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 기사까지. 모두 쓴 사람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동어 반복이다. 자기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글마다 다르지만,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헝거> 같은 형식의 이야기이다. '자서自敍'는 '자서전自敍傳'과 다르다.

성별과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성과 무관하게 '자서'는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슈들은 '드러내기 어렵다'기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 태도인데 그 덫에 걸리기 쉽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글을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록산 게이의 『헝거 : 몸과 허기에 대한 고백』 추천사 중 일부. 정희진의 글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정말 잘 쓴다. 정희진!'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던 사실을 일깨우는 글보다는 나도 생각했던 바로 그걸 글로 잘 풀어냈을 때 나는 감동이 되더라. 그럴 때 '앗따, 글 참 잘 쓴다.' 감탄하게 된다. 정말 내가 요즘 쓰는, 써야만 하는 고통에 뒹굴며 하는 생각들이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정희진 참 정말 잘 쓴다고, 라 생각하며 읽어 나가는데 추천사의 다음 부분은 이렇다.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나는 열패감과 좌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감히'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는 '해냈다'. 그것도 아주 잘 해냈다. 나도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 '페미니스트', 나이 들어가는 여성, 건강 약자로서 그리고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실은, 많이 썼다. 매일 쓴다. 돌이키기도 묘사하기도 힘든 기억을 쓴다. 하지만 쓸수록 자존감은 자학의 동의어가 된다. '감성팔이' '사연팔이'... 그토록 질색했던 글들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헉, 정희진도 이렇다고?! 그런데 내가 정희진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감성팔이' '사연팔이'가 없어서인데. 온통 감성팔이, 사연팔이 투성이인 내 글과 너무도 비교되어 부러워하곤 했는데?! 아무튼 페이지 넘겨 본론으로 들어가 록산 게이를 읽으며 글을 잘 쓴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생각을 했다. 이렇듯 가르치지도, 주장하지도,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으며 페미니즘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니. 자기 상처를 쓴다는 것은 상처 입힌 그 사람을 가해자라는 이름으로 규정해야 하고, 그런 후에는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뒤따르는 것이 수순일 터인데. 어릴 적 성폭력으로 망가진 몸과 마음을 고백하며 이다지도 밋밋하고 덤덤하여 사실적일 수 있다니. 감동 그 이상이다. 그냥 숙연해졌다.


나도 내 상처를 쓴다. 그야말로 프로 사연팔이er. 사연팔이의 기본은 자기 경험을 과하게, 늘 조금씩 넘치게 드러내는 것이다. 경험, 너무나도 쓰고 싶은 경험, 글로 써버리고 싶은 상처를 쓰다보니 일인칭 '나'의 대척점엔 늘 상처 준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나쁜 나라 만들기가 일쑤이다. 그렇게 쓰고나면 한편 후련하고, 한편 민망하여 견딜 수 없다. 정희진의 말대로 록산 게이는 상처를 해석하고 글로 써내는 것을 해냈고, 아주 잘 해냈다. 록산 게이의 글을 읽으면서 '글을 잘 써서' 부럽다는 생각이 1도 들지 않았다. 그저 매료되었다. 자기 상처를 바라보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객관적 태도가 놀라웠다. 초고도 비만인의 몸에 관한 고백이지만 삶에 대한 태도는 적당히 결핍도 넘침도 없다. 이렇듯 허위의식 느껴지지 않는 글이라니! (페미니스트적, 작가적, 심지어 피해자적 허위의식까지도)


또 하나의 글을 써서 떠나 보냈다. 어렵게 쓰는 동안 곁에서 록산 게이가 함께 해주었다. 많은 힘이 되었다. 한때 정희진 글을 배우고 싶어 필사를 하기도 했는데.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선망이었다. 어쩐지 그 선망이 조금 시들해진 것은 그의 글에 '감성팔이'가 없어서였나, 싶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감성팔이, 사연팔이 전공. 그리하여 부전공은 이불킥. 또 감성을 끼워 사연을 팔아 글을 또 하나 써냈는데. 어쩐지 마음이 자꾸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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