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동에서의 마지막 아침, 그러니까 이사하던 날 아침에도 여전한 햇살 거실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서운할 정도로 여전한, 무심한 아침이었다. 맑은 날 아침마다 책꽂이 중간까지 다가와 어떤 책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던 아침햇살이다. 그걸 마주할 때마다 찰크닥찰크닥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시작한 하루가 많다. 스포트라이트가 순식간에 옆 책으로 옮겨지거나 모양이 바뀌기 때문에 서둘러 찍워둬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저자들 위에 얹힌 그림자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은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시간이다. 아침에 잠깐, 그리고 해질녘 한 순간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영성수련의 시간이다. 이 집을 향한 애정이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삿짐을 먼저 보내고 레슨 갔던 채윤이를 태우고 새로운 곳 분당으로 향했다. 점심으로 어디서 무얼 먹을까? 여기서 먹을까, 가서 먹을까. 이런 의논을 하던 중이었다. '엄마, 나 밥이 안 먹혀. 어제부터 이상해. 놀이기구 탈 때 온몸의 장기가 다 붕 떠있는 느낌, 그런 느낌이야.' 이사 전날에 채윤이는 혼자서 강에 나갔다 왔다. 그 마음 나도 안다. 며칠 전 나도 절두산 성지와 마포 한강변을 찾아 작별인사를 하고 왔었다. '장기가 붕 뜬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단다. '그건 슬픔이야' 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리 모두 조금씩 슬프단 얘길 했다. '그래도 엄마, 5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은 일을 겪었어. 예중 입시 준비부터 예중 3년, 예고 입시, 그리고 꽃친. 어제는 일기를 썼어. 쓰면서 정리해보니 이사올 때와 이사 갈 때가 너무 다르다는 얘기로 끝나는 거야.' 그래, 채윤이의 동인리버빌 5년은 도전과 모험의 시간이었다! 다시 한 번 장하다, 우리 채윤이.


밥맛을 먼저 잃은 아이는 현승이다. 겨울방학 내내 봄방학 얘길 자주 했었다. 겨울방학 개학하던 날, 아침에 빵 한 조각을 먹었고 학교에 급식도 없었는데 저녁까지 뭘 먹질 않았다. 배가 고팠을텐데 저녁조차도 무성의하게 먹는다. 하루 이틀 후에 고백을 해왔다. '엄마, 입맛이 떨어진 이유를 알았어. 이제 며칠 있으면 봄방학인데. 봄방학 하는 날이 친구들과 마지막이야. 벌써부터 친구들이 인사를 해. 가서 잘 지내, 이렇게 말을 하니까 밥을 잘 못 먹겠어. 입맛이 없어져.' 눈 뜨면 연락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자곤 하는 옆동에 사는 베프와는 만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러는구나 싶어서 현승이 없는 자리에서 세 식구가 모여 대신 슬퍼하기도 했다. 아이들 어렸을 적에 읽었던 슬픈 그림책 <안녕 또 만나> 같다고.


벌써 몇 달 전, 분당행이 결정되고 현승이에게 알리던 날, 영화 한 편을 찍었었다. 차안에서 얘기했는데 바로 통곡을 했다. '한 번도 전학하지 않는 친구가 태반인데 나는 왜 자꾸 이래야 하느냐.' 생떼로 시작해서 넋두리를 하더니 시를 읊는다. '내가 이 골목에 서 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엄마는 몰라. 이 골목에 서 있지 않은 나를 상상할 수 없어' 그리고 몇 달 동안 간간이 통곡하고 간간이 생떼 쓰며 시를 읊었다. '친구들과 놀면, 행복한 그 순간이 이미 그리움이야' 사춘기 문학 소년의 감성 터지는 원망과 불평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몇 달을 지냈다. 이사가 지연되고 지연되면서 주일만 가는 새로운 동네 새 교회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사 가고 싶다'란 말이 나왔다. 아, 얼마나 다행인가. 말도 안 되게 이사 진행이 안 되어 마음을 졸이다 아빠는 병까지 얻어 앓아 눕기까지! '이사 가고 싶다'는 말이 현승이 입에서 튀어 나온 것만으로 졸였던 마음, 바닥에 눌러 붙은 근심의 찌꺼기 따위 오케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5년 전 명일동에서 이사 와서 앓았던 이별 증후군은 치명적이었다. 이사 한 달 후에 쓴, 초딩 3학년이던 현승 님의 시는 언제 떠올려도 쓸쓸하다.



이사

 

                                        김현승


이사한 곳을 지나가면 뭔가 마음에 걸린다

마치 무엇을 두고 온 것 같다

수영장에 수영복을 두고 오 듯

학교에 공책을 두고 오 듯

이사한 곳에 마음을 두고 왔다


현승인 늘 이별을 두려워한다. 변하지 않는 관계가 세상에 있는지 자꾸 묻는다. 분당 이사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도 '엄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 친구는 아무리 좋아도 또 헤어지게 돼. 그렇게 생각하니까 김포 수우세(외가의 사촌동생 셋, 수현 우현 세현)이 참 좋아. 외갓집은 우리가 이사를 해도 다시 만날 수 있잖아. 그리고 언제 가더라도 그대로일 것 같아. 수우세 셋이 놀았다 싸웠다 하고, 삼촌한테 혼나고. 외할머니가 현성아, 그러면서 돈을 주시고..... 김포가 참 좋아. 엄마, 나 오늘 혼자 버스 타고 가서 김포에 가서 잘게.' 현승이의 슬픈 시같은 말들을 그저 듣는다.


남편의 마음은...... 심심상인이다. 말이 필요 없다. 목회자와 가장의 정체성,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그의 번뇌는...... 나의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 이사 가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들> 같은 거실, 소파, 책상 만들어 줄게. 정신실 작가 글쓰는 자리 꼭 만들어 줄게' 이 말만 반복한다. 심심상인이다.


이삿짐이 다 나가고 텅 빈 집에 홀로 남았다. 청소를 좀 더 하고 나올 요량이었다. 먼지를 털고 바닥을 닦으며 고마웠던 집에 안녕을 고했다. 이 집에 와서 첫 책이 나왔고, 줄줄이 다섯 권의 책이 따라 나왔으며 '작가'라는 호칭이 민망하지 않아졌다. 떠나고만 싶었던 한국교회에 대해 절대 절망의 소망을 희미하게 품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고 평안했다. 집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도 아닌데 그냥 집에 고마웠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툭툭 털고 나오려는데..... 이삿짐 센터에서 놓치고 간 것이 있다. 주방 벽에 붙어 있던 'Present is Present'이다. 5년 세월 동안 얻은 소중한 만남이 어느 날 들고 온 문구이다. 한참 들여다 보았다. 이 집에서 주시는 그분의 마지막 메시지 같다. 늘, 언제나 '현재'가 가장 좋은 선물이다. 지나간 날은 지나간 선물이다. 오늘이 최고의 선물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종이를 떼내었다. 5년의 선물이 지나갔고, 오늘이라는, 다시 새로운 선물이 왔다. 두려움 없이, 기대감으로 발을 떼도 된다고 하는 것 같다. 이제 맞이하는 오늘이 선물이고, 선물은 늘 '오늘'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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