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오랜 시간 혐오한 죄를 회개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 상'에 대한 혐오이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회개한다. 그 불경한 마음을, 그 교만한 냉소를 회개한다. 친히 십자가 지신 나의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마음 다 안다. 그 혐오와 냉소가 나를 찾는 진정한 마음이었던 것을 잘 안다." 하시는 줄 알지만. 그럼에도 머리를 조아려 그 높아졌던 마음을 회개한다.
 
집 베란다 앞에 거대한 십자가 상이 있다. 어쩌면 저렇게 주변과의 조화를 철저하게 배제한 크기이며 배치일까,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저 십자가 상만 없으면...' 딱 마음에 드는 뷰라고 생각했었다. 이게 날이 갈수록 저 십자가가 좋아지니 무슨 조화냐? 새벽 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말없이 섰는 그리 예술적이지 않은 십자가가 자꾸 좋아진다. 십자가는 그대로이건만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배경이 바뀌어서일 것이다. 폰 카메라 앨범에는 온갖 배경의 저 십자가 사진이 많아서 따로 폴더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십자가 상이 싫었지 예수님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십자가 상이 견딜 수 없었던 시절, 예수님을 향한 갈망은 더 절절했다고 이제는 더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지난주 어느 날,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있던 저녁이었다.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농담 따먹기 하고 있는데 베란다 밖으로 무지개가 떴다. 천공의 성 라퓨타 구름에서 뻗어 내리는 사다리처럼 기묘하게 떨어지는 무지개라니! 게다가 그 배경으로 구름을 향해 치솟은 십자가라니! 아, 이런 이미지를 나의 하나님 말고 누가 만들어 보일 수 있겠냐고!
 
남편에게 보냈더니 남편 있는 교회 쪽 하늘도 예사롭지 않은지, 남편은 그 시각 하늘 사진 사진 몇 장을 전교인 단톡방에 올렸다. 저 십자가. 교회 강대상에 놓인 사이즈도 모양도 참으로 적절하고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어떤 저녁 하늘을 배경 삼아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이 역시 창조주 아닌 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애초 화해한 상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하는 나의 예수님과 더 가까워진 저녁이었고, 십자가 상과 다시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베란다 앞 십자가 트라우마(?)는 10 년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 명성교회 앞에 살던 시절의 것이다.  (2011.11.17 명성의 복이여, 영원하라) 매일, 매주일 마주하는 소음과 주차난의 불쾌감이었고, 한창 조용히 치열하던 신앙 사춘기 앓이의 통증이기도 했다. 교회 가야 하는 시간이 되면 배가 꼬여 거실 바닥에 뒹구는 일도 있었고, 어떻게도 해소되지 않는 차가운 분노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로 온몸이 아프기도 했었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다녔던 교회에는 십자가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건물 안팎으로 십자가가 하나도 없었다! 아, 그랬구나!  그 정신이 좋고 자랑스러웠던 젊은 시절에의 부끄러움과 억울함의 몸부림이었는지 모르겠다.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로 가득 찬, 무덤 같은 도시의 밤 사진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남아 있다.  그 붉은 무덤 십자가로부터 선을 긋고 "다른 크리스천"임을 피력하고파 '지성의 제자도'에 탐닉하던 시절도 있었네.

십자가 없이 내 인생을 설명할 수가 없구나. 십자가는 늘 그대로였는데,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배경이 바뀌면서 내 마음의 풍경이 달라졌다. 날씨만큼이나 쉽게 바뀌는 내 마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이건만, 질곡의 시간을 견딘 십자가가 되었다. 주일 예배 찬양 중에 '어저께나 오늘이나'를 부르다 이 가사에 울컥했다. 
 

세상 지나고 변할찌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합시다

 

 
 

명성의 복이여, 영원하라

지난 2년간 내 집 베란다에 앉아 명성이 자자한 이 교회의 대성전 건축을 목도하게 하셨으니 주의 은혜가 크시도다. 땅을 다질 때부터 온갖 공사 소음으로 환란을 주시어 내 인내를 연단하셨고,

larina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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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에 있는 성전에서 섬깁니다." (히 8:5)

 

어제 자 묵상 말씀이다.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히브리서를 나누고 있다.  "이 땅의 삶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천국을 바라보고 여기는 그림자처럼 여기며 살자. 천국은 좋은 곳, 여기는 하찮은 곳!" 이원론적 인식으로 가져갈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땅의 성전이 하늘을 반영한 것이라고 왔다. 땅에 있는 성전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의 모형을 본떠 만든 것이다. 원형은 하늘에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주기도문도 생각난다. 내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하는 예배와 삶 전체가 하늘의 모형을 비춘 그림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린다. 스캇 펙이 쓴 사후 세계에 관한 소설 제목은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씀의 역방향의 가능성이다. 관계는 이렇듯 상호적인 것 아닌가.
 
하늘의 모형을 비추는 그림자가 된 오늘이 천국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사는 오늘 하루가 저 영원한 천국과 이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침 말씀 묵상은 하루 분 일용할 영의 양식이라 여기는데... "오늘의 양식"이 그것이었다. 실은 전날 남편과의 말다툼으로 마음이 먹구름이었다. 오늘 마음의 지옥을 살면서 죽어 눈 뜬 곳이 천국이길 바랄 수 있겠는가, 생각하며, 지옥 같은 마음을 해결해야겠구나 싶었다. 오후에 용기 내어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사과할 용기, 내 잘못과 내 마음의 결핍을 인정할 용기는 오전에 있었던 "꿈 집단"의 나눔 덕이다. 진실한 대화로 내 마음을 알게 되었다. 전날 밤 남편에게 휘둘렀던 날카로운 말의 칼은 '연결'에의 갈망이었다. 꿈 작업의 힘을 빌어 자존심 내려놓고 진심의 사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한참 후에 답신이 오고... 지옥 같았던 마음에 천국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모처럼 개인 하늘이 아까워 저녁 산책에 나섰다. 빗물 웅덩이에 하늘이 담겨 있는 이 멋진 장면을 발견! 누추하고 답이 없고 엉망진창인 웅덩이 같은 내 마음에도 하늘이 담겼다. 땅이 하늘에 가 닿을 수 없으니 하늘이 내려와 땅에 담겼다. 만나려면 서로의 간격이 좁아져야 한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든, 누가 더 빨리 달려 많이 움직이든 어쨌든 움직임이 필요하다. 오늘 여기서 하늘을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친히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육신 사건이다. 스펙터클한 내적 전쟁을 가만히 정리해 준 한 장면의 선물이다. 그러고는 오늘 아침의 연구소 묵상은 또 이러하지 않은가! 이분을 얼마나 성실한 분인가. 내게 필요한 말씀을 얼마나 성실하게 반복해서 또 하고 또 하고 또 들려주시는 분인가.
 

