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공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적인 것도 아닌 부모 모임에 갔다. 만남의 기대보다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회의 비슷한 것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다. 회의 비슷한 방식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가 나왔다. 부모들, 특히 남들 한다고 다 하는 식으로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는 부모들의 모임이니 각자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런 부모들이니 한발 물러서서 보면 참 의식 있고 용감해 보이지만. 좋아 보이는 만큼의 불안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뒤로 기댔던 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고, 사람들의 말에 귀가 커지기 시작했다. 채윤이 대학입시를 통과하고, 어렵사리 현승이 고입 진로를 결정하고 한시름 놓았다 싶었지만, 실은 여전히 흔들리고 불안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나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키우는 부모들, 다르게 커가는 아이 얘기 들으며 어쩐지 마음이 새로운 자리로 간다. 대학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제 좋은 일을 한다는 어떤 아이. 모든 부모가 입을 모아 부럽다 했지만, 실은 나도 남편도 참 부럽다 했지만 우리 현승이가 그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마음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분다. 일반고 가기로 했지만 언제든 돌이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야기의 힘이다. 규정하고, 가르치는 태도, 편을 갈라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태도를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내가 강의하거나 글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목을 맨다고 일러주었다. 낮이나 밤이나, 어릴 적이나 나이 먹어서나,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살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교인들이 설교 본문이고 주제고 다 잊어버리고 예화만 기억한다.'는 설교자들의 흔한 불만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교인들이 애니멀, 스토리텔링 애니멀이었던 탓이다. 그러니 기억에 남을 설교를 원한다면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 성경이 온통 이야기 아닌가. 


<재즈처럼 하나님은>도널드 밀러는 말 그대로 이야기꾼이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에선 모든 이야기의 구조, 그 구조를 밝히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모든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 인물이 무엇인가를 원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얻어 낸다.’ 나의 하찮은 일상이 맥락 있는 이야기 속 한 장면이라면 조금 낫지 않은가. 이야기의 힘을 알고, 백분 활용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더니 이제 '이야기 사업가'가 된 것 같다. 도널드 밀러의 최근작 <무기가 되는 스토리>는 사업, 영업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로 영업하는 이야기를 쓴 이야기이다. 기독교 아닌 일반 서적으로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니 그야말로 이야기로 출세한 사람이다. 마케팅도 이야기라는 것이다. 내가 뭘 줄 수 있는지 지루하게 늘어놓는 영업은 사람들 귀를 막기 딱 좋다고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고객님을 이야기 주인공에 세우고, 고객님이 받아가실 것을 알려야 장사가 된다는 것이다. 암튼 이야기로 출세하신 도널드 밀러님, 부럽씸더.


읽은 지 한참 됐지만 소설가 정유정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위기철 선생님의 <이야기가 노는 법>도 꺼내어 기념촬영 해봤다. 소설, 동화 작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재미있고 유익했었다. <이야기가 노는 법>은 특히. 내적 여정, 꿈 집단, 치유 글쓰기 집단을 하면서 더욱 이야기의 힘을 믿게 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건강한 사람이다. 설령 깨어지고 상처 난 이야기 외에 내놓을 말이 없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시작한 이상 이미 건강한 사람이다. 남은 생애 '이야기느님'만 믿고 따르겠노라 나를 봉헌하고 싶은 심정이다. 책을 읽더라도 읽은 책으로 인해 달라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와 싸웠더라도 싸움의 기승전결을 아울러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하고, 기도하다 실망했더라도 나만의 기승전결을 찾아야 한다. 남은 생을 이야기에 봉헌한 자의 결심이다. (생래적 이야기 짐승이라 결심도 필요 없는 일이겠으나)


이야기에 삶을 봉헌할 때는 부작용도 있다. 잘난 척 하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만든 기승전결들을 들어줄 수가 없다. 물론 듣는 척은 잘한다. '다시는 이 사람과 얘기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부작용이 있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듯, 모든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없으니. 모임에서 수줍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고 울림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경험을 보편화 하여 가르치려 들고 다른 사람을 틀렸다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말을 길게 하면 부작용이 급성으로 나와서 막 집에 가고 싶고, 스마트폰 꺼내서 페북 보고 싶고 조급증이 생긴다. '워워~ 귀담아듣지 않아도 돼. 채윤 현승 싸울 때 하는 것처럼 안 들림, 안 들림, 하고 귀를 쳐! 너가 다 아는 부작용 증상이니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안 들어도 돼, 안 들어도 돼. 너보고 뭐라 하는 거 아냐.' 이런 말로 달래면 된다. 


여하튼 나는 스토리텔링 애니멀로서의 정체성을 찾았으니 더욱 이 정체성을 확립하여 살겠다. 









미리 정해진 약속을 깨지고 남는 시간 떼우려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난 친구가 있다고 치자.

어머, 너 여기서 만나다니! 뭐 해? 시간 되는 거야?

아니면 모임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 그 모임에서 본 사람과 지하철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와,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거의 초면인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는데

한두 마디 오가는 중 삘이 빠악 통하면서 베프 될 예감이 드는 경험.

드물지만 있다.


출간 되었다 조용히 묻힌 [융 심리학] 책 찾기 놀이가 취미인데, 

그 놀이 하다 찾은 책이다. 

영웅의 딸 : 여성들의 영웅 심리와 그 불안을 파헤치는 새로운 페미니즘 에세이


은유와 상징에 꽂혀서 그 동네 책을 찾아 검색, 검색, 검색 하는 중 만난 책이다.

『여성, 타자의 은유 : 주체와 타자 사이


두 책, 아니 두 여성 저자를 오가며 새로운 나를 만났다.

줄을 서 있던 후보들을 제치고 여름 휴가 책으로 선정된 것이 『여성, 타자의 은유』이기도 하다.

두 책, 아니 두 저자와의 만남이 신선하고, 고요하고, 깊었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그 어려운) 여성학 (고천) 책들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던 것처럼.

까지는 아니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도록 눈을 닦아 주었다.

젊고 열정 넘지고 독이 오를대로 오른 페미니즘에 위축 되기도 하고,

피로감도 느껴져 그 분야 책이 장바구니에 담아지질 않았다.


융 심리학을 찾다 얻어 걸려서, '은유와 상징'이란 주제에 낚여서 

지금 꼭 먹어야 할 책을 먹게 된 것 같다.


<영웅의 딸>이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가운데 남성을 모방하는 여성을 일컫는다. 그녀는 어린 소녀였을 때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를 이상화 하고 어머니는 거부한다. (중략)

아버지와의 지나친 동일시와 아버지처럼 되고하 하는 아버지의 딸들의 욕망은 그들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중략)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와 남자들의 세계를 모방하면서 일찍부터 그녀의 남성적인 성품을 발전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지나친 자기 동일시는 딸에게 자신감과 세상에서의 경쟁력을 심어주지만, 어머니와의 분리 속에서 그녀는 여성성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중략)


기독교반성폭력센터 글쓰기 자조모임에서 '부정적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를 떠올리며 글을 쓴 적이 있다. 참가자 넷  중 세 사람의 주제가 아버지였다.  내적여정에서 어린시절 작업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보다 엄마를 동일시하는 딸이 더 많고, 둘 다 고통의 근원이었을 테지만 아버가 준 고통을 더 강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 지점에서 감정이입 하지 못했다. 강의 할 때나 글에서 공공연히 밝히곤 했지만, 내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버지와 동일시 되어 있고, 심지어 우상화 했고, 동시에 아버지의 착한 딸이 되고자 애를 쓰고 있었는지. (알았지만 실은 몰랐다) 엄마를 혐오하고 아버지를 이상화 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여성인 나를 스스로 낮추며 이율배반적으로 외부의 남성 권위에는 분노하고 대항한다. 당연히 왜곡된 가부장적 하나님이 이미지를 가졌고, 그것이 영적 여정의 걸림돌이기도 하다.(역시나 알았지만 몰랐다) '아버지의 딸인 나'와의 갈등이 페미니스트로, 나다운 여자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부대꼈던 바로 그 지점 중 하나였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지식이 아니라 성찰의 거울로 새로 배울 여성주의이다. 이 나이에.  


메리온 우드맨(Marion Woodman)은 세상의 모든 딸들은 개인적인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딸>들이 아닐지 모르지만, 지배적인 가부장적 문화의 측면에서는 대부분 여성들이 <아버지의 딸>이라고 했다.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출발 이후로 여성들은 직업 세계에서나 가정, 학교, 그리고 정치적인 분야에서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남성드을 상대로 투쟁해 았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얼마나 깊게 그들 아버지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딸>은 자신 속에 아버지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더 개별적인 정체성 수리에 어려움으르 겪게 된다. 


