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피곤하고 무기력한 아침 이예요. 무기력은 어젯밤 해결되지 않은 정서의 연장인 것 같아요. 어제 저녁에도 여전히 목욕탕 세면대에는 물에 적셔진 현승이의 내복과 손수건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손.빨.래... 이제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 세면대에 널부러져 있는 손빨래 꺼리를 보면, 보는 그 순간 기운이 쪽 빠지고 마음이 상해버려요.
'애들 옷은 그 날 그 날 손빨래 해라. 물도 덜 들고 빨리 빨아 말려서 또 입혀야 한다. 현승이는 침을 많이 흘려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 입혀야 해' 몇 번 말씀 하셨는데 말을 안 들었죠. 내 생각에 모았다가 세탁기 한 번 돌리는 것이 물도 절약되고, 퇴근해 돌아와서 매일 손빨래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어요. 결국 어머님이 특단의 조처를 하신 것이죠. 아예 빨래들을 세면대에 모아 놓기. 이쯤 되면 손빨래 관철을 위해서는 막 가시겠다는 거죠. 여기다 대고 계속 세탁기 빨래를 하게 되면 나 역시 막 가자고 대드는 게 되겠죠.
당신 알죠? 나 손목 약해서 걸핏하면 물리치료 받으러 다니는 거. 밤에 애들 재우고 손빨래 하노라면 '시집살이'라는 말이 생각나요. 어머니 들으시면 콧방귀 뀌실 소리지만....이럴 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며느리들은 이런 생각을 하죠. '딸이라면 이렇게 하실까? 하루종일 일 하고 들어 온 딸에게 굳이 손빨래하도록 강요 하실까?' 이렇게요...

JP 당신 편지를 받고 오래 망설였어요. 내가 나서서 도와주기에 가장 어렵고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이죠. 당신도 알죠? 그렇지만 당신이 지고 있는 짐, 가능한 한 전부 다 내가 대신 지고 싶어 한다는 말에요. 그리고 또, 그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머니께 당신의 고충을 대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타기인지도 잘 알리라 생각하구요. 그러니 우선,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애기 빨래들, 우리 같이 나눠서 해 봅시다. 내 빨래도 아니고 애기 빨래를 부모님 앞에서 하는 거 썩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세수 하러 들어갈 때 어머니 눈치 못 채게 내 얼른 할게요.
얼마 전 전화요금 문제로 우리가 옥신각신 하고 난 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死卽生! '어차피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으니, 우리 것과 부모님의 것을 나누려고 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완전히 포기하자' 라는 생각이었죠. 부모님과 우리 사이에 합리적인 분배를 도모하는 건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우둔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따로 독립해서 사는 거라면 다르겠지만, 애들 양육 때문에 어차피 한 지붕 아래서 살기로 했다면, 한 푼의 미련 없이 다 드리자. 달라고 하기 전에 미리 드리고, 공휴일에 시간 내라고 하면 기꺼이 쉼을 포기하고, 관리비 내라 하면 전화요금도 내자, 라구요... 애들 양육 때문에 우리가 선택한 거니까, 우리가 하는 희생, 사실 희생 축에도 못 낄 거에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 혹 당신에겐 무리한 요구가 될까요?
그리고 며느리가 딸같이 대접받길 원하는 마음 내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번 일로 '만약 딸이였다면..'하고 생각하는 건, 당신의 상상력이 너무 앞서 나간 듯 싶군요. 여보! 당신은 이미 시집간 딸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어머니께서 당신의 속내를, 그 아픈 과거와 부끄러운 일들을 선뜻 며느리에게 얘기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당신은 어머니의 유일한 신앙 상담가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SS '사즉생(死卽生)이라! 역시 원칙의 왕자답게 당신께서 또 한 말씀 주셨구만요. 死! 양육이라는 큰 짐을 우리와 나눠지고 계시는 부모님께 우리가 뭔들 못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어머니와 나 사이에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나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요? 한결 같이 그런 마음이면 좋으련만 내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별 거 아닌 것에 다 걸려 넘어지고 불평하고 그렇게 되죠.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내가 원칙을 몰라서 투덜거리는 건 아니죠. 하긴 당신이 덩달아서 내 감정에 공감해 준다면 훨씬 더 내가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들 거예요. 그래요. 원칙으로 가죠.
