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산다. 부모가 준 이름 뒤에 데레사, 마리아, 티모테오... 세례명이 따라붙는다. 가톨릭 신자들과 친분을 맺고, 신부님 수녀님께 배우면서 농담처럼 "저도 세례명 하나 지어야 할까 봐요"  했었다. 김영미 데레사입니다, 박선영 카타리나입니다, 문재인 티모테오입니다.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내 순서만 오면 라임이 딱 끊어져 단절되는 것이다. "정신실입니다. 저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세례명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유익이 있는 것도 같다.  평생 자기 이름을 따라다니며 하나님을 매개하는 신앙의 선조 한 분을 갖는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도 아녜스, 세레나, 안젤라 형님, 베로니카 형님... 하면서 바로 어떤 유대감으로 연결되는 것도 좋아 보인다. 세례명으로 부르는 관계 안에서 '라임 단절자'로 앉아 있던 시간이 길다. 좋은 분들을 꽤 많이 만났는데, 어쩐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세례명으로 부르고 불리는 사이에서 세례명 없는 존재였다는 것은 아닐까,  이번 순례 여정에서 어떤 세례명이 친구의 이름처럼 느껴지는, 그런 경험을 했다. 
 
춥고 비오는 뮌헨 공항에서 독일 일정이 시작되었다. '춥고 비 오는' 정도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루 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덥고 목마르다 투덜거리지 않았던가. 비행기로 겨울 나라로의 이동이 된 것만 같다. 추운 날씨가 더 춥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내 캐리어에는 추위를 방어할 옷이 없다. 독일의 기온이 계속 이렇다면, 망했다! 추위에 취약한 나는 순례고 뭐고 잔뜩 움츠린 어깨와 쪼그라든 마음으로 남편을 원망하며 남은 일정을 지내게 될 것이다. 짐을 싸며 패딩을 챙기고 있는데 "여름 날씨야. 그거 필요 없어" 지나가는 말로 남편이 한 마디 했다. 여행지 날씨는 늘 예상 밖에 있는데... 싶으면서도 그 말에 의지해 가벼운 짐을 싸기로 했다. 에라, 잘 걸렸다. 남 탓, 남편 탓을 하자. 원망의 불길로 이 추위를 이기자! "당신 때문이잖아! 뭐가 여름 날씨야?!" 온기라고는 없는 이 차가운 불길, 분열과 미움을 유발하는 원망의 불길을 잠재운 것은 세례명 안나, 세례명 오틸리아 두 사람이었다. 덜덜 떠는 내게 입고 있던 패딩조끼를, 바람막이를 벗어주더니 내복까지 내어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만 추운 게 아닐 텐데, 그들도 따뜻한 옷이 필요한 날씨인데 말이다. 따뜻한 옷을 많이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틸리아의 캐리어는 내 것과 반대였다. 아, 여름 날씨 로마에서 시원한 옷이 없어서 반팔을 사야 했었지!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는 마음, 아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사람에게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내어주는 마음이었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내어준 옷을 입고 몸과 함께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남의 옷이니 내 옷이니 따질 겨를도 없고,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옷에 꽤나 연연하는 사람이다. 예쁜 옷 보면 못 참고, 시의 적절하게 옷 입는 것에 집착까지는 아니어도 매어 있는 사람이다. 가톨릭 학교에서 신이 나서 공부하는 내게 아이들이 "엄마 수녀님 되고 싶어?" 하고 물어보는데, 수도자로 살고픈 마음은 늘 있지만 극복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옷이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엄마는 옷 갈아입는 맛에 살기 때문에 옷 한 벌로 사는 수녀님 생활은 어려워.  내게 옷은 시의 적절하게 나를 드러내고, 나를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건네준 옷은 "보이기 위한 옷"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옷"이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연연하는 내게는 드문 경험이다. 보이는 것보다 속은 훨씬 더 까칠하고 예민한 내가 남의 옷을 덥석 받아 입는 것 역시 흔한 일이 아니다. 기꺼이, 덥석,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입었다. 집을 떠난 순례지였고, 내 캐리어에는 추위에 맞설 옷이 없었고, 무엇보다 기꺼이 자기 옷을 내어주는 동료 순례자의 마음이 거침없었기 때문이다. 내 평생 옷을 나눠 입은 친구로 오래 기억될 이름 안나와 오틸리아이다.


비바람 속 찬 공기를 뚫고 도착한 독일의 첫 수도원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다. 이곳에 성녀 '오틸리아'에게 봉헌된 작은 경당이 있었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렇다, 내게 옷을 내어준 '세례명 오틸리아'의 바로 그 오틸리아이다. 7세기 경의 성녀 오틸리아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다. 후작이었던 아버지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머지 이 딸을 죽이려했고, 어머니가 몰래 수녀원에 맡겼다. 수녀원에서 자라던 오틸리아가 12세 되었을 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중 성유聖油를 눈에 바르자 눈이 뜨였다고 한다. 이제 더는 '장애인'이 아닌 딸을 곡절 끝에 받아들인 아버지는 귀족과 결혼시키려 한다. 눈을 뜸과 동시에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겠다 결심한 오틸리아가 받아들 일 없었고, 강제할 수 없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큰 성을 딸에게 양도하고 수녀원을 지어주었다. 오틸리아는 거기서 남은 생애 40여 년을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산다. 이런 이야기에 나는 늘 마음이 끌린다. 특히 "평생, 그 후로 남은 여생... 기도하며 은수생활을 했다..." 같은 지점에 그렇다. "눈이 멀다, 눈을 뜬다" 말은 영성생활에 관해 얼마나 많은 상징을 담는가. 앞을 보지 못했던 오틸리아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였다. 돌봐야 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가 세례를 받으며 눈을 뜬 열두 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영적인 눈을 뜬 성녀는 남은 평생 기도로 살고자 한다. 장애를 가진 딸을 매질하고 버리고 학대했던 아버지도 함께 눈을 뜨게 된 것인가? 재산을 양도하며 수녀원을 지어준다.
 
"눈 먼 이에게 빛을" 
 
오틸리엔 수도회는 오틸리아 연합회(Ottilianer Kongregation) 또는 선교 베네딕도회라고도 불린다. "눈먼 이에게 빛을"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선교를 위해 설립된 수도회이다. 한국에 베네딕도 수도원이 시작된 것도 이 수도회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내가 여기 낯선 땅 독일의 수도원 뜰에 서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논문 지도교수님이신 신부님 덕에 '요셉 수도원'에서 처음 수도원 피정을 경험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을 그대로 사는 분들을 보았다. 불과 30분 전, 여느 농부처럼 밭에서 일하시던 분이 기도 시간에 들어가면 어느새 수도복을 입고 앉아 계신다. 요란할 것도, 성스러울 것도 없는 기도하고 일하는 일상을 보았다. 하루 일곱 번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수도원의 기도 리듬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고, 심지어 언젠가부터 그리워하던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게 수도원 영성을 접하고 한 발 한 발 깊이 들어가다 오늘 여기 수도원 순례 여정에 닿은 것이다. 요셉 수도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닿는다.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분리되어 나온 요셉 수도원 역시 베네딕도 수도원이다. 우리나라에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이 시작된 것은 1907년인데 바로 이 상트 오틸리엔의 선교 덕분인 것이다.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원인 백동 수도원(지금의 혜화동)이 북한의 덕원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폐쇄되었다. 전쟁 후 1952년에 왜관에서 다시 수도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역사의 흔적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마주했다. 독일 수도원에서 우리나라 전통 가옥을 보게 되다니! 성당 옆에 박물관이 한국으로 아프리카로 나간 수도자들이 현지에서 수집해온 것으로 채워져 있다. 크지 않은 박물관의 한국관이 어찌나 알토란 같이 꾸며져 있던지. 베네딕도 수도생활에 선교의 소명을 더하여 생긴 이 수도원에서 현지 유물을 수집한 목적은 다름 아니다. 멀리 있어 그려지지도 않는 선교지를 이해하고자 함이고, 이해할 뿐 아니라 이해시키고 더 잘 알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스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는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문화인류학과 문학에 밝았던 그는 일제 강점기를 겪는 조선이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잃어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사진과 영상을 찍어서 남겼다고 한다. 그 자료를 가지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과 영상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 당시 '겸재 정선 화첩'을 구입하여 독일로 가져갔는데, 나중에 이 작품이 고미술 전문가들에게 알려졌고 시가 50억을 호가했단다. 그런데 2005년 이 수도원에서 무상으로 한국에 반환한 것이다. 돈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이 정도 가격의 유물이라면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문화유산이 아니겠는가'하는 판단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성베네딕도 수도원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청빈을 서원한 수도원의 일일지라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교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다. '선교'보다는 '전도'라는 말에 더 그렇다. 주일학교 시절에 '포도알 붙이기' 시상에서 전도상이 가장 컸었다. 전도하면 한 명으로 포도송이 반을 채울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어쩐지 전도에는 젬병이었다. 요절을 외우고, 예배 시간에 바르게 앉아 있는 것은 할 만한 일이었는데 전도의 열매는 맺을 수가 없었다. 자라면서 보니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라, 교회 가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것에는 내 기질에 더하여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들러붙어 있었던 것 같다. "눈먼 이에게 빛을"이라는 깃발을 들고 선교지나 선교대상에게 공격적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어릴 적에 부르면서 뭔가 두렵고도 불편하지만 대충 "택함 받은 은혜"로 포장하여 종교적 열정에의 연료로 삼았던 찬송도 생각나고.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 물속에 빠져간다 /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 지금 곧 건지어라) 눈 뜬 자의 자의식이 선민의식이나 영적 우월감에 닿는다면  말이다. 전도에의 열정이 지나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전도 대상자로, 그야말로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있다. 사랑이 먼저이고, 사람이 먼저이지 전도가 먼저인가. 

 
'선교 베네딕도회'라니 두 단어가 조화롭게 들리지 않았다. '수도원'과 '선교'를 나란히 이어붙이면 더욱 그렇다. 수도원은 물러남으로 다다르는 곳이고, 선교는 '나아가는 것' 아닌가.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수동성과 능동성, 침묵과 말의 차이로도 느껴진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어쩐지 이름만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인 것 같다. 수도원을 소개하는 모든 글에 '선교'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흐릿한 선입견은 수도원 안에 들어서자마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입구에 있는 수도원 서점에 짐을 두고 발걸음을 떼어 처음 마주한 것은  Erika Grube라는 치료사의 기념비였다. 이 수도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 생존자들을 위한 병원과 재활 센터로 사용되었단다. 해방을 맞아 수용소에서 나온 유대인들, 거의 모두가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어가는 몸이었을 것이다. 전적인 돌봄이 필요했을 텐데 즉각적으로 그 일을 한 곳이 여기 상트 오틸리엔이었다니. 무엇보다 여기에는 유대인 임산부들을 위한 출산 센터가 마련되어 수도원 경내에서 유대인 아기가 태어났다고 한다. 수도원 게스트룸이며 당시 병원으로 쓰였던 건물 앞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6년 6월부터 1947년 5월까지만 350명의 아이가 상트 오틸리엔에서 태어났다. 생존자들에게 '베이비 붐'은 삶에 대한 희망의 신호였다. 국가 사회주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이 승리하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아이들이 미래를 보장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독일 수도원이 유대인 생존자를 위한 병원이 되고, 유대인 아기들이 태어나 보호받는 생명의 요람이 되었다. 수도원이 병원이 되고, 수도원 독방이 분만실이 되는 것이 선교구나!  다시 이곳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올 수 있다면 수도원 손님의 방에서 며칠 머물러 보리라. 

 

숙연해진 마음 때문인지 걸음걸이가 느려진 것 같다. 자꾸 무리에서 뒤쳐지게 된다. 어느새 보면 사람들이 간데없고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 일어나니 아무도 없다. 뒤늦게 박물관으로 들어가 감동을 나누며 관람했는데, 다 돌고 나니 남편을 비롯한 순례객 모두 온데간데없다. 현실감각이 사라진 탓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상황이 무섭게 느껴졌다. 쫓기듯 서둘러 전시관을 나오는데 안내실에 수사님 한 분이 빙그레 웃고 계신다. 무슨 말인가 건네시는데, 잘 봤냐? 같은 인사겠지 싶어 웃으면서 끄덕끄덕 했다. 그리고는 바로 알아들었다. 통역기 반납하라는 말씀이었다. 민망해서 자꾸 웃으며 돌려드리니 따라서 계속 웃으신다. 용기가 불끈 나서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청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선교 박물관에서 나와 부슬부슬 오는 빗속에서 수도원 여기저기를 걸었다. 문지기 수사님과의 짧은 만남의 여운으로 마음이 왈랑왈랑 가볍고 기분이 좋다. 다들 어디로 가고 이 넓은 수도원을 전세 내고 독차지 한 느낌도 좋다. 조금 걸어 나가니 초록의 밀밭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농사짓는 수사님들의 일터일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하고, 이대로 멈췄으면 싶기도 하다. 