'사이' 또는 '경계'라는 말에는 늘 끌린다. 몇 년 전 <철학상담>을 들을 이후로 '레비나스'는 늘 마음 한 켠에 살아 있는 이름이다. 니체, 레비나스, 데리다를 저자 자신의 말로 들려주니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타자 철학자들이 언어화의 한계 너머에 있는 타자의 타자성을 가시화 하기 위해 여성 은유를 사용하지만', 이때 여성은 현실의 여성이 아님을 잘 설명해준다. 타자의 철학에 있어서조차 여성은 타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의 눈으로 나를 타자화 시켜 50년을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결론이 철학자답게 관념적이어서 차라리 실천적으로 다가온다. 책의 마지막 부분이 참 좋다. 내 주장을 잠깐씩 침묵에 가두고 들어야 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 그 비결정적인 것에서 '들어야'한다.


이 모든 비판적 읽기 이후에,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타자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주체가 타자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하여야 하는가? 주체가 타자를 해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자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주체 안의 타자들, 확실성과 동일성으로 말끔히 포착되지 않는 이질성의 요소들, 그것이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타자의 분절화되지 않은 소리, 구조화를 거부하는 이야기, '비결정적인 것', 침묵으로 가라앉지도 언어로 떠오르지도 못하는 흔적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거싱 아니겠는가?

사람들 사이, 주체와 타자 사이,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아니다. 사이에 섬은 없다. 오직 경계 지워지지 않는는 이질성과 혼동이 있을 뿐이다. 그 사이를 들어야 한다. "우리가 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면......"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 튀어나와 심장에 꽂힌 한 문장이다.

'어느 가족'의 모양새는 엄마 아빠, 아이들과 할머니가 사는 가족이지만 알고 보면 가족이 아니다.

피 한 방울 섞인 것 없는 어른 아이 여섯의 집합이다.

본인들은 끝까지 아니라 우기지만 법적으론 유괴로 얻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들에겐 도둑질을 가르쳐 생필품을 얻는다.

거주하는 집의 소유주이며 가족의 안정적인 수입원인 연금 수혜자인 할머니도 있다.

이 할머니의 행적도 그리 정상적이진 않다. 


교회에서 잘 쓰는 표현으로 '깨어진 세상의 깨어진 가족'이라고 하면 딱 어울리겠으나

알고 보면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족이다.

법의 잣대로 범죄자 집단으로 치부되어 그야말로 가족이 깨어지고 뿔뿔이 흩어지며 영화는 마친다.


제 집으로 돌아간 막내 유리가 그린 바닷가 파도 놀이 그림에 울었다.

깨어져 없어진 그 아름다운 가족이 그리워 내가 울었다.


모양새 그럴 듯한 역기능 가정과

일그러지고 보잘 것 없는 사랑의 가정 사이 

진정한 가정은 어디 쯤에 있냐고 '어느 가족'이 내게 묻는다.


부모교육 강의나 내적 여정 안내를 하면서 '나의 가족 이야기'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다.

수많은 가정을 만난다.

그럴 듯한 가족으로 보이고자 덮어 쓴 포장지 아래 질식하여 메말라가는 아이와 어른을 본다.

그럴 듯하게 보이는데 에너지를 소진한 부모가 자녀를 망친다.

아이의 바램이 어디 있는지에 쓸 관심과 에너지는 없다.

그런 엄마는 영화 속 유리의 엄마처럼 폭력의 화신이 되고 만다.

영화 속 유괴맘 노부요의 말처럼 사랑해서 때린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키고 양심의 가책은 없었냐는 형사의 질문에

좀도둑 아빠 오사무가 말한다.

그것 밖에는 가르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내가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다.

내게 없는 것을 돈으로 사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아이를 질식시킨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아는 부모는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가.


그리하여 깨어진 가족의 좀도둑 엄마아빠의 자녀교육의 어떻게 되었나?

깨어진 가족을 깨트린 것은 아들 쇼타이다. 

도둑질 하다 일부러 잡히는 것으로 어느 가족을 끝낸다.

동생에게 도둑질 시키지 말라는 문방구 할아버지의 유언 같은 말 때문이다.

사춘기를 지내 어른이 되는 쇼타는 스스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이상한 사랑의 가족을 잃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끝내야 한다고 용기를 냈을 것이다.

얼마나 잘 키운 아들인가.

얼마나 멋진 자녀교육인가.


폭력적인 정상 가정으로 돌아간 유리의 일상이 아프다.

그것이 현실이다.

유리가 그린 그림을 다시 보러, 

아니 그 행복한 바다 놀이 장면을 다시 보러,

깨어진 아름다운 어느 가족을 다시 보러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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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 기사까지. 모두 쓴 사람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동어 반복이다. 자기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글마다 다르지만,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헝거> 같은 형식의 이야기이다. '자서自敍'는 '자서전自敍傳'과 다르다.

성별과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성과 무관하게 '자서'는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슈들은 '드러내기 어렵다'기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 태도인데 그 덫에 걸리기 쉽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글을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록산 게이의 『헝거 : 몸과 허기에 대한 고백』 추천사 중 일부. 정희진의 글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정말 잘 쓴다. 정희진!'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던 사실을 일깨우는 글보다는 나도 생각했던 바로 그걸 글로 잘 풀어냈을 때 나는 감동이 되더라. 그럴 때 '앗따, 글 참 잘 쓴다.' 감탄하게 된다. 정말 내가 요즘 쓰는, 써야만 하는 고통에 뒹굴며 하는 생각들이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정희진 참 정말 잘 쓴다고, 라 생각하며 읽어 나가는데 추천사의 다음 부분은 이렇다.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나는 열패감과 좌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감히'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는 '해냈다'. 그것도 아주 잘 해냈다. 나도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 '페미니스트', 나이 들어가는 여성, 건강 약자로서 그리고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실은, 많이 썼다. 매일 쓴다. 돌이키기도 묘사하기도 힘든 기억을 쓴다. 하지만 쓸수록 자존감은 자학의 동의어가 된다. '감성팔이' '사연팔이'... 그토록 질색했던 글들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헉, 정희진도 이렇다고?! 그런데 내가 정희진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감성팔이' '사연팔이'가 없어서인데. 온통 감성팔이, 사연팔이 투성이인 내 글과 너무도 비교되어 부러워하곤 했는데?! 아무튼 페이지 넘겨 본론으로 들어가 록산 게이를 읽으며 글을 잘 쓴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생각을 했다. 이렇듯 가르치지도, 주장하지도,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으며 페미니즘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니. 자기 상처를 쓴다는 것은 상처 입힌 그 사람을 가해자라는 이름으로 규정해야 하고, 그런 후에는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뒤따르는 것이 수순일 터인데. 어릴 적 성폭력으로 망가진 몸과 마음을 고백하며 이다지도 밋밋하고 덤덤하여 사실적일 수 있다니. 감동 그 이상이다. 그냥 숙연해졌다.


나도 내 상처를 쓴다. 그야말로 프로 사연팔이er. 사연팔이의 기본은 자기 경험을 과하게, 늘 조금씩 넘치게 드러내는 것이다. 경험, 너무나도 쓰고 싶은 경험, 글로 써버리고 싶은 상처를 쓰다보니 일인칭 '나'의 대척점엔 늘 상처 준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나쁜 나라 만들기가 일쑤이다. 그렇게 쓰고나면 한편 후련하고, 한편 민망하여 견딜 수 없다. 정희진의 말대로 록산 게이는 상처를 해석하고 글로 써내는 것을 해냈고, 아주 잘 해냈다. 록산 게이의 글을 읽으면서 '글을 잘 써서' 부럽다는 생각이 1도 들지 않았다. 그저 매료되었다. 자기 상처를 바라보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객관적 태도가 놀라웠다. 초고도 비만인의 몸에 관한 고백이지만 삶에 대한 태도는 적당히 결핍도 넘침도 없다. 이렇듯 허위의식 느껴지지 않는 글이라니! (페미니스트적, 작가적, 심지어 피해자적 허위의식까지도)


또 하나의 글을 써서 떠나 보냈다. 어렵게 쓰는 동안 곁에서 록산 게이가 함께 해주었다. 많은 힘이 되었다. 한때 정희진 글을 배우고 싶어 필사를 하기도 했는데.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선망이었다. 어쩐지 그 선망이 조금 시들해진 것은 그의 글에 '감성팔이'가 없어서였나, 싶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감성팔이, 사연팔이 전공. 그리하여 부전공은 이불킥. 또 감성을 끼워 사연을 팔아 글을 또 하나 써냈는데. 어쩐지 마음이 자꾸 무겁다.







왜 이리 사는 게 따분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할까요?


<사랑의 기술>과 <소유냐 존재냐>의 에릭 프롬, 그의 미발간 원고를 묶은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입니다.

무기력을 되풀이하는 삶에 대한 진단은 명확합니다. 진짜 삶, 진짜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생각도 느낌도 감정도 심지어 의지조차도 '남이 바라는 나'에 맞춰져 '진짜 나'로 살지 못합니다.


