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우리들> 하는데, 왠지 포스터가 싫어서 생각에 없던 영화였는데 열카톡을 하다 얻은 정보가 이랬다. '소재: 초등학생의 왕따와 그 안의 감정, 그러나 결국은 그들의 언어로 담아낸 우리들의  감정' 이란다. '어머, 이건 (채윤이 손잡고) 꼭 봐야해!' 했다. 그리하여 채윤이와 함께 보았다. 영화를 강추한 여자사람 제자가 어느 남자사람과 봤다는데 그 남자사람이 울었단다. 그렇다면 나는 홍수, 쓰나미가 되겠군. 만반의 울 준비를 하고 갔다. 눈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고 휴지도 듬뿍 챙겼다.


채윤이에겐 영화에 대해 긴 설명 하지 않았다. 그냥 보자고 했다. 긴장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입안 헌 곳에 알보칠을 바르기 전의 긴장이다. 팔짝팔짝 뛰도록 아프다는 걸 알지만 나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어렸을 적에 동생이 여름마다 무슨 피부병을 앓았다. 밖에서 죽도록 놀고 들어오면 일단 목욕을 시킨 후에 과산화수소로 상처 하나하나 소독을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연고를 발랐다. 여름 저녁마다 무슨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다. 엄마 아버지가 하시던 치료의식을 어느 때부턴가 내가 하게 되었다. 소독약 묻은 솜을 상처 부위에 대면 동생이 아파서 팔짝팔짝 뛰었다. 투명한 과산화수소는 상처에 닿으면 뽀골뽀골 거품이 되었다. 거품이 뽀골거리는 만큼 동생이 펄쩍펄쩍 뛰었고 마치 내가 아픈 것처럼 오금이 저렸는데, 그나마 거품이 뽀골거리면서 균이 없어지는 느낌이라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느꼈다. 영화 <우리들>을 보러 채윤이 손잡고 가는 일은 과산화수소 묻은 솜 앞에 상처를 내미는 일과 같다. 그래도 남은 균이 뽀골거리며 잡힐 거야.


팅팅 부은 눈으로 영화관을 나서겠구나, 유난히 각오를 하게 된다. 허무하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말짱한 얼굴로 필름포럼 2관을 나왔다. 옆에 앉았던 채윤이도 마찬가지. 대신 나는 영화보는 내내 양팔이 아팠다. 마비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순간적으로 근육의 긴장이 훅 풀렸다가. 내내 그런 식이었다. 나중에는 손을 펴고 팔을 축 늘어뜨리고 '내려놓음' 포즈가 되었다. 관람 후엔 채윤이랑 맛있는 것을 먹으며 치유의 수다수다를 할 계획이었는데 채윤이 얼굴이 말이 아니다.(울어서가 아니다) 그냥 딱 '기분이 떡입니다' 이런 표정이다. 영화 시작 전 분명 맑음, 쾌청이었건만. 영화 얘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다와서 '영화 어땠어?' 물었더니 '저런 영화 싫어. 영화가 너무 현실같애. 나는 영화같은 영화가 좋아' 짧은 평이었다. 왕따라는 말로 담을 수가 없다. 영화도 그렇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6학년 때 같은 친구에게 당했던 그 일과, 채윤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당했던 그 일 모두는. 왕.따. 두 음절의 보편적인 언어로 담을 수 있는 사연이 아니다. '왕따'라는 말이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영화 <우리들>은 담아냈다. 그 복잡함과 두려움과 팔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다 보여주었다. 그래서 차마 울지도 못했다. 채윤이 말 '너무 현실 같애'에 담긴 뜻이 그러하다. 나도 그랬다.


