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하는 내적여정14


이석 :
모님, 안녕하셨어요? 이거요. 오다 보니 딸기가 참 싱싱해 보이더라구요.
모님 : 그렇다고 비싼 딸기를 이렇게 많이 사왔어? 고맙다. 앉아. 집 안에 연기가 심하지?
이석 : 연기요? 아, 연기. 그러네요. 뭘 구우셨나요? 웬 목장갑까지…….
모님 : 응, 좀 전에 커피 볶았거든. 나는 커피 볶는 비릿한 냄새까지도 좋은데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더라. 괜찮니? 환기를 시킨다고 시키긴 했는데.
이석 : 괜찮은데요…. 아, 이게 커피 볶는 냄새군요. 커피 볶는 일이 우아한 일인 줄 알았더니 연기에 목장갑까지 끼시고…. 이런 일을 할 땐 절 부르세요. 우리 모님이 이렇게 험한 일을 하시면 안 되죠. 하하.
모님 : 그러게. 커피 볶는 일이 생각보다 센 육체노동이다. 그래도 내게 가장 흥미로운 일이 이 로스팅하는 과정이야.
이석 : 밖에서 뵐 걸 그랬어요. 그러잖아도 정말 근사한 커피로 한번 대접하고 싶었는데요. 다음번엔 제가 맛있는 커피 집 찾아서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모님 : 그래, 그러자. 커피 마실까? 이번에 코스타리카가 좀 잘 볶였어. 커피 괜찮지?
이석 : 네네, 물론이죠. 코스타리카라…. 좋아요. 주세요.


모님 : 피곤하겠다. 어제 장례식에 장지까지 갔다 왔다며? 멀어서 힘들었을 텐데…. 
이석 : 아, 뭘요. 그 정도는 뭐…. 그래도 그 녀석 꿋꿋하게 잘 버티더라구요. 멀다고 오지 말라고 하더니 그래도 가니까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모님 : 이석이는 따뜻한 양털 같은 남자지. 이석이가 함께 가서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을 거야.
이석 :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서요. 응급실 가던 날 어머님도 계시고 친척 분들도 계셨는데 저한테 새벽에 전화를 했더라구요. 그래서 새벽에 응급실에 같이 갔거든요. 아, 이 녀석 가엾어 죽겠어요.
모님 : 언제나 힘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출동 대기 자세로 있는 이석이지? 그러니까 어려운 상황이 됐을 때 제일 먼저 이석이 형이 생각났겠네.
이석 : 아, 뭐… 제가….
모님 : 2유형들이 가진 장점, 여태껏 우리가 말한 방식으로 자아 이미지가 나는 돕는다. 나는 필요한 사람이다 이거잖아. 실제로 세심하고 친절하게 신경 써주고 남을 위해서라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지.
이석 : 제가 뭐 딱히 돕는다기보다는…. 우리가 서로 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모님 : 어쨌든 이석인 지난 며칠처럼 후배 아버님의 장례를 돕고, 마음이 아프거나 힘든 사람을 도울 때 의미 있고 살아 있다고 느끼지?
이석 : 그, 그렇죠. 그렇지만 뭐 그걸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모님 : 그래. 이석이가 스스로 가장 의미 있다고 느끼고, 또 가장 빛이 나는 그 지점 말이야, 누군가를 돕고 있고 필요한 것을 나누고 있다는 그 지점은 바로 집착이라는 어두움의 이면을 가지고 있지.
이석 : 제가 돕는 것에 집착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모님 : 이제껏 살펴본 모든 유형들이 그렇듯이 자아 이미지 내지는 유형이 가진 장점이 나쁜 것은 아니야. 남을 돕는 것은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잖아. 사실 우리 공동체에 이석이처럼 자신을 아끼지 않고 돕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
이석 : 아…. 뭐 그런 건 아니구요. 제가 뭐 하는 게 있다구요.
모님 : 다른 유형에서 그랬던 것처럼 2유형들은 자신이 도와야만 사랑 받고, 살아남는다고 여긴다는 거야. '저 사람이 뭘 원하나?' 하고 필요를 감지하는 안테나를 세우면서.
이석 : 사실 저는 그게 눈에 잘 보이고요. 그게 그렇게 나쁜 건 아닌…. 음, 말하자면 주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그런 삶이 아닌가요?
모님 : 반복해서 말하지만 남의 필요를 캐치하고 돕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쉽게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헌신적으로 남을 돕는 이유가 사실은 대.가.를 바란다는 거지.
이석 : 대, 대가라구요? 제가 무슨 대가를 바라겠어요? 저는 뭘 바라면서 해준 적 없구요,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에 충실하자는 그런 마음뿐예요.
모님 : 그래. 2유형들에게는 다소 아프고 충격적인 말이겠지만 한 번 생각해 봐. 무리해서 후배들 밥을 사주고,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일일이 다 태워다 주고, 어려운 일 있을 때 끝까지 함께 있어주고 했는데, 이런 도움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인정해주지 않을 때 이석이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말이야.