뉴스 하나에 기뻐하고 분노하는 것조차도 가장 적절하고, 인기 있는 감정을 선택하려는 나 자신을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브레넌 매닝 생각도 나는군요. 거짓자아를 인식하고 진짜 자기로 사는 사람에겐 영혼의 근본 에너지인 열정이 깨어난다지요. 그것은 절정의 황홀감(뽕 맞은 것처럼)이나 도취된 감정이나 마냥 낙관적인 인생관이 아닙니다. 진짜 자기로,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자기로 살아가려는 불굴의 의지랍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기꺼이 영향 입을 줄 아는 심장’이기도 합니다. 강인한 의지이며 동시에 말랑한 심장이라니!


다시 에릭 프롬의 말입니다.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라고 했고요. 이 용기와 더불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가지기 위한 능력으로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을 꼽습니다. 역시나 혼자일 수 있는 용기와 감탄할 준비가 된 말랑한 마음. 내적 여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덕이란 이것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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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사람인가 싶었는데 알수록 숨겨둔 매력이 솟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 자신이 가진 온갖 것을 다 드러내 찬사를 받아내곤 갈수록 바닥만 보여주는 사람도 있고요.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 <행복한 페미니즘>으로 만난 벨 훅스를 <올 어바웃 러브>로 만나며 놀라는 중! 벨에 빠져 전작에 도전할 기세입니다. 언젠가부터 피로감으로 손에 잡지 않았던 페미니즘 도서 목록에서 익숙했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행복한 페미니즘> 개정판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스캇 펙, 에릭 프롬, 토마스 머튼까지 아우리는 벨 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는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을 잇는 21 세기 최고의 사랑의 고전이라는 평이 과장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다 <행복한 페미니즘>을 다시 훑어보니 개인의 만족과 성장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었더군요. 술술 읽혔던 내용들이 두려움이나 분노 아닌 사랑에 기반한 여성주의였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 신성한 사랑, 결국 영성을 말하는 이 보석같은 책을 씹어 먹고 싶네요 :)    


오늘 읽은 챕터가 참으로 좋아 페북의 페이지, 개인 타임라인에도 올리고 내내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내적여정 세미나를 안내하고 있지만 그 결국은 ‘일상’입니다. 영적인 삶은 한적한 곳을 거닐며 좋은 글귀를 읽고 묵상하는 유유자적 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내적인 여정은 허구헌날 자기분석과 성찰에 빠져 수염 덥수룩한 나날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에니어그램 번호, 날개 화살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영성은 지금 여기 일상을 영적 존재로 사는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올 어바웃 러브>의 한 부분입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행동과 실천을 통해, 즉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영성을 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된다. 잭 콘필드는 다음과 같은 통찰력 있는 말을 했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영적인 스승이 많아도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고귀한 상태에 들고, 아무리 뛰어난 영적 업적을 이루더라도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또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주변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 내적여정에서 놓치기 쉬운 부부입니다.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또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주변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장 로맨틱하고, 달콤하고, 섹시하고도 슬픈 판타지라는 평이 이어지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이다. 제목과 여러 리뷰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 영화인가? 부인할 수 없다. 제목과 제목에 관해 밝힌 감독의 말이 이러하니.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 부드럽지만 우주에서 가장 강하고 가변성 있는 힘이기도 하다. 사랑 또한 그렇지 않은가? 여성이나 남성, 기타 생명체 등 사랑을 어떤 모양에 집어넣건, 사랑은 바로 그것의 모양이 된다”


나는 어쩐지 괴물을 사랑하게 되고, 괴생물체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괴물과 사랑에 빠진 동료와 친구 곁에 서는 사람들을 주목하게 된다. 몹쓸 병인 줄 알면서 나는 또 편을 갈라 바라보게 된다. 괴물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리고 역시나 치명적인 병인데, 그들을 줄 세우고자 한다. 물론 일렬로 세운 왼쪽 끝에 엘라이저 역의 셀리 호킨스가 있고, 그 옆에는 청소부 친구 젤다, 자일스가 선다. 오른쪽 끝에는 말할 것도 없이 스트릭랜드 역의 마이클 세넌이다. 백인가부장시스템의 대리자이다. 무슨 근거에 의한 줄 세움인가? 인간다움의 등급이라 하겠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다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해부되기 전에, 죽임당하기 전에 괴물을 연구소에서 탈출시켜야 한다는 엘라이저의 절박한, 소리 없는 절규이다. 옆집 친구 자일스에게 도움을 구하며 하는 말(말보다 더 강렬한 몸의 소리)였다. 엘라이저의 계획이 무모하단 것은 관객인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이고 싶은 나는 동의한다. 격하게 동의한다. 그렇게 규합된 탈출단은 여자, 청소부, 흑인, 게이. 백인가부장 시스템에서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다. "당신들은 청소만 하면 되는 거야!" 소리를 듣는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이들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이었다.  


아침에 목욕하며 자위를 하는 엘라이저, 괴생물체와의 섹스는 사랑의 모양을 잘 드러내는 평범한 아름다움이다. 감독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보통의 영화였다면 그런 장면에서 모델처럼 아름다운 20대 배우의 몸을 수증기로 감싸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비추면서 페티시즘을 느끼게 하는 장면처럼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일상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엘라이자의 성적인 욕망은 페티시즘이거나,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일상입니다." 인간다운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 말이다. 과대포장 된 에로틱 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욕구를 사는 몸을 가진 인간을 보여준다. 누군가 유일한 사람과 온전히 하나 되고 싶은, 나를 잃을 정도로 깊은 친밀감에 휩싸이고 싶은 간절함이 성욕의 심리적, 영성적인 측면이 아니겠나. 아침마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욕조에서 괴생물체와 하나 되는 장면은 아름답고 아름답다. 장면 장면 엘라이저의 몸이 뿜어내는 에로스 에너지가 내내 내 몸을 끌어 당긴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셰이프 오브 갓"으로 읽어본다. 스트릭랜드(스트릭 랜드, strict land!)가 엘라이저와 젤다를 불러다 놓고 알리바이를 묻는다.  이 장면 대사에서 '신의 형상'을 읽는다. "두 다리로 서니까 인간처럼 보이지? 하지만 우린 신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어. 저게 신의 형상으로 보이진 않잖나. 그렇지 않아?" 인간성 상실의 스트릭랜드가 젤다에게 묻는다. 젤다가 답한다. "글쎄요, 신을 본 적이 없어서" 이 장면에서 옆좌석 앉았던 남편이 터졌다. 웬만하면 관람 중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속삭였다. "영화 오두막에서 하나님으로 나와. 큭큭" 영화 <오두막>에서 파파 역을 맡았던 젤다 역의 옥타비아 스펜서가 "글쎄요, 신을 본 적이 없어서"란다. 


이 한 마디로 나는 읽는다. 참다운 인간성은 신의 형상이며 엘라이저와 젤다, 심지어 괴생물체라 불리는 그 역시 누구보다 신의 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 신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은 같은 재료, 사랑으로 지어졌다는 의미일 터. 결국 영화가 말하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셰이프 오브 러브, 또는 셰이프 오브 갓. 한 가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신의 사랑이다. 에로스와 아가페의 구분이 있단 말인가. 엘라이저의 욕조는 에로스가 담긴 곳, 사랑이 담긴 곳, 신의 형상이 담긴 곳이다. 

 




폭력의 화신이며 혐오와 배제의 존재인 스트릭랜드는 신의 형상인 자신을 확신한다. 괴생물체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며 흑인이며 청소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고 말이다. 힘이 있고, 군림할 자격이 있고, 제힘으로 국가를 지킨다는 확장된 자아가 신의 형상일 리 없다.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님의 삶은 공생애 기간 3년은 물론이고 이전 30년도 가난하고 무력한, 을의 삶이었다. 신의 형상을 찾고자 한다면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거나, 하겠다거나, 지켜내겠다는 이들은 피하고 볼 일이다. 신의 형상으로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말하지 못하고, 조금 야생적이고 미개한 형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생명과 평화와 사랑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가졌고, 치유의 능력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란 걸 모르는 눈빛이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니까요.


사랑의 모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사로 꼽을 만 하다. 말을 못 하는 엘라이자는 평생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왔겠으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눈빛을 만났다. 그것이 사랑이다. 신의 사랑 역시 그러하다. '너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자야.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야43:4, 공동번역)' 이것이 내가 믿는 신의 목소리이다. 더 깨끗하고, 더 정의롭고, 더 올바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괴물 같은 지금 그대로의 나일지라도. 어쩌면 엘라이자는 이미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는지 모른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이 말 못 하는 장애인이며, 청소부일지라도 그 눈빛에 규정되지 않는다. 춤추고, 자위하고, 옆집 게이 친구를 챙기며 홀로 충분한 일상을 살아간다. 이미 사랑이 장착되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신의 모양을 보았다.