 
<수도 규칙서>에는 문지기 수사에 대한 규칙도 있다. 문지기, 문을 지키는 사람. 베네딕도 성인이 말하는 문지기는 문을 지켜 누구를 들여보내고, 막고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말을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 환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순하고 착한 마음으로 찾는 이에게 응대하는 사람이란다. 생각해보니 수도원에는 담장이 없다.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빼앗길까 두려울 때 사람들은 담을 쌓는다. 마음에도 담이 있다. 높고 낮은 담이 있어서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선교란 어쩌면 담을 넘어가는 행동이다. 독일 수도원에서 유대인 생존자를 돌보는 일, 동방의 먼 나라에 수도원 개척을 위해 수사를 파견하는 일은 담을 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도 담을 허는 일이었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내어준 호의는 낯선 개신교인을 친구로 받아주는 담을 넘는 일이었다. 아니, 애초 담을 쌓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순례기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내 마음에 세워진 높은 담을 본다. "개신교 목사 부부가 순례단에 참여하여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는 그럴듯한 말 뒤에는 담이 있다. 담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제도로, 교리로 세워진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담 자체는 말이다. 문이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기꺼이 환대할 마음으로 양순한 얼굴로 앉아 있다면. 낯선 이가 문을 두두릴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분에게 강복하소서!" 하고 맞이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내게 옷을 빌려준 오틸리아는 어릴 적 개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성인이 되어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았다. 신심이 남다른 것은, 버스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이끄는 목소리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세례명을 정할 때는 성녀 오틸리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그저 "주님, 제가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하니 이 역시 신비로운 일이 아니겠나 싶다. 신앙의 눈을 뜨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눈을 뜨는 것이다. 나도 기도한다. 주님, 저도 눈을 뜨게 해주세요. 매일 사랑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수도원의 정문에는 말을 주고받을 줄 알고 또 (인격이) 성숙하여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일이 없는 현명하고 연로한 사람을 둘 것이다. 문지기는 정문 옆에 방을 가져, 방문자들이 언제나 응대할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 문을 두드리거나 가난한 사람이 외치거든 즉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거나 또는 "강복하소서" 하고 대답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온갖 양순함과 사랑의 열정으로 재빠르게 응대할 것이다."
<수도규칙> 245

 

 

 

 

로마를,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이다. 호텔 창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별다르지 않은, 아무럴 것 없는 풍경이었는데 뭐가 아쉽지? 로마 이틀은 마음의 순례로 치면 일주일이나 보름은 되는 시간이었다. 몬테카시노와 수비아꼬의 설레는 첫 만남 후 찾아온 혼란의 시간이었다. 나는 왜 어쩌다, 왜 이 수도원 순례단원이 되었을까 물어야 했다. 왜 굳이 남편과 함께 왔어야 했나 묻고, 무엇을 기대하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점검해야 했다. 포장지 없는 말이 필요했던 것 같다. 배려하느라 눌러두었던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미안함, 두려움 같은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려놓은 수도원 순례의 그림이 있었고, 늘 그렇듯 미리 그린 그림대로 되는 여행은 없으니까. 순례를 기다리던 몇 개월 동안 한껏 부풀려 놓았던 '꿈'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의 여백은 단지 아쉬움만은 아니다. 텅 빈 충만함이라고 할까? 충만까지는 아니어도 텅 빈 그 상태로도 괜찮은, 잠잠해진 마음이다. Pax, 평화라고 해도 좋겠다. 로마를 떠나며 평화가 왔는데, 이 평화는 깃발을 휘날리며 로마군대가 진군하듯 밀려오지 않았다. 축쳐진 어깨로 터덜터덜 걷는 이에게  다가와 "무슨 일 있어요?" 말 걸어오며 가만히 걸어주는 방식으로 왔다. 엠마오 길을 소망 없이 걷는 사람들 곁에 슬며시 다가가 걷는 갈릴리 사람의 발걸음처럼.
 
독일 순례는 인솔자 없는 여정으로 확정이다.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인솔 신부님은 로마 병원에 남아야 한다. 이에 독일에서 통역 정도로 참여 하려던 가이드가 못 하겠다고 나가 떨어졌단다. 가이드가 급조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괜찮다.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기대와 꿈을 걷어내고 지난 이탈리아 일정을 돌아보니 신부님이나 가이드가 들려준 정보는 다 내 안에 있었다. 노트북에는 대학원 수업 내내 꼼꼼하게 정리한 노트 필기가 있고, 기도와 수도원에 관한 독서 기록이 있다. 검색과 번역기능도 있지 않은가. 같은 내용이라도 평생 수도원 안에서 일하고 기도하며 살았던 신부님의 육성으로 듣는다면 더 좋겠지만, 카사마리와 몬테카시노, 수비아꼬 수도원에서 체험했다. 공간에 담겨 있는 것으로 충분한 기도가 된다는 것을. 많은 설명의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실은 그러려고 비용을 들여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 아닌가. 말 대신 침묵이다. 수도원은 침묵의 공간이다. 앞으로 가는 곳마다 회랑을 걷고, 성당 한 구석에 앉아 성무일도에 참여하면 된다. 기도를 배우러 왔으니 기도하면 된다. Pax가 임한다.
 
안팎의 평화가 연결되어 있고 동전의 양면이긴 하지만, 시간 차가 있다. 마음에 임한 평화가 밖으로 흘러가 화해가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간밤의 충돌로 인해 남편을 대하는 마음이 벌쭘하고 민망하다. 그래서 피차에 서먹하다. 마음으로는 충분히 화해했지만 거리를 두게 된다. 거리 두고 말을 멈추고 있는 시간이 주는 유익이 있다. 한 발 물러서서 낯설게 바라보면 그의 존재가 새로워진다. 사람의 관계도 이렇듯 서로에게서 한 발씩 물러나고, 언어 없이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 아빠스의 권고처럼 '나쁜 말은 물론 좋은 담화도 멈추는 것'이 침묵의 덕을 닦는데 도움이 된다. 독일로 가기 위해 다시 로마 공항으로 가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는 시간, 말 없이 적당히 예의를 갖추며 각자 할 일을 했다. 아니, 내가 일하는 동안 남편은 가만히 곁을 지켜주었다. 글을 하나 써서 보내야 했는데, 이 와중에 글이 써질까 싶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일사천리로 글을 썼다. 이 무슨 쾌거인가!
 

침묵의 덕을 (닦기) 위해 때로는 좋은 담화도 하지 말아야 했다면 하물며 죄의 벌을 (피하기) 위해서 나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좋고, 거룩하고, 건설적인 담화일지라도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완전한 제자들에게 말할 허락을 드물게 줄 것이다. 수도규칙 6장

 
순례단 분위기는 조금 더 무거워진 것 같다. 불안감도 느껴진다. 인솔 신부님, 영적 안내자가 사라진 빈 자리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 "목사님, 목사님" 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출국 수속 마치고 자유시간을 위해 흩어지고자 한다. "목사님, 몇 번 게이트라고요? 아직 안 떴다고요? 어디를 보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 비행기가 무슨 색깔이라고요? 목사님은 왜 팀 스카프를 안 맸어요? 스카프 매세요. 키가 크니 목사님이 매야 잘 보이죠." 젊고 빠릿빠릿한 데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순례단원들에게 주는 위안이 있는 것 같다. 개신교 목사 부부가 왜 수도원 순례단에 오지? (심지어) 신천지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는 분들이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어준 것은 벌써부터이다. "목사님 부부가 계셔서 다행입니다. 다 뜻이 있어서 함께 하셨나 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 로마 공항의 텅 빈 시간 동안 순례단원 사이 마음의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목자를 잃은 양의 마음,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원팀의 소속감이 생겼다.


순례 이틀 째 남편의 생일이었다. 유럽 순례지에서 맞는 생일이니 특별한 축하하고 싶었지만 산 위의 수도원에서 케이크 하나 구하기가 어려웠다. 순례 초반이라 아직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그래도 슬쩍 인솔 신부님에게 정보를 흘렸는데, 저녁 식사 시간 기도 끝에 "오늘이 목사님 귀 빠진 날이랍니다" 라고 하셨다. 그 말에 바로 생일축하 노래 떼창이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목사님, 생일 축하합니다." 감동이었다. 사랑하는 신부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목사님이라니! 남편이 일어나 멋지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여기 와서 여러분들과 얘기 나누다보니 개신교인들에게 상처받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대표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희 교회에 가서 제대로 가르치고 더 잘하겠습니다." 내가 다 고마웠다. 가톨릭 교회를 향해,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함부로 하는 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말을 듣는 분들의 입장에 서보지는 못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지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말들이었다. 개신교인 가족에게 받은 깊은 상처로 말씀을 나누는 중 연실 눈물을 흘리는 자매님이 계셨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럴 때는 '목사'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가 더욱 쓸모가 있다.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사과 같이 느껴졌다. 순례 여정 중 남편의 어떤 성품이 조용히 빛을 발하는 순간을 보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하기를 참 잘한다. 질문에 그치지 않고 가만히 듣는 것도 잘 하고. 좋은 풍경을 두고 사진 찍어주는 것도 좋아하고. 오히려 나보다 더 편하게 순례단에 녹아드는 것 같다. 


내가 주도한 순례이기 때문에 부담을 지고 있었다. 순례단 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 남편이 꼭 보고 싶었던 사도바울 참수터 등에 가지 못한 것이 내 잘못이 아니건만 괜히 미안해져 눈치를 보게 되었었다. 그런 일로 남탓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다. 뭔가 꼭 얻어야지, 배워야지, 기도체험을 해야지, 남편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어야 할 텐데... 잔뜩 힘을 준 채로 혼자 마음으로 북치고 장구 치고 했다. 가만 보니 남편은 갈수록 더 밝아지고 가벼워지고 이 순례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남편에게 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뮌헨 공항에 내렸다. 뮌헨(bei den Mönchen)은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에 의해 건립된 도시이다. 비가 내린다. 기온은 뚝 떨어졌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공항으로 오다 사고가 났단다. 시작부터 뭔가 난항이지만, 수도원의 도시에 와 있는데 뭔들 순례 일정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훨씬 허허로워졌다. 아니, 이제 기대 따위가 없어졌다. 빗속에 성 오틸리엔 수도원(ST. Ottilien)을 방문하고 에탈수도원호텔(Klosterhotel Ettal Ludwig der Bayer)로 가는 길이었다. 독일에서 만난 가이드가 깜짝 선물처럼 이끌어 간 곳은  '오버아머가우(Oberammergau)' 마을이었다.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고간 페스트가 창궐하던 1633년. 이곳 주민들은 전염병으로부터 구해주시길 구하며 수난극 공연을 서약했단다. 그 이듬해 첫 공연이 열렸고,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수난극은 이후로 10년에 한 번씩 열린다. 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지난 2020년 코로나 기간에 열리지 못했다. 두 해를 미뤘지만, 2022년에 마흔두 번째 수난극이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팬데믹 초기, 사상초유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려야 했던 시기에 교인들 사이 혼란이 있었다.  그 즈음 남편이 설교 중에 이 마을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예배를 위해 모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진정한 예배이며 '이웃 사랑'이 되는지 말했던 것 같다. 바로 그 마을에 서자 남편이 기뻐 흥분하였다. 꼭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의 얼굴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탈 수도원(Ettal Abbey)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 - 1945)를 만난 것이다. 젊은 날부터 사랑하던 신학자 본회퍼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치의 폭정에 반대하는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설립과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신학자이자 루터교회 목사이다. 무엇보다 남편과 나를 이어준 분이기도 하다. 청년 시절, 성경공부 그룹의 리더이던 내가 새로운 교재를 설명하면서 "본회퍼가 말하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에 남편 귀가 번쩍 뜨였다고 했다. "아니, 저 누님은 누구시길래?..." (그렇게 종필은 신실에게 빠져들게 되었...) 그런 본회퍼 목사님이다. 수도원 벽에 개신교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니! 가톨릭 수도원 벽에 한국 분당 한 귀퉁이에 사는 순례자 목사가 가장 사랑하는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니! 1940년 즈음 본회퍼가 이곳에 4개월 여 머물렀다고 한다.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를 읽은 수도사들이 배움을 위해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수도원 전통의 영성을 개신교회 안에 살려내고자 새로운 수도회주의의 이상을 꿈을 꾸기도 했었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은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편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목사가 되어 한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는 지금, 특히 지난 7년 동안 남편은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는 말을 새기고 또 새기며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다. 《신도의 공동생활》에 나오는 말이다. 남편은 특수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민주적 교회 운영을 위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 '맡은 일' 이외의 차이가 없는 교회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오며 개신교회가 표방했던 그야말로 '만인제사장주의'의 극한을 실천하는 교회이다. 목회자들의 전횡에 깊이 상처입은 교인들의 주도적인 선택이었다. 남편도 나도 이 모든 이상에 동의하지만, 목사인 남편에게 쉬운 자리는 아니다. 잠재적 독재자, 잠재적 범죄자로서의 목사를 전제로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설교하는 일이란, 목양하는 일이란...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을 때는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꿈꾸는 교회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그 꿈은 대형교회 같은 야망도 아니다. 그의 교회를 향한 꿈이 아름답다 여겨 뒤늦은 신학교 행에 찬성하지 않았던가. 목사에게 상처 입은 이들에게는 목사 개인의 꿈 자체가 위협일 수 있음을 아프게 경험했다. 이제 그의 목회 이상은 '꿈을 내려놓는' 것이 되었다. 힘들 때마다 남편은 젊은 날부터 마음에 새긴 본회퍼의 말을 꺼내 들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의 꿈이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
 
본회퍼가 앉아 기도했을 성당, 걸으며 기도했을 회랑이 있는 이 에탈수도원은 아무래도 김종필 목사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생일선물이다. 꿈을 내려놓기 위해 자기 꿈을 미워해야 했고, 자기 꿈을 미워하기 위해 자기를 혐오하는 어두운 날을 보내야 했던 그를 위해 "여기까지 잘 왔다"라고 등을 토닥여주시는 그분의 손길이다.  "여기서 본회퍼를 만나다니!" 라는 탄성 같은 한 마디에서 남편의 영혼이 살아 춤추는 것이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신부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순례단원들이 자연스럽게 "목사님이 기도해 주세요"라는 요청을 했다. 남편은 여러 번 사양했다. 앞에 나서는 사람도 아닌데다 목사의 이름으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게다가 기도 문화도 다른 가톨릭 신자들 앞에서 기도라니. 나설 위인이 아니다. 남편이 쓴 순례기 일부를 옮겨와 본다.
 