이석 :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겠지만 결국 주님이 알아주시면 된다고 생각해오긴 했는데. 그렇지만 그게 좀, 뭐랄까….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모님 : 이런 거야. 2유형이신 어느 여 집사님의 고백인데, 그분은 천생 크리스천이라 할 만큼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돕는 데 선수시지.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자신이 무슨 대가를 바라냐며 본인은 2유형이 아니라고 하셨어. 어느 날 가까이 지내는 분 남편이 심하게 아프셨나봐. 평소대로 정성껏 죽을 쒀서 가져다 주셨대. 집에 와서 고맙다거나 맛있다거나 전화 한 통 하겠지 싶었는데 안 하더래. 문자라도 오겠지 했는데 안 오고. 이 집사님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애?
이석 : 그, 글쎄요. 뭘 어떻게 했을까요?
모님 : 저녁에 자기가 전화했다는 거야. 전화해서는 '아까 죽이 조금 짰지?' 했다고.
이석 : 풉! 아….
모님 : 그러면서 결국 '전화 못 해서 미안하다. 고맙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내심 괘씸한 마음이 드는 자신을 깨달았다고 하셨어.
이석 :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네요.
모님 : 커피 한 잔 더 마실까? 리필 안 필요합니까, 고객님? 아, 참! 위장병 때문에 요즘 약 먹는다고 하지 않았었니? 커피 마셔도 되는 거야?
이석 : 네? 네…. 아, 약 먹고 있긴 한데요… 뭐, 괜찮아요. 모님과 함께 하는 커핀데 마셔야죠. 리필 주세요. 하하하.
모님 : 어이구, 이런. 됐다! 그냥 넘어가자. 남의 필요와 그것을 돕는 데 꽂혀 있는 2유형들이 회피하는 건 자신들의 욕구야.
이석 : 욕구를 회피한다니요? 욕구가 회피한다고 회피할 수 있는 건가요?
모님 : 그래. 회피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야. 2유형들은 자신의 욕구를 잘 알지 못하고 내세우지도 못한다는 거지. 내 욕구를 채우면 사랑 받을 수 없을 것 같다거나 이기적이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석 : (목소리 톤을 높여) 그렇지 않나요? 자신의 욕구만을 내세우고 채우는 건 이기적이고 나쁘죠.
모님 : 물론이지. 여러 개의 사과 중 제일 좋은 것을 골라 '이거 먹어라' 하면 '네~' 하고 넙죽 먹을 수 있는 2유형이 많지 않을 거야. 대체로 '저는 괜찮아요. 누구 먼저 주세요.' 하지. 왜 자신은 괜찮다고 하지? 본인도 좋은 걸 누려야 할 귀한 존재가 아닌가?
이석 : 제 얘기하시는 거예요? 저는 일부러 수박을 먹어도 맨 끝의 껍질 부분을 먼저 집어 먹는데….
모님 : 남의 욕구에 맞춰 사는 것이 훌륭한 삶(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준과 전제를 두셨어.
이석 : 아…. 실은 후배들에게 밥을 사준다거나 선물을 사줄 때는 망설임이 없는데 제가 쓸 물건을 좋은 걸로 사려면 힘들어요. 뭘 새로 샀다는 걸 사람들이 알까 봐 숨길 때도 있고요. 그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님 : 그래,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바램과 필요에 두기 때문에 2유형들이 내면 성찰하는 것을 어려워 해. 이것은 2유형의 근원적인 죄인 교만과 맞닿아 있어.
이석 : 저, 그거 이해가 정말 안 돼요. 제가 부족한 점이 많지만 교만하다는 건 좀….
모님 : 2유형들이 돕기만 하고 남의 도움 받는 것은 강하게 부정하는 경향이 있지. 2유형의 교만은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는 데서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바라는 것에 자신의 삶을 묶어 두고 자신의 필요는 아예 묵살하지. 그러면서 '나는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교만과 허영에 빠지는 거야.
이석 : 그… 그게 교만이군요.
모님 : 그래서 2유형들은 진심으로 감사하기가 어렵다는 거야. 하나님께 조차도 내가 봉사하고 열심히 섬겼을 뿐 받은 게 있어야 감사하지.
이석 : ………
모님 : (이석이 등을 토닥이며) 에니어그램 워크숍을 하면서 유형별 그림을 그려. 가끔 2유형의 그림에서 뻥 뚫려 있거나 텅 빈 마음을 그린 그림이 나와. 자신 안에도 사랑 받고 싶은 욕구와 갈망이 있어서 마음이 텅 비어 있는데, 그 메마른 곳에서 뭘 퍼내서 주려고 애쓰는 2유형들이(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엾게 느껴져. 내가 커피를 하면서 로스팅을 하게 된 계기 중에 하나도 이와 비슷해. 신선한 원두는 값이 비싸거든. 넉넉히 사 둘 수 없으니까 집에 찾아오는 이들과 커피를 나누는 게 힘들어지더라. 겉으로 헤헤거리긴 하지만 속으로는 한 잔 두 잔 계산하고 헤아리는 거야. 그러다 분노하고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그래.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생두를 사다가 어설픈 자가 로스팅을 하기 시작했지. 원두가 넉넉해지면서 나누는 내 마음이 편안해졌어.
2유형들이 돕고 나누는 것 정말 귀하고 아름다워. 다만 먼저 텅 빈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겠어. 비어 있는 걸 외면하고 퍼주는 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하지 않아. 내가 왜 다른 사람들에게 그토록 잘 해주려고 애쓰는지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많이 자유로워질 거야. 도움의 여왕 테레사 수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지. '나누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고,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은 타인의 인정에서 오는 게 아니라 기도로 만나는 그분에게서만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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