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채윤이가 스물네 살 청년이라니, 매일 마주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 청년의 힘과 성장하는 에너지, 푸르른 생기와 함께 살면서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채윤이 태명이 "푸름이"였다. 지난 토요일에 함께 영화 <위키드>를 보고 밥을 먹으면서 이 영화와, 전신인 뮤지컬, 또 그 전신인 <오즈의 마법사>까지 세계관과 음악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내는 채윤일 보고 내가 탄성을 질렀다. 오늘 아침에는 영화에서 들었던, 음악을 자기 빛깔로 연주하고 녹음해서 바로 들여주었다. "주님, 과연 이 아이를 제가 낳았단 말입니까!" 과장이 아니다. 내가 낳았지만, 이 아이 존재의 크기와 무게는 내가 감당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청년이다.   
 
동생 군대 보내고 외동 체험 중인 덕에 한 달을 생일 축하로 지냈다. 유학을 위한 오디션 준비로 갈아 넣었던 시간을 끝내고 엄마 아빠와 제주도 여행을 가야겠다고 했다. (여행으로 생일 선물 퉁치겠다던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11월 초에 셋이 짧은 제주 여행을 했다. "내 생애 처음은 이런 가족이었잖아." 했는데 맞다. 이 아이가 우리에게 와서 살아보지 못한 삶을 열어주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아주 조그만 아이가 아장아장 걸었던 그런 날이 있었다. 둘이 호흡을 맞추고 "우웃~짜" 하고 번쩍 들어 올려주면 깔깔거리던 그 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다.
 
지난주 어느 날, 종일 있던 일정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왔다. 지하철로 마중 나온 남편이 채윤이가 저녁을 안 먹었다고, 호빵을 사다 달라했단다. 편의점 몇 군데 들렀는데 없더라며. 함께 마트에 가서 호빵을 샀다. 영어 시험을 앞두고 긴장했던 채윤이가 호빵을 보고, 아니 엄마를 보고 재잘거리다 얼굴과 마음이 확 풀린 게 느껴졌다. 주문했던 반건조오징어도 도착한 터라 호빵을 데우고, 오징어를 구워주니 애가 살아났다. 생기가 도는 채윤이를 보니 내 마음도 함께 살아나 긴 하루의 피로가  싹 달아났다. 오징어를 굽는데 속에서 노래 한 자락이 스물 거리다 입으로 튀어나왔다.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옆에서 따라 부르면서 채윤이가 그런다. "이거 무슨 노래야? 나 왜 이 노래 알아?" 내가 네게 불러준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니가 모르면서 아는 노래, 알면서 모르는 노래가 어마무시할걸!
 

 

맛있는 걸 먹고, 셋이 재미있다가도 현승이 생각이 불쑥불쑥 난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채윤이가 먼저 그런다. "아, 김현승 보고 싶다!" 채윤이 생일 축하를 하면서도 현승이 생각이 난다. 군인 월급 받아서 누나 생일 선물 사라고 돈을 보내줬다니... 짜식! 하면서 셋 모두 울컥해졌다. 현승이 없이 보낸 세 식구 3개월. 부재로 그리운 마음이 크면 클수록 오늘 함께 하는 시간에 감사하고 누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언젠가 채윤이도 어딘가로 떠날 것이고, 그러면 현승이와 셋이 그리움을 섞어 맛있는 걸 먹고 놀고 할 것이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누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노래일 것이다.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제주 여행 중 셋이서 많이 걸었다. 바닷길을 걷고 숲길을 걸었다. 걷다 돌고래를 보기도, 잔뜩 먹고 배 두드리면 밤길을 걷기도 하고, 걷다 비를 쫄딱 맞기도 했다. 20여 년 전과 그림이 많이 달라졌다. 우뚝 솟은 두 김씨 사이에 끼어 호빗족 내가 걷는다. 아빠 김씨가 놀린다. ”여보, 우웃~짜 해줄까? 채윤아, 니네 엄마 우웃짜 해주자.” 언제 이렇게 컸나. 아이가 크고 나는 작아진 오늘이 참 좋다. 채윤이 생일 파티를 하면서 어렸을 적 자장가로 틀어주었던 음악을 BGM으로 깔았다. 카세트 테이프로 사서 늘어지도록 틀어주었던 음반인데, 이사 다니면 잃어버렸고. 늘 그리웠는데 어느 날 유투브에서 채윤이가 찾아냈다. <Bless My Little Girl>. 아기 침대에 눕히고 조명을 어둡게 하고 끝없이 음악을 들려줬었다. 요즘은 내가 밤에 글을 쓰면서 틀어 놓게 된다. 어제는 혼자 이걸 들으며 "늙어서 침대에서 누워 지내야 할 시간에 이 음악 틀어 달래까?" 했다. 채윤이와 함께한 어제들이 내겐 선물이었고, 모든 내일들이 선물이겠으나, 가장 큰 선물은 오늘이다.

