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이 말하기를


화해의 제스처? 그거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첫 말을 꺼내기 위해 수십 리도 더 되게 느껴지는 심리적 거리감을 극복해야만 겨우 할 수 있는 말이 바로 ‘미안해’이다. 그뿐인가? ‘미안해’라는 말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남자는 별 아이디어를 다 짜내야 한다. 고상한 편지쓰기 방식부터 선물 공세, 하다하다 안되면 쌩쑈를 벌여서라도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화해의 싸인을 보내놓고 돌아오지 않는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수많은 가설과 싸우며 대략 세 가지 반응을 선택해야만 한다. 첫 번째는 아내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저 기다리는 일이다. 당황스럽고 답답하지만 아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길 기다리는 것이다. 두 번째 반응은 맞불작전이다. ‘미안하다고 했는데 말을 안 해? 기다리는 것도 한도가 있지, 좋아 나도 말 안한다. 누가 먼저 말하나 보자!’ 대강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 부부가 침묵으로 지낸 최악의 기록은 신혼 초에 약 일주일이었던 것 같다. (듣기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한다.) 세 번째 반응은 공격적인 발언을 쏟아 붓거나 보복성 발언을 하는 것이다. ‘어 그래?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당신도 마찬가지야. 당신이나 잘 해.’ 날 향한 아내의 무언의 압력을 비난으로 여길 때 나는 이 방식을 취한다.

기다리는 일은 참 힘든 일이다. 나를 이해해주기는 커녕, 자신의 기질, 자신의 경험, 자신의 부모, 자신의 습관 등등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불평하는 아내에 대한 분노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누르고 있기란 참으로 한심하고 불행한 일이다. 때론 결혼이 후회스럽다는 생각도 스치곤 한다. 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밖에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 생길 땐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 능력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다! 내 행위의 정당성을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지쳐버리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속좁음을 비난하다가 후회하고, 화해의 언어가 얼어붙고, 전략이 바닥날 때, 그 때서야 비로소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도대체 내 어떤 모습이 어떻게 굳어진 내 습관이 어떻게 타고난 내 성질이 그토록 아내를 힘겹게 하는 걸까? 하는 물음을 통해 실존적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은 단순 갈등봉합이 아니라 근본적인 갈등의 싹을, 내 편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내재적 조건을 개선하기로 다짐하는 아픈 성찰의 시간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결혼은 치유’라고 했는가 보다. 어느새, 알게 모르게 굳어진 내 모습, 삐뚤어지고 상처나 있는 내 내면이 그리스도안에서 다 치유되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상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온 죄를 등짝에 달고 있는 반쪽이에 불과한 나는, 결혼이란 제도 안에서 아내란 거울 앞에서 비로소 직면하고 치유하고 그리고 온전해지기 위한 씨름의 샅바를 잡고 있는 것이다.

‘열정’이 말하기를


표현되는 언어가 없다고 그것을 단지 침묵이라 할 수는 없다. 드러나는 양상은 침묵이지만 내 안에서는 무수한 언어들이 올라왔다가 ‘안돼. 그렇게 말하면 저 쪽에서도 할 말이 있어. 아니, 그것도 안돼. 그건 비열한 표현이야. 그렇게 얘기하면 너무 자존심 상하게 하는 거잖아...’하는 불가판정으로 내 안에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침묵이 남편을 고문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남자가 나의 침묵을 못 견뎌하는 것이다. 매우 괴로워하는 것이다. 이 남자를 괴롭히는 최고의 살상 무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맨 처음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택했던 침묵시위가 시간이 지나면서는 갈등 상황을 유발한 남편을 어느 정도 응징하기 위한 도구로 적절히 활용되었다.(이건 아직도 쓸만한 무긴데 이렇게 상대편에 공개해 버리기는 좀 아까운데....)
그게 도를 좀 지나쳤나보다. 어느 날, 예의 그 침묵 속에서 몇 가지 노력을 하다가 갑자기 남편이 방바닥에 있는 뭔가를 집어 들어 던지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처음 보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뭘 집어 던지는 이 행동이 전혀 폭력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순간적으로 ‘저건 극심한 좌절의 표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이 남자의 좌절의 끝을 알기 때문이다. ‘아마도 분명히 나는 무능한 사람이야. 나는 무능한 남편이야’ 라고 속으로 되뇌이고 있을거야. 하는 생각에 미치니 말이다. (이럴 때는 남편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도 병!) 아무리 갈등이 심해지더라도 나로 인해서 남편이 ‘총체적 무능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회심을 한 것 같다. 내 기질을 뛰어 넘자. 나는 감정이 다 정리 돼야만 말이 나오는 사람이야. 이렇게 고집하지 말고 100% 내 잘못 아니라 여겨져도 ‘여보! 미안해’ 라고 말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니 여태껏 남편이 해 왔던 ‘미안해’는 ‘여보 이제 무장해제 하고 당신과 대화의 장으로 나가고 싶어’ 라는 표현이었다는 사실과 그러기까지 남편도 남편 자신의 이기심을 뛰어넘는 노력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아이가 싸운다. 선생님한테 또는 엄마한테 일단 혼나고 나서 ‘사과해’하는 어른들의 말에 한 녀석이 ‘미안해’하고 손을 내밀면 ‘나두 미안해’ 하고 악수하면 끝. 아이들의 싸움은 정말 이렇게 끝이다. 아이들처럼 이런 식으로 진정 싸움은 끝나고 밝은 태양빛 비치는 미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부가 정말 하나 되기 위한 진정한 자신과의 싸움이 바로 이 순간부터인 것 같다. 귀 기울여 상대방의 소리를 듣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방식이 아니라 최대한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나를 표현하는 것. 이 과정에서 감정이 복받칠 때는 나는 여전히 말이 안 나오기도 하고 가슴이 떨리고 때로는 민망하게 입술이 바르르 떨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용기를 내면서 마음을 다잡아먹는다.
그러면 그렇게 대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던가? 불행히도 아니다. 말을 할수록 더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말을 들을수록 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게 끝이 없을 것 같은 싸움을 싸우던 어느 날, 남편이 손을 덥석 잡더니 ‘여보! 기도하자’하면서 다짜고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나 역시 함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각각 하나님 앞으로 우리의 약점을 가지고 나가는 일만 남았었는지도 모른다. 이 지점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을 의지해야 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냉정과 열정이 함께 정리하기를


언제 싸우든 잠자리에 들기 전 해결하기.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먼저 ‘미안해’라고 사과하기. 받아 칠 말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아내(남편)의 말을 들어주기. 아내(남편)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 지와 내게 나쁜 의도가 없었음을 설명하기. 아내(남편)의 눈으로 본 나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보기. 기질을 뛰어 넘는 사랑은 바로 싸움의 한복판에서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5년간 싸우며 세운 JP와 SS의 싸움의 법칙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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