내려감 / 불행감


언젠가부터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멜로디가 있었다. 노래가 있었다. 누군가 하모니가 잘 맞는 사람과 꼭 한 번 제대로 불러보리라. 불러보고 싶다. 오래된 노래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란 곡이다. 두 개의 멜로디가 나란히 어우러져 겹치는 듀엣곡이다. 예전 한영교회 샬롬찬양대 지휘할 때 함께 불렀던 기억이 아련하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 막으나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지난 1월 교회 사경회 특송으로 부르는 기회를 딱 얻었다. 내 영혼에 찬양의 샘이 마를까 보내주신 노래 짝이 하나 있다. 탱탱한 젊은 목소리에 기대어 노래했다. 연습하느라 부르고 부르다 보니 멜로디가 아니라 가사가 맴돌았던 것이었다. 따르던 스승을 잃고(영영 잃은 것으로 알고 있었겠지) 십자가 언덕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길. 위에 선 두 사람. 그 막막한 걸음걸이를 떠올렸던 것 같다.


적나라한 2절 가사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그렇다. 나는 자주 이 세상 사는 길이 엠마오의 길이라고 느낀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소망 없는 하루를 사는 날이 많다. 엠마오 내려가는 길 위의 두 사람, 그 사람들 뒤를 비슷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먼지 나는 길이다.


나타남 / 들이닥침


특송을 부르다 부끄럽게도 목에 메고 말았다. 먼지 나는 길 위에 선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니! 나는 안다. 모두 실재라는 것. 절망과 공포 속의 홀로 걸음도 실재요, 그 곁에 홀연히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을. 그분은 나타나는 분이다. 그분의 부재로 내 영혼이 말라갈 때, 부재로 현존하는 분. 가장 부조리한 일상에 들어와 조용히 함께 걸어주시는 분.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이게 해놓고 다시 사라지시는 분. 


아닌 게 아니라 특송을 부른 그 사경회에서 박영돈 교수님의 세 번의 설교는 내게 '나타난 말씀'이었다. 사모님과 짧은 대화 역시 갑자기 들이닥친 위로와 격려였다. 그렇게 그분의 은총은 예고 없이 나타나거나 들이닥쳤다. 늘 그러했다. 그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하는 용기를 북돋운다.


나타난 스승들


래리 크랩의 <행복>과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 동시에 발간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의 스승들. 래리 크랩이 한 번, 리처드 로어가 한 번 나를 회심 시켰다. 내 인생에 두 스승이 나타나(들이닥쳐) 영적 가면을 벗겨내라 촉구하였고, 내내 충실한 안내자로 함께 해주셨다. 두 스승과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내가 아니었을 터.


게다가 들고나온 제목이 '행복'이다. 또 '떨어짐'이다. 서문만 읽어도 이 선생님들이 뭔 얘기를 늘어놓으실지 알겠는 사이가 됐다. 늘 하시던 그 얘긴데 또 새롭고, 읽는 자세를 다시 고치게 된다. 전에 알아들었던 그 얘기가 다시 새롭게 들리는 것은 그사이 살아낸 스승들의 지난한 삶을 담겨 있기 때문이다. 때로 엠마오로, 드물게 예루살렘을 향해 쉬지 않고 걸었던 거장들의 진솔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떨어짐 / 행복


올라가기 위해서 떨어지고,

진정 행복을 위해 쓰디쓴 일상의 잔을 마셔야 하리라.

스승이 나타나 단호히 가르치시니 어쩔 것인가.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저런 책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문 시작이 저러하다. 이 책 나오고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자꾸만 마주쳤는데, 굳이 클릭하지 사서 읽을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알라딘 중고서점 놀이에 빠진 탓에 꼭 읽을 책이 아니어도 관심이 있던 책이라면 구매하고 본다. 이런 방식으로 만난 보석같은 저자도 있었다. 기대보다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이 먼저 나오는데 그걸 그저 빠져들어 읽기를 멈추지 못했다. 밤이 깊도록 읽고, 잠이 들면 악몽을 꾸었다. 예상대로 불편하고도 불편한 책이다.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 제목처럼 '평범한 일상에 숨은 공포'가 내 평범한 일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금방 읽어버렸는데 책이, 아니 가해자의 엄마가 내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월을 다 보냈다.


이렇게나 파렴치한 제목이라니. 신간 안내로 이 책을 접한 이후 자꾸 신경이 쓰이면서도 굳이 읽지 않고 마음으로 밀어낸 것은 저 파렴치한 제목 탓이다. 가해자의 엄마라면 입 다물고 자숙해야 마땅한 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내가 가해자의 엄마요! 하며 책을 내다니.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밀어냈다. 가해자답게 찌그러져 있어야지, 어디다 대고 공적인 글을 남기느냐! 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짙게 깔려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확인했다.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이다. '가해자의 엄마'는 번역과정에서 붙여진 제목인 듯하다.)  


읽으면서, 다 읽고나서도 쉽게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내용 자체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도 엄청났지만, 제목을 향한 내 반감을 톺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아니 나는) 얼마나 흔하게 착한 편, 피해자, 좋은 나라에 동일시 하는가. 그렇게 쉽게 동일시하고는 나쁜 나라, 가해자와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다. 뉴스로 접하는 사건, 역사 속에 일어난 일, 심지어 성경의 사건 속에서는 나는 거의 대부분 피해자 석에 앉는다.  오래된 어느 날이었다. 성전에서 기도 드리는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에게를 읽다가 평생 나는 세리에게 감정이입 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바리새인과 나 사이에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손가락질이나 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고 있는 나를 깨달았던 순간, 발 아래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으나 그 이후에도 늘 습관처럼 피해자, 약자, 착한사람에 동일화 된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일에서 당연히 나를 피해자 자리에 둔다. 늘 내 중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생활방식일지 모른다. 성장과 치유라는 주제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착한 사람 고치기가 나쁜 사람 고치는 것보다 수십 배 어렵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무의식적인 자기 규정, 자아상이 '나쁜 사람'일수록 더 빠른 정서적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최소한의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것이 병적인 자기 죄책으로 신경증의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을 가진 사람이 변화를 위한 문을 열 수 있다. 예수님 말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하기도 하셨다. Karl Jung이 그의 자서전에서 한 '선에 빠지면 반드시 악해진다'는 말의 뜻일 것이다. 자기 안의 선과 악이 공존함을 인정는 것이 이 온전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내 안의 악, 가해자 습관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지나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말조차 보기 싫었던 것이다.


책을 추천한 조한혜정 교수의 말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피해자는 가해자일 수 있고, 가해자도 피해자일 수 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피해자의 논리, 상처 받은 자의 입장을 특권처럼 남용해 무례한 말과 행동을 정당화 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는 역설적 자기규정으로는 편히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처지로 한 달을 보낸 것 같다. 안절부절 끝에 마음 깊은 곳에서 겸허라는 싹이 나기도 했다. 안절부절만 하지 말고 의지를 다하여 겸허해야겠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잠재적 가해자인 나여.


사건이 나고 16년이 지나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엄마의 말처럼 이상한 가정이 아니었다. 역기능 가정 아니고, 부모가 중독자도 아니고, 부유하지만 검소하고,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특히 아이 교육에 부부가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가정이었다. 흔한 '문제 아이 뒤의 문제 부모'라는 논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가정의 아이가 무고한 친구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면 어느 가정의 아이에게 가해자의 가능성이 없겠는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러니 누구보다 엄마 자신이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동의 추천사처러 '악마가 되어버린 아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피눈물 나는 헛수고'가 바로 이 책이다.


앤드루 솔로몬이 해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아이가 총격 살해범이 되는지, 이유를 찾고 규정해 놓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특히 부모의 탓이라고 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우리 집에서는 아이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으니 이런 재앙을 겪을 일이 없다'고 안심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많은 육아서를 읽고, 세바시 강의를 찾아 듣는 이유는 선한 것을 집어 넣으면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믿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때때로 육아강의를 하곤 하는데, 이 지점에서 늘 조금씩 마음이 어렵다. 이러이런 방식으로 아이와 소통하고 키운다면 아이는 자기 재능을 꽃피우고 자유로운 아이가 되면 궁극적으로 당신은 좋은 부모에 등극할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다. 그런 것을 말해줄 수 없다면 젊고 초롱초롱한 눈빛의 엄마들이 내 앞에 앉아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 말을 중간에 끊지 마세요 / 여러 사람 앞에서 아이를 나무라지 마세요 / 따뜻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봐 주세요 / 이런 육아 십계명이 있다. 육아 강의 시작하며 이걸 보여주곤 하는데, 찰칵찰칵 폰으로 ppt 화면을 찍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요? 이걸 읽고 이런 엄마가 되어야지 결심하고 어린이집 간 아이를 기다려요. 아이 오기 5분 전,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옵니다. 얘, 이번 주말에 집에 와서 김치 가져가라. 어머니 저희 일정이 있는데요, 말을 채 꺼내지도 못하고 네네 전화를 끊었어요. 어린이집 갔던 아이가 들어와 떠들기 시작해요. 엄마 오늘 친구가..... 시끄러! 들어가 씻어!" 이 쯤이면 모두 공감한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좋은 엄마됨의 방법을 배운다고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도를 닦아서 시어머니 전화에 결코 시험 들지 않고, 아이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키운다 해도 기대하는 결과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이것이 팩트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육아 책, 육아 강의로 배우지 말란 말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아이는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하나의 우주이며 미지의 세계이다. 그렇다. 나는 너를 알 수 없다. 가해자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피를 토하며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알지 못했다' 이것이다. 낳았고, 너를 지키며 길렀고, 공들여 너의 인격을 만들어 왔고, 대화 했고, 기도 했는데...... 나는 너를 몰랐다!