Presnt is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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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중 한 달 제주에서 지내는 남편에게 다녀왔다. 애월의 어느 편집샵에 들어가 구경을 하다 둘이 함께 "김채윤!" 했다. 우리 채윤이 닮은 브로치, 그리고 약간 현승이 같은 강아지...를 선물로 사 왔다. 아우, 귀여워... 이것들... 김채윤, 김현승! (마음이 간질간질)

받아 든 스물다섯 채윤이는 "인정이 되네. 내가 봐도 나네. 그런데 어디서들 이런 걸 잘도 골라 와?" 하면서 되려 엄마 아빠를 귀여워했다.
 
누가 누굴 귀여워 하는 거?
 
자주 집을 비우고, 주일에는 남매끼리 교회에 가는데. 목사 아빠 둔 죄로 "내 교회" 아닌 "아빠 교회" 다니게 하는 것이 늘 미안한 일이다. 아빠 때문에 다니는 교회인데, 아빠 없이 둘이 가서 있다 오는 생각을 하면 주일마다 마음이 찌릿하다. 우리와의 인연으로 교회에 온 벗들이 있는데, 마음이 쓰인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왔는데, 채윤이가 식탁에 앉아 프라이팬 째로 잡채를 처묵처묵 하고 계셨다. 교회 설립 기념 주일이어서 점심에 반찬이 많았다고. 집사님들이 남은 반찬 싸고 있는데... 챙겨주실 것 같은 집사님 곁에 알짱거려서 얻어 왔다며. 일하는 월요일 퇴근하고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
 
다음 날 점심에 달래간장에 비벼 먹도록 잡채밥으로 줬더니 "이렇게 정갈한 밥상은 오랜만이군!" 하면 또 좋아하셨다. 귀엽고, 대견하며, 엄마를 귀여워하는, 고마운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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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면 김치찌개가 끓여져 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돌아온다. 긴 여행을 떠났다 집에 왔을 때, 김치찌개가 끓여져 있는 집이면 좋겠다. 몇 년 전, JP이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을 때, 여행 내내 체한 느낌으로 식사를 거의 못했다고 했다. 김치찌개였나, 김치말이국수였나.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딱 맞춰 준비했는데, 그걸 먹자마자 체기가 쑥 내려갔고 깨끗하게 나았다고 했다. 집은, 집밥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문제는 내가 집에 없으면 그걸 해줄 엄마가 없다는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깨끗하게 청소된 거실에 채윤이 마음이 담겨 있었다. "청소는 해놨네!" 기특하고 대견하다 싶었는데. 주방에 가서 놀랐다. 가스렌지 청소까지 해놓은 것이다. 하이고, 이건 대견한 것이 아니고... 나마스떼!다!!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 남비가 올려져 있는 가스렌지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답다. 내가 가르치지 않은 예쁜 짓, 생각지 못하게 마주한 아이들의 선함에 경외감을 느낀다. 주말에 집에 왔다 간 현승이는 화장실 청소를 해놓았다고 한다.
 
나마스떼 채윤, 나마스떼 현승!     

I honor you!
 