예수님의 육화는 우리가 인간으로 있는 곳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느님이 둘 사이의 간격을 하느님 편에서 완전하게 극복하신다. 구원의 문제는 그것이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연출되기 전에 이미 해결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은 베들레헴에서 이미 밝혀졌다.

자기를 지킬 수 없는 어린 아기 안에 하느님이 숨어 계시고 드러나셨듯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능력이 언제나 무능한 사람들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이 사랑받고 나누이려면 나약한 인간의 몸을 입는 모험을 감당하셔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가슴을 울리고 일깨우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개념이나 신학 이론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물론 이것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사람은 사람하고 사랑에 빠진다. 

나약한 어린아이 안에 하느님은 완벽하게 숨어 계시고 거기에서 완벽하게 그리고 더없이 사랑스럽게 드러나신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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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우연히 찾아든 선물같은(다른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시간이었다. 대학원 4학기를 완전히 마치는 마지막 종강 날이었다. 수업 마치고 늘 수녀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리곤 했는데, 학생으로서 특혜였다. 그날 수업으로 시작하여 별별 얘길 다 나눈 것 같다. 이건 진짜 상상도 못 한 일인데. 대학원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결정하는 문제로 의논을 하기도 했었다. 이 학교로 결정하고 "어느 신부님 강의는 꼭 들어보라"는 말씀을 해주실 때도 이런 날을 상상이나 했냐는 말이다. 4학기 차에 수녀님이 우리 대학원에 강의를 나오시게 되고, 그 과목은 무려 <중세 여성 신비가들>이었고, 박사논문으로 연구하신 베긴(Begine) 신비교사 '안트위르펜의 하데위히' 강의였으니! 이건 하나님께서 너~어무도 나만 생각하시는 건 아닌가 싶으신 것이었다. 너무 내 위주로 커리큘럼 짜고 계신 건 아닌지.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도대체 왜 나한테...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진짜 많이 투덜거리고 대들었는데... 하나님, 당신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학기 세 과목은, 아니 세 분의 교수님은 인생 종합 선물 세트였다. 오랜 시간 '스승의 날'마다 박탈감 같은 걸 안고 보냈다. 신앙 사춘기를 통해 젊은 날 존경하던 스승님들 다 보내고 텅 빈 마음이었을까? 올 스승의 날에는 정말 세 분 스승님께 정성을 다해 마음을 표현했다. 지난날의 박탈감이 다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 마치고는 수녀님과 차 한 잔 하자는 발걸음이었는데, 갑자기 정해진 반포대교, 그리고 입구를 잘못 찾아 들어가 카페와는 한참 멀어졌고, 걷는 게 힘드실 것 같아 빈 벤치가 보이면 무조건 앉자고 우겨서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이게 무슨 일! 바로 반포대교 분수쇼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자리는 로열석이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 담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횡단이 아니라 종단이었다. 1517년 종교개혁 시대의 담을 넘어 초세기부터 16세기 스페인 영성에 이르는 영성의 강을 여러 차례 오르고 내린 것 같다. 간간이 고대 그리스까지도 거슬러 올랐었다.  이 강물에 몸을 맡겨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며 흘렀다. 예습, 복습, 자기주도 학습. '습'이란 습은 다 하며 행복했다. 목말랐던 바로 그 배움이 딱 거기 있었고. 그렇게 헤엄치다 발에 땅이 닿아 디디고 섰더니 원래의 내 자리이다. 내가 나고 자란 교회, 혹독하게 신앙 사춘기를 겪었던 엄마의 품, 엄마의 교회, 개신교회, 지금 여기의 교회. 그간 가졌던 많은 의문들이 2000년 영성의 강물 위에서 나뭇잎 한 장 같은 것이 되었다. 횡단의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단으로 밝히 알게 된 출생의 비밀 같은 내 영성의 역사로 자부심이 커졌다. 그렇게 보낸 4학기 마지막 강의를 마친 밤에 참 잘 어울리는 종강파티였다.
 
논문만 쓰면 된다.
논문 따위!...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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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기만 한 컵이 아니라 의미 담긴 컵을 참 좋아하는데... 그건 아마도 컵을 영적 스승으로 삼은 조이스 럽의 "내 인생의 잔" 때문일 것이다.  취향저격의 컵 선물로 격려를 받아서 '취향저격려'이다. 컵을 좋아하고, 의미 있는 컵을 좋아하는 취향을 정확히 저격당한 것도 사실이고, 후쿠오카의 스벅에 갔는데 저 컵을 봤다면 덥석 사 왔을 디자인이라서 취향저격이다.
 
폴리백에 담긴 멸치가 취향저격이다. 맨입에 먹는 멸치 좋아하고, 뼈를 발라 국물 우려낸 축축한 멸치 진짜 좋아해서 버리지 못하고 혼자 먹는 취향을 갖고 있다. 그냥 고추장 찍어 먹으라는 이 멸치는 고추장 꺼낼 새도 없이 그냥 먹게 된다. 폴리백에 담긴 것이 흡사 <멜로가 체질> 야감독(손석구 분)이 해외로 떠나는 은정이에게 던져주는 빙어 같이 생겨서 더 좋다. 이걸 주신 분들도 쿨하기가 야감독 못지않은 분들이라. 
 
