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코스타에 가기로 결정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던 가장 큰 이유는 '마르바 던'이었다. 오전 성경 강해의 강사가 마르바 던이었다. 아, 마르바 던의 강의를 직접 듣는다니! 나는 바로 그 코스타에 있었고, 어느새 그 시간을 추억하고 있다. '역시! 마르바 던,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거나 '기대 이상이었다'라는 표현으론 부족하다. 그런 식상한 표현을 하느니 침묵으로 표현하는 것이 나으리라. 도대체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지점에 걸려서 며칠째 쓰다 멈추고 쓰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리 골라도 적절한 언어가 없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아니, 비주얼 만으로는 '걸어 다니는 중환자실')이라 불리는 몸으로 굳이 서서 강의를 하셨다. 오래 전부터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 쪽 다리, 절단하여 의족을 끼워 넣은 나머지 다리. 그 두 다리로 서서 강대상에 의지한 채 세 번의 강의를 하셨다. 매우 무리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의 약함, 그분의 능력'이라는 이번 집회의 주제를 존재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대 한구석에 휠체어를 두고 굳이 걸어서 강단까지 걸어가시는 모습, 강의를 마치고 몸을 휠체에 맡기고, 휠체어는 무대의 자동 하강장치에 맡겨져 스르르 내려앉던 모습이 내겐 참 인상적이었다. 내게만 그러했을까? 절도 있어서 오히려 위태해 보이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시작을 알렸고, 스르르 내려앉는 무대에 맡긴 휠체어, 거기에 기댄 그녀의 무력한 몸이 말로 했던 그녀의 강의에 긴 여운을 남기는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다. 그 순간 900여 명의 눈길과 숨결은 한마음으로 멈추는 것 같았다. 모두 자기만의 마음의 눈으로 그 장면을 새겼을 것이다. 

 



처음엔 몰랐는데 마르바 던은 자신이 맡은 오전 성경 강해 시간뿐 아니라 모든 전제집회 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연약한 몸을 보더라도 최대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당연함인데 남편과 더불어 맨 뒤쪽에 앉아 계셨던 것이다. 간증이며 저녁집회의 설교 같은 것들을 통역을 통해 몸뿐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함께. 흔히 이런 집회에 참석하면, 특히 강사로 참석하면 특권의식이 발동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강의 외에 웬만한 강의나 설교는 '어디 잘 하나 보자'는 식으로 바라보기 일쑤이고, 오직 speaker로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지 가만히 잘 듣는 태도를 가지기가 어렵다. 그런데 일개 연애강사도 아니고 무려 마르바 던 아닌가! 

 

 

감동적이긴 하지만 사실 여기까지 이야기의 등급을 매기자면 '기대만큼'이다. '기대 이상'의 이야기는 이제부터이다. 마르바 던의 첫 강의를 들은 화요일 오후에는 나도 첫 강의가 있었다. 첫 강의를 마치고 준비했던 강의안과 PPT를 싹 뜯어고쳤다. 가져간 노트북을 직접 프로젝터에 연결해 쓰지 못해서 PPT에 쓴 폰트가 깨졌기 때문에 일단 손을 볼 수밖에 없었다. PPT 폰트를 수정하다 아예 PPT 자체를 고치고, 강의안까지 고쳐버렸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준비하는 느낌이었다. 얼마를 고민해서 준비해간 것인데 그렇게 휙 뒤집어 버렸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완전히 마르바 던 탓, 또는 덕분이다.

 



마르바 던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명료했다. 불필요한 것이 덧붙여지지 않아 거슬리는 바가 없었다. 정말 하고자 하는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그녀의 관심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청중이 알아듣는가였다. 그래서 가끔 잘 따라오고 있냐고 물었다. 진심으로 잘 따라오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미 시력을 잃은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 눈에 손을 모아대고는 청중을 살피곤 하였다.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은 이 장면이다) 청중의 반응이 그저 진정성 없이 예예 하는 것이라 느껴지면 마음을 담아 다시 대답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하였다. 청중과 깊이 소통하기를 바라면서도 청중의 반응에 중심이 휘둘리지는 않는 태도가 엿보였다. 병약한 할머니 신학자의 이 부드러운 단호함을 정말로 배우고 싶다.

