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즐겁게 안식할 날> 린 바압, 윤인숙 옮김, IVP


안식일이 안 쉬는 날이 되는 이유


그 옛날 청년시절부터 나의 교회생활은 ‘봉사의 생활’이었다. 봉사라는 의미가 교회에서 사용될 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다 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고, 찬양팀을 하고, 소그룹의 리더를 하고....이런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다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가끔 교회봉사와 신앙생활, 때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삐 움직이는 그 봉사의 현장 어느 곳에 숨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것도 있었다. 주일 이른 아침부터 끼니도 거르면서 밤이 맞도록 동분서주하면서 보내는 주일,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 뭔가 할 도리를 다 한 듯 뿌듯한 자족감.  또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 돈 되는 일도 아니고 그저 희생뿐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열심히 봉사를 할 때 교회 어르신들과 동료들로부터 받는 ‘입 마르는 칭찬의 달콤함’ 맛보지 않으면 모르는 은근한 맛이렷다.

때로 힘에 부치는 봉사를 하며 주일을 너무 빡세게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 두 가지 메리트가 나를 쉬지 못하게 한다. 내가 이래 뵈도 구원을 공짜로 받았는데 하나님께 뭔가 도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뼈 빠지게 봉사할 때 나를 어여삐 보아주시는 그 많은 따스한 눈길들.

그렇다. 내게 있어 안식일이 ‘안식일’ 되지 못하고 ‘안 쉬는 날’이 되는 이유는 내 자체로는 하나님도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존재만으로는 안 된다. 뭔가 성과를 내줘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나는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행위 없이 내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나는 과감히 안식할 수 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닌 이유


시간이 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를 찾는다.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한다. 관계의 존재로 말이다. 내 속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내가 털어놓는 만큼 내게도 자신을 드러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좀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친밀해지고 단짝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 나는 뜬금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떤 친구가 내가 거북해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하다. 역시 예상치 못했던 감정, 배신감 같은 것이 고개를 든다. 가끔은 내가 친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과시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오버하며 친한 척을 해보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어떻게든 연결되고 걸쳐져야만 안심이 되는 내 본성은 내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조차도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마음과 시간의 모든 공간을 그냥 텅 빈 상태로 두지를 못하고 어떻게든 사람들로 채워보려는 욕구 말이다. 시간이 나면 사람을 만나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전화 통화를 한다. 그 정도의 여유조차도 나지 않는다면 늦은 시간 사이버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미니홈피, 블로그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이는 일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그러나 결코 진정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설거지 다 하고 뭐 할거야? 쉴 거야? 컴퓨터 하면서 쉴거야?” 컴퓨터 앞에 앉은 엄마에게 또 묻는다. “엄마! 지금 일하는 거야 쉬는 거야? 어? 이건 누구 홈피야?” 키보드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빠르게 타닥타닥 날 때는 엄마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의자에 약간 기대앉은 상태로 느리게 따닥따닥 클릭하는 소리가 나는 건 쉬고 있는 것이다. ‘아니야! 사실은 엄마는 지금 쉬는 게 아니고 엄마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쉼을 찾.아.다.니.고 있는 거야’라고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겠다.


모든 것 내려놓고 안식하기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안식함’을 통해 거룩한 삶의 리듬 속에 살고 있는 <즐겁게 안식할 날-Sabbath Keeping>의 저자 린 바압, 그녀의 결단과 그에 따른 열매가 부럽다. 도통 삶에서 여백두기를 못견뎌하는 내게, 여백이 생기면 그 여백을 뭔가로 채우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내게 그녀는 조용하지만 따끔한 일깨움을 준다. 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으로 채워야할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충대충 일과 사람으로 틀어막아 수습하려했던 공허함은 바로 나를 만드신 분께로 가서 다시 튜닝이 필요하다는 싸인 이라고 말이다. 튜닝 되지 않은 악기는 합주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독주를 할 때도 스스로의 귀를 불편하게 만들고야 만다. 줄이 다 풀어져서 삶의 연주가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뒤늦은 수습에 나설 것이 아니라, 저자 책에서 보여주는 삶처럼, 아니 하나님께서 보이신 방법대로 여섯째 날에는 정확하게 쉬는 자리로 가는 리듬을 회복해야겠다. 매일 매일 주어지는 나만의 시간을 무엇엔가 걸쳐지는 것으로 얄팍한 위안을 삼을 것이 아니라 비워두고 내려놓고 쉬는 시간이 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 해야겠다.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중동에서 2년 동안의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우연히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 살게 되고, 거기서 전혀 새로운 문화경험을 하면서 발견한 보물이 오늘 이 책을 통해서 내게 전해졌다. 그 간에도 나의 하나님은 수도 없이 내 귀에 속삭이셨을 텐데....‘얘야! 일은 그만하고 내게 안겨 그냥 쉬거라. 뭘 그리 다른 쉼과 위안을 찾아다니는 것이냐? 그냥 나를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너와 함께 산책하고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단다. 내게로 와서 쉬거라. 지쳐서 파김치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지금 나와 함께 휴가를 떠나자는 말이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단다. 나를 찾아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너다워지고 너의 영이 충만해진단다. 내게로 오렴. 내게와 와서 쉬렴’ 그렇게도 안타깝게 속삭이셔도 도통 못 알아듣는, 도대체 ‘참된 쉼’을 모르는 나를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분의 딸을 사용하셨다. 가 가장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처방이 되는 ‘책’을 써서 내 손에 들려지게 하는 이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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