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김현승翁의 어릴 적 일기를 빌자면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이다. 똑같은 일과 비슷비슷한 염려, 여전히 감내해야 할 것들이 반복되는 하루이다. 이런 일상 속에 심장 뛰는 일이 생기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심장 뛰는 놀이가 생겼다. 발품팔이 온라인 중고매장 찾아가 득템하기. 열정 솟아나는 새로운 놀이이다. 절판 도서 한 권을 노리고 있었다. 사람들 취향이 다른 듯 비슷해서 내가 찜한 절판 도서들을 나만큼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사람들이 있다.  습관적으로 오프라인 중고매장을 검색하던 어느 날, 기다리던 책 <남성성과 젠더>가 합정점에 떴다. 채윤이 레슨 가는 날 잡아오라 하기엔 늦을까? 무리해서 돌아돌아 다녀올까? 고민하는 와중에 이미 판매되고 사라짐. 허망. 딱 한 권이 알라딘 중고매장 전주점에 살아 있다. 주일에 전주에서 강의가 계획 되어 있었다. 터미날 투 강대상까지의 픽업 의전을 마다하고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지. 중간에 알라딘 매장에 들러야지,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런 와중, 잠실 신천점에 한 권이 또 떴다. 지하철 타~아고, 버스 아고 달려가서 체포했다. 몇 번 책꽂이 몇 번째 칸 찾아가 눈알 굴리며 더듬다 동공 고정. 떨리는 손으로 책을 뽑는 느낌. 말로 표현 못함. 으아아아.


운동 삼아 서현역의 온라인 중고서점에 다니며 쏠쏠한 재미를 보기 시작. 쏠쏠쏠쏠한 재미를 위해 중고매장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된 것이다. 새로 생긴 동탄점에, 분당 야탑점에도 가 착한 가격으로 위시리스트에 있는 책들을 낚아왔다. 아주 급한 책이 아니라면 중고가 나올 때까지 검색질을 하며 기다리기로 한다. 하루 한 번 정도 검색창에 제목을 치고 엔터를 누를 때마다 (얼마 만의) 뛰는 가슴 한껏 즐기면서 말이다. 남편과 서로 책 사는 문제로 은근 갈구고 눈치 주고, 갈굼 당하고 눈치 보는 일상이다. 당신 책 또 샀어? 어, 이번 설교에 꼭 필요한 책이야. 정신실, 책 또 주문했어? 아아, 준비하고 있는 강의가 있는데 주제에 딱 맞는 책이 있더라고. 피차에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으며 책을 사들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고서점에서 엄청 싸게 샀어' 이것은 기분 좋은 면죄부가 된다. 


책 읽는 즐거움이 없다면, 책을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이 깊은 공허감과 결핍감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누군가 내 어릴 적에 진로 코칭을 잘 해줬다면' if로 시작하는 상상의 나래를 자주 펼치곤 한다. 중고등 때는 영어가 정말 좋았다. 모두 평등하게 과외를 할 수 없었던 중학교 시절에, 시험 때마다 영어과목은 더 공부하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달달 외우고 또 보고 또 보곤 했다. 틀릴래야 틀릴 수 없는 상태로 시험을 치곤 했으니. 영어가 재밌고 좋았다. 영어를 전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학 2학년 때는 사회학을 세미나 수업으로 듣고 '아, 내가 사회학이 딱 내 체질에 맞는구나!' 싶었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 여성학을 공부하겠다고 대학원 준비를 한 적도 있다. 화해 불가능으로 보이는 기독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길을 찾고 싶었었다. 포부는 컸으나 사소한 일로 포기하고 말았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아쉽지만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다. 아쉬움이 꼭 나쁜 것은 아닌 것이, (영어, 사회학, 여성학, 심지어 철학까지) 미답의 전공지에 대한 결핍감이 땔감이 되어 오래도록 독서열을 불태우고 있는 지 모르니까. 덕분에 이 나이에 이런 설렘도 누리고 있으니까.


도서 구입비 지출에 대한 부부 상호 갈굼도 독서열을 활활 태우는데 한 부채질 하고 있다. 훔친 사과과 맛있다? 몰래 하는 일이 짜릿하고 더더더 갈증 속에 몰입하게 되는 법. 몇 달에 한 번씩 '우리 이제 당분간 책 사지 말고 있는 책 다 읽고 사자. 읽은 책 또 읽어도 돼. 사실 다 까먹잖아. 맞아, 맞아' 남편과 다짐하곤 한다. 연기하는 듯한 말투며 필요 이상으로 꽉 쥔 손을 보면 '저거 저거 오래 못 가지' 피차에 이미 알고 있다. 그 과장된 약속이 그어놓은 선을 넘는 맛에 몰래 또 책을 주문하곤 하지. 보고 싶은 책 마음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면 이렇듯 맛있는 책읽기를 누릴 수 없을 테다. 절판 도서를 찾아 헤매면서 '책을 쓰려면 이런 책을 써야지. 내가 낸 책들은 한 번 읽히고 책꽂이 자리나 차지하는 책. 나무야, 미안해. 지구야, 미안해' 자조의 심정이 되기도 한다. 그것도 어쩌랴. 내 수준과 한계가 여기까지인 걸.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젊은 날의 결핍이, 일상 속 결핍이, 결핍감이 독서의 즐거움에 이르게 했으니 부족함과 한계는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남편 쉬는 날에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함께 보았다. 후기 수다를 떨다 '안 되겠다.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싶어 중고매장 검색을 하고, 가장 싼 책이 동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달려갔다.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남편이 붙들더니 이틀 새 읽어 버렸다. 이제 내가 읽을 차례. 책만 보는 바보 부부, 스튜삣! 이렇듯 경제적으로 독서라니, 그뤠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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