예전에 어머님이 채윤이 앞머리 맘대로 짤라 놓으셨을 때 생각나요. 그리 예쁘지도 않은 얼굴에 짤뚱하니 올라간 앞머리가 간난이 같아서 처음 보는 순간 많이 속상했었죠. 그 때 머리도 그렇고, 이번 손빨래 건도 그렇고, 현승이 이유식에 조미료 넣으시는 것도 그렇고....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 아니지만 문제는 섣불리 어머니께 말씀드릴 수가 없다는 것 이예요. 웬만한 관계는 잘 대화하면 어느 정도 해결을 볼 수 있는데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설피 대화하면 상처만 남길 수 있다는 것이죠. 당신 말대로 부모님을 아이들의 양육자로 인정하고 맡기는 이상 어찌 됐든 1/2의 권리는 부모님이 가지고 계신 거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포기도 쉽고 불평도 덜해지는 것 같아요. 또 어찌 보면 나 같은 성격은 그런 훈련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해요. 내 손으로 어떻게 다 해보려고 하는 욕구가 강한 거 말이 예요. 아이들 양육하는데 있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환경을 100% 다 통제할 수 없는데, 설령 내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운다 해도 마찬가지구요. 그렇죠? 이런 생각을 하다니...나 정말 훌륭하죠? ^^
‘딸 같은 며느리’라는 말에 대해서는 내가 할 말이 많네요. 써 놓고 보니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딸이라면 아마 그렇게 안 시키시겠죠. 그리고 나는 딸이 아니라 며느리니까 그렇게 시키시는 거구요. 그러고 보니 많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딸 같은 며느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나 역시 예외는 아니였구요. 뭐 궁극적으로 좋은 관계를 표현하고자 그렇게 표현하는 때가 더 많다는 것은 알겠지만 사실 그 환상으로 인해서 관계가 더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나는 며느리다. 나는 딸이 될 수 없다.’라고 관계 설정을 하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을까요?
‘난 널 딸같이 생각하는데......’ 이런 표현을 하시며 섭섭해하시는 시어머니, 또 그렇게 표현하시며 정작 딸하고 다르게 대접받는 것 때문에 상처받는 며느리 많이 본 것 같아요. 여보! 나는 이제부터 딸 운운하지 않아야 겠어요. ‘딸 같은 며느리’는 피차에 결국 이루지 못할 목표를 설정해 놓고 끊임없이 좌절하게 만드는 명제 같이 느껴져요. 나는 그저 좋은 고부간이 되는 꿈을 가져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예전에 하신 말씀 생각나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엄마’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엄마라고 부른다고 시어머니가 친정엄마 되는 것 아니다. 뭐라고 부르든 잘 지내면 되는 거다’ 이러셨거든요. 아! 난 어머니의 이런 합리적인 면이 마음에 든다니까. 너무 차갑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잘 보면 그 차가움이 합리적인 것의 또 다른 얼굴이라니까요.

JP 요새 당신이 어머니와 작은 갈등을 느끼고 있는 걸 보니, 새삼스럽게 신혼 초가 생각나는군요. 칭찬을 주고 받는데 익숙한 환경에서 살아온 당신에게 칭찬이라고는 쑥스러워서 눈꼽만치도 못하는 우리 가족이 얼마나 가혹하게 느껴졌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요. 내가 어머니께 전화해서 며느리 칭찬 좀 하시라고 큰 소리로 항변(?)했던 거 기억나요? 나로서는 거의 불효자식 소릴 들을만한 엄청난 발언이었죠. 그렇지만 다신 어머니께 그런 얘기 안해도 될 정도의 상황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편 합니다. 간혹 어머니께서 툭 던지는 말씀이 사실 마음에 걸리거든요. 당신도 들어서 알다시피 우리 어머니 종종 그러잖아요. '기껏 키워 놨더니 지 새끼하고 지 처 밖에 모르는 놈' 이라구요. 그렇다고 기죽을 일은 아니지만, '그거 다 아버지한테 배운 거에요.' 라고 발뺌하는 것도 이젠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
간혹 당신이 어머니로부터 상처받는 것들을 보고 들으며 대체로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사실 당신의 입을 통해 어머니의 허물을 듣게 되는 건 아들로서 정말 괴로운 일이에요. 설령 당신 말이 옳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렇다고 당신보고 혼자서 알아서 다 해결해라! 말도 꺼내지 마라! 그런 뜻은 아니란 걸 알죠?