아침 버스에 오르자, 단장님이 억지로 나를 가이드 옆자리, 인솔자 선탑자 자리에 앉혔다. 신부님이 부재하여 단장님이 대신 앉아 있던 자리였는데, 목사인 나라도 거기에 앉으라는 것이다. 그저 한 명의 순례단원이고 싶었는데, 억지로 십자가가 또 지어졌다. 가톨릭 순례단원들은 목자를 잃었다. 나와 내 아내는 그저 그들 주변부에 머문 객들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양들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본회퍼가 에탈 수도사들과 어울리며 기도했을 것을 생각하며, 나도 오늘 하루 그 임무를 받아들여 순명한다. 버스에서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 신자들을 두고 기도했다. 아멘 소리가 낯설지만 은혜가 된다. 목이 멨다. 이렇게 가까운 일인데, 제도는 왜 이렇게 먼 것일까.  _남편의 블로그에서
 

맞다. 이렇게 가까운 일이다. 기도의 형식이 어떻든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하늘 아빠스는 사람이 만든 호칭에 갇히는 분이 아니다. 앞좌석 앉은 김에(마이크 잡은 김에) 방문한 순례지 관련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작고 소박한 교회 일치의 깃발이 나부끼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주어진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에 익숙한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의 자유기도를 신선하게 듣는다. 목회자도 아닌 사람들이 갑자기 시키는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신부님들조차도 자유기도에 익숙치 않아,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확실히 자유기도는 개신교인들이 가진 강점이다. 반면 정해진 기도문에 따라 드리는 가톨릭의 기도 역시 그 나름의 강점이 있다. '기도'라는 미명 하에 '자기 뜻'을 펼치고 '자기 의'를 드러낼 여지가 없다. 순례자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난다. 버스에 올라 하루를 시작할 때 정해진 기도문으로 아침기도를 드린다. 순례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저녁 기도가 있다. 아침 기도 후에 바로 묵주 기도를 드리고, 아픈 신부님을 위한 특별한 묵주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이들의 정해진 기도를 따르는 것이 순례 여정의 중요한 기도이다. 어느 아침, '사제들을 위한 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사제들을 위한 기도>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주님을 본받으려는 사제들을 지켜주시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에 올라 날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축성하는 사제들을
언제나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주소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사제들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사제들이 하는 모든 일에 강복하시어 은총의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저희로 말미암아 세상에서는 그들이 더없는 기쁨과 위안을 얻고
천국에서는 찬란히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문득 신부님들이 부럽다. 이 기도문으로 신자들의 축복 기도를 받는 신부님들이 부럽다.  아니, 이런 기도문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이 부럽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존경할 목자를 가졌다는 것과 함께 말이다. 인간에게는 존경할 대상이 필요하다. 신앙인에게는 하나님 사랑을 매개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의존이 아니라 존경할 목사님, 신부님이 필요하다. 단번에 삶과 신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가르침을 설파하는 초인이 아니라, 비록 당장 그분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렇게 따라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꿈꾸게 되는 그런 선생님 말이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으로 치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성직자주의 또는 사제주의의 양극단을 보는 것 같다. 순례여정을 기획하고 이끌어야 할 신부님이 사라졌고, 여행사도 소속 수도원도 책임있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 하나 없는 단원들에게 놀란다. 개신교인들의 순례였다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옳은 주장들이 난무할 것이다. 여행비 환불 청구가 들어갔을 것이다. 대신 이들은 기도한다. 사제를 위한 기도문으로 기도한다. 말 잘 듣는 착한 초등학생들 같다. 남편이 목회자로 서 있는 자리는 사제주의에 맞서 생긴 개신교회 중에서도 극단에 섰는 교회이다. 공동체와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공예배의 대표기도에서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조차 드물다. 부모의 말이라면 뭐든 어기고 보고, 독재자 아버지는 필요없다는 사춘기 아이들 같다.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 보면서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인으로 자란 자녀같은 신자가 있다면 어떨까. 사제와 목사를 넘어서는 영적 성숙에 이른 사람, 진정한 의미의 '만인제사장주의'를 실현하는 개인이 어딘가에 있을까.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호텔 정원

대학 친구들 중 가장 늦게 결혼했다. 남편과 만나며 결혼을 생각하던 즈음 친구들을 만났다. 육아 전쟁 중인 친구집 거실이 내 연애 얘기로 흥미진진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여러 질문 끝에 "걔가 어디가 좋냐?" 그 흔한 질문이 나왔고. 나는 어째서인지 그런 답을 했다. "가난하게 살고 싶대. 가난하게 사는 게 꿈 이래." 돌아올 반응을 예상치 않았던 건 아닌데, 아직까지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표현으로 치면 "결혼은 현실이다... "처럼 우리 엄마나 이모가 하는 걱정과 다르지 않았지만, 뭔가 다른 단절감, 깊은 외로움 같은 것이 남아 있다. 결혼도 모르고 현실도 모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상 너머의 이상이었다.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가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근본적인 지향 같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이제는 좀 알겠다. 나는, 우리 부부는 어쩌다 수도원 영성에 닿아 순례단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혼란과 울분의 로마 이틀을 보내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남편에게 물었다. 팔당대교 아래에서 강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서 했던 그 말이 생각이 나느냐고. 어떤 의미로 그런 얘길 했느냐고. 얼핏 기억이 나는 것 같다며, 그냥 예수님의 길이 그런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아, 나도 그렇게 알아들었던 것이다. "가난"이란 단어를 "예수님의 길"로 들었다. 한참 후에 읽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말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상향지향적 삶과 햐향지향적 삶 사이의 방향성이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 읽은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의 길을 알려주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하나님의 사랑은 물의 성질과 비슷해서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내적 세계에서는 나의 가장 은밀하고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면 된다. 내적 여정을 동반하는 이 자리에서 원칙처럼 새기고 있는 말씀이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베네딕도회 수도자이고, 이번 순례 여정의 끝자락에 그분이 계시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이 있다. 가슴이 뛰는 이유 중 하나이다. 

 

로마 4대 대성당 중 하나인 성요한 성당(라테란 성당) 건너편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동상이 서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사랑한 성인이다. 그에게 가난보다 더 거룩하고 중요한 것은 없었다.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면 가난과 결혼했다 하여 '가난 부인'이라 부를 정도였다. 가난 그 자체를 사랑했겠는가. 가장 큰 선생님이신, 신랑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프란치스코의 소명을 담은 언표였을 것이다. 평생 가난하게 살고자 했고,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지만 프란치스코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직물 상인이었다. 프란치스코 타고난 매력과 유창한 말솜씨, 세련된 옷차림으로 어렸을 적부터 상인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런 그가 전쟁에 참전하고 하나님을 체험한 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함께 어울려 술 마시고 즐기던 친구들에게서 멀어져 칩거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한센병 환자를 마주하게 되는데, 충동적으로 그를 얼싸안고 입을 맞춘다. 그 입맞춤에서 '단맛'이 느껴졌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가장 낮고 가난한 곳에서 단맛을 느끼는, 스승 예수님을 따르는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무너진 성 다미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중, 또 다른 체험을 한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교회를 다시 세워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문자 그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돈을 가져다 성당을 보수하기 시작한다. 변해버린 아들이 탐탁치 않았던 아버지는 이 일로 아들을 두고 소송을 제기한다. 여기서 저 유명한 "떠남"의 의례가 등장한다. 프란치스코는 그 자리에서 옷을 홀딱 벗어 아버지 발 앞에 두고 말한다. "지금부터 제게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프란치스코를 프란치스코 되게 것은 안락함을 보장하는 세속의 아버지, 부자 아버지의 아들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능력으로 거저 누리는 것들을 떨쳐내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가난이다. 마침내 알아들었을 것이다.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건물의 교회'가 아니라 '체험의 교회'라는 것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무너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는 프란치스코의 방법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서 '가난'이었다. 

Giotto di Bondone, Legend of St Francis 6. Dream of Innocent III, 1295

이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하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당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한센병 환자를 돌봄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프란치스코 주변으로 사람이 모여든다.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급진적 제자도는 늘 이단으로 몰리거나 거부당할 위험을 안게 된다. 제도권의 지지, 공적 인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프란치스코 역시 수도회 회칙을 만들어 교황의 허락을 받고자 한다. 그리하여 교황 이노센트 3세를 만나기 위해 라테란 성당을 찾는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함인지 라테란 대성당 맞은편에는 성당을 바라보면 두 팔을 들고 섰는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꿈 이야기가 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받아보고는 가난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이상적이라 여겨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꿈을 하나 꾸게 되는데, 무너지려는 라테란 대성당을 프란치스코가 홀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 꿈을 꾼 후에 마음을 바꾸어 회칙을 인준한다. 그리하여 가난한 삶을 살고자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탁발수도회, '작은 형제회' 라고도 불리는 프란치스코회 수도회가 설립된다.

 
고개가 빠져라 올려다 보아야 보이는 라테란 대성당이다. 그 크기가 하도 커서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크다 느껴지질 않는다. 맞은편 길 건너에는 그 교회를 바라보면 두 팔을 벌리고 섰는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있다.  그 사이에서 서니 묘한 심정이 된다. 프란치스코 옆에는 함께 했던 11명의 수사들이 지쳐 쓰러져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탁발, 그러니까 빌어 먹으며 여기까지 왔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거지, 가난뱅이, 거룩한 가난뱅이(santo poverello)들이 저 화려한 대성당 밖에 서 있다. 라테란 대성당은 당시 교황청이기도 했다. 돈과 권력의 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교회 앞에 예수님의 꿈, 가난의 꿈을 살고자 하는 수도자들이 서 있다. 성당 내부 천장은 콜롬부스가 발견하고 식민지화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공수해 온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지금도 라테란 성당에 입장하려면 (공항처럼 삼엄하진 않지만)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걸인 행색의 낮고 천한 이들이 드나들만한 곳이 아닌 것 같다. 저 보잘것없는 이들이 수도회를 설립한다니, 회칙 인준은 높은 벽을 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꿈을 동원해 저 가난한 이들의 소명의 길을 도우셨다 생각하니 뭉클해진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즈음,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연출되었다. 노숙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프란치스코 동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보란듯이 그 앞에 눕는다. 사진을 찍으라는 장면이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카메라를 들었고, 같은 생각을 했다. 로마 한복판, 머리와 온몸에 새똥을 뒤집어쓴, 썩 관리도 되지 않는 가난뱅이 성자의 동상 앞에 이보다 어울리는 그림이 있겠는가. 저 남자는 부러 작정하고 퍼포먼스를 해주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800여 년 지난 오늘의 교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돈과 권력으로 크고 화려해진 교회, 깨인 교인이라는 특권의식으로 끼리끼리 뭉쳐 담을 쌓은 교회 주변에 새똥을 뒤집어쓰고, 목마르고 배고픈 영혼들이 쓰러져 있다. 인정받는 다수가 되지 못한 소수자들이 교회 주변에서 방황한다. 혼란의 로마, 울분의 로마에서 오늘 내 조국의 교회를 본다.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섰다. 사람에 떠밀려 박물관을 훑고 나와 목마르고 지친 상태였다. 관람이 아니라 '옆에 두고 밀려서 걷기'였다. 그 많고 진귀한 소장품을 옆에 두고 말이다. 광장에 서니 그래도 숨통이 좀 트였다. 넓은 광장에 마음도 꽤 넓어졌다. 사심이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만나야 할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이 광장을 조성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1598 ~ 1680)이다. 이 광장은 대성당으로부터 두 팔이 뻗어나가 세상을 포용하는 형태이며, 베드로의 상징인 천국의 열쇠의 모양이라고 한다. 물론 그 안에 서서는 결코 조망할 수 없는 장면이긴 하다. 베르니니에 관심이 가는 것은 무엇보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체험을 형상화 한 <성녀 데레사의 법열>이라는 대리석 조각상 때문이다. 사랑의 불화살을 맞아 황홀경에 빠진 성녀의 표정이며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주름 등,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저렇게 섬세하게 조각된 성녀의 표정이 지나치게 관능적이라고 하여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로마까지 가서 이 조각상을 보지 못했지만, 내 평생 다시 로마에 가야 한다면 이 조각상을 영접하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애초 포기했기에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그러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서 제대 한쪽에 있는 베르니니의 무덤을 만난 것은 선물과 같았다. 구석진 곳, 작은 무덤이라 더 좋았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대성당을 바라보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무실 창이 보인다. 삼종기도 하러 나오는 곳이라 뉴스에서 가장 많이 보던 그 곳이다. 맨 윗 칸,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창이다. 잠시 저 창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을 뿐이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이 부럽다. 내게 현시점 존경하는 신앙인을 한 사람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그는 즉위 후 교황명으로 가난을 사랑한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땄다. 이름으로 다 설명되는 그분의 이후 행보이다. 과연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벗'이다. 무엇보다 나는 2014년 방한 시의 여러 일들을 잊을 수 없다. 시복미사를 집전을 위해 광화문으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유민이 아빠를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파파, 파파'를 목놓아 외치던 장면이 있다.  그 영상을 보면서 '파파'에 담긴 피 울음에 같이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교황이 타신 차가 바로 앞에 오자 '파파, 파파'하는 소리는 절규에 가까워졌다. 파파 여기 봐주세요! 여기로 와주세요! (다시 심장이 뛰고 눈물이 차오른다.) 차가 멈춰 서고 교황이 내리고 유민이 아빠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셨다. "파파, 파파" 부르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꼭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소리 같이 들렸다. 2014년 당시 예수님께서 이땅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제일 먼저 세월호 가족의 손을 잡아주지 않으실까, 생각했는데. 유민아빠에게 다가가 손잡아주는 교황의 모습은 내 상상을 실현시킨 장면이었다. 교황을 만난 세월호 유가족들이 참사 이후 처음으로 위로 받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저 으리으리한 성 베드로 성당은 교황 프란치스코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사는 집, 입는 옷... 이전의 관례를 다 깨며 전에 없는 파격적인 교황의 길을 가고 있다. 가난을 사랑한, 빈자의 친구 프란치스코가 천장에 금을 입힌 집에 사는 것은 상상되지 않는 부조화이다. 그럼에도 저분은 부조화 속 조화를 보여주신다. 제도 종교의 수장, 가장 높은 곳에 앉은 교황으로서 가난을 사랑하는 지향을 거두지 않는다. 하나가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갈 수 없는 길일 것이다. 성 베드로 광장에 서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계실 그 방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위를 향하고 동시에 아래로 향하는 영성의 길을 생각한다. 베네딕토가 왔다가 떠났던 로마, 성 프란치스코가 찾았던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가 계시는 지금 여기 로마를 떠나며 통합의 길을 생각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남자와 25년을 살았다. 단 한 번도 돈 걱정 없는 날을 살아보지 못했지만, 절대 가난을 산 적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길과 세상의 길의 방향이 다르다는 감각은 잊지 않았다. 그 감각을 일깨워 아이를 키우고 각자의 진로를 선택하며 여기까지 왔다. 신대원을 마치고 전임 사역자가 되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크고 깨끗한 아파트에 살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우리 형편에 맞지 않는 넓고 더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싫어"라는 내 말(싫어서 싫은 것이 아니라 좋아서 싫은 것이었다)에 보내온 친구의 냉소가 생각난다. 음악조차도 성적으로 줄 세우는 예술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일 년 안식년을 가지기 위해 예고 합격증을 포기했을 때 "아이를 바보로 만들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물리적 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봐도 마음고생이 뻔할 목회지를 선택했을 때 '신앙을 가장한 맹목적 희생, 하나님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라며 애정을 담아 말리던 노(老) 스승님의 말씀도.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하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구나, 싶다. 옳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부름 받았기에, 그 지점에서 부부의 마음이 딱 맞았으니까. 우리에겐 이것이 예수님의 길로 가는 방향이니까. 그렇게 살다 수도원 영성에 끌리고 여기 이 순례 여정에 와 있는 것이다. 가난하게 살고자 하는 꿈이 여기 이 순례 여정까지 이끌었다.
 