가해자 엄마의 말이라 싫어 피하고 싶었던 책을 통해서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 육아일기 십수 년을 써 온, 육아 책을 내고 강의를 하는, 신앙도 좋아 기도까지 열심히 하는 엄마인 내가 들어야 바로 그 말을 들었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는 시를 쓴다.

시를 쓰니 시인이겠지만 시만 쓰는 것은 아니니 시인인 것만은 아니다.

패터슨 씨는 패터슨 시를 운행하는 버스 운전기사이다.

패터슨 씨는 월화수목금, 아침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난다.

포즈는 조금씩 다르지만 자그마한 아내를 품은 채로 아침을 맞는다.

잠든 아내에게 사랑스런 입맞춤을 하고,

아내의 단잠이 깰세라 각 잡아 개켜진 옷을 살짝 들고 침실을 나온다.

우유에 만 씨리얼을 덜렁 앞에 놓고 우그적우그적 씹으며 식탁에 놓이 상냥갑을 관찰한다.

도시락 통을 들고 출근을 하고, 

버스 운행이 시작되기 전, 운전석에 앉아 아침의 영감을 바탕으로 시를 쓴다.

시인 패터슨을 버스 드라이버의 운전석으로 불러내는 것은 동료의 노크이다.

그리고 아침 인사.

안녕, 어때? 어, 사실은 별로야. 

염려와 짜증을 일발장전 하여 살짝 건드려도 다다다다 불평 투하이다.

동료의 염려와 짜증을 뒤로 하고 버스는 출발한다.

코너를 돌고, 작은 폭포 옆을 달리는 패터슨 시의 버스는 뭔가 몽롱하다. 


패터슨 씨의 일상은 라임이 딱딱 맞는다.

아주 작은 변주가 있고, 아침 점심 저녁 일상의 흐름은 월화수목금 운율이 잘 맞는다.

시의 운율은 잘 모르겠다.


시를 위한 시인가, 사랑을 위한 시인가.

시인들을 보면서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내게 사랑이란 로맨스가 아니다. 

일상이다. 일상의 사람, 가장 빈번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사람,

에 대한 마음이다.


패터슨의 시는 식탁에 놓인 성냥갑으로 시작하여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패터슨은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다.

뭔가 철없어 보이는, 아슬아슬한 아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지지한다.

물론 시가 끝나지는 않는다.

다만 시를 적은 비밀노트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으로 일단의 시가 끝나게 된다.

아내가 아들처럼 키우는 개에 의해서 패터슨의 비밀노트는 찢어발겨지고 만다. 상실감.

주말에 일어난 일이다.

그 주말은 어떤 주말인가 하면, 패터슨 시의 진가를 알아주는 아내가 복사본을 만들겠다던 주말이다.

혼자 보지 말고, 복사본을 만들어 남기자! 알리자! 이번 주말이다!

아내의 설득에 내키지 않는 오케이를 했던 바로 그 주말이다.


일상과 예술 사이의 성찰 또는 헛갈리을 위해 감독이 놓은 여러 개의 덫에 걸려 들었다.

주말에 열리는 마켓에서 머핀을 팔아 대박 내겠다는 철부지 아내의 바램은 실패가 될 줄 알았다.

패터슨의 시는 주말을 기점으로 어떤 전기를 맞이할 줄 알았다.

시는 잃고, 머핀은 대박이 난다.

어쩌면 패터슨에게 시는 잃어도 좋은 것이다. 

다만 관객에겐 조금 불편한, 손해 보는 듯한 패터슨의 월화수목금 사랑과 일상이 잘 흘러가고 있으니

그게 어디냐.

뜬금없이 나타난 일본 사람이 주고 간 새 노트에 시는 다시 씌여질 것이다.


패터슨을 닮은 한 남자를 알고 있다.

시를 쓰던 남자였다. 

이제는 시를 쓰지 못한다.

시 대신 말을 빚어 공기 중에 흩어 놓는 것이 그의 일이 되었다.

주말 밤 거실 바닥에 찢겨 흩어진 패터슨의 비밀노트가 차라리 명예로우리.


패터슨의 시가 사라져도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아무렇지 않은 일상은 아름다운 영화가 되듯

패터슨 닮은 남자의 떠벌이지 않는 사랑 역시 마지막까지 남을 아름다움이다.


그 남자의 비밀노트, 어렵게 고르는 말의 명예를 지켜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없지만.

글과 말이 사라져도 고이 남겨지고 지속되는 일상이 있으니........








2017년 나의 '올해의 저자'는 '강상중'이다. 남편이 사들인 소설 몇 권 중 제목 때문에 집어든 <마음>이 첫 만남이었다.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재일 학자의 첫 소설이라니! 이런 사람의 마음엔 어떤 소설이 들어 있을까? 첫 페이지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서문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시작하더니 세월호로 잃은 우리 아이들, 그리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을 맺으니 계속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란 제목을 달고 어찌 죽음에만 붙들려 있는지, 썩 공감은 되지 않는 상태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알라딘에 들어가 '강상중을 검색하기'를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여섯 권의 책(가족 이야기를 쓴 <어머니>도 있는데 사진에 못 담았다)으로 강상중의 사유를 추적하며 늦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마음의 강 바닥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죽음이고 또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악이라는 듯. 모든 책에서 죽음과 악을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악은 대부분 시대의 옷을 입고 개인 앞에 등장한다. 정직하게 마주한 마음 안에는 무의미와 불안이, 그것을 유발한 이유를 찾아 두리번거리자니 자아에 갇힌 개인의 욕망과 시대의 악이, 때로 국가 권력과 결탁한 노골적 거짓이 보인다. 강상중의 책에서 보이고 지금 내 현실에서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읽은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의 마지막 챕터는 필사를 했다. 내용이 좋은 곳은 많아서 책마다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다닥다닥이다. 조금 깊이 마음에 담고 싶어서, 만남의 여운을 좀 가지고 싶어서 필사 했다. 문장이 좋은 글 위주로 가끔 필사를 하곤 하는데, 글쓰기 향상을 위한 실용적인 공부이다. 이번 필사는 일종의 목례였다. 그의 내밀한 사유와 성찰을 일방적으로 관람한 것이 되지 않으려고, 예의를 갖춘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좋은 책에 대한 최고의 답례란 정성스런 리뷰이겠으나 그러지는 못한다. 뭐랄까, 사실 서평을 유발하는 책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고 딱 부러지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고,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읽는다고 힘이 불끈 솟는 것도 아니다. "계속 살아야지 어쩌겠어. 무의미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불안과 악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야지, 뭐 어쩌겠냐고" 희망을 주되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희망만, 힘을 주되 코앞의 부조리를 견딜 힘 정도만 주는 고약한 책이다. 그래서 좋은 책, 좋은 저자였다. 매일 흔들리고, 매일 좌절하고, 늘 포기하고 싶은 이대로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확신 만큼은 주기 때문에. 고민하는 힘은 살아갈 힘이다.

'세간(世間)'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강상중은 세간에서 찾는 것 같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을 분석하며 말한다. '하지만 소세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세한 일상, 아무래도 좋은 세상 사람들의 심정이나 감정 그리고 인간관계 속의 밀고 당기는 모습 등을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실은 바로 거기에야말로 사회가 생생하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소세키는 틀림없이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기 전에 '세간'을 생각했습니다. 라고 한다.

혁명적인 로맨티스트는 세간을 무시하고 모멸합니다. 세간 따위는 단순한 질곡에 지나지 않으니 언급한 필요도 없다며 멀리 내던지고 고매한 이상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요. 자연주의 문학도 마찬가지로 세간을 원수처럼 취급하며 자신이 독을 품은 세간의 이빨에 얼마나 크게 상처 입었는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는 일종의 로맨티시즘으로 결국에는 악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타락하고 만다는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즘에도 이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세계를 타락시켰다고 악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지요.  


결국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은 세간을 마주하는 힘이다. 라고 쓰고 나니 어떤 글귀가 자꾸만 맴돈다. 

현재를 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현재를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는 줄 알기에.
이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거룩한 현재를 겸허히 끌어안는다.

마포나루에는 언제 찾아가도 늘 현재로 흐르는 강물이 있다.
거룩한 현재가 있다.


민망하게도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에필로그로 내가 쓴 글이다. (아, 나도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을 응시하고 살아내야 한다. 다시 강상중이 말한다.