20대 말에 JP 썸타던 시절 이야기이다. 30대를 그냥 맞을 수 없다는 뜻으로 친구 M과 H가 '지리산 원정대'를 꾸렸다. 지리산 종주 여행에 JP도 함께 했고. 나는 엄두도 못 낼 일정이었고, 썸녀였던 나만 남았다. 주일 예배 마치고 잘 갔다 오라는 내 인사에 "어, 누나도 같이 가시잖아요." 해서 무슨 소리냐 했더니 '누나는 제가 마음에 담아 갈 건데요'라는 파렴치한 수작을 부렸었다.
 
오글거리는 말이긴 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 짧은 가족여행 다녀오시면서 초콜릿 하나를 주셨어도 "웬걸요!" 했을 일이다. 아니 뭘 주시는 자체가 가당치 않은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컵을 고르고 사고 할 때 나를 기억하고 내 취향을 고려했다는 것이 참 고맙다. 멸치를 폴리백에 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누굴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멸치를 나눠 담을 는 짧은 순간, 담는 사람의 마음에 '누군가'가 담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순간의 '담김' 그게 참 격려가 된다. 내가 뭐라고... 나를 담아주시나요. 그리고 조그만 기도 안에 머물러도 알아차리게 된다. 내가 근본적으로 어디에 담겨 있는지. 이 취향저격 격려는 그분이 보내신 것이라는 걸. 내 어깨가 좀 처져 보이고, 내가 나를 싫어하려는 조짐이 보이니까 그분이 손을 쓰신 것이다. 어떤 이들의 선한 마음을 이용해서. 그분은 정확하게 취향을 저격하시는 분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훨씬 많아서 늘 털리는 인생이라며 자기연민에 빠지는 적도 많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머물러 꼽아보면 그 반대다. 말되 안되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다. 받는 모든 것에 진심의 감사를 하는 것이 내 일상 또 하나의 기도이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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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 줌으로 하는 내적 여정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소파에서 기절하듯 낮잠을 잤다. 기절 낮잠은 참 오랜만이다. 이유 있는 기절 낮잠인 것이, 한 이십몇 년 만에 시험공부를 했는데, 그야말로 시험공부였다. 외우는 공부 말이다. 문제는 나와 있지만, 문제마다 답을 정리하는 것이 리포트 하나를 써야 하는 수준이고, 그걸 쓰자면 한 과목의 한 학기 공부를 정리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간 의미 있게 들었던 과목을 내 것으로 정리하는 시간이 되고, 그걸 외우기 위해 안 쓰던 머리를 써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라고 지나고 나면 말할 수 있는 거지! 답을 정리하고 외우느라고 죽을 뻔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
 
기절 낮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시험공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아... 논문 쓰고 싶다. 외우는 고통에 비하면 논문 쓰기가 훨 낫네" 했었으니까. 정말 달콤한 책상 앞 시간이구나... 하는데, 채윤이가 등장하여 카페 가자고 난리를 친다. 점심 먹기 전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장은 봐야 한다." 이런 얘길 했던 것 같은데, 분명히 가기로 했다고 떼를 쓰고 (진짜로) 거실 바닥을 구른다. 쟤가 미쳤나 싶어, 미친 애는 이길 수 없지 싶어 카페에 가기로 했다. 주섬주섬 책을 챙겼더니 "제발, 제에발... 그냥 보통 엄마처럼 카페에 가자"고 다시 발을 구른다. 책 가져가지 말라고. 쟤가 미쳤나 싶었지만, 기꺼이 져주기로 하고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나섰다.
 
채윤이가 꼭 가고 싶었던 카페는 늘 지나다녔지만 카페인 줄도 몰랐고, 카페라 해도 "어반 런드렛", 세탁소 겸 카페라니 끌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끌려 나온 몸, 끌려가자 싶어 들어간 카페는, 오!!! 분위기 좋고, 뷰 좋고, 음료 마음에 들고! 1층은 카페, 2층은 세탁소라는 이상한 조합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창가에서 보이는 내가 늘 걷는 탄천 길의 큰 나무였다. 오미자 신맛 좋아하고, 자몽의 쓴맛 정말 좋아하는데, 얘네 둘을 콜라보한 '오미자몽'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한가로이 앉아서 즐기고 노닥거리는데 잃었던 어떤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잃은 줄도 몰랐던 어떤 좋은 것 말이다. 커다란 덩치에 갑자기 다섯 살 채윤이가 되어 거실을 구르던 채윤이 덕에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만났다. 게다가 이 얘기 저 얘기, 수다수다 하다 채윤이가 툭 던진 한 마디가 마음 깊은 곳으로 풍덩 들어왔다. 듣고 보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는데,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그 말이었다. 듣고 보니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복닥거리며 찾아다니던 것이 있었는데 채윤이 입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이럴 땐 정말 "아이는 하나님의 메신저다."라는 말이 수사가 아니다. 다 큰 채윤이가, 힘을 써서 나를 끌고 나가서 내 지갑을 털고 제 욕구를 채우는 줄 알았는데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끌려나갔더니, 내가 얼마나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달리는 것 자체에 취해서 어떤 감각을 마비시키고 살았는지 깨달아졌다. 문자 그대로 달린다는 뜻은 아니다. 내 방식으로만 일하고, 내 방식으로만 쉰다는 뜻이다. 카페에서 보이는 나무 아래는 내가 늘 걷는 길이다. 나름대로 쉼이며 멈춤이라 여기며 혼자 산책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내 방식대로 쉬는 고착이라는 것을 알겠다. 내 스케줄과 내 방식을 포기해야 비로소 늘 보던 나무 저편 아래에 카페가 있고, 상상치 못한 조합의 '오미자몽'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 딸, 잘 키운 딸, 열 친구 부럽지 않은 잘 키운 딸을 영접하게 된다.
 
마침 다음 날 주일 예배 설교의 본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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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천을 따라 약속이 있는 보정동 카페거리에 갔다. 어느 카페 앞에 수선화와 수국이 줄을 맞춰 서 있다. 수선화로구나! 봄이로구나!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세 시간 가까운 즐거운 수다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가 생각났다. 수선화narcissus니까 외로운 거야... 나르시시스트 외롭지... 물에 비친 내 모습에 빠져서, 자아에 빠져서, 결국 자아에 빠져들어 죽는 건 가장 외로운 일이지... 
 