25년, 따로 또 같이 인생 순례길을 잘 걷는 우리 부부이다. 그런 부부가, 그런 부부이기에... 로마 이틑 날 밤, 우리는 다퉜다. 다소 격렬하게 말다툼을 했다. 그 다툼 끝에 내 정직한 몸에 발진이 생겼다. 발진은 반가운 '증상'이다. 마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증상이다. 겉으로만 평화, 아니 외적 평화를 가장한 내적 불화의 관계보다 때로 다투고 열을 내는 것이 낫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이기 위한 다툼이었다. 이렇게 혼란과 울분의 로마 이틀을 보내고 우리는 내일 독일로 간다. 독일의 수도원에서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마메르틴(mamertium) 감옥터 앞

 

갑자기 남편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리 와 봐, 해서 보면 남편은 벌써 저기 멀리 걷고 있다. 빨라진 남편의 발걸음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몸이 정직하다. 때로 몸이 가장 정직하다. 그의 영혼이 뛰고 있는 것이다. 말년의 사도바울이 갇혀 있었던 감옥터, 마메르틴(mamertium)이다. 이 앞에서 남편은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수도원 순례에 오른 후 처음으로 말이다.
 
2015년 남편이 성지 순례단을 이끈 적이 있었다. 남편과 참여자들의 후일담에 비추어 좋은 순례였던 것 같고,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성지순례 모델이기도 하다. 순례 전에 여러 번 만나 다양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여정 중에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가는 곳마다 드리는 예배와 기도에 그 이야기를 반영하고. 남편에게 터키 그리스 순례지의 각 스폿은 참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신앙 이야기로 자리하고 있다. 모르긴 해도 작은 공동체 안에서 잘 묻고, 잘 듣고, 그것을 말씀과 기도에 반영하는 남편의 장점이 극대화되어 발휘되었을 것이다. 그 기억으로 남편은 성지순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사도바울로 인해 언젠가 로마에 꼭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몸과 영혼이 기뻐 뛰놀지 않겠는가. 남편의 글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2015년도에 바울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터키-그리스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가 걸었던 길을 걷고, 그가 설교했던 아레오바고를 오르고, 그가 세례를 줬던 빌립보 강기테스 강가에 앉았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은총이 쏟아져 내렸다. 순례의 참 의미를 알았다. 그때 비로소 로마가 가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것이 제일 큰 이유다. ❞ (남편 JP의 블로그에서 가져옴)

그런데 여기는 우리 순례 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앞에서 사진 정도 찍고 지나치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빠르게 들뜬 남편을 보고 따로 입장료 내고 들어가보자 했지만, 단체 여정 중이니 그리 할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합리적인 남편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더 안타깝고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내일 '사도바울 참수터'와 거기 세워진 '세 분수 수도원(TRE FONTANE)' 일정이 있으니까. 그리고 성 바울 성당이 있으니까. 아쉬움을 기대로 달랬다. 그러나 다음 날 예상치 못한 일로 그 앞까지 가서 버스를 돌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끝끝내 여기는 밟아보지 못하고 로마를 떠나왔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남편의 들뜬 모습을 보았는데, 여차저차 사도바울의 흔적과는 결국 교차하지 못한 순례가 되었다. 쉬 달래 지지 않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차곡차곡 쌓인 로마의 시간이었다. 감정은 에너지와 같아서 열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 꾹꾹 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인 감정들은 무질서하고 맥락 없는 것이 되어 엄한 곳에서 터지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사도바울 참수터 입구

 
로마의 첫날인 어제, 카타콤베로 가는 일정을 앞두고 인솔자 신부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신부님은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카타콤베 안에서 미사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당장 그것부터 문제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카타콤베 안에서의 미사는 로마 일정 중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2000여 년 전 숨어서 기도하던 신앙의 선조들의 호흡이 배어 있을 것만 같은 그 공간에서의 전례라니. 그 자체로 신비 아니겠는가. 예배라면 더 좋겠지만, 미사 형식이어도 얼마든지 좋을 것이기에 기대가 컸다. 기대는 아쉬움으로 바뀌었지만, 우리 부부를 제외한 가톨릭 신자들의 그것과 비할 수 없을 것이니 내 아쉬움 따위는 넣어 두어야 한다. 일상에서도 그렇지만 순례 여정 중 특히 '매일 미사'가 중요한 분들에게는 아쉬움 너머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나절 푹 쉬시고 회복되기를 바라며, 신부님을 위한 이심전심 기도의 마음으로 순례단은 모두 입을 닫았다. 그렇게 로마의 첫날밤을 보내고 이튿날이 된 것이다.

 

신부님이 몸은 조금 나아지셨지만 순례여정을 동반할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이 순례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막막한 마음이 되어 인솔자 없이 가이드만 의지한 채로 바울 참수터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니 키 큰 나무들이 도열을 하고 맞이하였다. 순간 마음이 넓어지고 커지며 부풀어 올랐다. 나는 누구보다 먼저 뛰어 앞으로 나갔고, 그 순간 뒤에서 남편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사도바울 참수터'와 '세 분수 수도원' 순례의 전부가 되고 말 줄이야. 모두 내려 그 길을 걷는데 심각해진 가이드가 다시 버스에 타라고 했다. 숙소에 있던 신부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채, 타라면 타고 내리라면 내리고 기다리라면 기다리면서 로마 이튿날 오전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한나절의 순례 일정, 그것도 남편에겐 간절한 것이 이렇게 날아가는 것인가. 마음엔 폭풍이 몰아치려 하는데, "느끼면 안 돼, 느끼지 마!" 꾹꾹 누르게 되었다. 신부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기도하는 것과, 일정이 틀어진 것에의 실망감은 별개의 문제인데. 당장은 두 개의 감정을 함께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텅 빈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나긋나긋하고 매끄러운 가이드의 말이 마이크를 타고 쾅쾅 울렸다. 자신이 어떻게 조치를 잘 취했는지 자분자분 보고했다. 아울러 무척 당황스럽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그러니 여러분도 그리하고,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라며 특유의 설교조로 마무리했다. 뱃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성 바오로 대성당

 
썩 내켜하지 않는 남편을 설득하여 데려온 순례이다. 사도바울의 흔적 앞에서 생기가 도는 남편을 보고 덩달아 기뻤던 것은 찰나로 지나가고 말았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한 마디를 할까말까 엉덩이 들썩이고 있는데 앞에 앉은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이드에게 갔다.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 남편인데, 가이드에게 가서 식사를 못해도 좋으니 오전에 가지 못했던 곳을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다행히 받아들여졌다. 오후 순례 일정 서두르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별다른 설명 없이) 오전 일정 중 성바울 성당만 채택되었고, 결국 참수터와 세 분수 성당은 가지 못했다. 이쯤 되면 그분의 메시지로 알아들어야 할 듯하다. 좋은 뜻을 가지고 바라는 것이라도 연거푸 좌절된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충분하다. 연연하지 말아라" 하시는 그분의 말씀으로 들어야겠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다. "네, 주님! 알겠습니다. 여기까지로 만족하겠습니다." 가슴이 뛰었다는 그것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고 나를 설득한다. 

 

저녁식사 시간, 옆에 앉은 젊은 순례자 하나가 "저, 신부님 일로 멘붕이에요."라고 했다. "저도요!" 그리고는 꾹꾹 눌러 담았던 몇 마디를 꺼내 놓았다. 충분치는 않았지만 꺼내 놓은 몇 마디의 여백으로 종일 부글거렸던 마음과 꽉 조였던 가슴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멘붕이라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쉽고, 불편한 감정들을 느끼지 말자, 느끼자 말자, 하며 억압하니 어떤 울분이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순명'이라는 말과 덕에 익숙한 듯하다. "이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표현을 순례 중에 많이 들었다. 순명의 미덕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 미덕의 빛 앞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조차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순례단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베네딕도 수도원이라면 '아빠스' 아닌가)가 갑자기 증발한 상황에서 그분의 상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무엇하나 명확하게 알려지는 것이 없어도, 예정된 일정이 없어지고, 심지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미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는데도 모두 순순하다. 

성 바오로 대성당


신부님의 건강 상태가 베일에 싸이고, 대번에 남편과 나는 혹시 우리 존재가 불편하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했다. 가만 보니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이드도 같은 생각을 했단다. 흔히 부부간의 갈등과 불화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것을 제 탓으로 가져간다. 학대 가정의 아이들이 학대의 원인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과 비슷하다. 맞을 이유가 있었다거나, 부모님이 나 잘 되라고 때렸다는 식으로 학대 가해자의 죄를 피해자가 뒤집어쓰게 된다. 힘의 차이가 있을 때, 약자가 자기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선을 가장하여 죄를 숨길 때, 아이들은 부모의 죄를 자기 잘못으로 가져가서 수치심의 존재가 된다. 엄마 아빠의 문제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명확한 표현과 설명이 필요하다.  
 
저녁 식사 후 방으로 돌아와 남편과 나는 말다툼을 했다. 늘 그렇듯 시작은 사소한 한두 마디였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갈수록 창대해져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쌓이고 쌓인 울분이 터져버린 것이다. 서로를 향한 울분인가, 아니다. 참수터를 보지 못한 아쉬움인가, 아니다. 잘못 선택한 순례라는 자괴감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어머니 소식이 전해져 온다. 병원에 계신 어머니 상태가 갈수록 악화일로다. 어머니 거취의 중요한 결정을 남편이 해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남편은 막내인데 말이다. 여기도 저기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 명확하게 길을 제시할 어른이 없다. 결국 부부 다툼으로 끝난 하루는 아빠스 없이 헤쳐나가야 할 수도원 순례, 아니 일상 순례에의 울분인지 모르겠다. 우리에겐 아빠스가 필요하다.

프랑크슈테텐 수도원 지하 경당 벽에 그려진 성 베네딕도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중요한 특징은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라고 한다. 과연 읽어보면 그렇다. 그렇다. 탁월한 분별력으로 분별해주는, 그리고 그것을 명쾌하게 제시해 줄 아빠스가 필요하다. 영적 어른이 필요하다. 누가 나의 아빠스가 되어줄 것인가.  "주님, 저의 아빠스는 누구니이까?" 맥락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했던 어떤 율법사의 말에 빗대어졌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리고 내 질문에도 되물으시는 것 같다. "네 생각에는 누가 아빠스가 되어야 할 것 같으냐, 가서 네가 그와 같이 되어라." 아빠스를 찾지 말고 네가 아빠스가 되어라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제 그만 울분을 거두고 네 발로 서서, 어른이 되어 너의 순례 여정을 가라고 하신다. 분별력과 명쾌한 말을 '어느 아빠스'에게 구하지 말고 네 안에서 찾아라고 말이다.  

 

집에 돌아왔다. 공항버스가 익숙한 우리 동네로 들어설 때, 둘이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복잡한 모든 것을 담아 내가 말했다. "긴 꿈을 꾼 것 같다." 상투적이지만 이보다 좋은 표현이 없다. 일상의 풍경에 몸이 담기고 보니 질곡의 12박 13일은 꿈이었나 싶다. 꿈인가 싶지만 꿈이 아니다. 휴대폰 카메라에 수백 장의 사진이 남아 있고, 몸이 감각하고 체험한 것들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 다만 사유와 성찰이 그 체험의 속도를 따르지 못할 뿐이다. 그 속도의 차이 또는 간극으로 인한 고통으로 글이 나오질 않았다. 시차로 인해 일찍 깨어난 새벽마다 글을 쓰곤 했다. 남편과 내가 각자의 노트북을 마주하고 앉아 쓰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로마 이후로 나는 더 나가지 못했다. 고마운 것은 남편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순례일기 쓰기를 완주했다는 것이다. 힘도 들이지 않았다. 그냥 투닥투닥 쓰더니 '일일일포(하루에 하나의 포스팅)'가 되었다. 나는 변비이지만 아침마다 황금색 변을 보는 건강한 아이처럼 글을 낳는 남편 덕에 숨을 쉴 수 있었다. 글은 숨이고 쉼이다. 이제 집에 돌아와 내 자리에 앉았으니 피할 수 없는 내 차례이다. 
 
수도원 순례, 안식월을 보내는 남편과 함께 하는 수도원 순례, 내 생애 가장 큰 '지름'이었다. 한 권의 책을 목표로 하고 글을 시작했다. 수도원 영성이 일상 영성과 다르지 않음을 나는 벌써 느끼고 있었고 그 느낌이 이끄는 더 깊은 갈망으로 오른(또는 지른) 순례였다. "일하고 기도하라"는 모토가 구체적 규범으로 구현된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오늘 여기"의 눈으로 읽어내는 순례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순례 시작부터 기대와 달랐지만 이끄신 그분의 뜻이라 믿으며 이탈리아 순례를 마치고 로마을 경유하다 글이 멈추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네 식구 모여 앉아 남편의 생일축하 촛불을 켜고 끄며 시끌벅적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이제 혼자의 시간이다. 수도원 성물방에서 산 검정색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멍, 검은 초를 가만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읽고 쓰고 기도하는 내 자리에 앉으니 좋다. 살아야 할 내 자리, 계속 써야 할 내 자리이다. 쓰지 않으면 발굴할 수 없는 보석이 일상에 가득하다. 그렇다, 가득하다. 하물며 낯선 나라의 낯선 수도원을 돌며 보낸 짧았던 순례 일상은 오죽하랴. 쓰고 싶고 써야 할 이야기가 부지기수이다. 검은 초를 밝히고 기도한다.
 
주님, 살 자리와 쓸 자리가 분리되지 않게 해주세요. 쓰는 일은 단지 쓰고 마는 일이 아니라 써서 새롭게 간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거기 계시죠? 저 여기 있습니다. 제 일상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순례 여정 무수한 이야기들을 오늘 여기 제 책상에서 글로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몸이 끝낸 순례를 몇 걸음 뒤에서 허둥지둥 따라가는 생각의 길이지만, 포기하지는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살 자리에서 살고 쓸 자리에서 쓰겠습니다. 살 자리와 쓸 자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 꽃자리입니다. 지금 여기를 살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일하고 기도하는(ora et labora) 삶입니다. 물심양면의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   

다시 로마로 왔다.  로마에서 이틀을 보내고 한참 지나도록 순례기가 써지질 않는다. 할 말이 없거나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글이 써지지 않는 답답함은 내게 익숙한 고통인데, 대부분은 여러 말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려 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데다 잘 쓰고 싶어 힘이 들어가는 경우가 가장 어렵다. 글 변비에 걸린다. 마감일을 코 앞두고 밤낮으로 끙끙거리며 보내는 고통의 시간이라니. "내 다시는 새로운 원고 청탁 수락하지 않겠다." 결심하지만, 지켜질 리 없다. 나를 낚는 글은 늘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잘 쓰고 싶은 욕심은 가득한 주제들이니 말이다. 내 안에서 농익지 않은 주제들 일지 모른다. 말은 늘 무성하다. 무성한 말들이 정제되어야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글이 된다. 그러니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노트북을 덮고 나가서 걷든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무성한 것들이 스스로 겨루어 꼭 필요한 것만 살아남도록 하는 시간 말이다.
 