그가 응시하고 있는 '세간'이란 형명 투사나 가부장적인 폭군과는 거리가 먼 가족이나 친구 관계였으며, 달리 어찌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얽매임이나 애증의 인간관계였습니다.


샤이니 종현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채윤이가 며칠 째 밥도 잘 먹지 못하고 눈물 바람이다. 충분히 알 것 같은 슬픔이다. 제대로 귀 기울여 음악 들어보지 못한 나도 순간순간 마음이 아득한데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 너무도 아까운 생명을 너무 속절 없이 잃고 있어서 무력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강상중 선생도 아들을 잃었다. "이런 비참함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던 끝에 아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고 했다. 어쩌면 종현도 비슷한 이유일 거라 생각해서인지 꿈에 강상중 선생과 종현이 함께 나왔다. 마음과 죽음과 악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들 세간에 있는 실존이다. 어제 아침 막막함으로 펼친 메시지 성경 히브리서에서 나 보란 듯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고난을 겪으신 것은,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 곧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면에서 인간의 삶에 들어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는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서실 때, 이미 모든 고난과 시험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히 2:16-18, 메시지)

 








볼 영화는 결국 보게 되어 있고, 놓친 영화는 내 것이 아니다. 이쪽으로 이사 온 후에 놓치는 영화가 많아졌는데 그러려니 하고 있다. 영화 뿐이겠는가 일도 사람도 결국 만나지는 것이 내 것이다. 성사시키려 애쓰기 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가, 만나고 싶은가'를 묻고 시간과 상황의 흐름을 타는 것이 제일이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보려고 검색하고 시간 맞추고, 심지어 어떤 날은 서울까지 나가기도 했는데 보질 못했다. 사당역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다. SNS에 몸을 맡기고 놀다 얻어 걸린 책모임이었다. 오래된 책모임이 있는데 모임 시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걸 생각하면, 한 방에 시간도 맞고 마음도 가는 책모임은 '내 것'인 셈이다. 당일 이수역 아트나인의 상영시간을 검색하니 <다시 태어나도 우리> 마치는 시간이 모임시간 15분 전이다. 죽어라 뛰면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 (일타쌍피 짜잔) 

 



영화 마치고 극장에서 모임장소까지 순간 이동한 느낌으로 달려갔다. 생각해보면 책모임 내내(거의 3시간) 인도와 티베트 눈덮인 고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약간 달뜬 상태로 모임에 앉아 있었고 책 얘기를 했지만 정신은 훨씬 더 넓은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세 시간여의 모임은 영화의 연장이었는지 모른다. 정작 관람 중에는 몰입이 잘 되지 않았었다. 잔잔한 다큐영화인데 옆좌석 여자분이 중간부터 계속 울어대는 것이다. 반작용으로 나는 더욱 차가운 이성의 불을 밝히고 관람하게 되었다. 담담히 보고 잔잔히 감동 받았기에 천천히 걷고 싶었지만 미친 여자처럼 15분을 뛰어 약속 장소로 가며 묘한 느낌이었다.   


벌써 자기 생에 이름을 붙이고 확고한 길을 가고 있는 맑은 눈동자의 아홉 살 인격 앙뚜, 어린 제자에게서 높은 스승의 영혼을 감지하고 그의 길을 열어주는 것에 삶을 건 주름 가득한 얼굴의 노승 우르갼. 극(drama)이 아니다. 말 그대로 다큐다. 두 주인공 각자의 생애 또는 둘이 하나 되어 사는 춥고 먼지 나는 일상에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숭고하고도 아름답다. 윤회나 환생의 종교적 믿음과 별개로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이다. 노승 우르갼의 요란할 것 없는 자기증여와, 어린 앙뚜가 린포체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명의 태도에서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 구도의 길이 산과 눈보라에 막혀 있어 막막할수록 두 사람 사이 오가는 그 무엇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 무엇'이다. 이것은 사랑, 헌신, 신뢰, 가르침과 배움, 정(情)......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따스함이다.  




스승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때는 제 때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내 인생,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 존경하고 신뢰하며 스승으로 여겼던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여 방황하던 날도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스승은 참 많았다. 스승은 만날 수 있지만 제자는 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금방이라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스승님이 많다. 물론 그분들 중에는 내가 당신의 제자인 줄 모르는 분이 허다하지만.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여겨지는 분이 많다. 여기저기 영성심리 배우기 위해 들쑤시고 다닌 곳에서 만난 선생님들 그렇고,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들으러 오셔서 자기를 나눠주며 오히려 가르침을 주고 간 분들이 그러하다. 책으로 만난 스승님이야말로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실은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스승은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아무튼 오늘의 내 강의과 글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나를 스쳐간 내가 통과해왔던 스승님들의 덕이다.


앙뚜와 우르갼은 묘한 사제지간이다. 앙뚜는 전생의 높은 스승이 환생하여 태어난 린포체라 하니 늙은 우르갼에게 지극히 높은 스승이다. 어린 앙뚜는 우르갼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없다면 아홉 살 무력한 아이일 뿐이니 진정 우르갼의 제자이다. 둘 사이 스승이며 제자이고 제자이며 스승인 묘한 관계이지만 피차에 스승연(然)하는 자의식은 없다. 라면을 끓여주고, 청소를 하고, 불경을 공부하고, 삐딱하게 굴고, 막막하게 먼산을 바라보는 스승과 스승, 스승과 제자의 일상이 숭고하게 다가오는 이유같다. 그저 보이는 것만 보면 늙은 의사와 어린 아이인데 서로에게서 스승을 본다. 서로가 가진 가장 높은 것을 본다. 이것은 '당신 안의 신을 경배한다'는 라마스떼, 지극한 존엄의 태도 아닌가.




항상 스승을 찾아 헤매는 나는 이번 학기에 강의 하나를 신청했었다. 두 번 가고는 다시 발길이 움직이질 않아서 못 가고 있다. 강의 신청을 해서 실패하는 적이 거의 없다. 강의로 벌어서 강의 듣는데 쓴다해도 본전 생각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강사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흘러나온다. 그런 의미에서는 얻을 게 많다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했다. 참고하는 모든 책의 저자의 주장을 끌어와 자기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듯한 태도에 나는 나의 무엇을 투사하는지, 들어주기가 불편했다. 지난 학기까지 4학기 철학상담을 들으며 정말 어려웠다. 못 알아듣는 말이 반이었다. 강의가 어려운 이유는 교수님이 단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는 식이었으니까. 철학은 그럴 수 밖에 없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는 학문이 있기는 하지만.


가르치려는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다. 일반화 할 수는 없겠다. 적어도 나는 자기확신에 차서 가르치려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않는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스승이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에 내게 가르친 것을 모를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스승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존재를 걸고 싶은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우르갼에게 앙뚜처럼 말이다. 또 스승은 무력한 자에게 유일하게 기댈 언덕일지 모른다. 앙뚜에게 있어서 우르갼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만남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스승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저 두 사람처럼. 춥고 가난한 삶과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길을 헤치고 가는 여행이라 해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라고 그런 스승을 못 가질리 없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제목을 스토리에 맞게 바르게 고쳐 쓰시오. (정답 : 기억을 틀리다)


원제 <The Sense of an Ending>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우리말 제목이 되었다. '혹시 내게도 저런 치명적인 기억의 오류가 있진 않을까?' 막 더듬어보게 하는 영화이다. 극장을 나서는(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관객(독자)의 머릿속에 '기억'이란 두 글자가 포인트 40으로 새겨질 것을 예상한 원저자가 더 멀리 던지는 화두일지도 모른다. 'The Sense of an Ending'은. "바보 관객들아, 기억 얘기가 아니야!" 기억의 왜곡으로 인한 충격적 반전으로 사람 놀래켜 놓고선 '기억'이 아니라 '예감'의 문제라고? 아무튼 나는 원제목(동명 소설)과 번역된 제목 둘 다 마음에 든다. 한참 전에 예고편과 함께 무엇보다 제목에 끌려 목록에 담아 둔 영화이다. 결국 영화 속에선 예감은 있었으나 기억은 틀렸다. 예감은 그러니까 결말에 대한 예고는 영화 곳곳에(원작인 소설에선 더더욱 정교하게) 흩뿌려져 있다. 다만 그것을 읽어낼 감각이 없어서 결말에 관해 잘못 짚은 것이다. '잘못 짚은'의 주어는 주인공이고 '나'이며 또한 우리이다. 말하자면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인생에서 제가 무엇을 뿌렸는지 모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짚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독(毒)을 뿌려놓고 선(善)을 뿌렸다고 착각할 수 있음이다. 착각점이 정확히 (기억의) 왜곡점이다.


