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영화는 결국 보게 되어 있고, 놓친 영화는 내 것이 아니다. 이쪽으로 이사 온 후에 놓치는 영화가 많아졌는데 그러려니 하고 있다. 영화 뿐이겠는가 일도 사람도 결국 만나지는 것이 내 것이다. 성사시키려 애쓰기 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가, 만나고 싶은가'를 묻고 시간과 상황의 흐름을 타는 것이 제일이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보려고 검색하고 시간 맞추고, 심지어 어떤 날은 서울까지 나가기도 했는데 보질 못했다. 사당역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다. SNS에 몸을 맡기고 놀다 얻어 걸린 책모임이었다. 오래된 책모임이 있는데 모임 시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걸 생각하면, 한 방에 시간도 맞고 마음도 가는 책모임은 '내 것'인 셈이다. 당일 이수역 아트나인의 상영시간을 검색하니 <다시 태어나도 우리> 마치는 시간이 모임시간 15분 전이다. 죽어라 뛰면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 (일타쌍피 짜잔) 

 



영화 마치고 극장에서 모임장소까지 순간 이동한 느낌으로 달려갔다. 생각해보면 책모임 내내(거의 3시간) 인도와 티베트 눈덮인 고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약간 달뜬 상태로 모임에 앉아 있었고 책 얘기를 했지만 정신은 훨씬 더 넓은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세 시간여의 모임은 영화의 연장이었는지 모른다. 정작 관람 중에는 몰입이 잘 되지 않았었다. 잔잔한 다큐영화인데 옆좌석 여자분이 중간부터 계속 울어대는 것이다. 반작용으로 나는 더욱 차가운 이성의 불을 밝히고 관람하게 되었다. 담담히 보고 잔잔히 감동 받았기에 천천히 걷고 싶었지만 미친 여자처럼 15분을 뛰어 약속 장소로 가며 묘한 느낌이었다.   


벌써 자기 생에 이름을 붙이고 확고한 길을 가고 있는 맑은 눈동자의 아홉 살 인격 앙뚜, 어린 제자에게서 높은 스승의 영혼을 감지하고 그의 길을 열어주는 것에 삶을 건 주름 가득한 얼굴의 노승 우르갼. 극(drama)이 아니다. 말 그대로 다큐다. 두 주인공 각자의 생애 또는 둘이 하나 되어 사는 춥고 먼지 나는 일상에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숭고하고도 아름답다. 윤회나 환생의 종교적 믿음과 별개로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이다. 노승 우르갼의 요란할 것 없는 자기증여와, 어린 앙뚜가 린포체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명의 태도에서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 구도의 길이 산과 눈보라에 막혀 있어 막막할수록 두 사람 사이 오가는 그 무엇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 무엇'이다. 이것은 사랑, 헌신, 신뢰, 가르침과 배움, 정(情)......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따스함이다.  




스승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때는 제 때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내 인생,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 존경하고 신뢰하며 스승으로 여겼던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여 방황하던 날도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스승은 참 많았다. 스승은 만날 수 있지만 제자는 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금방이라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스승님이 많다. 물론 그분들 중에는 내가 당신의 제자인 줄 모르는 분이 허다하지만.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여겨지는 분이 많다. 여기저기 영성심리 배우기 위해 들쑤시고 다닌 곳에서 만난 선생님들 그렇고,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들으러 오셔서 자기를 나눠주며 오히려 가르침을 주고 간 분들이 그러하다. 책으로 만난 스승님이야말로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실은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스승은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아무튼 오늘의 내 강의과 글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나를 스쳐간 내가 통과해왔던 스승님들의 덕이다.


앙뚜와 우르갼은 묘한 사제지간이다. 앙뚜는 전생의 높은 스승이 환생하여 태어난 린포체라 하니 늙은 우르갼에게 지극히 높은 스승이다. 어린 앙뚜는 우르갼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없다면 아홉 살 무력한 아이일 뿐이니 진정 우르갼의 제자이다. 둘 사이 스승이며 제자이고 제자이며 스승인 묘한 관계이지만 피차에 스승연(然)하는 자의식은 없다. 라면을 끓여주고, 청소를 하고, 불경을 공부하고, 삐딱하게 굴고, 막막하게 먼산을 바라보는 스승과 스승, 스승과 제자의 일상이 숭고하게 다가오는 이유같다. 그저 보이는 것만 보면 늙은 의사와 어린 아이인데 서로에게서 스승을 본다. 서로가 가진 가장 높은 것을 본다. 이것은 '당신 안의 신을 경배한다'는 라마스떼, 지극한 존엄의 태도 아닌가.




항상 스승을 찾아 헤매는 나는 이번 학기에 강의 하나를 신청했었다. 두 번 가고는 다시 발길이 움직이질 않아서 못 가고 있다. 강의 신청을 해서 실패하는 적이 거의 없다. 강의로 벌어서 강의 듣는데 쓴다해도 본전 생각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강사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흘러나온다. 그런 의미에서는 얻을 게 많다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했다. 참고하는 모든 책의 저자의 주장을 끌어와 자기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듯한 태도에 나는 나의 무엇을 투사하는지, 들어주기가 불편했다. 지난 학기까지 4학기 철학상담을 들으며 정말 어려웠다. 못 알아듣는 말이 반이었다. 강의가 어려운 이유는 교수님이 단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는 식이었으니까. 철학은 그럴 수 밖에 없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는 학문이 있기는 하지만.


가르치려는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다. 일반화 할 수는 없겠다. 적어도 나는 자기확신에 차서 가르치려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않는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스승이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에 내게 가르친 것을 모를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스승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존재를 걸고 싶은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우르갼에게 앙뚜처럼 말이다. 또 스승은 무력한 자에게 유일하게 기댈 언덕일지 모른다. 앙뚜에게 있어서 우르갼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만남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스승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저 두 사람처럼. 춥고 가난한 삶과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길을 헤치고 가는 여행이라 해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라고 그런 스승을 못 가질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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