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내적여정 12



일경에게



묵직하게 낮아진 겨울 하늘이구나. 베란다에 서서 무거워 내려앉은 듯한 구름을 한참 바라봤다. 일기예보가 맞는다면 오후쯤 드디어 첫눈이 올 것이고, 그렇다면 저 어두운 구름 속에서는 한 송이 두 송이 눈송이를 만들어 떨어뜨리려는 준비가 한창이겠지. 어젯밤 잠을 설치기도 했고 흐릿해진 몸과 마음의 감각을 깨우고 싶어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려 마신다. 이 한 잔에 담긴 수백 가지 향을 느껴보고자 온몸의 감각이 일제히 입안을 향하는 느낌이야. 덕분에 내 생각과 감정들을 잠깐 멈추고 '지금 & 여기'에 집중할 수 있었어. 이런 커피를 난 영성적이라 부르고 싶다.^^

음…. 지난번 만남 이후로 일경이랑 마주하기가 전 같지 않아 마음이 쓰인다. 가까이 얼굴을 대하고 인사 나눈 지도 오래됐어. 먼발치에서 봐도 전처럼 따스한 눈인사 나누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은데, 내게 서운한 마음이 있나 싶구나. 아, 이건 그냥 순전히 내 직감이고, 이렇게 느끼게 하는 내 안에 있는 목소리에 대한 얘길 들려주고 싶어서 몇 자 적어 본다.


유형의 화살


1유형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날, 내가 꽤 다그쳤던 것 같아. '일경이 너는 지금 화가 나 있다'면서…. 그 순간 너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어. 너와의 대화를 다시 읽어 보니 확실히 내가 지나치게 몰아세웠더라. 물론 1유형의 회피가 '분노'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겠다는 동기도 있었어. 하지만 일경이에게 고백해야 할 또 다른 동기도 있더구나.

에니어그램의 아홉 유형은 '날개'와 '화살'로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어. 나중에 자세한 설명을 할 기회가 있겠지만 '화살'에 대해서 잠깐 얘기 해볼게. 아홉 개 유형은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화살로 연결되어 있어. 이것은 각 유형의 성장 지점과 스트레스 지점을 보여줘. 예를 들어, 1유형은 4유형으로 화살을 날리고, 7유형 쪽에서 화살을 받아. 화살의 역방향은 유형의 성장 방향, 정방향은 스트레스 방향이라고 이해하면 돼. 무슨 의미냐면, 1유형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잘 받아들여지고 안정이 될 때(흔히 성숙한 모습일 때) 밝고 쾌활하며, 낙천적인 7유형의 장점들을 보이게 된다는 거야. 반대로 어떤 식으로든 스트레스 상황이 오래갈 때(아니면 미성숙한 1유형의 경우) 4유형이 가진 부정적 모습을 띠게 돼.


가르치는 자의 하나님 놀이

난 네가 알다시피 7유형이란다. 그리고 나의 화살은 1유형이지. 다시 말하면 내 안에 1유형의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숨어 있다는 거야. 일경이와의 지난번 대화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인식하게 됐지. 기도하지 않는 날이 오래될 때 내 상태가 메∼롱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상이 있어. 그건 '모든 사람들의 모든 단점을 들춰내 묵상하기'야. 누구는 뭐가 잘못됐고, 또 누구는 뭐가 잘못됐고…. 세상 모든 사람의 잘못을 다 파일링해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니까. 그러다가 이 묵상이 깊어지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줄줄줄 말로 나오지. 당신은 이렇게 나를 속상하게 했고, 당신이 이러니 내가 정말 불행한 여자고, 네가 이렇게 하니 엄마가 너를 키우는 게 너무 어렵고…. 이런 식이야. 이렇게 보면 나는 1유형 못지않은 7유형인 것 같애. 그래서일 거야. 부끄럽게도 나는 1유형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른 어떤 유형의 약점보다 더 나쁜 것으로 말하려는 경향이 있어. 분명한 투사(投射)지. 내 안의 어두움을 보기 싫어서 외부에 있는 1유형들의 약점에 반사시키는 거지. 때문에 강의 때마다 1유형을 설명할 때는 더 조심하려 애쓰는데도 잘 감추지를 못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교만한 일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때문에 일경이가 비난받는다고 느끼고 많이 아팠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미안하다.