아까 찍은 수선화 자세히 들여다 보니 수선화답지 않게 서로를 마주 보는 둘이 있다. 뭔가 얘기가 오가는 중인 것도 같고.  아까 만난 내 젊은 친구와 나 같기도 하고. 나만 바라보면 외롭다. 내 모습에 도취되어 빠져 있으면 외롭지 않을 방법이 없다. "아까 만나러 가는 길 어느 카페 앞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마주 보고 얘기하며 행복한 우리 둘 같죠? ^^ 우리 사이에 성령님께서 앉아 함께 기뻐하시고…"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그렇다. 영락없이 우리 둘이고, 그 '사이'를 오가며 기뻐하시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시는 그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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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8일, 연구소 카페에서 아침마다 나누는 '읽는 기도' 묵상이었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을 읽고 아래와 같은 글을 붙였다. 다음 날 주일 예배의 설교 제목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 전날 넋두리 같은 글에 대한 답처럼 주어진 설교였다. 남편의 설교를 대문에 걸어두는 게 설교자 당사자 만큼이나 민망하지만, 이 민망한 짓을 하고 싶다. 힘을 내보려는, 허무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나는 죽어서 지옥 가지 않을 것이다, 정도를 부활 신앙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묵상처럼 "부활이란 위대한 변형이며, 전혀 새로운 창조이고, 무엇보다 큰 '사랑'의 변형"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은총과 영광, 그 변형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 아침입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가 없어서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은, 연구소는, 삶은, 신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지 않은 날들이 창밖의 하늘처럼 뿌옇기만 합니다. 과거와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근거라 믿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숫자입니다. 통장의 잔고, 나이, 데드라인, 남은 시간, 인생의 등수, 내 모든 점수...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겠다는, 보지 않겠다는 무력감과 허무입니다.

부활 신앙은 진정한 의미의 낙관주의이고, 하나님 사랑이 해내실 일을 미리 사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 막막한 페스트 펜대믹 시대에, 죽어가는 몸을 하고서도 "All shall be well!"이라 하신 노르위치의 줄리안이 그 증인이겠지요.

"당신은 아직 부활 신앙에 미치지 못했군요! 지금 이 순간, 진정한 낙관주의를 다시 발견하세요."
오늘 묵상글은 경고로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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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뉴욕  (3) 2022.10.02

무화과를 왜 사?

 

채윤이랑 장을 보는데 무화과를 사자고 한다. 무화과를 왜 사? 처음 클릭된 내 마음이었다. 그리 비싸지도 않고, 채윤이가 사자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냥 먹고 싶다는 것이다. 먹고 싶다는 것보다 정직한 이유가 있으랴. 그래, 사!라는 반응에 "어, 진짜?" 하는 게 조금 슬프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 아이들이 뭘 사고 싶다거나 욕구를 드러내면 나는 일단 빨간불을 켜 들었다. "왜애? 그게 지금 필요해?" 엄마가 내게 그러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서 아이들에게 그러고 있다. 그걸 인식한 순간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했으나 아이에게 가 닿는 건 몸의 언어이다. 표정과 세포로 말하는 것을 먼저 들었다. 그 행동이 맞고 틀려서가 아니라 엄마가 전적인 지지를 하지 않으니 아이는 불안한 것이다. 내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게 그렇게 싫었는데... 그렇게 심긴 무의식적 메시지가 "네가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아!"라서 그 메시지를 지우는데 긴 시간이 걸렸는데 내 아이에게 그러고 있었다. 그러지 않겠노라 결심한 세월이 짧지 않지만, 내 몸에 새겨진 것이 아이 몸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래, 사.

 

어? 정말? 엄마 무화과 사준 적 한 번도 없잖아. 정말 사도 돼? 그렇게 무화과 한 박스를 사왔다. 아이의 몸에 새겨진 "안 돼! 필요 없는 것을 왜 사? 네 선택은 옳지 않다!" 트라우마는 이런 작은 경험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그렇게 무화과 한 박스를 사 와서 이렇게 저렇게 먹는 동안 무화과에 얽힌 나의 이야기가 하나 씩 둘 씩 풀어져 나왔다. 무화과에 얽힌 사연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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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의 우정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그 여운이 길다.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다. 우정은 마음결이 같은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면서 싹튼다. 일단 알아본다. "같은 꽈구나!" 그리고 두 사람 사이 약속이 생기고(언어적일 수도 비언어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이 생긴다. 아마 여기서 신뢰가 싹 틀 것이다. 세 번째가 신선한 통찰이었는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극복할 것은 '시기심'이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태도와 마음을 드러내는 성경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번호 붙여 정리하면,

 

1. 마음 결이 비슷한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다.

2.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그것을 지킨다.

3. 어쩔 수 없이 올라오는 시기심을 알아차리고 극복한다.

 

나는 애정하는 여성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에서 키케로를 인용하여 정리한 것을 '우정'의 즐거움 또는 정의로 생각하고 있다. 우정의 즐거움은 농담과 뒷담화라고 했다. 누군가를 마음 편히 뒷담화 할 수 있고, 농담할 수 있는 사이. 그 정도면 찐 친구라고 생각한다. 위의 세 가지에 내 기준 두 개를 덧붙여 우정을 정의하고 더욱 일궈가야겠다.

