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 22

 

 

교회 청년부에서 연애 강의를 하고나면 꼭 받는 질문입니다. ‘스킨십 어디까지 가능한가요?’ 저는 데드라인을 정해준다고 지킬 것도 아니면서 왜 묻느냐받아치지만 질문 뒤에 숨은 SOS 메시지를 마음으로 느껴요.

남친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할까요? 계속 거절하다 사랑이 깨지면 어떻게 하죠? / 제 컴퓨터에 있는 영상들과 제 머릿속 상상을 하나님은 다 아실텐데 끊을 수가 없습니다. 늘 마음 한 구석 죄의식이 따라다닙니다. / 순결을 잃은 제가 축복의 결혼할 수 있을까요? / 어쩌다보니 데이트가 곧 성관계입니다.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매주일 예배드릴 때마다 마음에 찔림이 있지만 돌이킬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 결혼할 건데 굳이 지켜야 하는 걸까요? 데이트 한 번 한 번이 정말 힘든데요. / 결혼 전까지 꼭 지키고 싶습니다. 이런 비슷한 얘기만 꺼내도 친구들은 저를 바보 광신자 취급합니다. 제가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남친(여친)을 못 사귀는 걸까요?

 

딱히 물을 곳도 없고, 있다 해도 솔직하게 꺼내기 어려운 얘기들입니다. 교회의 청년들의 성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저도 그렇게 주장하는 글을 쓰곤 했습니다) 허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교회가 전통적으로 성을 금기시하고 건강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성은 원래 부끄럽고 낯선 것입니다. 그래서 발화되기 어렵습니다. 막 시작한 연애로 스킨십에 불이 붙은 청년이나, 혼전순결을 목 놓아 외치는 믿음이 특심이신 장로님이나, 심지어 결혼 17년 차로 연애강의를 하는 저조차 성에 관해 특히 자신의 성 이야기를 쿨하게 내놓기란 쉽지 않습니다. 섹스를 섹스라 부르지 못하고, 마음으론 그렇게 원하지만 너와 뽀뽀하고 싶다말로 나오질 않죠. 개인적으로 성에 관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도 있고, 엄격한 분위기의 신앙교육을 받은 탓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에 관련된 감정이 낯설고 부끄러운 이유는 그것이 단지 육체적 욕구가 아니라 존재 깊은데서 오는 갈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킨십은 어디까지 가능한가요?’ 에둘러 묻는 이 질문을 탓하지 않겠습니다.

 

청년들에게 가혹한 시대라고 하지만 크리스천 청년들에겐 더욱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연애관련 자기계발식 정보가 잘 팔리는 상품입니다. 그에 힘입어 더 이상 연애, 스킨십, 성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것 없다는 듯 <마녀사냥> 같은 TV 프로도 생겼지요. 교회 수련회에선 ‘(부끄부끄) 스킨십 어디까지 가능한가요?’ 이러고 있는데 <마녀사냥>에선 성경험, 성욕에 관해 못 할 얘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연애를 대놓고 섹스와 등치시켜 놓는 대담함이라니. 신세계 같습니다. 이런 어느 날이 있다 가정해봅시다. 혼전순결을 목 놓아 주창하시는 장로님 말씀에 나는 영락없이 음란마귀 씌운 자구나자책하며 회개하며 집에 돌아옵니다. 늦은 밤 TV를 켜니 <마녀사냥>이 뙇. 음란마귀는 무슨! 출연자들의 경험이 보편이라면 내 몸과 영혼은 순결해도 너무 순결해서 쉰내가 나는 것 같나요? 이렇듯 봉건과 근대 몇 백 년의 시대적 간극을 하루에 넘나드는 듯 하는 여러분의 연애와 스킨십과 성이 진심 안타깝습니다.

 

이쯤 되면 제가 시원한 답을 드려야 하나요? 순결서약과 마녀사냥 사이 어디쯤이 당신들이 서야할 좌표라고 빨간 압정 딱 꽂아 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제가 정해준 답이 너무 하드하면 고리타분하다며 마녀사냥에 사연 보내는 것이 낫다 할 것 같고. 너무 느슨하면 음란마귀 연애강사로 담임 목사님께 신고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구요. 연애강사나 청년사역 목사님이 정해주는 선과 정답은 여러분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일단 들어보고 폐기되는 건 아닌가요.

 

여러분 안에 답이 있어요. 어디에 설 것인가? 한 번 쯤 심사숙고 하고 정해보세요. 아직 교제 전이라면 더욱 좋고요. 연애 중이라 스킨십이 진행 중이라도 몸이 가는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몸의 진도를 어디까지 뺄 것인가 멈춰서 정해보세요. 멀쩡히 잘 하던 스킨십을 멈추고 분위기 깨지게 무슨 짓이냐, 남친이 삐져서 갈등이 생기더라도 좋은 일입니다. 너무 멀리 와 있다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관성을 따라 데이트하고 있다면 그대로 가지 마세요.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면 바꿀 수도 있어야죠. 그걸 당장 어떻게 하냐구요? 당장 결정하라는 것도 그럴 수 있다는 뜻도 아니에요. 고리타분한 가르침을 반복하는 교회에 화를 내는 것도 필요하고, 혼전 임신으로 서둘러 결혼한 친구 뒷담화 하는 것은 살짝 아드레날린 나오는 쾌감이 있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나의 성이야기를 고민하고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결정한 후에 책임져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최근 방송에서 모 가수가 혼전순결을 지키겠노라 당당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정의 내용보다 감동적인 것은, 이미지가 손상될 것을 알면서, 악플이 줄줄 달릴 것을 알면서도 당당히 밝히는 그 용기입니다. 이 가을, 여러분 자신의 성이야기, 몸에 대한 결정권 행사를 위해 저랑 같이 고민해 볼래요? , 지면이 부족하군요. 다음 달에 다시 올게

 

 

<QTzine>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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