이런 게 에니어그램을 비롯한 모든 성격유형을 설명하고 가르칠 때 피해가기 어려운 실수인 것 같아. 성격유형을 설명하는 강사도 분명 어느 유형 중 하나고, 필연적으로 자기 유형의 한계를 가지고 있거든. 게다가 어쩔 수 없이 경험을 통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유형이 있어. 그러다 보면 어떤 유형에 관한 설명들은 더 힘을 실어서 하게 되고, 반대로 어떤 건 은근슬쩍 패쑤! 하게 돼. 그러면서도 어느새 자신이 가장 객관적인 설명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람의 내적 동기를 모두 다 아는 것처럼 자만하는, 슬프게도 하나님 놀이에 취해버리게 되지.


배우는 자의 자기방어


에니어그램 강의를 듣고 자신의 유형을 못 찾는 사람에게 농반진반으로 '이것만은 절대 내 유형이 아니다' 하는 그 번호를 의심해 보라고 해. 실제로 그런 경우를 많이 봤어. '이것만큼은 절대 내 번호가 아녜요. 왜 아니냐면요…' 하면서 그 유형이 아닌 이유를 백만 가지 늘어놓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도 아니라던 그 유형을 자기 유형으로 받아들이고 그 백만 가지 이유가 백만 가지 '자기방어'였다는 걸 인정해. 마음이 건강하고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들은 자기방어를 위해 애쓰지 않아. 자기 자신에 대해 '그러함'을 설명하기보다 '그렇지 않음'을 항변하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쓴다면, 난 십중팔구 자기방어의 중무장 태세라고 생각해. 우리의 성장점은 칭찬받는 지점에 있지 않고 부딪혀 아픈 연약함에 있지. 누군가 내게 듣기 싫은말로 비난하고, 못난 점을 마구 까발린다면 바로 그때가 기회라는 거야. 자신을 변호하고 다시 설명하고픈 '자기방어'를 마음으로부터 멈출 때가 진정한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수년간 나를 이중인격자라 부르면서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사람으로 대하던 사람이 있었어. 받아들일 수 없었고,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항변하며 많이도 애를 썼는데… 이제야 조금 알겠단다. 그 사람이 그 누구보다 나를 제대로 가르친 영적 스승이었다는 것을.

일경이를 아프게 할 일이겠으나 마음을 다잡아먹고 말해볼게. 일경이와 대화하면 유난히 네 친구나 직장상사, 주변 사람들에 대한 얘길 많이 듣게 돼. 표현은 항상 부드럽지만 그 친구들의 단점에 관한 내용이 참 많아. 그 말끝에 '그래도. 이젠 괜찮아요. 섭섭하지 않아요.'를 후렴구처럼 붙이지. 헌데 나는 일경이의 그 말들이 '저는 누구누구에게 화가 나 죽겠어요. 심지어 지금 모님에게도 너무 화가 난다구요.' 라고 들려. 일경아, 네가 그런 자신을 부여안고 얼마나 고민하며 울며 기도하는지 알고 있어. 그래 지금처럼 '더 이상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험담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해. 헌데 그 기도와 함께, 아니 먼저 앞서야 할 게 있어. 나는 일경이가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라는 말을 멈추고 '나는 화가 났어요. 화가 나 죽겠어요. 하나님께도 화가 나요.'라고 말하고 기도할 수 있음 좋겠어.


분노는 감정이다 감정은 내가 아니다


장유형의 핵심감정은 '분노'라고 했지? 외면화된 8번은 분노를 밖으로 폭발적으로 표출하고, 거부지점인 9유형은 '분노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장유형으로 보이지 않고, 1유형은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분노를 철저하게 억압한다고 했어. 그러나 분노는 장유형의 것만은 아냐. 모든 사람의 것이지.