로마는 혼란스럽고, 혼란을 유발하는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로마는 도시 전체가 관람객으로 가득차 있다. 나는 순례자인가 관광객인가. 트리비 분수 앞 인파 속에서 해맑게 동전을 던지며 사진도 찍어 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것이, 정체성 혼란인 것 같다. "관광객으로 로마에 올 수도 있었으나 나는 지금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자이지 않은가."  그리 심각해질 필요가 있나,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라고 조언하지 마시라.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나름의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여기저기 빠르게 적응하고 잘 맞추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체성, 즉 내적인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내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순례자에서 관광객으로 모드를 전환할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많은 경우에 그렇다. 나만의 이유를 발견하면 모드 전환은 언제든 가능하고, 둘 사이를 오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나는 지금 개신교인으로, 개신교 목회자의 아내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끼어 순례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내적 일관성에 비롯한 '나만의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되어 지나쳐야 했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와 죽임 당할 그리스도인들이 입장했다는 문 앞에 머물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끊임없이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이 관광객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중에 "아무 의미 없는 죽임이었죠!" 하는 말이 귀에 꽂혔다. 의미! 그렇다, 나는 의미를 묻고 싶다. 로마시민의 유흥이 되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고, 사람과 짐승이 죽을 때까지 싸우던 곳이 여기 콜로세움이다. 싸움을 '당했다'고 표현해야겠다. '유흥'이라는 의미를 위해서 죽는 죽음이라니, 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삶과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히브리서 말씀이 떠올랐다. 박해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던 시대를 생각한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이 말씀이 갑작스레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나은 부활을 사모한 나머지 굴복하고 풀려 나가는 것을 거부한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학대와 채찍질을 기꺼이 받았고 쇠사슬에 묶여 지하굴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고 톱으로 켜져 두 동강이 나고 살해되어 싸늘한 시체가 된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짐승 가죽을 두르고 집도 친구도 권력도 없이 세상을 떠돈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혹독한 세상의 가장자리로 다니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들 가운데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의 믿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메시지성경

 

 

콜로세움 관광 후엔 바로 개선문이다. 박해 뒤에 갑자기 그리스도교 공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를 공인한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박해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이다. 어렸을 적에 세계사 시간이었을까?  AD 313 년을 처음으로 들은 그날부터 시험공부를 위해 따로 외울 필요도 없이 까먹지 않는다. 드디어 기독교가 인정된 해라고 하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안도감이 들었었는지. 철이 들어 교회사를 새롭게 배우고, 영성사를 배우고 보니 기독교 공인을 천진난만하게 반겼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귀엽기도 하고, 싹수가 노란 어린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보여 씁쓸하기도 했다.  

&amp;amp;lt;콘스탄티누스의 꿈&amp;amp;gt;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52~1466년, 329x190㎝, 프레스코. 야전 막사에서 곤히 잠든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붉은 이불을 덮고 잠든 주인공이 콘스탄티누스다. 천사가 왼쪽 위에서부터 가파른 각도를 그리면서 날아든다. 손에는 황금 십자가를 들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뒤에는 꿈 이야기가 있으니, 꿈 선생님으로서 이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원 숙소의 아침이고, 아침 식사 시간 전에 글을 마쳐야 하니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로마 제국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뜻하지 않은 계기가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로부터 한 해 전, 그러니까 312년의 어느 날 밤이었다. 숙적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하루 앞두고 잠이 들었는데,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황제를 깨우더니 『위를 보라』고 말한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밤하늘에 십자가가 밝은 빛을 뿜으면서 걸려있고, 그 위에 황금 글씨로 「이 표식 안에서 너는 승리를 거두리라」라고 씌어 있는 것이었다. 기운과 용기를 얻은 황제는 잠에서 깨어나 당장 군단 깃발의 휘장에 십자가를 그리게 한다. 이튿날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버려 둔 채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바빴고, 큰 승리를 거둔 콘스탄티누스는 이때부터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유일한 황제가 된다.
<가톨릭신문> "노성두의 미술 이야기" 2003-09-28 제 2366호 12면

 

 

카타콤베, 무덤이기도 은신처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묻을 곳이 없었다고 한다. 좁은 통로 옆의 벽이 죄다 무덤이다.  아이가 묻힌 작은 무덤, 어른의 무덤이 있다. 가이드 없이 들어가면 길을 잃어 나올 수 없는 곳, 깊은 곳으로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한다. 추격해 오는 로마 병사들이 여기로 들어와서는 미로 같은 길에 갇혀 두려움에 떨었고 그것을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수동적이며 적극적이고 지능적인 방어로구나. 여기는 피난처인가. 피난처 밖은 위험하다. 위험 속에서 숨는 곳은 순간의 안전을 지켜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은 밖은 위험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밖이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피한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더는 위험한 일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일이 위험한 일이 된 것인가. 초대교회 영성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이라고 한다. 박해의 영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박해와 고난을 자처하는 일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곧 다시 오신다' 하셨기 때문이고. 이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근거한다. 곧, 이들이 살아생전에 오실 것이라 믿었을까. 처음엔 그리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00년, 200년 다시 오시지 않는 시절을 보내며 참 '믿음'을 발견하고 살았을 것이다. 당대에, 그 약속한 것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으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음에도 믿는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가 믿어도 된다고 하니, 맘껏 믿어도 된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기독교가 공인되자 '맘껏 믿어도 되는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박해 없는 세상을 떠나 자발적 박해로 들어간 분들이다. 사막의 교부들이라 부른다. 수도원의 시작은 여기 사막, 사막의 수도 공동체였다. 베네딕도 역시 혼란의 로마를 뒤로 하고 은수의 삶으로 갔던 것이 우연은 아닐 듯하다. 혹독한 박해의 시절이 갑자기 평안의 때로 바뀌는 혼란, 하나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공부하러 왔으나 공부가 되지 않아 방황하다 떠나기를 선택하는 혼란, 순례자로 왔으나 관광객이 되어 떠밀려 다니는 혼란. 혼란이 있는 곳이 로마이다. 여행 가이드북의 로마 소개란에 "ROMA를 거꾸로 하면 AMOR!"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혼란스러우며 동시에 어떤 사랑으로 이끄는 곳이 아닌가 싶다. 초세기 교부들에게, 성 베네딕도에게, 나에게. 그리고 이 무엇보다 순례단에. 사실 직면한 가장 큰 혼란은 로마의 순례단이 마주한 난관이다.
(혼란의 로마, To Be Continued!)

 

 

중세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웠다는 파르파(Farfa) 수도원이다. 수도원이나 성당의 건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부유했다는 뜻이다. 수도원의 시작은 6세기 시리아에서 아리우스 파(언젠가 다시 설명을 늘어놓을 예정)의 박해를 피해 내려온 은수자 성 로렌조 시로(Lorenzo Siro)에 의해서이다. 이탈리아의 대부분 수도원들이 그러하듯 북쪽에서 내려온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한 때 무너졌고, 제2 창립자의 신심과 소명으로 재건되었다. 교회든 성당이든 수도원이든, 중세시대든 지금이든 건축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로마로 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프랑크 족의 카를로 황제가 수도원을 보호하고 지원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파르파 수도원은 황제의 권력 하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누리며 '황제의 대수도원'이라 불린다. 이후 파르파 수도원은 교황과 황제 사이 권력 다툼의 격랑 속에서 영욕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다. 

 
"한때 아름다웠던" 것들은 아름다운 전통이 되어 남아 거기 잇댄 오늘을 빛나게 한다. 또 "한때 아름다웠던" 영광에 비춘 오늘이 누추하기만 할 때도 있다. 한때 아름다웠던 기억과 상실감에 매여 그때의 영광을 회복하려 한다며 비참한 오늘을 살게 될 수밖에 없고. 순례자는 순례의 여정 중 짧게 어딘가를 방문하고 떠나게 된다.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파르파 수도원을 한나절 방문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순례든 여행에서 계획이 틀어지고 일정이 꼬이는 일은 흔하다. 가이드는 우리 팀만 따로 조용히 순례하기 위해서 조금 기다리자고 했다.  동네를 돌며 기다리다 연기한 시간이 되어 들어갔는데, 우리가 기다리던 시간에 진행했어야 할 순례팀이 늦게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래 기다린 덕에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과 도떼기 시장 순례를 해야 했다. 현지인들이기에 통역이 따로 필요치 않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안내에 통역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날려버렸다. 많이 속상했는데, 남편은 마침 그 순간 수신기의 배터리가 나가버려 마음 편히 포기하고 인파에 밀려다녔단다. 

 
도떼기 시장 속에서 들린 짧은 한 마디는 수도사들의 방에 1900년대 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커다란 수도원에 남아 있는 수도사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은 어느 수도원에서나 듣는다.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 현재 39명의 수사들이 살고 있다는 말에 그렇게 많으냐고 놀란다. 수도원에 돈이 모이고 대리석으로 성당 바닥을 깔고, 천장과 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동안에도 수도사들의 일상을 지속되었을 것이다. 가난, 정결, 정주를 서약한 수도자 한 사람의 삶은 작은 독방에서 매일의 일상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아빠스의 명령 없이는 누구라도 감히 무엇을 주거나 받지 못한다. 또 어떤 것을 개인 소유륵 가져서도 안되니 도대체 어떤 물건이라도, 책이거나 서판이거나 펜이거나 아무것도 전혀 개인의 소유로 가지지 못함은, 자기 몸과 뜻도 개인의 마음대로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필요한 모든 것은 수도원의 아버지에게 바랄 것이며, 또 아빠스가 주지 않은 것이나 허락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 33장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각자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줄 것이다." 이렇게 말함음-이런 일은 없어야 하겠는데-, 사람의 차별을 두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을 고려하라는 말이다. 적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말 것이며, 많이 필요한 사람은 연약함에 대해 겸손하고 자비를 받은 데 대해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베네딕도 규칙> 34장

 

 

그 와중에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다. 이탈리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런 동네 골목을 걸어 보았다는 것,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잘생인 이탈리아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에스프레소 한 잔의 행복을 누려본 것이다. 순례 안내를 받기 위해 버린 시간이 아깝지 않다. 오히려 고맙다. 실은 수도원 안내에 대한 정보가 차고 넘쳐서 한 번쯤 놓쳐도 아쉬운 것은 없다. 계획은 틀어지고 일정은 꼬이게 마련이고, 꼬인 일정 가운데 아름다운 순간은 새롭게 빛을 발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순례의 묘미이고 인생 순례길이 고유한 아름다움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해도 파르파 수도원을 떠올리면 불편한 감정이 떨쳐지지 않는다. 진선미, 진실은 선하고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진실일 수 없다. 진실한 것이 아름답다. 한 텀을 기다리면 우리끼리 순례할 수 있다고 한 것이 현지 안내인인지, 가이드의 계획이었는지 모르겠다. 한 텀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더 불편한 상황이 된 것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정중하게 사과했으면 좋았겠다. 우리를 배려하지 않고 통역할 시간을 주지 않는 현지 안내인의 태도, 이 모든 일을 있어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습성이라 말하며 심지어 이해하고 받아들여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설교까지 하는 가이드가 아름답지 않다. 일어난 일을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고, 책임자로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되는데 말이다. 선하고 유창한 말이 아니라 선하고 진실한 말이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투덜대지만, 순례 여행 중 심장 터지도록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 수도원 근처 공원에 혼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나 스윽 다가오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얘는 꼭 <마녀 배달부 키키>의 고양이 지지 같이 생겼다. 지지의 동생이거나 언니일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시간 내내 온갖 재롱을 부리더니 내 흰 운동화에 제 검은 발을 스윽 갖다 대는 것이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내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이었을까. 잠시 후 불편해질 내 마음을 미리 다독여주려는 것이었을까. 달라스 윌라드의 마지막 강연록에 있는 말이 떠오른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작동하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이 가장 잘 작동하는 곳은 "자연"이다. 수도원이 하나님 나라인가? 수도원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 나라는 "일상"이다. 뜻대로 되는 것 없고, 애써 잘하고 싶은수록 더 안 되고, 그러다 갑자기 어느 순간 잘 되어 버리는 일상. 이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아침 기도 시간이다. 이른 시간 혼자 일어나 연구소 벗들에게 영적 독서를 나누고, 남편과 함께 렉시오 디비나를 나누고, 향심기도를 하는 시간. 우리 집 거실, 내 자리가 그립다. 돌아가면 그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지켜야겠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수도자의 독방 같은 시간 말이다. 

영성사(史)를 공부하며 수도원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니 <베네딕토 수도 규칙>은 뼈대 같은 것이었다. 각각 다른 수도원들의 영성을 하나로 묶는 것이기도 하고, 이 수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에 수도회의 고유함이 결정되기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한 문서이지만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인용된 것으로 충분했다.  '규칙' 같은 말에 대한 거부반응이 본능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잘하던 일도 '너 이거 꼭 해야 해!' 강압으로 주어지면 안 하고 싶어 하는 못된 아이 같은 마음 말이다. 알고 보면 누구보다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하면서, 강압하고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빠르고 지나치게 과민반응 해버리는 면이 있다. 규칙, 규칙서. 이런 것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수도원 순례를 결정하고 꼭 읽어야겠다 싶은 것이 <베네딕토 수도 규칙>이었다. 뒤늦게 순례 참여를 결정한 남편은 수도원 관련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아니, 결정하기 위해서 이미 쌓아 두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규칙서만 잘 읽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베네딕토 수도 규칙> 머리말부터 빠져들었다. 2장의 "아빠스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부분에는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규칙서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빠스에 관한 권고들이다. 아빠스는 대수도원장( Abbas)을 일컫는 말로 아람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아빠(Abba)"에서 왔다고 한다.
 

수도원을 돌보기에 적합한 아빠스는 항상 그의 호칭을 기억하여 행동으로써 으뜸이란 명칭을 채워야 한다.(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어지며, 그분께 (바치는) 호칭으로 불리어진다.