 

학교 가는 즐거움 중 하나는 학식 먹는 즐거움이다. 내 공부를 기뻐해 주는 한참 젊은 '친구'(라고 하자)를 학교에서 만나 학식을 먹었다. 학교 카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 얘기 저 얘기 흘러가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갑자기 일어나 학교 앞 산에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바로 앞에 공원 같은 산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언젠가 걸어봐야지, 하고만 있었다. 생각보다 좋은, 너무나 걷기 좋은, 내가 딱 좋아하는 그런 길이 펼쳐져 있었다. 좋은 공기 때문인지, 편안한 대화 때문인지, 영혼에 뭔가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친구 같다."는 말이 나왔는지, 속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실은 '일로 만난 사이'이다. 이 날도 일을 도모하고 싶어서 만남을 청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일은 거들뿐, 살아가는 얘기, 살아갈 얘기 같을 것들로 대화의 주제가 종횡무진이다. 오솔길을 내려오니 뻥 뚫린 강남대로이다. 지하철 가는 길로 조금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친구같다, 가 아니라 친구다, 라고 혼자 말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기준이라고 치면 1번 항목 완전 체크로 시작했을 것이다. 일로 만나든 무엇으로 만나든 만나면 일단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MBC 문화방송이 아니라 마음 결의 동질성이지 싶다. 오늘 자 카페의 영적 독서 내용은 여성과 영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묵상글  본문을 올리고 덧붙이는 말에 "여자인 것이 참 좋다"라고 썼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자라서 여자들과 맺을 수 있는 우정이 참 좋다. 몇 달에 한 번 만나도, 인생에 단 한 번을 만나도, 몸은 멀리 떨어져 있고 메시지 한 줄로 만나도 몸으로 확인되는 우정, 여자들의 우정이 참 좋다. Womanc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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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의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읽자니 뉴욕의 거리가 살아온다. 체험이 이런 것이다. 뉴욕의 38번 가, 33번 가... 이것이 더는 숫자가 아닌 것이다. 그 길에 서봤기 때문에 더는 머릿속 이미지, 관념일 수 없다. 지난여름에 걸었던 뉴욕의 길들을 떠올린다.

뉴욕의 마지막 밤이다. 재즈바 Village Vanguard에서 나와서 그냥 걸어보는 길이었다. 마지막 밤이라고 큰 아쉬움도 없었다. 나는 그저 어서 내 집 내 침대에 돌아가 편안한 잠을 자고픈 소원 외에는 없었고. 그래도 돌아보면, 참으로 좋았던 순간이었다. 한적한 길을 느리고 가볍게 걸으며 사진 여러 장을 찍던 순간이 뉴욕 여행 "최고의 순간"까지는 아니어도 참 좋았다.

채윤이에겐 두 개의 얼굴이 있다. 미국 얼굴과 한국 얼굴. 무슨 일이 있어도 유학을 보내야겠다 싶은 건, 그 어떤 이유도 아니다. 미국 얼굴로 살게 하고 싶어서이다. 미국 얼굴은, '자기'가 된 얼굴이다. 최상급의 한국 얼굴은 예중 다닐 때 얼굴이고, 아빠가 목회하는 교회의 청년부에 가 앉아 있을 때의 얼굴이다. 미국 얼굴에는 생기가 있고, 사랑이 있다. 자발성이 있고 기쁨이 있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내 인생에 들어왔는가. 타고난 영적 지능이 있어야 영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어느 신부님이 말씀하셨는데.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이와 경험 너머의 어떤 귀를 가진 것 같다. 정말 잘 알아듣는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올 여름 미국행에 다슬 샘이 함께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분이 둔 한 수였다.

극적인 체험이 담긴 사진이다. 여행 내내 제대로 잠을 못 잤지만, 그야말로 한잠도 못 잔 날이었다. 시차 적응 실패로 몸의 균형이 완전히 깨진 탓이기도, 거기에 마음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일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게 바닥이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생기가 주입되어 살아난 것이다. 미술관 들어갈 때 얼굴 다르고 나올 때 얼굴 달랐는데, 달라도 너무 달랐는데 저렇게 행복하고 평온한 표정이라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 여인 모두 그러했다. 참으로 행복하고, 뉴욕에 오길 잘했다! 정말 잘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루이즈 부르주아 특별전을 만난 것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미술 전공 다슬샘은 "저는 아무 계획 필요 없어요. 미술관만 가면 돼요." 했었다. 나 역시 시카고 미술관은 다시 가고 싶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기대가 되었었다. 하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아니었다. "루이즈 부르주아 기획 전시회 한다! 눈물 날 것 같아요!" 먼저 도착해 있던 다슬 샘의 톡으로 극적 반전은 시작되었다.

다슬 샘이 하는 미술치료 그룹에 참석해서 큰 도움받았던 채윤이는 루이즈 부르주와를 닮았다. 어떤 조각품들은 채윤이를 형상화한 것 같다며 같이 웃었다. 마치 제가 그린 그림이라는 듯, 턱턱 그림을 읽어냈다. 뭉클하게 심장 깊은 곳을 찌르는 감상평을 쉽게 쉽게 내놓았다.

루이즈 부르주와는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하는데, '마망(maman)'이라 이름하는 거대한 거미 작품으로 유명하다. 거미가 '엄마(마망)'라니. 엄마가 거미라니! 거미는 전통적으로 모성의 상징이다. 아, 모성은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 엄마로 딸로, 인습으로, 죄책감으로, 그리움으로 혐오로 얽히고 얽힌... 딸 채윤이와 루이즈 그림 앞에 사람대 사람으로 서서 그림에 비춘 마음을 나누었다.

다슬샘과 나란히 서서 치료자의 눈으로 루이즈 부르주와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았다. 말 한마디가 건너오면 내 안에서 다른 것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다시 건네면 또 따른 것이 되어 돌아온다.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티키타카이다. 영적 지능으로 이해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소장님과 연구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여자와 여자로 말한다.

루이즈 부르주와 그림 앞에서 나는 그냥 한 여자였다. 애증의 모성 거미줄에 얽힌 엄마이거나 딸로 분열적 자리에서 고군분투 하는 여자였고, 앤 윌슨 섀프가 말하는 '백인 남성 시스템'에 맨몸으로 던져졌던 여자였다. 그리고 내 앞에 강한 두 여자가 있었다. 딸도 아니고 연구원도 아닌 힘과 영적 지능을 가진 여자 사람 친구들이 있었다. 미국 오가는데 비행시간만 60여 시간. 노숙자 행색의 공항 셀카가 몇 장인지 모른다. 경유 비행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시간에, 꿈작업도 할 수 있는 우리 셋이었다. 꿈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담겼다. 친구라는 뜻, 영혼의 친구라는 뜻이다.

