓하며 쓸쓸했다. 분당의 가을은 예쁘다. 봄도 예쁘고 여름도 예쁘지만 가을은 유난하다. 눈을 돌려 마주치는 어디든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




봄은 가까이 가서 봐야 예쁘고, 가을은 멀리서 봐야 예쁘다.


지난 주 어느 날, 역시나 단풍으로 예쁜 동네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얻어 들은 명언이다. 명언의 발화자 권사님의 부연설명은 '가을 단풍이란 실은 푸석푸석하고 물기 없는 것이 가까이 보면 고울 것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렇지! 흙모자를 쓰고(이거, 망원동 사는 어느 시인의 표현이다.) 올라온 새싹과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이밀던, 연한 새잎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던 봄날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을은 버석버석하고 스러져가는 아름다움이다. 바람 살짝 불면 후루룩 떨어져 버리는 힘 없는 잎들의 향연이다. 붙들고 싶으나 더는 붙들 힘이 없는, 고갈된 생명의 처연함이다. 가까이서 찍은 내 얼굴이 보기 싫은 느낌은 운전하고 지나치다 본 숲에 들어섰을 때의 쓸쓸함이다. 나좀 봐달라는 듯, 지는 해를 스포트라이트 삼아 존재감을 발하는 벤치가 눈길을 끈다.  




벤치를 주인공 삼아 사진 여러 장을 찍은 뒤에 화단의 낮은 담을 넘어 가서 앉기로 했다. 주름진 얼굴, 오십견이 와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어깨, 물오르는 생명력 같은 건 많이 잃어버린 마음을 가지고 가 앉았다. 가서 앉자, 앉다, 앉아 있다, 이런 말을 되뇌이다 구상 시인의 시에 이르렀다 . 이 한 마디 알아듣기 위해 인생의 봄, 여름을 달려온 것일까. 푸석푸석한 생의 가을이어서, 알아들어지는 것이 있는 가을이어서 다행이다.

 


[꽃자리]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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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영화는 결국 보게 되어 있고, 놓친 영화는 내 것이 아니다. 이쪽으로 이사 온 후에 놓치는 영화가 많아졌는데 그러려니 하고 있다. 영화 뿐이겠는가 일도 사람도 결국 만나지는 것이 내 것이다. 성사시키려 애쓰기 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가, 만나고 싶은가'를 묻고 시간과 상황의 흐름을 타는 것이 제일이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보려고 검색하고 시간 맞추고, 심지어 어떤 날은 서울까지 나가기도 했는데 보질 못했다. 사당역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다. SNS에 몸을 맡기고 놀다 얻어 걸린 책모임이었다. 오래된 책모임이 있는데 모임 시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걸 생각하면, 한 방에 시간도 맞고 마음도 가는 책모임은 '내 것'인 셈이다. 당일 이수역 아트나인의 상영시간을 검색하니 <다시 태어나도 우리> 마치는 시간이 모임시간 15분 전이다. 죽어라 뛰면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 (일타쌍피 짜잔) 

 



영화 마치고 극장에서 모임장소까지 순간 이동한 느낌으로 달려갔다. 생각해보면 책모임 내내(거의 3시간) 인도와 티베트 눈덮인 고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약간 달뜬 상태로 모임에 앉아 있었고 책 얘기를 했지만 정신은 훨씬 더 넓은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세 시간여의 모임은 영화의 연장이었는지 모른다. 정작 관람 중에는 몰입이 잘 되지 않았었다. 잔잔한 다큐영화인데 옆좌석 여자분이 중간부터 계속 울어대는 것이다. 반작용으로 나는 더욱 차가운 이성의 불을 밝히고 관람하게 되었다. 담담히 보고 잔잔히 감동 받았기에 천천히 걷고 싶었지만 미친 여자처럼 15분을 뛰어 약속 장소로 가며 묘한 느낌이었다.   


벌써 자기 생에 이름을 붙이고 확고한 길을 가고 있는 맑은 눈동자의 아홉 살 인격 앙뚜, 어린 제자에게서 높은 스승의 영혼을 감지하고 그의 길을 열어주는 것에 삶을 건 주름 가득한 얼굴의 노승 우르갼. 극(drama)이 아니다. 말 그대로 다큐다. 두 주인공 각자의 생애 또는 둘이 하나 되어 사는 춥고 먼지 나는 일상에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숭고하고도 아름답다. 윤회나 환생의 종교적 믿음과 별개로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이다. 노승 우르갼의 요란할 것 없는 자기증여와, 어린 앙뚜가 린포체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명의 태도에서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 구도의 길이 산과 눈보라에 막혀 있어 막막할수록 두 사람 사이 오가는 그 무엇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 무엇'이다. 이것은 사랑, 헌신, 신뢰, 가르침과 배움, 정(情)......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따스함이다.  