 
2장 "아빠스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호칭을 기억하라! 아빠스라 불리는 호칭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명칭을 채워야 한다니. 이보다 분명하고 준엄한 지침이 있을까 싶다. "나는 아빠다!" "나는 엄마다!" 이 말이 담은 책임감의 무게, 그 무게를 견디는 기쁨... 나는 이것을 안다. 그리고 이 문장을 좋아한다. '자녀를 위한 어머니 기도회'가 내 아이만 잘 되라는 이기적 욕망을 부추긴다 여겨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썩 내키지 않았던 어머니 기도회 강의에 가서 본 문구가 마음을 건드렸었다. "주님, 제가 엄마입니다!" 엄마이고 아빠인 정체성을 생각하는 것, 그에 합당한 행동으로 엄마와 아빠로 불리는 그 호칭을 채우는 것의 감미로운 고통이란. 
 
누가 내게 <베네딕토 수도 규칙>을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하라 한다면, 이 규칙서는 수도승들을 위한 것이기보다 아빠스를 위한 것이라 말하겠다. 그리고 한 문장을 뽑아 내라 한다면 물론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이겠지만, 내 맘대로 2장의 저 첫 문장을 꼽겠다. 베네딕토는 한 번도 일반 수도승인 적이 없고(은수동굴 3년은 수도승이었겠다) 시작부터 아빠스였다. 사람들을 모은 적이 없으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배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 수도원을 세우기 시작했으니 시작부터 아빠스였다. 그래서 아빠스에 관한 규정들이 유독 더욱 준엄했는지 모르겠다. 성 베네딕토든 아빠스의 정체성, 즉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베네딕토가 로마로부터 물러나 수비아꼬로 가기 전에 유모와 함께 기거했던 '아필레(Affille) 마을에 들렀다. 아필레는 성 베네딕토의 첫 기적 장소라고 한다. 유모가 이웃집의 채를 빌려다 썼는데 잘못해서 그것을 깨트렸다고 한다. 그것을 붙들고 통곡하고 있는 유모를 보고 베네디토 성인이 기도를 하자 그 채가 다시 붙어 원래대로 되었단다. 이 기적이 소문이 나자 베네딕토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 떠남이 은수처인 수비아꼬에 닿았다. 성인전에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기적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의미 없는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쪼개진 채가 붙고, 물이 포도주가 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의미는 제거하고 기적만 바라는 마음이 참된 신앙이 될 리 없다. 아빠스 베네딕토를 향한 씨앗은 이미 이 첫 기적에 담겨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유모는 누구인가. 유모는 엄마 대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다. 베네딕토의 가정이 부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마로 유학을 떠나는 베네딕토를 돌보기 위해 유모가 따라갔다. 로마를 떠나 머무를 곳에서도 유모가 함께 한다. 이 기적을 행하고 길을 떠나면서 베네딕토는 유모와 결별한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에서 스스로 돌보는 어른으로의 떠남이기도 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돌보던 베네딕토를 혼자 보내야 하는 유모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얘는 나 없이 아무 것도 못해요." 엄마가 이렇게 말하며 운다면, 나는 같이 울고 말 것이다. 이웃집에 채를 돌려줄 수 없으면 상황이 많이 어려워지나 보다. 그러니 통곡을 했겠지. 절박한 유모 한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첫 기적이었다. "어머니, 저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강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안심하세요." 하는 메시지를 남기며 속세를 떠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빠스가 되기 위해서, 돌봄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돌보는 존재, 그것도 하나님을 찾는 많은 이들을 돌보는 아빠스가 되기 위해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떠나야 한다. 떠나되 이제는 나보다 약해진 부모를 안심시키고, 그를 축복하고 떠나야 한다. 규칙서에서 아빠스에 관한 부분을 읽으며 엄마인 나를 비추고, 내적 여정을 동반하는 나를 비추고, 연구소를 이끄는 나를 비춘다. 나도 모르게 한 구절 한 구절 자꾸 읽게 된다. 내가 아빠스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을 맡은 자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게 두 아이를 맡겨 주셨고, 그 아이들 앞에서 어른으로 살라고 하셨다. 연구소로 모여든 사람들의 영적인 여정을 동반하는 자로 책임을 맡겨 주시고, 소장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하신다. 아빠스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셨으나, 예수님께 부름 받은 우리 모두는 그분의 대리자이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 아닌가.
 

아빠스는 집주인이 양들 가운데서 별로 이익되는 점이 없음을 발견하거든 그것이 목자의 탓인 줄로 알아야 한다. 

 

아빠스는, 자기가 제자들에게 부당하다고 가르친 바든 무엇이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 가르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버림받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며...

 

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선행과 순명에 있어 뛰어나지 않은 한 어떤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지 말 것이다.

 

아빠스는 자기의 지위를 늘 기억하고 명칭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많이 맡겨진 이에게는 많이 요구됨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영혼들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질을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유순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벌해야 한다. 또 각자의 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순응하고 알맞게 해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착한 양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빠스는 맡겨진 양떼에 대해 장차 받게 될 목자로서의 심문을 항상 두려워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 바칠 헴을 조심하는 동시에 자신의 헴에 대해서도 염려할 것이며, 자신의 훈계로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고치게 할 때에 자기의 결점도 고칠 것이다.

 
 
 

 

아주 작은 기념 성당이 있고, 성당 주변으로는 무덤이 있었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가 인상적이다. 무덤가에는 이 나무가 주로 심겨 있다. 하늘을 향해 올곧게 치솟은 나무의 형태가 하늘을 향한 인간 영혼의 본성을 담는다 여기는 것일까. 아필레는 아주 시골 동네이다. 우리나라 시골처럼 빈집도 많다고 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족이 산책을 하는 작은 동네 아필레의 골목을 걷는 시간이 참 좋았다. 유모의 깨어진 채처럼, 작은 것으로 울고 웃는 우리의 일상이 기적이고 신비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동네였다. 이런 골목을 걷이 참 좋은 것은, 돌아갈 내 일상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아빠스, 연구소의 아빠스로 사는 일이 무겁고 좋다는 생각에 이르니 말이다.       

SNS 보거나 폰에 빠진 것 같이 보이지만, 수도원 안내인의 설명을 열심히 필기하는 중이다.

 

스콜라티카 수도원, 수도원 순례기 다섯 번째만에 여성의 이름이 등장했다. 스콜라티카는 최초의 베네딕토 수녀원장이다. 스콜라티카 성녀의 이름이 붙여졌고, 성녀에게 봉헌되었을 뿐이지 그녀가 세웠거나 살았던 수도원은 아니다. 이 수도원은  베네딕토에 의해 세워진 12개의 수도원 중 첫 번째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수도원들이 그러하듯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복원되곤 하는데, 여기도 그 마지막 상흔은 세계대전이다.
 
이탈리아 최초의 인쇄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독일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와 일하던 두 명의 독일 수도사가 이곳에 와서 3년간(1465-1467) 머물면서 처음으로 네 권의 책을 인쇄했다고 한다. 안내하는 분은 아주 빠르게 지나치듯 언급했지만, 최초의 인쇄, 수도원에서의 인쇄는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중세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필사'였기 때문이다. 필사 자체가 영적 수련이며, 필사된 서적을 보관한 수도원 도서관은  중세 시대 지성과 영성을 담고 보존하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수도원 이름으로 등장한 성녀 스콜라티카의 개인 신상을 공개할 차례이다. 스콜라티카는 성 베네딕토의 쌍둥이 여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을 뿐 아니라 많은 동생들이 그러하듯 오빠가 하는 것은 다 좋아 보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빠가 로마 유학 중 겪은 실망과 환멸로 거기를 떠나 수비아코의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할 때도 스콜라티카 역시 근처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오빠를 좋아하는 동생, 오빠와 사이좋은 동생이니 그리했을 것 같지 않은가.

육안으로 볼 때 참 아름다운 회랑인데, 사진을 찍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빛과 그림자에 주목하여 그림자가 충분히 담길 때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내 교회의 그림자, 그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끌어는 것이 내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일이다.

 

인상 깊은 일화가 하나 있다. 남매는 각각 수도원장과 수녀원장으로 지내면서 일 년에 한 번 어느 농가에서 만나곤 했다고 한다. 동생 스콜라티카 성녀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오빠에게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자고 청했단다. 그러나 수도원 밖에서 잠을 자는 것이 규칙 상 허락되지 않는다며 오빠는 단호하게 떠나려 했다. (자신이 만든 규칙이었기에, 누구보다 엄격하게 지키려 했을 테니까) 오빠와 더 대화하고 싶었던 동생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러자 날씨가 험악해져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오빠 일행은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동생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 며칠 되지 않아 베네딕토는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동생의 죽음을 느낀다. 곧바로 동생의 시신을 모셔와 자신의 무덤으로 준비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 무덤에 안장하였다. 남매는 죽어서 나란히 한 곳에 묻혀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남매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남매가 서로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나란한 수도자의 삶과 여정 이야기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봉헌된 오빠를 좋아하고 따르는 동생,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하나님께 부름 받은 소명 안에서의 한계를 살려는 오빠.

 

순례의 시간과 여정이 길어지고 깊어지면서 짧게나마 함께 한 분들의 개인적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전부 가톨릭 신자이고, 난생처음 목사 부부와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열심 있는 개신교 신자들의 지나친 열정, 특권 의식으로 상처받는 가족들은 흔하다. 우리로 치면 말없이 착한, 조용히 하나님 사랑하는 권사님 같은 한 분이 계시다. 교회 일이 있다고 가족 모임은 등한시하고 얼굴도 비치지 않는 가족 개신교인 가족 이야기를 하신다. 눈물을 찍어내며 드문드문 이어가는 말씀을 듣자니, 단지 가족 모임에 오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냥 존중해 주면 좋겠어요." 누나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폭력적인 말들을 할지, 내 주변 어떤 교인들의 말을 떠올리면 금방 상상할 수 있다. 개신교인 가족, 개신교인 친구에게 받은 상처를 들으며 나라도 엎드려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다. 결국 기습 생일 축하 노래로 축하받은 남편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목사라는 가족의 대소사를 다른 형제자매에게 떠넘기고도 당당한 이들로 상처받은 사람 또한 흔하다. 물론 목사라는 '직업'은 결혼식이 있고, 가족 모임이 흔한 주말이 제일 바쁘고, 장례가 나면 휴가 중에도 복귀해야 하는 그런 '직업'이다. 직업으로선 그렇다. 남편은 어릴 적 친구 모임의 걸림돌이 되곤 한다. 모두 일하는 월요일에 쉬니 말이다. 우리 가족 때문에 시가의 가족 모임 시간 잡는 것이 늘 조금씩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직업, 서있는 위치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목사 아니라 누구도 가진 한계이다.
 
봉헌된 삶, 하나님께 드려진 삶은 결국 사람에게 드려진 삶이다. 하나님 일이라 퉁쳐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성직은 없다.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에 단호할 수밖에 없었던 베네딕토 오빠였을 것이다. 동생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오빠로서 오빠의 자리에 진정성 있게 충실한 것은, 오빠의 뒤를 따르는 동생을 위한 최선의 사랑일 수 있다. 문제는 사랑이다. 오빠를 조르는 동생 역시도 사랑이었으니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알아주셨을 것이고. 봉헌된 삶은 특혜를 누리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은 사랑에 봉헌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혐오한다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 베네딕토와 성 스콜라티카 남매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을 적신다. 편 가르고, 특권의식에 휩싸여 배제하고 혐오하는 부끄러운 내 마음 정화되기를.
 
 

버스 창너머 산 위에 보이는, 호텔 수영장에 비쳐서 보이는 몬테카시노 수도원 찾기!

 
베네딕토 성인이 정착하여 살다가 묻힌 곳, 베네딕토회의 모체이며 서방 수도회의 모델이 되는 수도원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이다. 글로만 보던 베네딕토 성인의 삶과 영성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처음 순례지 카사마리 수도원에서의 감흥이 가시지 않은 채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향했다. 지도책에서 본 것을 눈앞에서 바로바로 찾아내는 JP가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거기 산꼭대기에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보였다. 와아, 저기로 올라가는 거야! 저기야, 저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식상한 말은 꼭 이렇게 튀어나오곤 한다니까. 글로 보면서 한참 가까워진 베네딕토 성인이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에는 없었다.

 

로마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책은 <베메딕토 수도 규칙>이었다. 비행기 독서는 집중력과 이해력이 덜 필요한 소설 정도가 적당한데 무려 ‘교부 분헌 총서’로 발간된 책을 읽은 것이다. 읽힌다는 뜻이다. 술술 읽힌다는 뜻이다. 6세기에 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분명 성인이 이루고자 하는 수도 공동체의 이상은 높은데, 실천할 것들은 구체적이고 섬세하다. 숲과 함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보여주는 느낌이다. 이런 식이다.

식탐이 있거나 식사량이 많지도 않는 남편인데 나이가 들면서 전 같지 않다. 가만 두면 계속 먹는 아저씨가 되어간다. 남기기 아까우니 먹어 치우겠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뜻인기 싶고. 아무튼 비행기 안에서 나오는 식사, 간식을 남기지 않아도 탈탈 털어먹는 것이다. 거기 엮여 이건 남겨라, 저것만 먹어라, 잔소리하는 나도 싫고. 그런데 마침 읽고 있던 <수도 규칙>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옆구리 쿡쿡 찔리서 보여주었다. 큭큭거리며 알겠단다. 말이 필요 없는 가르침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과식을 피해 수도승이 결코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과식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다. ‘여러분의 마음이 과식으로 무뎌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수도 규칙> 39장 '음식의 분량'

성화에서 베네딕토 성인을 찾는 방법은 손에 든 규칙서이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써서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3년의 은수생활, 수도원 창설, 기도 생활… 그 모든 것보다, 아니  모든 것을 담은 규칙서를 만들고 문서로 남겼기에 베네딕토 성인이 베네딕토 성인 된 것 아닌가. 왜 굳이 그는 수도승들을 위한 규칙서를 만들었을까?