저러고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다슬샘은 여행 중 만난 사고 때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되곤 하였다. 내적인 사고든 외적인 사고든. 돌아오기 전날, 저녁 재즈클럽 일정 전 공원에서는 말 그대로 대형사고를 만났다. 제대로 깔렸으면 이후가 상상이 되지 않는 커다란 나무통이 떨어졌던 것. 제대로 아니고 살짝 각도가 비켜가 찰과상을 입는 것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었고. 나 대신 그 나무를 맞아주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두고두고 잊지 못한 대형 사고의 기억을 남긴 지난여름 시카고와 뉴욕이다. '미쿡 원정대' 공식 해단식을 하자, 하자 하면서 몇 번 셋이 만났는데 해단식은 계속하기로 했다. 해단식으로 모일 때마다 새로운 마음의 후기가 나오니 어쩔 수 없다. 뉴욕의 거리를 함께 걸었고, 길 위의 시간을 함께 겪어냈다. '체험'이란 그런 것이다. 함께 체험했으니, 끝나지 않는 해단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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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란다. 나와서 놀잔다. 바람이 말했다.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그 바람이 말했다. 오늘의 고생은 오늘로 족하니 함께 걸으며 무엇이든 흘려보내자고. 낮의 일로 마음의 온도가 아직 뜨겁냐 묻는다. 그런 것 같다 하니 시원하게 선선하게 불어준다. 명절이 다가오고, 어머니의 명절 증후군 증상이 부드럽고 소소한 화살이 되어 날아와 꽂힌 것을 바람도 알고 있었다. 이제 맞고만 있지 않는, 정확하게 말하고 상처드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며느리가 되었다는 것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어 금세 열이 떨어진다. 분노의 열기가 떨어지니 냉랭한 마음이다.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 밤하늘 달이 좋고 바람이 이렇게 좋으니. 되돌려드린 말의 화살이 생각난다. 취약하신 어머니가 그 화살 붙들고 외로우실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온다. 바람이 말했다. 언제 어디서나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어머니께 전화했다. 그, 그래... 에미야. 낮의 그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시지만 느슨하고 힘 없이 당겨진 활시위라 화살이 멀리 날아오질 못한다. 전화선 어디서 툭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나는 활을 들지 않았다. 사실을 따지는 마음 없이, 모든 말을 믿어 드(리겠다 결심)렸다. 그러니까 어머니 금요일에 시간 비우시고 바람 쐬고 맛있는 것 먹고 그러기로 해요. 기억하세요. 금요일이요. 그래, 그래. 9일, 9일 금요일, 알았어. 마음에 찬 바람이 분다. 슬픈 바람이다. 어머니의 외로운 노년이, 연결되어 도울 수도 없는 노년이 슬프다. 내 마음 아는 바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좋은 분에게, 선함을 불러 일으키는 분에게 카톡을 하라고 바람이 알려주었다. 몇 줄 메시지와 돌아온 짧은 답신으로 마음에 기쁨이 가득찬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고개를 드니 먼저 물든 나뭇잎이다. 손이 없는 바람이 단풍 든 나뭇잎을 흔들어 따뜻한 안녕 인사를 건네준다. 들어가 편히 쉬라고, 오늘 고생은 오늘로 족하다고. 잘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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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이 더위가 지나길, 이 여름의 시련이 끝나길 기다렸지만 이렇듯 허무하게 갈 줄 몰랐다. 가을을 기다렸지만 이렇게 빠르게 갑자기 들이닥칠 줄이야. 가을이 아니라 '이상한 여름'일 수도 있겠으나. 이번 주로 학교도 개강하니 가을로 받기로 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애써 혼자만의 마침표를 찍어보려 한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도전과 시련의 시간이었다. 잠 못 이룬 밤이 여러 날이었다. 그렇게까지 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할 일이 아니었다 싶지만. 그 모든 시간을 통해 받은 선물 같은 글귀로 행복하게 마침표 찍는다. 과분한 평인 것은 알지만,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에 내놓았던 글과 말, 드러냄으로 감수해야 했던 수치심의 시간에 대한 격려와 위로 또는 보상으로 받는다. 아니 선물!

 

어느 밤,

내놓은 말과 글을 회수하고 싶은 충동에 몸부림 치는 어느 밤이 또 온다면 이 글을 찾아 읽을 생각이다. 

 

2022년 여름을 살게 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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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동네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휴가를 보냈다. 동네 안에, 동네와 어우러져 지어진 집이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동네 산책을 했다. 로망 중의 로망이다. 아침에 일어나 시골길을 걷는 것. 그래서 놓치지 않는다. 이번에도 3일 내내, 비가 오는 날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른 아침 산책을 했다.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이 교회이다. 어릴 적 우리 교회 같았다. 첫날 산책에 나서서 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발이 끄는 곳이 교회였다. 교회 마당에 하얀 백합이 야생적으로 피어 있었다. 꽃집에서 보는 백합, 꽃다발 안에 든 백합이 아니라 얼마나 반가운지. 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발이 이번에는 예배당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는데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사람은 없다. 바로 조금 전까지 새벽기도 마치고 가장 늦도록 기도하신 어느 권사님(또는 권사님 나가시는 걸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던 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 익숙한 냄새,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난다. 이 교회에서야 장의자 냄새일 테고. 익숙해도 너무 익숙하다 싶은 건 어릴 적 교회의 마루에서 나던 그 냄새 아닐까. 감각적 냄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여하튼 존재에 새겨진 어떤 냄새이다. 기도하는 엄마 옆에서 방석 깔고 자던 그때부터 몸에 배였을 것이다. 애기 때부터. 엄마는 산후조리 마치고부터 온갖 예배들에 갔을 테고. 수요일이나 금요일 또는 새벽 예배 때 엄마 옆 방석 위에 누워 잠들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 시절 나무 냄새와 함께 새겨진 것이 노래들, 찬송들, 어린이 찬송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교회에 앉아 기도하고 나와 걷는데 흘러나온다. 냄새와 함께 저장된 어릴 적 그 노래들이.

