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엉망진창인 목사님이 설교’는’ 잘합니다. 그 목사님을 이렇게 대한다면 어떨까요? “목사님의 삶은 보지 말고 설교만 들어. 그렇게 알아서 은혜 받으면 되는 거야" 가능할까요? 신앙이 삶과 상관 없는 관념이거나 실체 없는 허상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어떤 선생님, 목사님, 지도자들을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마음의 투사(projection)입니다. 기술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야 그의 사생활이 어떠하든 상관 없습니다. 운전기술, 커피 내리는 기술만 배우면 되니까요. (엄밀하게 따지면 '기술'을 배우다 무의식적으로 배우는 '태도'가 있으니, 결국 '기술'조차도 누구에게 배우느냐는 중요합니다.) 신앙을 안내하는 종교지도자의 삶과 설교를 분리해서 배울 수 있다는 말에는 신앙에 대한 정의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지는 결국 내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가진 하나님 상(image)는 어떻겠습니까. <침묵>의 저자 엔도 슈사쿠의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에 나오는 짧은 글입니다.

‘예수님은 각자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내게는 나의 예수님 상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들 나름의 예수님 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혁명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그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 유다교 해방자인 동시에 사회 혁명을 시도한 사람의 이미지가 박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은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면서 사랑의 작용을 하는 이미지입니다. 사람들 각자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 예수님의 이미지가 탄생합니다. 나는 이런 이미지의 총체가 진정한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묘사한 것처럼 예수님은 확실히 상냥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그것만은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성전 경내에서 양과 비둘기를 팔고 있던 상인이나 환전상들을 새끼줄로 만든 채찍으로 쫓아낸다든지 그들의 돈을 흩뿌리거나 판매대를 둘러엎는다든지 하지 않는가, 그런 과격하거나 강한 면도 있지 않은가 하는 비판도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역시 상냥한 예수님이 가장 매력적입니다. 나는 그런 예수님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줄곧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게는 성전에서 분노하는 예수님은 그다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의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각기 다른 예수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고, 그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이 진정한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어떤 하나님 이미지를 붙들고 있을까요?
예, 기승전'영성과정 초대'입니다.
40, 50년 공들여 만든 하나님 이미지를 단번에 찾을 수는 없겠으나
자유와 투명한 기도를 위한 여정의 시작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 1단계 이상 수강하신 분들을 영성과정에 초대합니다.

[일시] 2017년 12월 20일(수)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5층
[참가비] 12만 원
[문의] 010-4235-8020 (수진 쌤)
[신청] http://bit.ly/2vJI8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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