이 영화를 보고 울 수 있는 그대, 행복하여라. 라고 말하겠다. 울 수 있는 것은 한 발 물러서서 볼 수 있다는,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울 수 없다. 영화 속 선과 지아가 결코 울지 않는(못하는) 것처럼. 왕따(우쒸, 이 말의 무게는 도대체가 너무 가볍다고!) 당하는 아이의 1인칭 시점을 너무 잘 그려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꿈작업, 내면아이 치료작업..... 그리고 치유하는 기도 등을 해오면서 나는 나의 왕따(우쒸) 사건을 재경험하였다. 많이 객관화되었고 치유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울 수는 없는 나를 발견하였다. 울지 못하여 몸이 아픈, 아직 녹지 않은 감정이 몸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채윤이도 마찬가지. 아프도록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어른이 없다. 불과 열한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폭력에 짓밟히고(짓밟고) 있을 때 도움을 손길을 내미는 어른이 없다. 아니, 손이 아니라 눈이 먼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두려움 가득한 표정과 축 쳐진 어깨를 읽는 눈이 없다. 선이 엄마는 밝고 따뜻하여 치유인자를 가진 사람 같지만 자기 아이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러니 엄한 곳에 정과 따스함을 발휘한다. 남편이 돌보지 않는 시아버지 돌보기에만 극진하다.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 문제로 두면 될 일에 내내 더 마음을 쓰는 듯하다. 선이 아버지는 임종 직전인 자기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음이 괴롭다. 괴로울 때마다 술로 회피한다. 심지어 권위적이지도 않은 젊은 담임 선생님조차도 이 가공할 폭력을 읽어내는 눈이 없다. 이 어른들을 탓할 수 없다. 이 어른들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에의 미숙함은 선이 지아 수준이다. 엄마는 낫다고?(엄마가 늘 선이 동생 얼굴에 상처내는 연우엄마와 통화하는 것을 보라. 문제에 직면할 줄 모른다) 어른이 없다. 선이나 지아도 결국 이 아픈 일에 대해 돌봄받지 못한다면 똑같은 어른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시절 내게도 마땅한 어른이 없었다. 엄마가 알고 학교에 쫓아와서 뭐라뭐라 했지만 결국 내게 한 말이 '니가 교만해서 그렇다'였다. 이 말에 내 가슴에 더 큰 비수로 꽂혔다는. 채윤이에겐 어땠을까? 엄마 아빠가 마땅히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을까? 썩 자신이 없다. 내게 여전히 미해결 과제인데, 엄마로서 한다고 했지만 잘 했을까?


왕따 경험이 없다 해도 누구나 두려워한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한다. 장면장면이 그 두려움을 참 잘 그려낸다. 셋이서 대화하다 나머지 둘과 내가 의견이 다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한 긴장이 생기는 것이다. 둘도 마찬가지. 상대와 내가 의견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되어도 몸 어딘가가 떨린다. 우리들, 우리들이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운 우리들이다. 평균적인 두려움을 상회하는 두려움, 그리하여 울 수도 없는 또 다른 우리들도 있다. 아직 울지 못하는 우리들을 자각시켜주니 고마운 영화이다. 울지 못하고 몸이 아팠거나 하염없이 우울해진 우리들 있으면 여기여기 붙어라! 당신만 그런 거 아니다. 우리집에도 둘이나 있다.


집에 와서 한참 후에 채윤이가 한 마디 더 했다. '엄마, 그런데.... 영화 속 모든 사람이 다 이해가 돼. 공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돼. 선이, 지아, 심지어 보라까지도 이해가 돼' 이해가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해된다고,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 강제할 필요 없어. 모두를 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먼저 너의 아픔을 돌봐.' 참았다. 다시 얘기할 기회가 올 것이다..


영화 리뷰 쓸 마음이 생기면 다른 리뷰를 일부러 읽지 않는 편인데, 영화소개에 바로 링크가 되어 있어서 이동진의 글을 읽었다. 동의하지 않음! 특히 아래 인용된 부분 완전 동의하지 않음이다. 


‘우리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려도 관계는 어리지 않다. 이 영화의 아이들이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풀어야 하는 자신만의 실타래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우리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이다. 아이들이 어리기에 관계는 어리다. 이 영화의 아이들에겐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어른들이란 없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른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열한 살이 주고받기에는 너무 잔인한 폭력이어서 스스로 풀 수 없는 실타래였지만 그 누구도 풀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풀지 못한 실타래를 가진 아이들이 그대로 어른이 되었기에 오늘 열한 살이 도움을 청할 어른은 여전히 없는 것이다. 여전히 어리고 미성숙한 관계를 맴돌다 술로 도망치는 몸만 어른인 어른들 뿐이다.


라고 고쳐야 맞다.


그리고 또 하나,

피구에서 가위바위보로 애들을 하나 씩 뽑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같은 장면으로 끝낸 양괄식 구성. 첫장면의 피해자 선이가 용감하게도 지아 편을 들어준다. 훈훈할망정 감동적이진 않았다. 급조한 환타지 엔딩 같았다. 내내 무섭도록 리얼리티이지 않았던가. 영화 속 선이 캐릭터는 그럴 수 있다. 어린 동생의 말에 은혜받아서 '아, 내가 먼저 무장해제 해야지' 결심했을 법하다. '내가 때리고, 연우가 또 때리고, 계속 때리고 때리고 그러면 언제 놀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은 유딩의 입에서 나온다. 현실 왕따 세계에서 선이 같은 선이가 있을까.................................. 그래, 있겠지. 다시 생각해보니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나마 세상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게다. 




쓰다보니 과하게 시니컬해지는 것 같기도.

뒤로 올수록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왕따 트라우마 치료가 시급한가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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