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 FREE INTO FULLNESS'의 빨간 플래카드로 남을 2013년 시카고 코스타를 짚고 넘어가려 한다. 다녀온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일상의 모든 경험과 묵상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 없다. 헌데 코스타 이야기는 내게 '쓰고 가라, 쓰고 가~아라' 하며 지친 내 어깨를 떠민다. 밀쳐뒀던 원고 약속을 지키려면 뭔 얘기가 됐든 코스타를 끄집어내 정리해야 그 밑에 있는 글이고 말이고 나올 길을 찾을 것 같다.

 



1.

수년간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오면서 이번처럼 맘에 든 적이 없었다. 같은 강의를 세 번에 걸쳐서 했다. 세 번이 다 좋았고, 뒤로 갈수록 더 좋았다. 거두절미하고 잘 들어서 좋았다. 특히 수련회 같은 데 강의를 가면 나는 그렇게 힘든 것이 안 듣는 아이들이다. (물론 전혀 개의치 않고 강의하는 척은 잘 하고 있다) 딱 봐도 얼굴에 '엄마가 강제로 보내서 왔어요. 조장 형한테 끌려 왔어요.' 쓰여있다. 맨 뒤 벽에 기대고 앉았는 그가 강사인 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수월찮이 신경이 쓰인다. 코스타에서 세 번 강의를 하는 동안 정말 진지하게 듣는 눈동자들이 강의를 밤무대 삼아 뛰는 내 강사생활 동안 최고라 할 수 있는 감동을 남겼다.

2.
개별 상담도 좋았지만 한 조를 함께 만나는 그룹 상담이 참 즐거웠다. 즐겁다는 표현이 살짝 부적절한 것은 오고 간 이야기가 가슴이 미어지는 얘기도 있었고, 나도 그들도 울컥하는 장면이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즐거웠던 건 그야말로 '오고 가는' 말의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숨기지 않았다. 나는 어쭙잖은 설교할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애매하게 돌려 말하기로 자기 문제 포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케케묵은 내 연애사까지 꺼내놓게 되었고 그 와중에 20년이나 된 내 상처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도 했다. 중요한 건 여럿이 함께 한 자리에서 누구의 눈치도, 강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툭툭 내뱉는 질문들이 우리를 무장해제 시켰다는 것이다.

 

 

3.
주변에서 '난 코스타 안 좋아해요.' 이런 직접적인 표현도 들었고, 코스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심지어 코스타 강사로 가는 일이 무슨 몹쓸 권력과의 타협을 선택한 것 같은 느낌에 말하기가 꺼려지기도 하였다. 반면에 확인된 바는 없지만, 강사로서의 네임 벨류를 높이기 위해서 코스타에 목을 매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이런 미확인 소문 역시 내 자유를 앗아간 또 다른 미확인 비행물체이다. 그저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가보니까 목마른 젊은이들이 있더이다. 말씀, 좋은 특강, 멘토, 혹여나 있을 이성과의 만남.... 등을 기대하면서 몇 시간 씩 비행기 타고 모여든 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있더이다. 미확인 비행물체를 붙들고 좋다 나쁘다 대단하다 아니다 하시지 마시고요. 코스타는 잘 준비된, 유학생들을 위한 수련회입디다.

4.
코스타를 불편해하는 분들에게 내가 유일하게 공감이 되는 것은 그것이다. '고지론의 산실'이라는 것. 이것은 내 표현이고 내가 가진 선입관이다. 근거는 코스타가 사랑하는 주강사들의 면면이다. 안타깝게 몰락한 전**, 오** 두 분과 페이스북을 통해서 서서히 몰락해가시는 김** 목사님들 말이다. 이 분들이 마이크를 잡고 침을 튀기며 말씀을 전하고 청년들을 헌신시키는 그 뜨거운 자리에서 '고지론' 말고 무엇이 선포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내게는 그게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 고지론이 어떻게 어떤 모양일지도 모르면서 단단히 결심을 했다. 소신 있는 강의를 하자. 비록 이성 교제 강의지만 '축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전인적인 성숙'을 전하기로 하자. 허무하게도 '고지론'과 제대로 맞짱 뜰 일은 없었다.

5.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코스타가 사랑한 고지론 주강사들의 몰락으로 시카고 코스타는 과도기 같은 걸 겪고 있는 것 같다. 리더십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리더십이 세워지지 못한 탓일까?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집회 주강사들의 메시지 때문인 것 같다. 매우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도통 '자유케 하는 복음'의 힘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나의 삐딱하고 눈만(귀만?) 높은 교만' 때문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고지론이 실패한 자리에 확실한 방향 선회(이게 회심인데)이 없는 것 아닐까. 대놓고 '고지론'만 아니면 되는 복음이어서일까? 도통 이 어그러진 세상에서 자유케 되는 참된 능력이 무엇이라는 것인지, 열심히 들어도 나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아, 물론 그럼에도 100여 명의 참가자가 선교사로 헌신 했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한 사람도 꽤 됐다. 그런 결실들을 보며 감사했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청년들은, 아니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기본적으로 무슨 설교를 들어도 은혜받을 태세가 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더더욱 말씀을 전하는 분들은 진지해야 하고 성실해야 한다. 청중이 청년이니까, 들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저 몇 번 빵빵 터뜨려주고,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깊은 성찰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설교'는 들을 만큼 들었다 아이가. 


 

6.
오프닝 특강으로 김근주 교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코스타에 실망하고 삐칠 뻔 했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자유케 되는 복음을 그 강의를 통해서 확실히 들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어쩌면 첫 강의가 너무 좋아서 기대가 한껏 높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자유'는 자기 발로 서서 걷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붙들려 있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선착순 세상, 기회균등이라고 하지만 그 기회란 결국 돈과 능력을 이미 선점한 사람들에게 일착으로 주어지는 세상 말이다. 이렇게 어그러진 세상에서 너도나도 유일한 '고지'(김 교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으로 표현했다)를 향해 달려가며 '욕망'과 '두려움'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자유의 발목을 잡는 이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진단, 그리고 베데스다 따위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신 예수님이 메시지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어그러진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리지 않고 진정한 '자유'란 없다. 어그러진 세상이 달려가는 방향에서 선회하지 않는 이상 자유란 없다. 개인적으로 코스타 주제에 부합하는 가장 힘 있는 메시지였다. (고지론이 무너지고 난 자리에서 전해져야 할 진짜 복음은 이것이라 생각한다. 부디 내년에는 이런 분들이 집회의 주강사 되시길)

 

 

7.
아, 어메리카에 가니 난 정말 작아도 너무 작은 사람이더라. 어디 앉아 있어도 보이지도 않는 사이즈. 초딩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얼굴만 안 보여준다면 못 골라낼 사이즈. 몸 뿐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사이즈 자체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작은 나 자신을 더 또렷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나 자신에 걸맞은 삶 그 이상을 욕망하거나 그 욕망을 붙드느라 두려움에 발목 잡히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된다. 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주는 청년들을 대상화하는 누를 범하지 않도록, 강의하거나 글을 쓸 때마다 '작은 나'를 인식하고 또 인식하려고 한다. 코스타를 경험하고 한 달 동안 곱씹어서 남은 것이 그것이다. 자유. 하루하루 더욱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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