 

라마스떼, 콩나물

현승에게 콩나물 심부름을 시켰다. 보내놓고 일을 하다 문득 정신 차려보니 애가 들어올 시간이 훨씬 지났다. 집 바로 앞이 가겐데. 무슨 일인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튀어 나갔는데 헉헉대며

larina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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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넘은 육아일기 "푸름이 이야기"의 푸름이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푸름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 말이 죄다 자랑인 듯하여 도통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간단하게 자랑하자면, 좋은 재즈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과 공연을 하는 영광을 누렸는데, 교수님이 보통 교수님이 아니라서 이게 좀 믿어지지도 않는 일인데. 열심히 잘했습니다. 

 우리 채윤이 대학생활 4년은 보석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친구면 친구, 공부면 공부, 음악이면 음악 모두 A+입니다. 친구와는 치열하게 싸우고 치열하게 화해하고 치열하게 좋아하고 죽도록 놀며 합주하고.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것처럼 교양과목 하나까지 재미있게 공부하고, 음악은, 아... 우리 채윤이 음악은... 이제 엄마가 감히 논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네요. 졸업공연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구들을 돕느라 제 곡 만들 시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 곡도 멋지게 작곡했습니다. 고마운, 멋진 딸입니다.

“투철한 진리탐구 의식을 가지고 시종일관 성실하게 학업에 임하여 발군의 성적을 나타낸" 것 인정! 완전 인정! 채윤이 졸업식 즈음하여 어떤 노래의 멜로디가 혀끝에서 달랑거렸는데 뭐지? 했더니 "Sound of Silence", 영화 <졸업>의 OST네요. 멋진 재즈 언니로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연습, 또 연습에 매진했는지. 만 시간, 이만 시간의 혼자만의 연습 시간,  Sound of Silence! 
 
우리 채윤이 "되어야 할 자기"가 되어
그 누구도 아닌 채윤이로 활짝 꽃 피우길...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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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이 복닥거리다 셋이 남았는데, 하나가 나간 자리가 '하나' 이상으로 크게 느껴진다.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해서 각자 현승의의 빈자리를 마주하다 보니 셋이 뭔가 끈끈해지는 느낌이다. 이런 시간도 금방 지나고 익숙해지겠으나. "동아리 면접 봤대... 얘기 들었어?"  현승이로부터 오는 작은 소식 하나에 연연하는 것으로 하나가 되기도. "엄마, 나 4월에 포항에 한 번 가려고. 현승이가 혼자 코인노래방 갔대... 나 너무 마음이 그래." 자기 방식대로 그리워하기도. 

채윤이는 제 생애 최초에 경험했던 가족을 다시 누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현승이는 태어나보니 누나가 기본설정이고 네 식구가 기본값이었지만, 채윤이에게 현승이는 자기 자리를 뺏으며 들어오는 존재였고, 엄마 아빠를 독차지하며 누렸던 세계를 뒤흔든 빌런이었으니... 무슨 이유에서든 셋이 끈끈하고, 그러다 보니 멀리 있는 현승이와도 더 깊이 연결되는 느낌이다.

 

끈끈하다 해도 각자 바빠서 룸메 셋이 사는 느낌이지만 말이다. 출근하고 학교가는 종필과 채윤이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나갔는데. 텀블러 뚜껑을 닫으며 채윤이가 그런다. "아, 이렇게 가져가면 눈물 날 것 같은데..." "왜애?(또 현승이 생각?)" "아니, 어렸을 때 엄마가 물이나 음료수 같은 거 싸주면 학교에서 먹을 때 눈물 날 것 같았어. 엄마가 보고 싶어서...."

 

아... 이 말에 내가 눈물이 나네. 우리 엄마 버튼이 눌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없는, 내가 모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인생이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는 것의 현타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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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잔소리 안 해?
응?
운동화 치우라고 잔소리 할 때가 됐는데 안 해서.
해도 어차피 안 들을 거니까.
오오, 성장했는데!