베네딕도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갔을 때 비꼬바꼬( Vicovaro) 수도원으로부터 수도원장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거듭되는 요청에 못 이겨 수락하게 되었다. 수도생활을 바로잡고자 하는 원장 베네딕토의 엄격함이 지나치다는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고, 불만은 불만에 그치지 않았다. 베네딕토를 독살하려는 음모가 꾸며진 것이다. 성인전에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암살을 위해 독이 든 포도주가 만들어졌고, 베네딕토 성인이 포도주에 강복하자 그 잔이 깨졌다는 것이다. <수도 규칙>을 번역 주해한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비꼬바로에서의 이 사건은 앞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지도하게 될 베네딕도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수도 이상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회심의 노력이 없는 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후에 그의 규칙서 여러 여러 곳에서 개인적인 수덕 노력과 형제들의 상호 교정을 강조하면서 악습을 고치는 일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말이 그렇지 얼마나 큰 충격이겠는가. 청운의 꿈을 안고 로마로 갔던 일, 거기서 느낀 환멸과 그로 인해 선택한 은수생활, 그로 인한 하나님 체험을 가르치고 나눌 공동체라 여겼을 텐데. 여러 이유로 거절했지만 결국 가야 했던 그 자리에서 이루고 싶은, 이룰 수 있다 여긴 수도 공동체였을 것이다. 배우고 따르기는커녕 뒤에서 독살 계획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알고 받았을 충격 말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서방 수도원 영성의 아버지'가 된 베네딕토는 깨달은 것이다. " 아무리 훌륭한 수도 이상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회심의 노력이 없는 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덕에 지금 우리 손에 <수도 규칙>이 들려져 있는 것 아닌가. 그로 인해 '서방 수도원 영성'의 아버지로 우뚝 서 있는 것 아닌가. 뼈아픈 체험 속에서 숲과 함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까지 보여주는 <수도 규칙>이 나왔구나 싶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이후 역사 속에서 네 번의 큰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577년 롱고바르도족의 침입으로, 두 번째는 883년 사라센의 침입으로, 세 번째는 1349년 대지진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2월 18일 연합군의 리더인 미군이 당시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하는 독일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125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수도원의 거의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된 상태이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놓은 수도원 건물의 스러짐을 막을 방법이 있겠는가. 세월의 흐름으로 부식되고, 전쟁으로 파괴된다. 마음에 지어진 성전만이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몬테카시노에서 <수도 규칙>을 쓰던 성 베네딕토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기대했는데 없었기에 내 마음에 더욱 농익혀 그분의 마음을 느껴볼 수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공동체에 대한 열정을, 좌절을, 물러남을, 나아가고 실패하는 여정을. 그 모든 것이 담겨 지금 내 손에 주어진 <수도 규칙> 한 권이다. 6세기, 여기 몬테카시노에서 규칙서를 만들고, 고치고, 썼을 성 베네딕토를 생각한다.  

 

* 순례 일정 중 순례기 쓰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는 수도원 호텔이라 와이파이도 안 됨) 그럼에도 결국 써서 남겨주신 6세기 성인의 열정을 이어받아 어떻게든 이어가 보기로 한다. (이 연재 재밌는 분? 응원 필요함!)

 


 
 

1203-1217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하는 이탈리아 라치오주 프로시노네 지방에 있는 카사마리 시토회 수도원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인데, 첫 순례지는 시토회 수도원인 카사마리(Abbazia di Casamari)이다. 시토회라니. 내게 수도원은 시토회(트라피스트) 수도원이다. 어째서 그러한지, 내 비밀 같은 이야기를 차차 풀어놓으려고 한다. (오늘 이야기가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들꽃은 어디나 있다. 개망초를 닮은 이 꽃의 이름은 '봄망초'이다.

 
나를 알고 남편을 아는 지인들은 '수도원 순례 여행' 간다는 말에 끄덕끄덕 하며 부럽다고 한다. 순례단에서는 신기한 일로 여긴다. 개신교인이, 그것도 목사 부부가 어떻게 여기를 함께 하느냐고.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 안면을 트고 대화가 길어지면서 듣고 또 듣는 질문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수도원 영성이 내 마음에 훅 들어온 것은 대학원에서 '영성신학' 과목을 듣던 그때였다. 생 티어리의 기욤<Guillaume de Saint-Thierry 1085-1149) 저작 『황금서간』을 한 학기 묵상 과제로 받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과제 앞에 '묵상'은 내가 붙인 것이다. 주욱 읽고 리포트 쓸 책이 아니었다. 한 학기 내내 영적 독서로 정하고 아침마다 한 절씩 읽으며 묵상하게 되었고, 그 책이 내 마음을 적셨다. 
 
이 책으로 쓰신 교수 신부님의 논문은 오늘날의 신학에 대한 성찰로 시작한다. "모든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과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 말해야 하고, 또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지 길을 제시해야 하는데 오늘의 신학은 자신이 ‘학문’인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 하느님과 사람 사이 가교임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삶과 분리되어 사변적 학문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시대는 바야흐로 영적인 시대가 되었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영적 갈망은 커지는데, 삶과 분리된 신학은 신자들의 영적 갈망을 채워주기는커녕 진정한 내적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사변적인 신학들이 진정한 내적 인간 양식을 전해주기는커녕, 내적 인간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아닐까 생각한다. 
 
논문을 읽고 공부하면서 영성과 신학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어려움이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을 알고 놀랐다. 12세기 스콜라신학이 등장하면서 수도신학과의 논쟁과 시대적 정황 속에서 어떻게 사변신학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는지 공부하며 수도원 영성에 깊이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생 티어리의 기욤은 스콜라 신학의 시작점에 있었던 아벨라르두스와의 논쟁했던 (당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논증''을 통해 삼위일체를 증명하고자 했던 아벨라르두스와의 눈쟁에서 결국 이기게 된다. 논쟁에서 이겼고, 결국 아벨라르두스는 패자가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12세기 이후 스콜라신학이 신학의 주류가 되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스콜라신학, 즉 학교신학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성당이나 수도원으로 모여들고 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수도자들의 일이 되었다. 수도자들은 학교를 운영해야 했고, 병자를 돌본다거나 다양한 일을 집행해야 했다. 이렇듯 일이 많아지자 수도자들은 독방에 머무르면서 고요히 기도하는 것에 방해를 받게 되었다. 이때, 스콜라신학과 강의로 인기를 얻는 세속 성직자의 도전으로 인해 수도자들은 그동한 해오던 교육 사업으로부터 물러날 뿐 아니라, 교육에 대해 등을 돌리기까지 하는 수도원들이 생겼다. 특히 12세기 수도원 개혁에 앞장섰던 시토회에서는 세상에서 더욱 물러나 광야에 자리를 잡고, 다른 일보다 손으로 하는 노동과 함께 기도하며 살게 된다. 외적인 학교를 배제하고 내적인 학교를 사는 것으로 전향한 것이다. 
 
생티어리의 기욤은 시토회 개혁을 주도하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친구였다. 윌리엄은 1119년 생티에리 대수도원의 수도원장에 선출되자 행정보다는 명상과 저술에 몰두하고자 했지만, 친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권고를 받고서 그 직위를 지켰다. 결국 이후에 베네딕토회를 나와 시토회로 입회하였다. 『황금서간』은 카르투지오 수도회 소속의 수도원을 방문한 뒤 거기 수도사들에게 쓴 편지이다. <몽디외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관상생활에 말 그대로 황금 같이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황금의 편지'로 불렸다. 12세기 쓰인 이 책을 한 학기 동안 읽고 기도하면서 '영적 독서'가 어떻게 기도인지 체험했다. 내적 인간을 위한 거룩한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황금서간』은 아침마다 내게 마음의 '독방'으로 들어가라 가르쳤다. 수도원의 독방은 내적인 독방이라고. 거기는 하나님과의 비밀 같은 사랑을 간직한 곳이다. 내게 그런 독방이 있다. 카사마리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앉아 드리는 짧은 기도가 우리 집 거실에 앉아 드리는 기도와 다르지 않으니 내가 가는 곳이 그 방이다. 


수도원 수사님께 직접 안내를 받는 행운을 누렸다. 중세 수도원에 관해 책으로 배운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듣는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내게는 흥미진진이었는데, 일행들은 슬슬 자리 이탈을 하기도 했다. 식사하며 들으니 지루한 내용 듣는 것이 힘들었고, 빨리 끝내길 바라면서 "이제 그만!"을 여러 번 외쳤다고 한다. 그러며 열심히 듣고 메모하는 개신교 신자를 보고 반성했다고도. 아, 내가 불안하면 남도 불안한 줄 아는 것처럼 내가 재밌으면 다른 사람도 재밌는 줄 아는 게 '내 중심' 사고라니까! 자신이 살고 있는 집, 그 집의 역사를 들려주는 재미에 아이처럼 신이 난  수사님이 귀여웠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100여 명이 살았는데, 지금은 15명의 수사님들이 살고 있다고. 이 넓은 집에서 15명이 사니, 그 집을 찾은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역사를 들려주는데 신이 나지 않겠나. 그리고 내가 가장 가깝게 느끼는 시토회의 저 수도복... 용기 내어 사진 한 장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사님들이 모여서 <베네딕토 수도규칙>을 읽었다는 방의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왼쪽은 베데딕토 성인, 오른쪽은 딱 봐도 시토회의 사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나는 이 두 분을 알고, 내가 이분들을 알기에 이분들도 나를 알 것이다. 내가 수도원에 닿은 이야기, 지금 여기 이탈리아에 있는 이야기는 1500년, 900여 년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던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야기이다. 

 

로마에 온 걸 환영한다니! 내가 로마에 왔구나! 순례 일정 중 분명 로마가 끼어 있는데 얼마나 안중에 없었는지,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하여 "Welcom to Rome"이란 전광판 글씨를 보고 "아, 나 로마에 온 거지... 로마행 비행기였어..." 싶었다. 이탈리아 독일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이다. '수도원'과 '베네딕토'에만 온통 집중하고 있어서 로마 일정은 보고도 본 게 아니었다. 
 
남편의 안식월과 결혼 25주년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는 긴 여행을 잡기 딱 좋은 시기였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온전히 3개월 '홀로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어떤 여행이든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겠는가 싶(은 쿨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 25년 만에)었다. 실은 그 와중에 내겐  '수도원 순례 여행' 씨앗이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였으니.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 '수도원 순례 여행'에 함께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렉시오 디비나'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도원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이다. 단순히 영성사가 아니라 말씀 묵상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도 결국 이 수도원 전통과 닿아 있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게 결혼 25주년 기념 여행은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 여행'으로 정해졌고, 나는 지금 로마에 와 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불린다. 물론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설자이다. 무엇보다 오늘 날 많은 수도회들이 따르고 있는 <베네딕토의 규칙서>를 지어 문서로 남긴 것이 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 규칙서를 읽으며 깜짝 놀랐다. 6세기에 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동체로 사는 삶과 관계에 대해 주는 지침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긴 여행에는 여러 권의 책을 심혈을 기울여 선택해서 가져오곤 하는데, 이번엔 거의 <베네딕토 규칙서> 한 권, 원 픽이다.
 
3년의 은수생활로 성 베네딕토는 오히려 유명해졌는데(은수, 숨어서 혼자 지내는 데 유명해지다니 말이다.) 은수생활 이전의 로마 유학 생활이 있었다는 것이 내게는 인상적이다. 학업을 위해 로마로 갔던 베네딕토 성인은 타락한 정치와 교회, 환락과 퇴폐로 물든 로마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그곳을 떠나 수비아코(Subiaco) 계곡의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거기서 하나님 체험을 하게 된다.
 
베네딕토의 여정에 몰입한 탓일까. 로마에 끌리지 않았다. 어서 몬테카시노(Montecassino) 수도원으로 날아가 그 회랑과 정원을 걸으며, 성당에 오래 앉아 기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환영한단다. 은수처의 기도 이전에 학업의 꿈을 품고 갔던 로마가 있었고, 화려하고 풍요롭고 타락한 로마를 살았기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였고, 떠나기도 하여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오늘 내 손에 남겨주신 베네딕토 성인이 되었다.
 
Welcome to Rome!
로마가 환영한단다. 나도 로마를 환영하기로 한다. 7시 30분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내려 어두워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어느 호텔에서 순례 여행 첫밤을 맞는다. 하루가 공중에 붕 떠서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르겠는 몸으로 로마의 밤을 맞았다. 물론 잠은 오지 않고. 덕분에 1일 차 순례기를 썼고, 두어 시간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당신도 이렇게 멀리 어디를 갈 때 그런 생각 들어?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아니, 전혀! 가는 곳을 생각하느라 그럴 겨를 없는데." 의외였다. 남편이 금요기도회를 인도하고 집에 오는 길, 급성 게실염으로 응급실로 가서 바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입원실 침대 밑에 놓인 구두를 보고 "어느 날은 신발을 신고 집에서 나와 다시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지지 못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다며 성찰한 내용을 설교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까지는 아니어도, 엇비슷한 느낌은 있을 줄 알았다. 전혀!란다. 순간 이 며칠, 아니 어디 떠날 때마다 무거워지는 내 마음이 새롭게 알아차려졌다.
 
어제 채윤이와 작은 다툼이 있었다.  "당신도 이렇게 멀리 어디를 갈 때 그런 생각들어?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아니, 전혀! 가는 곳을 생각하느라 그럴 겨를 없는데." 의외였다. 남편이 금요기도회를 인도하고 집에 오는 길, 급성 게실염으로 응급실로 가서 바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입원실 침대 밑에 놓인 구두를 보고 "어느 날은 신발을 신고 집에서 나와 다시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지지 못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다며 성찰한 내용을 설교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까지는 아니어도, 엇비슷한 느낌은 있을 줄 알았다. 전혀!란다. 이 며칠, 아니 어디 떠날 때마다 무거워지는 내 마음이 새롭게 보인다. 내가 그러면 남도 다 그런 줄 아는 게 인간이구나.
 