결혼하고 보니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얼마나 힘든 짐을 알게 모르게 부과해 왔는지 보게 되는군요. 게다가 그런 구조적 모순을 거부하겠다고 종종 다짐하곤 하면서도 몸에 배어있는 가부장적 습관과 사고가 생각보다 커서 당신을 더 힘겨운 구석으로 몰아가도록 한 몫 거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나는 처가에 가면 늘 최고 손님으로 대접받으면서 당신이 시댁에서 부엌때기처럼 일하는 걸 보면서도 역지사지를 잘 못해요. 이런 나 자신을 보면서 나를 포함한 땅의 남자들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답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식'과 '남편'이라는 두 역할 사이에서 책임있게 부모를 공경하고 아내를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생각해 보게 되네요.
당신은 어머니가 차가운 면이 있다고 했죠? 그걸 알았을 때 사실 나는 좀 당황스러웠어요. 어머니의 그런 면을 알긴 알았지만 나는 그게 그리 큰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요. 아마도 어머니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이 나랑 무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아들이 어머니 편에 서서 사람들을 볼지언정 다른 사람들 편에 서서 어머니를 볼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무튼 어머니를 객관적으로 보고 그런 모습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마치 금기를 범한 것 같은 죄의식이라고나 할까요? 뭐 그런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내인 당신의 입을 통해 어머니의 약점을 듣게 되는 건 늘 '불경스러움과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죠. 자식 된 도리로서 어머니의 약점을 수용하는 일, 이 땅의 남자들에겐 정말 종교적인 배교 쯤 되지 않을까 싶군요.
오늘은 이쯤 쓰지요. 내가 내 자식 생각하면 한없이 사랑스러운데, 그 애들이 나중에 커서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나로부터 독립한다는 생각을 하면 뭔가가 혼동스러워져요. 부모의 역할이란 뭐고, 또 자녀의 역할이란 뭔지.. 또 그런 역할 정립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우리 부모님들을 섬기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지혜로운 일인지, 정말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네요.

SS 사실 어머니의 ‘차가운 면’은 어머니를 이해하고 적응하는데 제일로 어려웠던 부분이었지만 이젠 많이 달라졌다는 거 당신 아직 모르나 봐요?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요? 어머니의 ‘차가운 면’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죠. 일단 칭찬에 매우 인색하시다는 것. 기억나요? 작년 당신 생일 때 내가 휴가 내고 당신 생일상 차렸잖아요. 그것도 아침 식사로 말예요. 내 나름대로 퇴근하며 장 봐가지고 밤늦게 까지 또 새벽에 일어나서 온갖 솜씨를 다 동원해서 부모님 입맛 당신 입맛 고려해서 한 상 차렸건만..... 식사하시기 전 어머님이 하신 말씀은 딱 한 마디였죠. “이걸 언제 다 차렸니? 먹자.” 끄~~~~~ㅌ!!
언젠가 어머니와 오랜 시간 앉아서 어머님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하면서 어머니가 칭찬할 마음이 없으셔서가 아니란 걸 알았어요. 칭찬하는 방법을 잘 모르신다는 거죠. 표현이 안 되지만 마음까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부터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또 ‘차가운 면’은 자식들을 독립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우리 친정 엄마처럼 이 땅의 대부분의 어머니들처럼 자식 일이라면 뭣이든 아낌없이 주는 분이 아니시죠. 그런데 그건 며느리로서 반대급부가 있긴 해요. 지나치게 주시지도 않지만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않으시잖아요. 그 점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죠. 그러고 보면 어머니들 역시 강점이 있고 약점이 있는 거 같아요. 우리 엄마는 자식일이라면 뭐든 양보하고 포기하시지만 그 만큼 말하자면 간섭도 많으시잖아요. 반면 어머님은 웬만한 일에는 우리 뜻대로 하도록 두시죠.