엄마는 성장하고 있쪄요... 우쭈쭈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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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너무 자고 싶은데… 씻기가 싫지?
어, 너무 피곤한데… 씻는 게 귀찮아서 잘 수가 없어.
둘 중에 대표로 씻는 게 되면 좋겠다….

(침묵)

엄마, 예전에 스마트폰 없을 때는 뭘 했어? 씻기 싫을 때 뭘 했어?
그러게… 뭘 했을까?

(침묵)

너무 귀찮다…. 에잇, 씻을 거야! (나 벌떡!) 채윤아, 엄마 일어났어. 이 어려운 걸 해냈어!
그러면 나도 일어날 수 있어! (채윤 벌떡!)

주일 늦은 밤, 각자 치열하게 달린 엄마와 딸이 식탁 앞에서 발 꼬옥 마주 잡고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시간 죽이고 있다. 원하고 바라는 건 침대에 눕는 것인데 그럴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헤매는 영혼 둘.

마침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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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필을 시작으로 채윤 현승까지 기침감기가 한 바퀴 돌았다. 

덕분에 허브티 마시기가 생활화 되고 있다.

꿀차는 한두 번이고, 부담없이 하염없이 마시게 되는 게 허브티니까.

티백으로 사놓으면 알아서들 마시니 간편하다.

 

레몬밤을 처음으로 마셔본 채윤이가

"어우, 이거... 어우, 토마토 상한 맛이야. 레몬 맛이 하나도 안 나."

레몬밤 티가 얼마나 좋은데! 무슨 토마토 상한 맛이야? 하고 말았는데.

다음 날, 혼자 있는 시간에 레몬밤 티를 마시는데...

와, 토마토 상한 맛! 레몬밤 허브향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다.

리스펙 김채윤! 

 

페퍼민트 마실까, 카모마일 마실까... 고민하던 채윤이가

"엄마, 사실은 나는 이게 제일 마시고 싶어. 여기다 물 부어서 마시고 싶어."

라고 했다.

멸치, 새우, 다시마... 잘 말린 복어가 들어가서 더욱 시원한 '복 다시팩'

맛을 아는 채윤이, 향도 아는 채윤이.

리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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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간다고 나서던 채윤이가 돌아서며 말했다. "아우, 귀여워. 귀여운 엄마를 두고 나가는 게 싫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이게 무슨 '하룻강아지 범 귀여워하는' 소리냐. (어쩔 수 없는 것이 하룻강아지 사이즈가 범을 압도하여! 엑스라지 사이즈 하룻강아지가 아침에 일어나 스몰 에스 범에게 "엄마아~"하고 달려들어 안기면, 안기는 게 아니라 '엄마아~'를 폭 안아주는 형국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귀여운 아이 두고 출근하는 심정은 엄마가 안다. 니 어릴 적에, 증말 귀여워 미칠 것 같은 니를 두고 출근하는 엄마 마음이 그랬느니라,라고 말했더니. 으으...(닭살)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하고 나갔다. 아, 자기 두고 출근하는 게 뭐가 그리 아쉬웠냐고 엑스라지 사이즈 하룻강아지가 물었다. "니가 하루 종일 순간순간 귀여울 텐데, 그 순간을 놓치는 게 아쉬웠어."라고 나오는 대로 답을 했더니. 아, 그게 아쉬웠던 거구나 깨달아졌다. 

 

지금 이 순간,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것처럼 아쉬운 것이 없지. 치명적인 손해지.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다 어느 새 보면 날이 어두워져 있다. 요기까지만 쓰고 나가야지, 몇 페이지까지만 읽고 나가야지, 하다 보면 결국 나가지 못한다. 이 좋은 날들, 지금 이 순간을 자꾸 놓친다. 며칠 전에도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고 뭉기적대고 있는데 귀는 아니고 마음인지 어딘지에서 막 이 가사가 막 울렸다.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하려나" 고개 돌려 베란다 밖 하늘을 보니 거기서 나는 소리였나 싶기도 하고... "이런 날에 집구석에 처박혀서 책이나 파고 이겠다고? 미쳤어, 미쳤어." 하는 소리로도 들렸다. 그렇게 끌려 나간다. 이 소중한 순간을 놓칠 거야? 하는 소리에.