스승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때는 제 때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내 인생,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 존경하고 신뢰하며 스승으로 여겼던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여 방황하던 날도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스승은 참 많았다. 스승은 만날 수 있지만 제자는 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금방이라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스승님이 많다. 물론 그분들 중에는 내가 당신의 제자인 줄 모르는 분이 허다하지만.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여겨지는 분이 많다. 여기저기 영성심리 배우기 위해 들쑤시고 다닌 곳에서 만난 선생님들 그렇고,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들으러 오셔서 자기를 나눠주며 오히려 가르침을 주고 간 분들이 그러하다. 책으로 만난 스승님이야말로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실은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스승은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아무튼 오늘의 내 강의과 글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나를 스쳐간 내가 통과해왔던 스승님들의 덕이다.


앙뚜와 우르갼은 묘한 사제지간이다. 앙뚜는 전생의 높은 스승이 환생하여 태어난 린포체라 하니 늙은 우르갼에게 지극히 높은 스승이다. 어린 앙뚜는 우르갼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없다면 아홉 살 무력한 아이일 뿐이니 진정 우르갼의 제자이다. 둘 사이 스승이며 제자이고 제자이며 스승인 묘한 관계이지만 피차에 스승연(然)하는 자의식은 없다. 라면을 끓여주고, 청소를 하고, 불경을 공부하고, 삐딱하게 굴고, 막막하게 먼산을 바라보는 스승과 스승, 스승과 제자의 일상이 숭고하게 다가오는 이유같다. 그저 보이는 것만 보면 늙은 의사와 어린 아이인데 서로에게서 스승을 본다. 서로가 가진 가장 높은 것을 본다. 이것은 '당신 안의 신을 경배한다'는 라마스떼, 지극한 존엄의 태도 아닌가.




항상 스승을 찾아 헤매는 나는 이번 학기에 강의 하나를 신청했었다. 두 번 가고는 다시 발길이 움직이질 않아서 못 가고 있다. 강의 신청을 해서 실패하는 적이 거의 없다. 강의로 벌어서 강의 듣는데 쓴다해도 본전 생각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강사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흘러나온다. 그런 의미에서는 얻을 게 많다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했다. 참고하는 모든 책의 저자의 주장을 끌어와 자기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듯한 태도에 나는 나의 무엇을 투사하는지, 들어주기가 불편했다. 지난 학기까지 4학기 철학상담을 들으며 정말 어려웠다. 못 알아듣는 말이 반이었다. 강의가 어려운 이유는 교수님이 단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는 식이었으니까. 철학은 그럴 수 밖에 없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는 학문이 있기는 하지만.


가르치려는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다. 일반화 할 수는 없겠다. 적어도 나는 자기확신에 차서 가르치려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않는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스승이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에 내게 가르친 것을 모를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스승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존재를 걸고 싶은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우르갼에게 앙뚜처럼 말이다. 또 스승은 무력한 자에게 유일하게 기댈 언덕일지 모른다. 앙뚜에게 있어서 우르갼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만남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스승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저 두 사람처럼. 춥고 가난한 삶과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길을 헤치고 가는 여행이라 해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라고 그런 스승을 못 가질리 없다. 



 


삶이 엉망진창인 목사님이 설교’는’ 잘합니다. 그 목사님을 이렇게 대한다면 어떨까요? “목사님의 삶은 보지 말고 설교만 들어. 그렇게 알아서 은혜 받으면 되는 거야" 가능할까요? 신앙이 삶과 상관 없는 관념이거나 실체 없는 허상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어떤 선생님, 목사님, 지도자들을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마음의 투사(projection)입니다. 기술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야 그의 사생활이 어떠하든 상관 없습니다. 운전기술, 커피 내리는 기술만 배우면 되니까요. (엄밀하게 따지면 '기술'을 배우다 무의식적으로 배우는 '태도'가 있으니, 결국 '기술'조차도 누구에게 배우느냐는 중요합니다.) 신앙을 안내하는 종교지도자의 삶과 설교를 분리해서 배울 수 있다는 말에는 신앙에 대한 정의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지는 결국 내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가진 하나님 상(image)는 어떻겠습니까. <침묵>의 저자 엔도 슈사쿠의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에 나오는 짧은 글입니다.

