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인생이 또렷했었다.
계획을 세워놓고 계획대로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되면 기뻤고 안되면 속상했다.

그렇게 또렷했던 인생이 갈수록 모호하고 때로 신비하기 까지 하다 느껴진다.
어릴 적에도 인생은 모호했을 것이다.
어릴 적이니까 아직 어려서 '또렷하다' 규정하고 또렷한 것만 인식하고 살았는 지도 모른다.



교회가 서 있는 양화진 공원의 저녁이다.
하늘의 빛깔이 신비하다.
위쪽의 푸르스름한 곳은 진짜 하늘 같은데 내가 섰는 땅과 가까운 하늘일수록 신비하다.
요 며칠 나는 딱 저 하늘처럼 신비로움에 서 있다. 조금 얼떨떨하게...







작년 연말부터 손에 든 두 권의 책이다.
두 책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힐 만한 연관성 같은 게 없는 책이다.
그저 우연히 같이 읽게 되었다.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데 김훈 소설은 나올 때마다 아껴서 읽는다.
마음의 여유도 생겼고해서 미루다 주문하고 손에 잡은 <흑산>이다.
사실 사전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책을 펼치기 시작하니 조선말 천주교 신도들의 박해에 관한 이야기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양화진, 잠두봉, 마포나루가 무대를 이루고 있어서 내심 놀랐다.
게다가 정약전을 비롯한 정씨 일가가 자리잡은 두물머리 마재는 또 얼마 전 까지 강동에 살면서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 아닌가?








어제는 한 달이면 수십 명의 새교우가 몰려드는 이 곳 교회에서 새교우 환영회가 있는 날이었다. 환영회 겸 교회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의 자리이기에 교역자 가족으로 인사하러 나간 자리였지만 나 역시 오리엔테이션을 제대로 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개신교 백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
교회의 존립 목적이 양화진의 선교사묘원과 용인의 순교자 기념관을 관리하면서 이 땅 기독교 역사 속에서의 정체성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가는 교회의 비젼에 자연스레 내 삶을 싣게 되었다. 한국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 그래서 더욱 철저하게 교회의 교회다움에 존재해야만 하는 교회.
양화진 소개 영상을 보면서 교회소개를 들으면서 다시 <흑산>의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갑.자.기.
난 왜 초기 기독교의 역사 속으로 이렇게 빨려들고 있는 것일까?




 




흑산으로 유배되어 내려간 정약전이 소설의 말미에 섬 이름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부르겠노라 하면서 말한다. 둘 다 같은 뜻이 아니냐며 묻는 창대에게 정약전은 답한다.

-같지 안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바꾸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흑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것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의 물고기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지금 정약전이 말하는 내용은 십자가의 성요한이 말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에 나오는 말과 흡사하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할 때 밤음 무섭고 불길함이 아니라,
단순히 컴컴함, 가리워짐, 뭔가 신비롭고 미지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 영혼의 밤은 메마르고 비어서 비로소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자리다.


지난 몇 년 나는 멀쩡히 밥하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커피를 배우며 볶고 살아왔지만 내면에서 끊임없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여겨진 시간을 보냈다. 끝도 없는 어둠 같았다.

하나님의 신비를 다 벗겨내는 듯한 종교적 행위에,
기도로 하나님을 통제하여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열심을 보이라는 기독교에,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뻔한 두려움을 은페하고 서로 서로 은폐해주는 행태에,
삶을 풍요롭게 하고 위대한 영적목표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길 권하는 욕망을 가장한 기도에,

그렇게 부추기는 위선과 악에 대해서 견딜 수 없어서 영혼의 어두운 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두운 밤에서 한 줄기 빛을 찾게 된 것은 가톨릭의 영성을 배우고 지도받으면서였다. 사랑이라는 것 외에는 신비에 싸인 하나님을 이제야 비로소 조금 단단해진 마음으로 다시 만나고 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어설픈 언어로 엮어내기엔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어쩌면 이렇게 언어로 발설해 낸 것이 나의 가벼움이런지 모르겠다.
오늘 매섭게 차거운 바람을 맞으며 처음으로 강변에 나갔다.
강변에 나가 잠두봉을 바라보고,
백 몇십 여 년 전, 여기서 참수당해 버려졌을 인간의 몸을 떠올리며,
그들과 여기 서 있는 나를 잇는 끈을 생각해봤다.


다시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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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일을 시원하게 보고난 어느 아침,
커피 한 잔 들고 베란다 내 자리에 앉으니 뱃속에 묵직한 것이 다 빠져나가서 한 없이 가벼워진 이 느낌. 당장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정말 뱃 속이 편하구나. 좋다. 감사하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오래 변비를 앓아보지 않았다만 이 순간, 이 편한 느낌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평생 몰랐을 것입니다. 이 순간, 맘에는 큰 돌덩이 같은 게 하나 얹어져 있다해도 몸의 가벼움과 자유로움에 잠시 그 조차도 잊혀집니다.



수 없이 거절당해 본 경험은, 또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했던 시간들은 오늘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에게 '나같은 사람을 찾아주다니....' 하며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견딜 수 없는 한낮의 뙤약볕은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낙비의 시원함에 시원함 이상의 기쁨과 만족감을 주고요.

영혼의 어두운 밤은 늘 내 안에 있는 그간에 보지 못했던 어두움을 보게합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의 빛을 발하시는 사랑의 빛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혼의 어두운 밤에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밤에 부르는 노래.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불러야할 가장 깊고 아름다운 노래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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