 

이 동네 참 희한하다. 탄천을 따라 산책 하는데, 그 옆길로 살짝 올라가면 농로다. 논이 있으니까 농로겠지? 논을 지나 보이는 차들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이다. 깜짝 놀랐다. 한동안 안 찾았더니 그새 겨울 논이 되어버린 것이다. 불과 한 달 전에는 채 황금물결도 되기 전이었다. 곧 황금물결이겠네. 꼭 와서 봐야지. 결심했었는데, 놓치고 말았다. 어느새 추수 끝난 텅 빈 겨울 논이 되고 말았다. 소중한 순간은 이렇게 놓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는 늘 지금 여기의 은혜이다. 주님의 은혜를 아니 받고 못 들은 체하면 이렇게 된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게 된다. 놓치고 나서는 아쉬워해도 소용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겨울 논을 즐기는 수밖에 없다. 엑스라지 사이즈가 된 하룻강아지 딸의 품에 안겨 즐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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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밥 먹고 바로 눕는다.
축하해. 소 돼!
엄마도 곧 엎드려서 잘 거잖아. 매일 엎드려서 낮잠 자잖아.
나는 낮잠 안 자.
맞아, 엄마는 낮잠 안 자. 그런데 우리 집에 이런 풍경이 있어.
(사진 제시) 관광 명소야. 관광객이 기념사진 찍으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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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 첫 음반이다. 내게는 그저 좋은데, 어떻게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다. 이 한 곡에 담긴 시간과 고민 뿐 아니다. 첫 음반을 내기까지 걸어온 채윤이 음악의 길 구비구비의 이야기들까지. 채윤이 자신조차 모르는 것을 알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만난 비와 바람과 들꽃 한 송이... 아니 어쩌면 채윤이의 길이 아니라 나의 길이겠다. 채윤이를 바라보면서 걸어온 나의 길. 아, 자기 몰입 쩐다. 딸의 첫 음반 소개를 하다 내 얘기로 깔때기를 대네. 다시 주인공 얘기로! 채윤이는 나도 닮고 제 아빠도 닮아 신기한 생명체다. 제가 좋아하는 일만 하려는 것은 나를 닮았고, 웬만해서는 내놓지 않고 끝까지 고치고 연습하고 또 고치고 연습하는 건 아빠를 닮았다. 세상 어렵게 살 스타일이고, 마음 고생 많을 타입니다. 곡 하나 만들고 내놓는 과정을 지켜보니 더욱 그렇다. 곡은 참 좋다. 음악과 제목이, 제목과 곡 소개가, 곡 소개와 음악이, 음악과 앨범 자켓이 하나처럼 어우러진다. 남편이 페이스북에 소개 글을 올렸는데, 진심 어린 축하와 격려가 쏟아졌다. 초보 음악가의 음악이 뭐 그리 대단하랴. 한 존재가 자기로 꽃 피워가는 것을 알아봐 주고 기뻐해 주는 마음들일 것이다. humane!! 제목 참 잘 지었다. 우리 채윤이.


벅스에서 듣기 https://m.bugs.co.kr/album/20406941

Humane / 김채윤 (Chaeyoon Kim)

벅스에서 지금 감상해 보세요.

music.bug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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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 맛있다. 짜지 않아서 좋네.
어어어... 그런데 맛이... 전에 안 먹어본 맛인데... 새로운 맛이야.
뭔가 바다의 맛과 땅의 맛이 함께 있어.
바다 맛은
멸치고... 뭐지? 이 맛은? 
식당에서 강된장 먹으면 일단 짜고... 짜고, 그냥 다 같은 맛인데...
색다르고 맛있어.
아, 뭐지 뭐지?... 이 땅 맛...