‘예수님은 각자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내게는 나의 예수님 상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들 나름의 예수님 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혁명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그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 유다교 해방자인 동시에 사회 혁명을 시도한 사람의 이미지가 박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은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면서 사랑의 작용을 하는 이미지입니다. 사람들 각자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 예수님의 이미지가 탄생합니다. 나는 이런 이미지의 총체가 진정한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묘사한 것처럼 예수님은 확실히 상냥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그것만은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성전 경내에서 양과 비둘기를 팔고 있던 상인이나 환전상들을 새끼줄로 만든 채찍으로 쫓아낸다든지 그들의 돈을 흩뿌리거나 판매대를 둘러엎는다든지 하지 않는가, 그런 과격하거나 강한 면도 있지 않은가 하는 비판도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역시 상냥한 예수님이 가장 매력적입니다. 나는 그런 예수님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줄곧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게는 성전에서 분노하는 예수님은 그다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의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각기 다른 예수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고, 그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이 진정한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어떤 하나님 이미지를 붙들고 있을까요?
예, 기승전'영성과정 초대'입니다.
40, 50년 공들여 만든 하나님 이미지를 단번에 찾을 수는 없겠으나
자유와 투명한 기도를 위한 여정의 시작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 1단계 이상 수강하신 분들을 영성과정에 초대합니다.

[일시] 2017년 12월 20일(수)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5층
[참가비] 12만 원
[문의] 010-4235-8020 (수진 쌤)
[신청] http://bit.ly/2vJI8Su






결혼 전부터 귀에 꽂히는 경구가 하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결혼을 앞둔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언니들의 조언이다. 경험을 우려낸 진국,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가 듬뿍 담긴 가르침이다. "시부모에게 처음부터 잘하지 마라. 잘하는 며느리에게는 계속 더 기대한다. 아예 처음부터 잘할 생각을 하지 마라"


영양가 높은 말인 건 알겠으나 동의가 되지 않았다. 결혼한 언니들 백이면 백 '시'자 들어가는 건 시금치고 시켸(식혜 켸켸)고 일단 뱉어내는 걸 보니 장난이 아니다 싶었지만서도. 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도 있고, 남들 하는대로 하는 건 무조건 안 하고픈 반골 기질도 있는지라. 무엇보다 관계 시작하기도 선부터 그어 놓는 것이 불편했다.


잘하고 말고 생각하지 않고 시부모님과 관계를 맺었다. 미리 규정하지 않으려 했고, 할 수 있다면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려 하다보니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못하)는 관계가 되었다. 착한 며느리 소리 듣고, '너는 며느리가 아니라 나의 상담자이며 치유자다'라는 극찬도 들었지만 어느 시점 정신을 차렸다. 아, 잘하는 며느리를 향한 기대는 끝이 없구나! 언니들 말이 맞았네!


나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자만심의 결과였다. (불평등한 결혼 구조 안에서 며느리로 사는 문제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시점 뒤늦게 경계를 설정하고 그럭저럭 편안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처음부터 잘하면 안 된다!


'처음부터 잘하는 게 아니었어, 대충 말 안 듣고 살살해야 했어' 시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께 이런 마음이 들면 복잡해진다.  내가 고분고분하니까 나를 너무 막 다루시는 거 아닌가 싶은 것이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 하시네. 이만큼 했으면 저만큼은 해주셔야지 갈수록 더 팍팍하게 구시나.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인 줄, 보자보자 하니 보자기인 줄 아시나 본데. 확 절교를 할 수도 없고!


때때로 살아야 할 이유가 흐릿해질 때가 있다. 일상의 부조리를 담기에 내 마음이 작거나, 마음의 그릇 크기에 비해 부조리의 크기가 크거나. 오늘의 부조리를 견딜 힘은 '의미'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흐릿해진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때때로 무의미의 숲에서 길을 잃어 헤매는데, 그때 내가 화살을 돌릴 유일하고 만만한 분이 하늘 아버지. '착한 사람들 뒤를 더 잘 봐주셔야지 갈수록 험지로 내모십니꽈? 이래도 되는 겁니꽈?; 삿대질 하고 원망해본다. 강상중이라는 뜬금없는 귀인을 만났다. <마음> <고민하는 힘> <어머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차례로 읽으면서 마음이 마음이 조금 풀렸다. "살아야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충만하지"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Yes라고 말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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