좋은 여행을 앞두고 설레는 적이 거의 없다. 꿈에 그리던 수도원 성지 순례이고, 그저 짐만 싸면 되는, 난생처음 해보는 패키지여행이다.. 가서 해야 할 강의도 없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끙끙거릴 원고도 없었다. 마침 집단여정 네 그룹도 모두 종강을 하고 여행 전 한 주는 헐렁한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떠날 날이 다가오면 마음에 먹구름 한 장이 드리워 일상이 묵직해진다. 오래도록 내 몸에 딱 붙어 있던 느낌이라 새롭지도 않다. 그런데 내 것이었구나. 나만의 것이었구나. 여행 출발은 고사하고 달력의 빨간 날만 봐도 설렌다는 연구소 은경샘의 말이 동화 속 대사처럼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채윤이와 작은 다툼이 있었다. 다툼이랄 것도 없다. 내가 괜히 아이 마음을 상하게 했다. 아빠 생일 선물로 아이들이 바지를 하나 사주기로 했는데, 미리 봐둔 바지를 사러 아빠와 딸이 나갔다. 채윤이가 거기 어울리는 남방을 골라 사주고는 둘이 기분 좋게 들어왔다. 내 눈엔 사이즈가 커 보이는데 오버사이즈로 입는 거란다. 내가 볼 때는 아빠 스타일이 아니라는 둥, 불필요한 말을 해댔다. 아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채윤이 엄마는 늘 이런 식이지!) “엄마 눈이 문제야. 미안해.” 뒤늦은 사과와 수습을 했고, 잠들기 전 채윤이도 “엄마 내가 아까 과했어.”라고도 했지만,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까지, 아니 지금까지 마음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공항에서 모든 수속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러 앉았는데,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채윤이와의 마지막 시간은 이 감정일 텐데, 하는 생각에 미쳐 남편에게 물은 것이다. 지나친 상상이며 비합리적 걱정인 것을 알기에 질문이 나왔겠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흐릿하지만 또렷하다고나 할까. 흐릿한데 마음에서 지워진 적은 없는 느낌이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밥을 드시고 나갔던 그 겨울의 밤 같은 새벽. 밖이 아직 캄캄했었다. 나갔던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모자를 달라고 했다. 현관으로 다시 들어선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 멀리 떠나는 아버지나 엄마는,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상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버릇이 있(었구나를 이제 다시 알겠)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처럼 흐릿하지만 지워진 적은 없는 상상이다.
 
남편이 말했던 '내 구두를 신고 집에 돌아가지 못할 날이 있겠구나!' 하고 깨달은 것은 어른의 기억이며 의식적 성찰이고, 멀리 갔다 집에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는 존재의 흠처럼 남은 정서적 기억이다. 거기로부터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다.. 무의식적 신념은 힘이 세다. 이름을 붙이지 못할 때는 더욱 그렇다. 좋은 여행을 앞두고 좋아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 준비할 것이 많네, 가기 전에 처리할 일이 수두룩 하네, 징징거리며 투덜대며 두려움의 버튼만 눌러대는 것이다.
 
공항이다. 먹구름에 이름을 붙이고 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익숙한 슬픔이 다시 밀려온다. 이것 그대로 가지고 떠난다. 이탈리아나 독일 수도원 어느 곳에 두고 집으로 올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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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은 사람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풍경이라도 사람이 담겨야 내게는 비로소 의미가 된다. 내 평생 뉴질랜드 남섬 여행만큼 멋진 풍경을 몰아서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그 배경의 사람이다. 남편과 둘이 여행하면 좋은 풍경에 내 독사진, 몇 장 안 되는 JP 사진, 각도 참 안 좋은 셀카 정도인데. 이번 여행에선 커플 사진을 많이 건졌다. 그 모든 사진 중 참 좋은 사진은 넷 단체사진인데,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너무나 자랑하고 싶어서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페이스북에 공개했었다. 사진마다 표정이 좋고, 표정보다 더 좋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중에서도 최애는 후커 밸리 트래킹 끝에서 만난 마운틴 쿡 배경의 빙하호수 배경의 네 인물이 담긴 사진이다.

 

고고씽 뉴질, 남섬 원정대 담당 업무 : JS 대장 / YS 회계 및 실세 / JP 총무 / SS 서기 및 유흥
 

남섬 여행을 위한 공식 첫 회의에서 업무분장이 있었다. 참으로 적절한 업무분장이었고, SS를 제외한 나머지 원정대는 정말 감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해 주셨다. 벌써 두어 달 전의 기억이 된 이 여행의 제목은 내게 "얹혀간 여행"이다. '기록'에 관한 한 각자의 방식으로 타고난 네 사람이라 내가 담당한 '서기'의 의무는 의미가 없었다. 여행 계획과 여정과 회계에 관한 정확한 기록, 여행 후 디테일한 기억의 기록에 얹혀서 여행을 누리고, 다녀와서는 힘들이지 않고 추억을 복기한다. 이렇게 여행하면 한 번쯤 싸워야 하는데... 우리 왜 안 싸워? 이런 심정. 심지어 돌아와 해단식 같은 지난 주일 모임에서도 한 번쯤 싸웠어야지, 우리 왜 안 싸웠어? 서로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우리 왜 안 싸웠을까요?

 

(다 커서 찾아간 교회를 모교회라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모교회에서의 인연이다. 둘 다 이런저런 교회 경험과 환멸 속에 방황하다 찾은 교회였다. 그 청년부에서 만나 결혼했고, 거기서 두 아이를 낳았고, '한영동산'이라 불리던 교회 앞의 동산은 우리 아이들에겐 유년 시절 비밀의 숲이다. 좋았던 교회이다. 어느 순간 교회를 옮길까 고민하던 시점이 있었다. 뭔가 공허하고 채워지지 않는다는 느낌이었고, 교회 문제라기보단 우리 문제가 아닐까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형식적 교회에 만족하지 못했다. 진정한 공동체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일궈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정말 '공동체'에 목을 매는 커플, 한쌍의 바퀴벌레이다. 공동체를 찾고 싶었다. 그때, 교회를 '가정교회 시스템'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정교회로의 전환이 급진적이라 판단되었던 것일까. 여성들 위주의 구역모임을  '가정(또는) 부부 중심'의 소그룹으로  실험적으로 운영하는데 우리 구역이 뽑힌 게 신의 한 수(또는 악마의 한 수)였다. 그로부터 시작한 가정교회 시스템이 정말 좋았고, 교회를 옮길 마음이 싹 사라졌다.(아, 그러고보니 남편은 가정교회 주제로 논문을 썼었네!) 그리고 그때가 뉴질 원정대 JS, YS, JP, SS 드림팀 구성의 시작이었다.  

 

실은 이 처음의 이야기들을 잊고 있었다. 뉴질랜드 여행은 '뉴질랜드 펠로우십 교회'를 돕는 일로 시작되었다. JS 대장님의 오랜 Kosta 인연으로 개척부터 도운 교회이다. 개척 후 5년의 세월이 흘렀고, 꾸준히 성장하는 교회의 리더십을 새롭게 하는 일을 돕고자 하는 것이 여행의 주요한 목적이었다. 어... 어... 하다 얼떨결에 합류한 NFC 리더십 수련회를 비롯하여 주일 예배, 무엇보다 수시로 있던 모임에서 나는 적잖이 감동을 받았고, 많이 부러웠다. 인생 가장 치열한 시간을 사는 세대였는데, 교회를 향한 열정으로 그냥 시간과 마음을 내는 사람들이었다. 아, 나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내 교회가 내 삶이었던 적이 있었지. 교회가 공동체였고, 공동체가 그냥 교회였지. 그때가 그때였다. 서재석 목짠님, 박영수 목녀님과 함께 했던 드림목장 시절이었다. 
 
수련회도 했고, 주일 예배도 함께 했고, 그리고도 모여서 저녁 먹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월요일 밤에 이들은 또다시 모였다. 소그룹 리더들이 모였다. 바로 그 모임에서 지난 시절 우리의 드림, 교회와 공동체를 향한 꿈이 모두 소환되었던 것 같다. 모임이 좋았다. 와하하하 웃으며 질의응답을 하는 중 소그룹에서는 리더와 함께 리더를 돕는 헬퍼가 꼭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 남편이 "제가 부구역장이고, 대표님이 구역장이셨다니까요."라고 했는데. 아, 그랬었다. 실험적 부부구역에서 구역장과 부구역장이었었지! 그리고 시작된 가정교회인 '드림목장'에서 공동체의 꿈을 살아봤던 것 같다. 우리 부부로서는 청년부 리더로 살아온 세월이 있었지만, 앞선 세대들과 마음을 나누는 교회를 처음 경험해 본 것이다.

 

그땐 그랬지...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뜨겁게 달구었던 공동체의 경험, '가정교회'는 '모' 교회로부터 떠나와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시기도 이유도 조금은 달랐지만 결국 두 분과 우리는 그 행복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거기를 떠나왔다. 그리고 '드림목장'의 경험을 기쁘고 아프게 간직한 채 교회를 향한 '드림'을 일정 정도 접고, 접은 만큼의 실망감과 그만큼의 허허로워진 마음으로 각자 낯선 교회 공동체에 어정쩡하게 몸담고 있다. 그래도 만나면 여전히 대화의 주제는 '교회'이다. 뉴질랜드 펠로우십교회, 갈등과 반목으로 상처받아 피 흘리는 모교회, 그리고 여러 교회, 우리들의 교회 이야기들...
 
목짠님, 몽년님. 좀 보편적인 호칭으로 바꿔보고 싶은데 여전히 두 분을 이렇게 부르게 된다. 실험적 공동체, '부부구역' 시절의 구역장과 부구역장의 관계로 시작한 드림목장 시절의 호칭이다. 교회와 공동체가 내 안에서 하나였던, NFC 교회 형제자매들의 열정에서 보았던 그 시절의 호칭이구나 싶다. 좋은 경험일수록 카피되지 않는 것이다. 그 시절로 족하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만남으로 족하고, 한 번쯤 있어줘야 할 싸움도 없이 풍성한 여행으로 족한 이 여행이 교회이고 공동체이다. 뉴질랜드, 펠로우십, 교회는 우리 넷 사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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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서천군 한산면 성외리 한산제일교회, 목사관. 내 고향집... 번짓수... 도 알았는데 생각이 안 나네. 군산은 한산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여서 가장 먼 곳이었다.군산은 배를 타야 가는 곳이었다. 장항으로 가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넜다. 그릇을 새로 산다고 엄마 아버지가 군산에 가야 했었고, 늘 입이 헐곤 했던 아버지가 입에 바르는 약을 사러 군산에 갔다. 그 먼 군산에 나는 피아노를 배우러 다닌 적도 있다. 초등학교 중학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배를 타고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한산에서 자란 내게 군산은 가깝고도 멀고, 꽤 중요한 곳이었는데... 그저 복성루 짬뽕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중요한 조각이었는데. 

 운전하고 내려오느라 힘드셨겠다는 목사님의 인사에 괜찮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툭 나온 말이다.  '제가 자가 운전으로 내려올 수 있는 남방 한계선이 군산이에요. 적절한 운전 시간이었어요.' 2시간 30분 정도 걸리니 정말 그렇다. 첫날 집회를 앞두고 식사하면서 목사님께서 "군산이 전라도이지만 충청도 인접이라서요. 충청도 정서와 매우..."라는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알아들었다. 아! 우리 엄마 사투리는 참말로 충청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는 그 무엇이었지! 순간 많은 기억과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충청남도 아래쪽 끝의 한산, 전라북도 위쪽 끝의 군산. 군산은 한산에서 도 경계를 넘어가야 닿는 곳이었구나! 

 실은 작년 여름 교회 전교인 수련회를 거의 한산이라 할 수 있는 '서천'에서 했었다. 수련회에서 맡은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서 꽃을 사러 군산에 갔었다. 차로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정말 가까운 곳이었다. 배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충청도와 전라도를 갈랐던 금강에 다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군산은 그냥 복성루 짬뽕의 군산이었지 내 어릴 적 군산이 아니었다. 첫날 강단에 올라 교우들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어떤 지점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어떤 표정들에서 익숙한 무엇을 느꼈다. 아, 여기 한산과 멀지 않은 곳이야! 그 순간 엄마와 아버지와 내 어린 시절과 한산의 교회와 목사관이 마음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군산에서 사경회 강사로 며칠을 보내면서 어릴 적 한산에서의 부흥회 생각이 났다. 부흥강사는 늘 우리집에 머물곤 했는데, 끼니때마다 잔치도 그런 잔치가 없었다. 부흥회는 엄마와 집사님 권사님에게는 요리실력 부흥회였다. 끼니마다 산해진미였다. 우리 집은 바로 호텔이 되었다.  말썽꾸러기 동생은 부흥회 때마다 외갓집이나 이모집으로 유배되어 갔고. 참으로 극진했었다. 부흥강사, 목사를 향한 극진함이 그리 위험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돌아보면, 목사였던 아버지를 향한 극진함이 목사가 늦게 얻은 딸인 내게로 흘러왔고, 생애 초기에 나는 큰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목사의 딸인 것이 부끄러움도 결핍감도 아니었다. 신앙 사춘기로 온갖 반항의 가슴앓이를 했지만 결국, 더욱, 오히려 더욱 교회의 딸인 나를 확인하는 자리로 돌아온 것은 어릴 적 받은 극진한 사랑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경회 강사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극진함은 세심함이었다.  호수 뷰의 호텔 숙소며, 부러 하루 오전 시간을 텅 비워 잡아주신 일정은 세심한 극진함이었다. 생각지 못한 선물이었다. 느긋하게 호숫가 산책을 하고(주일 아침에도 6시 전에 일어나 느긋하진 않아도 여유는 있는 이른 아침 산책을 했다) 볕 좋은 창가에서 강의 숙지와 독서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은파호수공원 산책길은 다양하기도 했다. 호수 바로 옆으로 걷노라면, 어느새 오솔길, 오솔길을 걷노라면 늪지대를 지나는 듯한 길. 걸으면 무조건 행복해지는 내게 최적의 쉼이었다. 숙소 공간도, 텅 비워진 시간도 목사님의 세심한 배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딜 가든 목회자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으로 내상을 입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분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전하게 된다. 한때 존경의 대상이었으나 어느 순간, 아니 서서히 빌런이 되어간 그 목사들은 원래 그런 존재였을까. 잘 위장하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더는 정체를 숨기지 못하게 된 것일까.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그런 존재가 된 것일까. 그냥 '고산병'이라고, 높은 산에 올라가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그 병과 같다고 진단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권력이 생기고 자리가 높아지면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라고. 나는 그것을 '황금투사'라고 이름 붙이곤 하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 이야기를 해야 했다. 
 
목회자에 대한 극진한 대접이 고산병을 낳고, 황금투사의 드라마가 된다. 위험하다.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시절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 지도자, 특히나 영적 지도자를 향한 극진함은 배우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나를 추앙해요!"라고 말하는 염미정의 말에 알콜중독자 구씨는 치유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염미정을 추앙하는 일은 염미정이 아니라 구씨 자신을 위하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추앙하는 순간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앤 율라노프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더 큰 권위에 연결되어 존중하며 성장하고픈 욕구가 있다. 그 욕구는 나를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 향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닿는 가교가 된다. 기꺼이 두려움 없이 존경하고 극진하게 대할 대상이 없어 슬픈 시절이다. 그런 대상 따위 필요 없다는 상처 입은 자의식이 더욱 슬픈 것인지 모르겠다. 
 
한산과 군산의 사랑을 생각하고,
어느 산 정상 근처에서 혼미한 정신으로 헤매고 있는 고산병 환자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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