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8

 



기도제목이란 이름으로 일상의 아픔을 나누는 일이 흔하다.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 해도 안 해도 어려운 연애, 어려운 처지의 친구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 하다못해 계속 실패하는 다이어트 얘기까지. 누군가 내밀한 어려움을 내놓았을 때 하지 말아야할 것이 충고, 조언, 평가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내 얘기 꺼냈다 다시는 여기서 나누나봐라!’ 결심한 적이 있다. 여러 번 있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그러려니 해, 친구를 돕다 네가 우울해지면 그건 돕는 게 아니야, 경계를 지켜야지, 하나님이 다 좋은 사람 예비하셨을 거야, 일단 살을 빼, 저녁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마. 이래라 저래라, 일해라 절해라......” 교회만큼 사랑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간섭과 판단이 흔한 곳도 드물 것이다. 답을 몰라서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애나 친밀한 관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갈등이다. 여친(또는 남친)이 침을 튀기며 쏟아놓은 말끝에 그러면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말을 했어야지. 뒤에 와서 이러지 말고 처음부터 거절해야 하는 거야.” “, 내가 앞에서 딱 거절할 수 있으면 뒤에 와서 이러겠니?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저 공감해달라고!”

 

우리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어떤 말과 행동에도 판단 받지 않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 관계적 존재인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그런 안전한 곳이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한가 말이다. 문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심리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하는 말은 어설픈 충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그래. 이런 방법도 있다고 알려주려는 거야.” 단지 도우려는 뜻, 사랑의 발로라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딱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 사랑의 발로에다 기도의 권위까지 더해진 충고와 조언은 가히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정작 입장이 바뀌어 자기가 나눈 고통에 충고 어택이 들어오면 어떨까? ‘내가 몰라서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우면 기도제목으로 내놓겠어? 제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야야. 차라리 입을 다물자.’ 결국 이해받지 못했다는 느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어렵게 꺼내놓은 기도제목에 그저 손잡아 주고 조용히 같이 기도해주면 안 돼?’ 그저 들어주고, 생색내지 않고 기도해주는 사람 찾기 어렵다. 충고와 판단이 난무하는 위험한 인간관계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 찬송 214장의 1절이다. 참된 도움이신 예수님께 간다. 내 모습 이대로 다 받아주실 것 같은 예수님께...... 라 하기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생각해보니 예수님도 뭐라 하실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이기적이고 쎈 면도 있고 신앙도 예전보다 못하다. 꼭 직장상사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 믿는 내가 더 큰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했어야 하는데 좁은 내 마음이 문제인 것 같다. 안 되겠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면 안 되겠다. 일단 주일성수를 다시 확실하게 회복하고, 부장을 사랑하는 마음 장착한 후에, 술 담배 끊고 예수님께 가야겠다. 아직은 일러, 아직은 아니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지 않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 말이 다 맞다. 스트레스 받는 것도 내 성격 탓이고, 친구를 도우려면 끝까지 도와야 하는데 힘들다고 그만 내려놓으려는 건 내 이기심이지. 여기서 몇 킬로는 더 빼야 소개팅도 나가고 연애도 할 수 있지, 늘 다이어트 실패하면서 연애는 무슨!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실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못하는 것은 소그룹 멤버도, 친구도, 예수님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이 내 안에 크게 울리는 것은 마주쳐야 소리 나는 손뼉과도 같다. 내 마음 안에 항시 대기 중인 자기비판의 손바닥이여. 스스로를 때리는 비난의 손바닥이 밖에서 들어온 충고의 손바닥과 만나 짝! 하고 큰 소리를 낸다. 사랑의 주님께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선언된 내가 여전히 거절감의 늪을 헤매는 이유이다.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아주소서

 

죄로 만신창이 되어 돌아오는 탕자가 이 찬송을 부른다면 어떨까. 제가 아버지라도 자기 같은 인간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굶어죽지 않고 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진 탕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받아들여짐의 기준은 아버지께 있구나! 내 모습 이대로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탕자 체험이 필요하다. 언젠가 형편이 나아지면 아버지께 가겠노라, 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도 돌아가기만 하면 받아주시는 분께 가야겠다고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럴 때 나 스스로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며, 나 먼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돌아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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