 

 

<언어의 영성> 내가 읽었던 마르바 던의 책이다. 언어, 오염되지 않은 언어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이다. 비록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나 설교하는 그분의 언어가 단순하며 화려하지 않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강의 중에 어떤 성경 구절을 한국말로 다 같이 읽어달라는 주문을 하셨다. 다 듣고 난 후에 나이가 젊어서 다시 기회가 있다면 한국말을 꼭 배워보고 싶다고 하였다. 간간이 통역하시는 김종호 대표님이 영어와 우리 말 사이를 오가며 재치를 부릴 때 웃음이 터지곤 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역력했다.  


유학생 수련회이다 보니 영어로 하는 대화가 흔한 곳이 코스타 집회이다. 울렁증은커녕 영어 앞에서 입을 떼겠다는 의지도 없는 내게 그 자체로 외국과 같은 곳이다. 남들 하는 걸 못하니 열등하다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니 심지어 우리 말이 영어보다 열등한 것처럼 생각된다. 마르바 던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태도는 이런  내 뒤틀린 의식을 바로잡아주었다. 그렇다! 영어를 못하는 나, 한국어를 못하는 마르바 던은 같은 한계를 가지고 마주 서 있는 것이다. 찬양 시간 중간에 주변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평화의 인사를 전하는 시간이 있었다. 근처에 마르바 던이 앉아 계셨는데 주저함 없이 다가가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우리 주님의 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알아듣지 못하여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러나 언어 너머의 내 마음을 듣고자 진지한 태도를 짧은 순간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용기 내 다가가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났더니 그 이후로 깊은 곳에서 어떤 갈망이 꿈틀거렸다.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대화를 시작하면 금세 깊은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분은 오랜 기간 사랑과 존경으로 관계 맺었던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아 바라보기만 하였다. 무엇보다 그분과 나 사이엔 언어의 장벽이 높았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계시는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면서 두 분을 위해서 깊은 언어로 기도했다. 그리고 마음으로 마르바 던에게 말했다.

"제 영혼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당신의 남을 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두 분이 이 땅의 마지막 날까지 더욱 행복한 날들 보내시길요. 지금은 저의 깊은 이야기를 당신께 전할 방법이 없지만 우리 천국에서 꼭 만나요. 그 좋은 곳에서 만난다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전하고 듣는 대화를 나눌 거라고 믿어요. 고맙습니다. 마르바 할머니! 아름다운 여성으로, 신학자로, 강사로 거기 계셔 주셔서요. 당신이 보여주신 예수님은 정말 최고였어요. 어떻게 최고였는지, 천국에서 만나면 꼭 알려드릴게요. 다시 뵐 때까지 잘 지내세요"  

 

 

내가 하는 첫 번째 강의를 마치고 새벽 2시까지 강의안을 새로 손본 이유는 내가 거기 있는 이유에 대한 성찰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러했다. 마르바 던은 말씀과 태도로 내게 계속 물었다.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여기까지 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코스타 강사라는 이력을 얻기 위함인가? 저명한 강사들과 안면을 트고 인맥을 넓히고자 함인가? 많은 똑똑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내 강의와 상담의 신통함을 확인하고자 함인가? 강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간이 웃기고 약간의 감동까지 주면서 강사로서 그럴듯한 이미지를 남기고자 함인가? 인생의 선배로 신앙의 선배로 내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를 자랑하고 확증받고자 함인가? 


나는 나를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경험한 그분의 이야기를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이다. 4박 5일 내내 걸고 다녔던 명찰에 'Speaker 정신실'이라고 씌여있지 않았던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10을 알면서 20을 아는 것처럼 말할 이유가 없고, 내 이미지 까이더라도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히 해야한다. 어설픈 유머로 논리의 허술함을 무마하려 하지 말고 하고자 하는 말 이외에 무엇이든 과정하여 덧대지 말아야 한다. 내가 거기 있는 이유는 정말 전하고자 하는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르바, 마르바 할머니 같은 speaker로 늙어가면 참 좋겠다. 앞으로 강의할 때마다 마음의 사진첩에 담아둔 마르바 할머니의 부드럽고 단호한 모습을 꺼내보고 또 꺼내보려 한다.

 

 

* 사진은 kosta facebook에서 가져왔고요,
마지막 사진은 통역을 하셨던 김종호 대표께 부탁하여 급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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