연못가에 자라는 한 송이 백합
천사같은 흰 옷을 입고 싶어서
맑은 샘물 거울에 몸을 비추며
푸른 하늘 우러러 기도합니다

 

담 밑의 봉숭아 어여쁜 봉숭아
그 누가 날마다 키우시나
하늘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날마다 쉬잖고 키우신다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예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


어릴 적 불렀던 많은 찬송들이 내 세포 구석구석에 저장되어 있다. 음악치료사나 어린이 성가대 지휘자, 찬양 인도 선생님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으로 키워졌는지 모르겠다. 그 많은 찬송 중에서도 '꽃'으로 비유된 어린이에 동일화되었다. 목사관 마당의 풍성한 꽃밭, 그 꽃밭에 정성 들이던 엄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인 것도 같고. 무엇보다 채송화, 봉선화, 사루비아, 분꽃, 나리, 백합, 찔레, 작약.... 같은 꽃들이 사시사철 눈앞에 피어 있었으니 노래 가사로 만나면 익숙할 밖에. 그 모든 기억이 나다. 그 기억들이 나를 형성했다.

신앙 사춘기를 겪어 내며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었던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웠던가. 엄마의 화원, 아버지의 화원에서 고이 길러진 내가 견딜 수 없었다. '화원'이 아니라 '비닐하우스' 같았다. 온실 속의 화초. 부모의 온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실, 교회의 온실에서 사랑받는 어린 백합꽃에서 야생의 나리꽃이 되기 위해 했던 몸부림이라니. 엄마를 아버지를, 교회를 혐오하며 뿌리 뽑혀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시절이었다. 하나님께는 벌써 버림받았고. 은혜 비를 거부하는 어린 백합꽃을 하나님이 돌아보실 리가 있겠나 싶었었다. 그랬으니 그렇게 찾아도 불러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겠지.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치유와 회복의 끈 소속감』이란 책을 방학 동안 함께 읽었다. 마치는 날이다. 마지막 챕터에 "봉인된 명령"이라는 말이 나온다. 내 존재 숨겨진 어떤 씨앗을 일컫는 말이다. 되어야 할 내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 '나'가 되기 위해서는 봉인을 풀어야 한다. 그 봉인은 고유한 상처이기도, 고유한 육아 환경이기도, 고유한 성격이기도 하다. 나의 총체, 내 기억의 총체이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필요하다면 치유하면서 되어야 할 내가 되어간다. 내 존재의 봉인된 명령에 이름을 붙여보자 싶은데, 책의 공동 저자인 데니스 린이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식으로 "봉인된 명령"에 이름 붙인 것을 코스프레해보자면 "아이의 노래" 정도 될까 싶다. 내 존재의 소중한 부분, 나를 형성한 어떤 좋은 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아이'와 '노래'를 빼놓을 수 없으니. 아이가 부르는 노래 같은 존재로 세상의 선에 기여하고 싶다.

 

 

오래된 교회 옆에는 오래된 종탑이 있었다. 내 아득한 기억 속에도 종탑이 있다. 예배 시간이 가까워오면 엄마가 종탑에 달린 줄에 매달려 종을 쳤다. 아주아주 어릴 적에 보았기 때문에 흐릿 하달 수도 없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남편에게 종탑을 보여주며 "우리 엄마가 어렸을 적에 종을 쳤어. 첫종, 재종 알아? 예배 시간 전에 두 번의 종을 쳐. 첫종을 치고, 예배 시간이 임박하면 재종이라고 한 번 더 쳐." 말하고 나니 귓가에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은 철이 들었을 때는 차임벨로 바뀌었고, 스피커를 타고 댕댕 찬송 멜로디가 울리는 종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일찍 저녁을 먹고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댕댕 종소리가 울렸다. 진짜로 들렸다. 뭐지? 싶었는데 수요일 밤이었고 수요예배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였다. 종탑의 종을 실제로 친 것인지, 스피커로 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존 던의 시가 생각나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구라파는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울린다.

 

누구든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나를 형성한 모든 것들을 생각한다. 나를 최초로 형성한 엄마와 아버지를 생각한다. 엄마와 아버지의 꽃밭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한다. 종소리와 꽃을 생각한다. 엄마와 아버지의 딸이라서 받아 안은 무수한 상처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잃었던 세상을 생각한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엄마와 남겨져 살아야 했던 날들의 좌절들을 생각한다. 아이같이 순수하여 상처였던 엄마의 신앙과 성격을 생각한다. 늙은 나이에 낳은 딸을 애지중지, 걱정에 걱정으로 키웠던 엄마의 사랑을 생각한다. 엄마가 쳤던 종소리를 들어본다. 기억 가장 깊은 곳에 귀 기울이며. 엄마의 죽음이 감소시킨 나를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으로 감소된 나로 인해 씻겨 내려간 내 자아를 생각한다. 엄마의 종은 나를 위해 울린다. 나의 봉인된 명령의 이름은 "아이의 노래" 또는 "엄마의 종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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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에서 “사랑하면 보입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요한1서 4:7-21 본문이다. 설교에서 인용된 도종환 님의 시 “배롱나무” 한 구절이 작은 사랑의 불꽃이 되었다. 설교에서 그 시를 마주한 이후로 온 세상이 배롱나무다. 무슨 마법 같다. 배롱나무가 이렇게 흔한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 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략)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 사랑의 신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셨고, 당신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 영혼의 재료가 사랑일진대. 내 영혼에는 사랑의 기본값이 있지. 그렇지! 오랜만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설교 후에 찬송가 314장을 불렀다. 2절 가사가 목에 걸려서 넘어가질 않았다. 이전에도 부를 때마다 늘 조금씩 불편했다는 것이 깨달아졌다.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에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내 비록 주 믿는 성도 중 하나이지만, 이런 차별적 사랑을 받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불편해졌다. 이런 찬송 가사가 얼마나 많은가. 나 아닌 누군가를 ‘죄인’이라 이름 붙이고 타자화하는 이런 식의 찬송 가사며 텍스트가 얼마나 흔한가? 구원받은 나와 구원이 필요한 누군가가 있다. 배제와 혐오에 닿는 자칭 선한 뜻 중 하나가 ‘구원받은 자아’ 특권의식이다. 그런 의미로 ‘주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큰 사랑’은 거절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 삐뚤어졌다. 설교로 받은 은혜를 찬송으로 다 쏟는 형국이었다.