분노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분노는 당연하다'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분노는 내 안에 무엇인가 꼬여 있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로,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거야. 모든 감정은 다 중요하고 이유가 있어서 올라와. 그리고 실은 상반되는 감정은 한곳에서 나오게 돼. 애 - 증, 호 - 오, 교만 - 겸손, 희망-절망…. 이렇게 짝을 이루고 있지 않니? 사랑하다 헤어지면 미워하는데 그 미움은 어디서 왔니? 전에 있었던 사랑이 만들어 낸 감정이야.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면 그 만큼 많이 신뢰했었다는 것이고, 지나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 안에는 숨은 열등감이 있어서 자신은 못났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때문에 짝을 이루는 두 감정을 모두 표현하며 살아야 해. 부정적인 감정은 억압하고 당장 이미지 구길 일 없는 긍정적 감정만 표현하는 것이 반복되면 결국 나머지 억압되어 얼어버린 감정이 나머지 반쪽 감정까지 막히게 만들어. 억눌린 화는 주변에 있는 약자에게 가장 쉽게 삐져나오게 되어 있어. 그러니 분노를 비롯한 모든 감정들을 일종의 에너지로 이해하면 좋겠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 알지? 형태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 감정은 억압해 봐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 변화의 과정을 거쳐 그 힘을 유지한다는 거다. 특히 신앙의 이름으로 억압된 분노는 '자기 의'라는 치명적인 독성이 있단다. 신앙인들을 곤란케 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화를 너무 많이 내는 것이 아니라 너무 적게 내는 것인지도 몰라.

그러면 분노를 억압하지 말라 했으니 화를 돋우는 친구의 얼굴을 벽에 붙여 놓고 다트를 던지라고? 병을 깨서 휘두르고 속에서 올라오는 모든 독설을 내뿜으라고? 분노를 억압하는 것이나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것이나 자신과 '분노'라는 감정을 분리시키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것에서는 마찬가지라고 봐. 두 경우 모두 분노에 이끌려 다니는 결과야.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자연스럽게 화내시고(막 3:5, 요 2:13-15, 마 23장), 화를 도구로 사용해 선한 것을 가르치신 예수님을 기억해 보자. 그분이 보여주신 분노는 억압되어 부적절하게 삐져나오는 방식도 아니고, 정제되지 않아 폭발적으로 표출되는 것도 아님이 분명해. 오직 사랑의 마음에서 기인한 분노,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온 화야. 네 안에 분노가 있음을 인정하고 나서 어쩔 줄 몰라 두렵다면 이분께 의뢰하면 돼. 화내고 욕하는 것에도 온전한 전문가이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잖니. 그분께 우리의 분노를 그대로 내어드리고 순종할 때 그 분노는 내 존엄을 지키고, 연약한 이웃의 버팀목이 되며, 공동체에 참된 정의를 세우는 작은 기초석이 될 거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노냐! 우리, 두려움 없이 인정하고 맞서 보자구. 분노는 나의 것!


                                                                                           <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 하는 내적여정1>


저는 키가 난쟁이 똥자루입니다. 양손 엄지손가락은 뭣에 눌린 듯 뭉툭하고, 앞니가 삐뚤삐툴한 리아스식 치아를 가졌습니다. 작은 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편하자고 신는 운동화조차도 높은 굽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게임의 여왕이었으나 엄지손가락으로 숫자 만드는 게임인 ‘제로게임’은 결코 도전해본 적이 없고요. 들쑥날쑥한 앞니는 의학의 힘을 빌어 줄을 좀 맞추게 되었지만 여전히 웃을 때마다 움찔하면서 입을 다무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저의 콤플렉스들입니다. 헌데, 이제부터 공개할 콤플렉스에 비하면 위에 있는 것들은 뭐 그리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음악치료사이며 MBTI와 에니어그램 강사이고, 목회자의 아내로 청년들을 만나 상담하는 일이 일상인 저. 강의하고 치료하고 상담하는 주제는 거의 가 다 ‘마음, 인간관계’ 이런 것들이랍니다. 그런 저를 괴롭히는, 40평생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제껏 잘도 숨겨왔던, 초강력 울트라 콤플렉스는 ‘관계’입니다. 제 마음 깊은 곳 은밀한 방에서는 너는 ‘관계의 실패자’이고 언제 누구와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이라며 정죄하고 조롱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새어나오곤 합니다.



넘기 힘든 관계의 벽, 교.회.언.니.