 

이럴 땐 정말 "귀신같은...." (년!까지 붙이면 딱인데! 참자.) 밖에 다른 말이 안 떠오른다. 우렁이 강된장을 했는데, 멸치를 손질하여 잘게 찢어 듬뿍 넣었다. 재료가 부실하다 싶어 냉장고를 뒤지다 저 안쪽에서 표고버섯 분말을 찾았다. 어, 좋은데! 흥분해서 넣다가 어어어... 과다 투입. 그렇다. 땅의 맛, 대지의 맛! "귀신같은...."(년)이 감지한 것은 바로 그 표고버섯의 향이었다. 들짐승 같은 본능적 감각을 장착한 딸, 내겐 과분하도록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이 딸. 주님, 과연 내가 낳았단 말입니까. 이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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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닮아 그림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채윤이. 그림 그리며 개인 상담 받고, 그림으로 마음을 만나는 집단 상담을 몇 회기 하더니 풍덩 빠져버렸다. 게임도 안 하고, 유투브도 안 보고 그림만 그린다. 내 글쓰기 강의 곁눈질로 듣고 열심히 쓰더니 요즘은 그림만 그린다. 심지어 일기도 그림일기다.

휴가 중이다. 숙소의 밤, 할 것 없어 심심한 중에 그림에 빠진 채윤에게 속담 퀴즈를 냈다. 신서유기 송민호 저리 가라! 우리 채윤이가 더 천재다! 천재적 오답을 깨알 필기했다.


호랑이도?
죽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토끼 보고 안심한다.

빈 수레가?
은수레다.

오뉴월 감기는?
오랜 간다.

수염이 석 자라도?
묶어야 예쁘다.

빚 좋은?
때깔.

바늘 도둑이?
소 된다.

못된 송아지?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어요.

말 한 마디로?
상처 받는다.

닭 잡아먹고?
알 깨먹고.

같은 값이면?
안 산다.

가지 많은 나무에?
열매 맺힌다.

가는 날이?
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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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생 채윤이가 생애 첫 투표를 했다.

저렇게 간절히 선거권 행사의 날을 기다리는 아이가 있을까 싶었는데.

2020년 19대 총선에서 어마어마한 한 표를 행사했다.

 

2002년 대선 때 채윤이 나이 세 살이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 수민네로 개표방송을 보러 갔다.

방송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추운 겨울이 춥지 않았다.

세 살 채윤이가 우리 앞에서 춤을 추며 걸어갔다.

"창 바꿔보니 창 바꿔보니 희망이 보인다 창 바꿔보니 창 바꿔보니 노무현 대통령"

"두우 번 생각하며언 노무현이 보여요오~"

노래와 구호를 똑 부러지는 발음으로 따라 하던 채윤이.

그 날 그 밤의 벅차오르던 마음, 우리 채윤이의 춤과 노래 잊을 수 없다.

때가 때이니 만큼 식탁에서 그때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현승이가 끼질 못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현승아, 너도 있었어! 엄마 뱃속에 현승이 있었어!"

6개월 태아로 현승이도 함께 한 시간이었다.

아, 그리고 생각해보니 민주당 경선 기간에 마음이 절박하여 금식기도를 했었다.

얼마나 절박하면 임산부가 금식기도 했다고 떠벌이던 기억도 새록새록.

 

2004년 탄핵정국 때 아기 현승이 부모님께 맡기고 다섯 살 채윤이 데리고 광화문에 갔었다.

"타낵꾸요, 민쥬수호, 타낵꾸요, 민쥬수호!" 
제 성격대로 가열차게 외쳤다.

돌아오는 길에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채윤이가 아빠 어깨에 올라앉아 화통 삶아 먹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젖혔다.

"갓써 제에자 사므라 셋쌍 마는 사람드를 셋쌍 모오든 영호니 네게 달련나니~~~이"

어린 채윤이와의 잊지 못할 몇 개의 장면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계셨다.

 

2020년 총선.

채윤이의 정치적 입장은 이제 엄마 아빠와 같고 또 다르다.