친할 뿐 아니라 선망하던 친구 아드리안이 헤어진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구 아드리안이 직접 편지로 알려온다. 주인공은 '그러든지 말든지'라는 식의 엽서를 보냈다고 기억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영화의 반전이다. 지질하게 비아냥거리고 저주를 퍼붓는 내용을 주절주절 써서 답장을 보낸 것이다. 노년이 된 토니. 베로니카 엄마의 유언장이 등장하며 자연스레 수십 년 전 애정사를 복기하게 된다. 물론 추억 속 그녀 베로니카를 만나게 된다. 추억(기억)을 더듬고, 사실(나 아닌 상대의 기억)을 확인한다. 알고 보니 편지에 담은 저주처럼 친구 아드리안은 여친의 엄마와 섹스를 하고, 그리하여 여친의 동생을 낳았고, 그 때문인지 어쩐지 친구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주인공은 토니는 평생 쿨하게 보낸 엽서의 기억만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틀린 기억을 가진 주인공은 그 일과 무관하게 무난하게 살아왔고, 그가 잊은 기억을 사실(현실)로 살아야 했던 여자 친구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추측된다). 고교시절 전학생 아드리안이 수업 시간에 했던 인상 깊은 말들이 고스란히 영화의 명대사로 남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패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죠." 


영화든 현실이든, 영화같은 현실이든 갈등은 뿌린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튀우는 싹이다. 잘 짜여진 화에서는 반전이 있고 다소 충격적인 볼 만한 이야기가 되지만, 현실의 왜곡된 기억과 파괴적인 결과는 흔하디 흔하며 고통이다. 불편한 관계 풀자고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화는 얼마나 흔한가.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걸 그렇게 이해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아니야, 너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정말 그랬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무슨 소리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어린 시절 상처받은 기억으로 오래 아파하다 '미안하다' 한 마디 듣고 싶어 용기를 내는 딸들을 안다.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어린 애한테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어? 어저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어? 과연 사과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미안하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어. 그땐 엄마도 어렸단다. 정말 미안해. 엄마를 용서해주겠니? 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얼마나 될 것인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제 와서 트집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서, 사랑 밖에 준 것이 없다. 더 큰 상처로 끝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차라리 내 기억을 수정하는 것이 그 사람과 화해하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주인공 토니는 어쩌다 그런 (너무도 단순하여) 치명적인 왜곡된 기억을 가지게 되는가? 이 질문 끝에 영화 <윈터 슬립>이 생각났다. 착하고, 이웃에게 해 끼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면에서 두 주인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윈터슬립의 주인공 아이딘이 가진 것이 많아서인지 더 견고한 자기의(義)의 성을 쌓은 것 같기도. 토니는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사람, 충실한 사람이다. 임신한 (싱글맘) 딸의 출산교실에 함께 가주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불평 없이 하는 사람, 이혼했을 망정 전부인과도 그럭저럭 잘 지낸다. 그런데 딸과 부인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지금 내 앞에서 내게 일어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흔하디 흔한 자기 몰입의 사람이다. 고등학생, 대학생 때도 그랬을 것이다. 올바르고 친절하고 다소 소심하게 살지만 나무랄 것 없는 삶이기에 더욱 반성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바운더리 안에서 착하고 충실하지만 아침마다 만나는 집배원에게 보통의 사무적인 친절 그 이상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다. 영화 마지막에 집배원을 향해 말 한 마디 건네게 되는 변화는 전부인에게 사과하는 장면보다 더 큰 회심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의 독백처럼 그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상처를 기피하며 그것을 생존능력이라 부르는 사람'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승자도 패자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라 오직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억 위에 색을 칠하고, 덧칠하며 생존을 유지할 뿐이다. 


내적 성장을 위한 에니어그램 여정을 이끌며 '기억의 치유' 없이 성장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기억이 사실이서가 아니다. 기억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문제이다. 해석의 틀에 갇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찾아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틀, 어떤 경험도 묽은 밀가루 반죽으로 해체시켜 부어버리는 자기만의 붕어빵 틀을 발견해야 하는 문제이다. '기억도 그렇습니다. 옛날 일이라는 것은 벌써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라는 우치다 타츠루의 통찰에 동의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그야말로 개정판으로 다시 써가는 일이다. 토니가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확인하고 베로니카에게, 전 부인에게 진심의 사과를 건넬 수 있었을 때, 그의 일상이 달라졌다. 저주의 편지를 썼던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의 기억으로 살아온 존재 자체에 대한 회한일 것이다. 참된 자기성찰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수용으로 향함을 안다. 내 붕어빵 틀이 이토록 터무니없이 확고하다면 당신이 찍어내는 기억의 붕어빵 역시 견고한 고유함이리라. 내가 모르는 아픔과 기쁨이 담긴 화석 같은 것이리라. 당신도 나처럼 상처를 피하기 위해 한 조각 기억을 붙들고 그 위에 색칠하고 덧칠하며 살고 있구나. 황혼을 사는 토니 일상의 작은 변화, 집배원에게 건네는 커피 한 잔이 내게는 참 좋았다. 그 변화가 참 좋았다.  






영화 <내 사랑> 리뷰이다. 정성들여 길게 쓸 생각은(자신이) 없다. 영화보다는 관람 후 뒷풀이(사실 앞풀이 뒷풀이 뒷뒷풀이)의 여운이 진했던 날이라 영화와의 만남은 실제 만남에 묻힐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좋은데 언니들 만나서 더 좋네'로 끝났다. 관람 후 일주일, <덩케르그>를 봤는데 관람 후 한두 시간은 스크린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바닷속에 잠긴 듯했고, 전투기를 조종하느라 창공을 헤집고 다니는 듯했다. 저녁 먹고 앉아서 (아들) 현승이가 '엄마, 덩케르그 영화 좋아?' 하는데 '그냥 그래' 하는 대답이 나왔다. '아까는 나도 보라며?' '어, 처음에는 뭔가 강렬했는데 지금은 엄마가 그 영화를 봤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나. 오히려 지난 주에 본 영화 <내 사랑>이 자꾸 떠올라. 그 영화가 좋았나봐. 엄마한텐 이런 게 좋은 영화야'라 말하고 보니 그제야 <내 사랑>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도 리뷰 쓸 에너지는 없었다. 교회 수련회며 강의 일정도 많았고, 읽어달라는 책이 유난히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그런데 못내 이렇게 어설픈 끄적임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홍보문구 때문이다. [한 여름 밤의 사랑 이야기, 에단 호크*샐리 호킨스] '아닌데, 로맨스 영화 아닌데'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극장과 뉴스 밖에 안 뜨는 페북 뉴스피드에서 '한 여름 밤의 사랑, 한 여름 밤의 사랑......' 자꾸 보니 신경질이 났다. '아니라고오! 로맨스 영화 아니라고오!' 하다 결국 블로그 글쓰기를 클릭했다. 고아 출신의 괴팍한 외톨이 남자와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신체적 핸디캡을 가진 천재 예술가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뭐, 그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한 발 양보하여 결과론적 로맨스 영화라고 하자. 


모드의 얇고 틀어진 다리, 그 다리를 삐칠삐칠 걷는 뒷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가정부 일자리를 찾아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로 에버릿의 작은 집을 찾아가고, 거절 당하고 돌아서 삐걱삑걱 또 걷는다. 그 성치 않은 다리가 편히 쉴 곳이 있었으면 싶은데 내내 그러질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마지막 에버릿이 했던 말처럼 나는 내내 모드를 '부족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감독의 낚시질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고 가며 동시에 모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열어 나가고 궁극적으로 에버릿을 다른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그녀의 부족해 보이는 걸음이다. 그러니까 에버릿이(우리가, 내가) '부족함'이라고 보는 모드의 부족함이 그녀 자신에게는 치명적 핸디캡(부족함)이 아닌 것이다. 영화 초반부 고모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사는 중에 클럽에 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장면은 엄지 척이다. 손에 손을 잡은 커플들 사이에서 어눌한 몸 그대로, 흥에 겨워 흔들거리는 슬프도록 당당한 모습이라니. 파트너가 없거나 자유롭게 춤출 수 없는 몸 같은 것들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 클럽의 밤이다.


고모의 핍박, 친오빠와 고모의 파렴치한 계략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발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모드. 시키는대로 하면 편안히 앉아 밥 얻어 먹을 수 있는 고모집을 떠나 가정부로 들어가는 모드. 그런 모드는 (아무리 딱해 보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모드'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내 사랑'이 아니라 '나 사랑' 모드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처절한 이야기,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해피앤딩인 듯 새드앤딩인 듯 해피앤딩 같은 먹먹한 결말의 이야기이다. 서서히 모드를 대하는 모드가 바뀌는 에버릿의 모드는 모드 자신의 자기 사랑 모드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에 굴하지 않고 느릿느릿 가정부 일을 하며, 인간적인 모욕에 굴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자존심을 지켜내는 모드의 '나 사랑'이 결국 에버릿을 구원하는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사랑'이라는 기반을 가지지 않은 에버릿에게 사랑의 실재, 사랑의 가능성, 사랑의 희망 같은 것을 전염시키는 것. 