사춘기를 지나며 정체성과 신앙적 자의식이 새로워지던 시기부터 저를 떠나지 않는 한결같은 의문과 좌절 하나가 있습니다. 왜 학년이 올라가서 반이 바뀔 때마다 싫은 아이가 한두 명 씩 꼭 있는 걸까? 1년만 버티면 되겠지. 어차피 반이 바뀔 테니까 하는 생각은 하나마나입니다. 반이 달라져도 어김없이 또 다른 비호감은 예비 되어 있었으니까요. 학교에서 만나는 비호감은 그래도 낫습니다. 딱히 싸운 일도 없는데 사사건건 나를 걸고넘어지는 것 같고, 뭘 해도 예쁘게 보이질 않는, 그러다보니 어느 새 말 한 마디 나누기도 긴장되는 교.회.언.니.에 비하면요. 학교친구도 동네언니도 아니고 교회언니란 말이지요. 주일예배 한 번 드릴 때마다 ‘사랑’이란 단어를 최소 세 번 이상은 말하게 되는 곳이 교회잖아요. 좋게 말하면 신앙의 컬러가 다른 거고, 쉽게 말하면 그냥 이유 없는 비호감이예요. 사랑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을 좋게 생각해보려는 노력도 해보고요. 대입 시험을 칠 때는 ‘언니, 기도할게요. 축복해요’라고 적은 카드와 초콜릿을 주기도 했고 애써 생일도 챙기곤 했습니다. 그러다 눌러놓은 미움과 분노가 쌓이고 쌓이면 편한 친구 하나 앉혀놓고 끝도 없이 그 언니를 씹어대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뭘 해도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일 년에 한 번 있는 수련회의 저녁집회와 기도회는 소망의 시간이었지요. 뜨거운 기도회가 정점을 찍을 무렵 무엇인가에 이끌려 우리는 평소 불편했던 사람을 찾아가 손을 맞잡고 기도했었고, 물론 저는 그 언니와 부둥켜안고 회개와 화해의 눈물 콧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미워하지 않으리라. 아~ 이젠 보혈의 공로로 다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리라..... 짜자잔. 그리고 ‘마지막회’ 라는 자막이 올라가면서 저의 이야기가 마치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련회가 끝나면 여지없이 다시 속세(?)로 돌아와야 했고 어떻게든 다음 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가고 있었지요. 안타까운 건 뜨거웠던 기도회의 감동은 어디로 가고 그 언니와는 헌신예배 때 부를 찬양 선곡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다시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은근 걸고넘어지고, 은근 비꼬고, 은근 밀어내기를 다시 반복하는 그녀와의 일상. 그 날의 회개와 화해와 불타오르던 사랑은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 저는 나이도 먹고, 학벌도 높아지고, 신앙의 경륜이 쌓였으며,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곁엔 이기적인 직장동료의 모습으로, 불편한 시댁식구의 모습으로 둔갑한 그 교.회.언.니.가 늘 함께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저의 내면의 목소리는 기로에 섭니다. ‘나는 안 돼. 내가 지금 누굴 치료한다고? 누굴 상담한다고? 나와 상담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치는 이 사람이 내가 어떤 인간인줄 알까? 내 안에 어떤 폭탄이 숨겨져 있는 지 그 실체를 알아도 날 지금처럼 신뢰해줄까? 난 애초부터 밴댕이 속 같이 좁아터진 인간이었어.’ 라면서 자기비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아무 일 없다는 식으로 가는 겁니다. 오랫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 관계는 ‘내 문제가 아니라 너의 문제야. 나는 진짜 열심히 사랑하려 노력했어. 그러나 마음을 열지 않았던 건 너야. 그러니 나는 선한 편이고, 너는 나쁜 나라지. 그런 식으로 사는 너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복을 받을 일 없고 조만간 큰 코 다치게 될 거야. 오케이! 노우 프라블럼!’ 라면서 책임전가하고 합리화하기.



관계에 있어 좋은 이정표를 만나다 

그.런.데. 자기비하와 책임전가회피를 오락가락 하는 내면의 전쟁 속에서도 끊임없이 양심을 터치하는 어떤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 손길에 대한 희미한 자각은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과 자유함에 이르는 막연한 초청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관계라는 무거운 짐에 대한 인식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부르심과 맞닿았고 그 지점에서 목이 말랐고 그 목마름은 ‘성령충만한 삶’에 대한 갈망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 날 그 날 잠시 마른 목을 축이며 근근이 살아가는 삶 대신 흐르고 넘치는 생수의 강에 몸을 맡기고픈 영원에의 목마름이었지요. 그렇게 목말라 우물가에 있는 저에게 ‘엣다, 이거 하나 읽어봐라’ 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처럼 <내 안에 접힌 날개>라는 책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펼친 그 책의 서두에 에니어그램은 마치 20여 년 전부터 널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제게 도전장 같은 질문 하나를 던졌고 도전장은 초정장이 되어 저를 깊은 내면의 여정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왜 그토록 자주 하나님께로 또는 이웃에게로 향해 나가지
못하고 계속
우리 자신과 부딪히는가?’