예배 후 오후에는 젊은 부부들과 ‘육아 세미나’가 있었다. 육아 얘기를 하는데, 대화가 자꾸 자기 부모님과의 관계로 흘러간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당신들의 최선이었겠지만, 부모님께 “미안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한다. 흔히 듣는 말이다. 크고 작은, 물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부모 폭력으로 내상을 입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그저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들으면 살겠다고 한다. 그러면 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할 수 있는태도가 필요한 것 아니냐 하는 데 다다랗다. 한 자매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자각이 아이들에게 온전히 사과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어머니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 분이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미안해”라는 말은 끝내 듣지 못했고, 나름의 처절한 기도의 몸부림으로 비신자 어머니를 용서한 체험의 고백임을 알고 있다. 존재를 향한 ‘미안함’이 존재적 죄인에 대한 자기 자각 없이 불가능하다는 고백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자기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키우지만, 죄인인 자기 현주소를 잊지 않겠다는 말이다.

죄와 죄인을 타자화하지 않고 자기를 돌아보는 기도와 성찰이 사랑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314장 2절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이유를 안다. 구원받은 자신, 구원받은 데다가 그 누구보다 구원의 은총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다는 자아팽창에 허덕이는 사람을 안다. 그리하여 자기는 ‘큰 사랑’ 받기 합당한 성도라는 자의식이 충만하다. 구원의 강 건너편에 있는 죄인이라 이름하는 이들을 가엾게 여기며 구원자 역할을 자처한다. 가엾게 여기는 것이 겸손에 뿌리내린 연민이면 좋을 텐데, 교만과 자아팽창이니 종착지가 사랑일 리 없다. 그 사람을 잘 안다. 너무 익숙하고 잘 아는 사람이라 모른 척하고 싶을 뿐이다. 모른 척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비슷한 사람 찾아내어 손가락질하는 것이니 손가락질과 남 탓의 명수이기도 하고. 이런 찬송을 부르며 안도감을 느끼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던(는) 나다.

마침 읽은 아빌라의 데레사 <영혼의 성>에서는 이런 구절을 만났다. 기도 여정의 맨 마지막 단계, 일곱 번째 마음의 방에 관해서이다. 죄인에 대한 인식의 방향이 사랑과 혐오의 갈림길에 선 우리에게 이정표 되는 것임을 알겠다.

“이 불행한 영혼들은 캄캄한 감옥 속에서 수족이 묶인 채 공이 될 선이라고는 아무것도 못할 지경으로... (중략) 정말이지 이런 영혼들은 동정할 만하고, 한때 우리도 그런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보면서, 주께서는 이들에게도 인자를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매들이여,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각별히 마음을 써 기도하고 태만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사랑하면 보인다.
배롱나무가 보이고,
배롱나무 당신이 보이고,
내가 보이고,
죄가 보이고,
사랑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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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 여긴 어디.

깨어서 삶을 살고 있다면 이 두 질문에 명료한 답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순간이 허다하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담긴 공간은 어디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데 급급한 것이 인생이다. 중요하고 막중한 일일수록 깨어서 감당해야 하건만,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중요한 일을 존재를 망각한 채로 해치우려 한다. 막중한 일이라며 기도는 하지만, 기도하며 그분의 현존을 구하지만, 정작 내가 현존하지 못하니 그분이 곁에 바짝 붙어 계셔도 알아차려질 리가 있나.

 

이번 코스타가 그랬다. 전체 집회 설교, 그것도 최초 여성 스피커라는 것에 과몰입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집회 설교 이후 겪어내야 할 여파도 있었다. '나는 누구/여긴 어디'를 인식하지 못하고 달렸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또 다르게 말하면 의미를 묻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설교 다음 날에 깨달았다. 청년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만남을 요청해오는 그룹(조)와 함께 식사를 하고, 세미나를 진행하는 사이 길고 짧은 상담을 했다. 눈을 맞추고 청년들의 얘기를 듣자니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인지 깨달아졌다. 코스타지! 처음 참석했던 2013년(벌써 10년 전이었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부터 코스타는 '사람'이었다. 가기 전까지는 강의 준비로 조바심치지만 결국 가서는 강의는 거들뿐, 목마른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늘 쉴 새 없이 청년들을 만났고, 어느 만남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고, 그것이 의미였다. 얼굴도 상담 내용들도 기억나지 않지만 의미 기억은 그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날 오후, 몇 사람과 눈을 바라보고 얘기를 나누니 비로소 영혼이 살아나는 느낌, 현존의 감각이 살아났다. 내가 이 사람 만나려고 왔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다. 

 

"강사님, 마치고 바로 한국 가세요?" 하는 질문에 어디어디 여행한다 답을 하는데, "어머, 저 거기 살아요." 하는 청년들이 있다. 보통 반가움은 거기까진데, "오시면 연락 주세요." 하는 경우가 있다. 그 말에 다 연락할 수도 없고 호감을 표하는 인사로 알아듣지만 어쩐지 "그럽시다!" 하게 되기도 하고. 시카고에서 한 사람, 뉴욕에서 한 사람 만났다. 여행도 결국 '사람'이니까. 두 사람 다 앉아서 얘기 나눈 곳이 카페가 아니라 공원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가. 인생에서 몇 번이나 갈지 모를, 머나먼 시카고 뉴욕 한복판에서 불과 며칠 전까지 알지도 못했던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이내 포장지 안쪽의 마음을 꺼내 보여준다. 이것이 신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위의 독사진은 뉴욕에서 만난 자매가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찍어준 것이다. 도심 빌딩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원의 멋진 밤이다. 진로를 고민하던 다른 자매는 그새 딱 일하고 싶은 곳에 취업을 했다는 톡을 보내왔다. 설교하러, 강의하러 코스타에 간 것이 아니고 사람을 만나러 갔다. 나는 누구, 거긴 어디였는가 하면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사람을 만나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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