'자기사랑'이라는 기반 없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정희진 선생은 '나를 경유하지 않은 타자의 시선은 없다'라고 한다. 같은 얘기이다. 나를 수용하는 만큼 타자 수용이 가능한 것이고,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타인을 품어 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부족하고, 누가 온전한 사람인가. 영화에서 죽음에 임박한 고모가 말한다. '네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잘 되었구나(잘 살고 있구나? 행복하구나? 온전하구나?)' 젊은 시절, 모드가 낳은 아이를 모드의 동의없이 입양시켜 버린, 모드의 존재 자체를 부족함으로 규정했던 고모의 말이라니! 


'나는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 했을까' 에버릿의 회한 가득한 고백에 나의 마음도 담는다. 모드는 예쁜 구두를 좋아한다. 예쁜 구두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한다. 틀어진 다리, 볼품 없는 걸음 걸이에 '예쁜 구두'를 욕망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눈길로 바라봤던 것을 고백한다. 보이는 것의 '번듯함'에 매인 나로서는 시각적 부족함 너머를 보는 것이 어렵고 부끄러운 숙제이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사랑하기, 엄마하기, 신앙하기) 동어반복을 하며 강의하고 떠들고 다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자주 실패한다. '보이는 번듯함'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모드의 걸음걸이가 자꾸 떠오르는 이유이다. 싫고 거북하여 자꾸 그리로 향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다고며, 엄지 척이라며 추켜세웠지만 한편으론 거북하고 싫었던 장면. 삐뚜룸한 몸으로 흔들어대던 클럽에 간 모드를 자세히, 오래 바라볼까. 예쁘게 보일 때까지? 그러다보면 '너도 그렇다. 부족하지만 너도 예쁘다' 내게 말해줄 수 있을까.



 







작년 이맘 때 기대와 설렘 가득 안고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집어 들었었다. 미국 오가는 비행기 독서용으로 선택했는데 결국 1년째 미완의 독서로 남아 있다. 야금야금 하나 씩 어쨌든 눈팅은 다했다고 볼 수 있다. 750 페이지 30여 편을 차례차례 꼼꼼히 읽었다 해도 '미완'의 느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내 '흠..... 긁적긁적.....' 하는 읽기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딱 내려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로 일 년째 '읽고 있는 중'의 도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와중에 장편 <현명한 피>가 IVP에서 번역돼 나왔다. '다 읽고 사기'의 책구매 원칙을 지키고자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으나 단편집에서 만난 인생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감동을 복기하고는 홀린듯 장바구니에 담고 말았다. 


내가 이걸 읽으려고 작년에 그렇게 화장실 들어갔다 뒷처리 안 한 느낌으로 플래너리 오코너를 끼고 있었구나! 어쨌든 오코너와의 라포 형성이 충분히 된 덕에 시간적, 정서적 낭비 없이 <현명한 피>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일이 되려면 이렇다. 가방에 든 <현명한 피>의 마지막 챕터 쯤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시점,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이 이름을 발견! 플래너리 오코너? 장거리 운전으로 몸이 뒤틀릴대로 튀틀리는 순간 팟빵을 털다 얻어 걸린 꿀잼이었다. 이동진은 내게 가끔 새로운 '정보'를 주는 고마운 '님'이지 '페이보릿'은 아니다.  피상적 차원에서 척척 대화가 통하지만 깊은 공감의 대화는 어려울 듯한 친구. 아는 것이 많아 입을 헤 벌리고 듣게 되지만 돌아서면 조금 공허한 그런 친구 같다. 동질성보다 이질성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을 알기에 가끔은 애써서 참으며 듣곤하는데 이번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들었다. 우주가 도와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느낌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의 주제는 '죄와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는 종교인들의 고민이다. 아니다. 정작 종교인들은 죄와 구원이라는 본질을 고민하진 않는다. 그로 인해 파생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엄한 곳에서 허튼 희망을 찾는 사람이고, 그 환상을 밑천 삼아 입에 풀칠 하는 사람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자는 구도자, (필연코) '외로운' 구도자일 터.소설의 헤이즐 모리츠는 (아무리 봐도 약간 돌아이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구도자이다. 순회 설교자인 할아버지(독침을 숨기고 다니는 말벌같이, 머릿속에 예수를 담고 세 개 군郡을 운전하며 다녔던 성마른 노인)을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두 살 이 될 때까지는 자신도 역시 설교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모리츠는 '예수를 피하는 길은 죄를 피하는 것'이라는 깊고 검은 침묵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설교자가 된다. 자칭 '현명한 피'를 가진 에녹은 또 얼마나 부적응적이고 멍청한 인간인가. 돈을 위해 가짜 맹인 설교자 행세를 하는 호크스가 설파하는 죄와 구원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종교이다. 등장인물 중 적응적 인간은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현명한 피> 안의 죄와 구원은 모두 뒤틀려있다. 각자 나름대로 죄와 구원을 독해하고 배역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명한 인간이라곤 없다. 현실 속 죄와 구원, 그것을 아우르는 신앙은 어떤가.


대학 친구들 모임에서 목회자인 남편과 관련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수다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숨통을 트기 위해 현실도피용으로 가지고 있는 나의 장래희망 카드를 하나 내놓았다. 마침 장래 계획에 관련된 전문가 친구가 둘이 앉아 있었다. 둘 다 크리스천이었는데 한 친구는 자칭 기복신앙에 보수적 신앙관을 가졌다. 목회자에게 잘 하고, 교회 봉사는 일단 열심히 해야 복을 받을 것 같단다. 다른 친구는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서 목회자(부부)에 과도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천하에 상종 못할 부류가 목회자인 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부부의 조금 파격적인 장래 목회 계획을 들은 두 친구의 반응이다. 자칭 기복주의에 보수적인 신앙을 자처하는 친구는 '너희 자신을 믿지 마라. 너의 남편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 어떻게 별할 지 모르고, 사람 욕심이란 끝고 없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집에 있는 뭣도 모르고 단잠 자고 있었을 우리 남편은 의문의 1패)  반면 목회자 알러지 있는 친구는 '신실아, 너라면! 네 남편이라면 무조건 잘 할 거야. 무조건 잘 할 것 같아'였다. (남편 의문의 2패?)


목회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결정한 친구는 제 친구 남편인 목사가 무조건 미덥지 않다. (근거는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목사들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친구는 내 친구의 남편인 목사는 무조건 믿을만 하다. (근거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남편이니까)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엉뚱하게도 나는 소설을 읽으며 두 친구를 떠올렸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고 예수를 부정하기 위해 부러 죄를 짓는 사람과, 그에게 죄의 냄새를 맡고 회심을 종용하는 거짓 맹인 설교자.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 언터쳐블의 존재라 믿는 것과 모든 목사를 잠재적인 장사꾼으로 보는 것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친구에게서 나는 본다. 맹신 이면의 냉소와 불신, 극단적 불신 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찌하여 볼 수 있는가, 내 안에 맹신과 불신 / 극단적 불신과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코너의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인간 내면의 이 불편하고 불온한 공존의 감정을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아니, 해결해준다. 충격적인 방식으로! 단편으로부터 이어지는 오코너 소설의 충격적 결말들은 다시 확인시킨다. 모순과 역설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두 친구는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내 안에 있다. 역자의 말대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내가 이렇게 살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좇는 헤이즐 모리츠의 그로테스크한 삶과 죽음을 따를까 겁이 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오코너가 동시대 개신교의 빗나간 열정을 풍자한 소설이라는 평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신교 천주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눈 먼 사람,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직 자아숭배에 몰두하는 사람을 직접, 가까이서 경험하지 않고는 이런 인물설정은 가능하지 않다. 아니 결국 자기 안에서 발견했을 테지. 충격적인 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할머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앎, 자신의 모든 것에 '성찰'이란 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편견을 종교의 이름으로 스스로 세례주어 합리화 한 좋은 나쁜 사람이다. 모든 것을 안다는 무지, 그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적 무지를 한 시도 쉬지 않고 입으로 떠벌떠벌하는 자가 불러온 끔찍한 화를 보며 놀라면서도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심지어 마지막 세 방의 총은 내가 쏘아도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평생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바로 그 일을 부적응자를 통해 대리만족한 느낌. 그녀의 입에서 더는 착한 나쁜 말이 나올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평생 누가 옆에서 1분에 한 번씩 총을 쏴 주었다면 좋은 여자가 됐을 거야"라는 부적응자(범죄자)의 말에 동생의 농담이 떠올랐다. "맞으면 돼. 몇 대 맞으면 돼." 치기 어린 비행청소년의 말을 세기의 소설가가 그로테스크하게 읊는다면 저 대사일 듯. 


헤이즐 모리츠이며, 호크스이고 동시에 착한 나쁜 할머니이며, 그를 쏜 부적응자인 나는 누구인가.

소설가 정이현의 추천사가 이렇게 답한다.


차갑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인간의 모순적 내면을 파헤치고, 읽는 이의 마음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후벼 판다. '어마어마'하다에는 매우 엄숙하고 두렵다는 뜻도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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