 
그렇습니다. 제가 콤플렉스라고 고백한 문제는 사실 지속적으로 나 자신과 부딪히는 문제였습니다. ‘관계문제’라고 이름을 붙이면 나 아닌 타인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니까 마치 내 마음 바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꼬인 관계’는 엉켜있는 내면을 반사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에니어그램이라는 거울은 이제 대놓고 제 내면을 비추어 줍니다. 20년을 끙끙거려왔던 초강력 울트라 콤플렉스는 빙산의 일각이었지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아’라는 끝도 없는 이기심의 늪을 직면하고 부인하는 과정 없이 이웃에게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부인’이란 그저 ‘화장실 청소와 복도청소가 있다면 나를 낮춰서 먼저 화장실 청소를 선택하는 것, 누군가와 나의 생각이 다를 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조금 더 쿨하게 내 의견을 포기하는 것, 갈등이 일어났을 때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등 주일학교 설교의 결론부분 적용처럼 몇 가지 덕목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니어그램은 ‘부인’은 아는데 ‘자기’는 몰라서 영적 성숙을 향한 큰 걸음을 떼지 못하는 제게 좋은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 당신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이 누구인가요?’ 라고 빌 하이빌스 목사님은 묻습니다. 일천한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함께 찬양팀을 섬기던 친구가 내년엔 찬양팀 그만두고 주일학교 교사를 해야 하겠다는데 실은 그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당신 때문이라면, 하루는 맑고 하루는 흐린 종잡을 수 없는 당신의 기분에 모임의 모든 사람들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쉽게 말해놓고 일이 닥치면 번번이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김을 빼는 당신에게 당신의 친구들이 기대를 접은 지 오래라면, 밤늦도록 긴 얘기를 나누며 헤어진 당신의 동역자가 ‘저 친구 도통 자기 속을 정직하게 얘길 하지 않아’ 하는 공허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몸이 안 좋아 좀 쉬어야겠다며 사직서를 낸 직장 동료의 진짜 사직이유는 바로 당신의 아무렇지 않게 던져대는 모욕적인 말을 견디기 어려워서라면, 새로이 GBS조를 짜는데 모든 조장들이 내심 맡고 싶어 하지 않는 기피 조원 1순위가 당신이라면....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나의 진실이라면 어떻습니까? 이보다 더 많은 나의 의도하지 않은, 생각지도 못한 약점들로 지금 누군가를 말 못할 고통을 받고 있다면요. 그리고 나없는 어떤 곳에서 그 모든 얘기가 진실처럼 회자된다면요. 마치 내가 지금 누군가를 향해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무슨 소리냐고?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넌 왜 그렇게 받아들이냐고
? 저는 이제 최소한 그렇게 다짜고짜 방어하고 부정하는 건 조금 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에니어그램이 준 선물이지요. 어쩌면 나보다 타인이 나의 실체와 특히 약점에 관한한 더 잘 볼 수있다는 것도 인정해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힘이 빠지다보니 ‘관계의 문제’는 오늘도 여전히 저의 아킬레스건이지만 조금 숨통이 트이고 살짝 가볍게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이 느껴져요. 문제는 여전하지만 그게 제 발목을 잡고 늘어지게 두지 않는 걸 배웠으니가요. 무엇보다 ‘
, 의 노력, 의 은사, 의 기도, 의 헌신...’ 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서 조금 공간이 생기니 이미 충만히 계셨던, 그렇게도 목마르게 젖어 들고 싶었던 그 분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초대장을 쓴다는 게 길어졌습니다. 여러분을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여정에 초대합니다. 에니어그램과 함께 하는 여정을 위해 다음 달부터 여러분을 저희 집 거실로 초대하겠습니다. 저희 거실은 커피가 있고, 음악이 있고, 책이 있는 북카페 같은 곳입니다. 무엇보다 저희교회 청년들이 딱딱하고 칙칙한 ‘사모님’ 대신 ‘모님’이라고 불러주는 제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볶은 신선한 원두를 정성을 담아 핸드드립 한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여러분과 마주앉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에니어그램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제 초대, 받아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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