뉴스를 스스로 보고, 책을 찾아 읽고, 역사를 공부하고, 제 마음에 끌리는 곳으로 표를 던진다.

혹여 칸을 밀려서 찍을까 손이 떨렸다며 나와서도 "잘못 찍은 건 아니겠지?" 걱정을 한다.

 

내 절박함과 초조함도 채윤이와 다르지 않다.

2002년 대선 때와 다르지 않고, 내 인생 첫 선거 87년 대선 때와도 다르지 않다. 

선거는 내게 간절한 기도다. 

 

사전 투표로 먼저 기도하고, 오늘 하루도 기도의 마음으로 보낸다.  

"잊지 않겠습니다" 가방에 붙이고 다니던 약속을 떠올리며,

4월 16일을 기억하는 기도와도 한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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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여러 일정이 취소되며 일상의 여백이 생겼다. 누구에겐 여백이고 누구에겐 상실감 불러일으키는 공백. 채윤이는 작심하고 2박3일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피정을 예약해 뒀었다. 엄마가 피정비를 내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제 스스로 신청하고, 비용을 부담하면서 말이다.

 

늘 하는 '제 자신'에 대한 고민이지만, 대학생이 되고 학교와 교회에서 성인 자아로 살아가는데 감당할 몫이 가볍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 앤 줄 몰랐는데 결국 엄마 아빠를 닮는 것인지 책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록산 게이, 레이첼 에반스, 도널드 밀러, 브레네 브라운 같은 책을 딸과 함께 읽는 날이 오다니!

 

가면인지, 진짜 자기 얼굴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 두려워서 울고 막막하여 입맛을 잃기도 하더니. 급기야 "엄마, 나 엄마 내적 여정 세미나 들어도 돼? 수강료 다 내고 들을게." 하고는 1단계 여정을 들었다. 그 어떤 수강자보다 진지하게 에니어그램에 자기를 비추고, 나의 딸이 아니라 제 자신이 되어 제 번호를 찾더니 급기야 '엄마가 어릴 적부터 찍어준 유형은 틀렸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어린 시절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나랑 같이 하기는 어렵겠구나 싶어 피정을 추천했다. 내가 배웠던 박정자 수녀님 하시는 내적 여정으로 가서 1단계부터 다시 듣고 심화과정(어린 시절 작업) 듣는 게 어떠냐고. 무슨 뜻인지 알아 듣고는 바로 신청하고는 피정의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취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알바도 빼놓았고 텅 비워놓은 시간. 갑자기 생긴 이 시간을 여느 날처럼 집에서 뒹굴거리며 보낼 수는 없다고 '엄마 여행 가자, 엄마 여행 가자' 노래를 했다. 나 역시 토요일 내적 여정을 취소해 놓은지라 여백이 생겼으니 그래 어디든 가자!

 

엄마가 밥 사면 제가 나서서 커피 살 줄 알고. 친구처럼 하루를 보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나누는 얘기는 이십 대나 오십 대나 결국 관계, 자아, 두려움 같은 문제로 어렵다는 것을 확인한다. 정말 친구 같다. 아주 닮은 친구. 어쩌면 너 엄마를 그렇게나 닮았니? 

 

언젠가는 어린 시절의 엄마를 제대로 한 번 만나야 할 것을 안다. 채윤이가 내 세미나에 오던 날, 얼마나 마음이 복잡하고 두려웠는지 모른다. 결국 지금 겪는 자아의 문제는 생애 초기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일 텐데. (엄마 노릇을 잘했고, 못했고의 문제는 아니다. 엄마와 아이 존재론적인 관계 얘기다.) 내적 여정을 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두렵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맨몸으로 맞을 일이다. 아이가 알을 깨고 성장할 때마다 나도 함께 부서지면서 성장할 것임을 아니까. 날은 춥고, 메마른 겨울 수목원은 조금 황량하지만 같이 걷고 (사려 깊은) 수다 떨며 정겨웠다. 모녀 간의 정(情)보다 자매애에 가까운 정. 내적 여정의 젊은 벗을 하나 만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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