많은 남성들이 결혼하고 부모로부터 ‘떠나기’를 잘 못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 그런 면에서 잘 떠난 사람이라면 그 배후에는 어머님의 ‘차가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젠 나도 어머님의 '차가운 면' 을 감사하고 있다니까요.

JP 결혼과정과 그 이후를 돌이켜 보면 나는 부모로부터 독립이 생각보다 순탄했던 것 같아요. 나는 줄곧 '남자가 부모를 떠나' 라는 말씀을 지키려고 했던 내 노력의 열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죠. 근데 당신 편지를 받고 보니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우리 부모님께서도 자식을 당신들의 품에서 떠나보내려고 꽤나 애쓰셨을거란 생각이 드니 새삼 감사한 생각이 드네요. 그렇지만 그게 다는 아닐 거에요.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과도한 간섭과 여전히 그 간섭에 익숙해진 나의 미숙한 습성 사이에서 당신이 얼마나 현명하게 모자 관계를 끊을 땐 끊어버리고 이을 땐 이어줬는지 내가 모르는 바 아니에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결과적으로 다 지났기 때문에 하는 말이긴 하지만, 내가 당신과 백년가약을 맺은 이후 나와 우리 부모님이 참 많이 밝아지신 것 같아요. 우리 가족 안에 우리도 어찌 할 수 없는 음울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나는 그게 정말 싫었는데, 어느 새 부턴가 그런게 없어진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을 맺어주신 그분의 뜻 중에 우리 가족의 치유도 거기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네요.

SS 서방님! 과찬의 말씀이옵니다. 소녀 부끄럽사옵니다~ 호호호... 고마워요. 여보~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그건 사실 내가 노력한 일이라기보다는 제 천성이 엔터테이너인 걸요. 한 가지 자신할 수 있는 건 있어요. 당신 내 옆에서 지켜봐 아다시피 저는 시부모님께 계산하지 않고 섬기고 순종하려 했어요. 가끔 이런 조언을 들어요. ‘시부모님한테 처음부터 너무 잘 하지 마라. 잘 하는 며느리한테는 기대가 갈수록 높아져서 나중에 잘해도 잘하는 줄 모르신다.’ 어떤 때는 정말 이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이건 아닌 거 같아요. 물론 친정엄마께 하듯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섬김과 공경이 늘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것 같아요. 앞에서 말한 통념을 받아들이고 시부모님을 두고 계산을 하면서 섬기다 보면 모든 관계에서 그런 것처럼 결국 나 스스로 외로워지고 공허해지죠.
결혼하고 처음에 말예요~ 부모님께 나 진짜 잘했잖아요. 그렇죠? 그 때는 어머님의 약점을 많이 알기 전이기도 했고 또 사랑하는 당신의 부모님이라는 생각 때문에 정말 힘든 줄 모르고 잘 할 수 있었거든요. 처음에 그렇게 해 드린 것이 부모님께 신뢰를 심어드린 것 같아요. 말하자면 좋은 선입관이 생기신 거죠. 그래서 혹 며느리에게 좀 섭섭한 일이 있으셔도 당신들을 향한 제 마음은 늘 믿어주시는 것 같아요. 또 혼자 오버하고 있다구요? 암튼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상처 받는 일이 있지만 어머니와 나 사이에 의심할 수 없는 신뢰가 있다는 건 분명하거든요.
함께 주고받은 긴 편지 마무리할께요. 당신과 결혼하여 가장 좋은 영혼의 친구 되기 위하여 에너지를 쏟았죠. 교회와 직장에서 내 삶의 여기저기서 만나는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구요. 다른 점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려 하고 설령 다른 점으로 인해서 불편해도 가급적 비난하지 않으려 하고 말이죠. 그렇게 부단히 연습하는 사랑으로 부모님을 사랑하기위해서 노력하겠어요. ‘시(媤)’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뭔가 뒤틀린 관계일 수밖에 없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媤’자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통념에 마음 뺏기지 않겠어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시어머님을 예외로 두지 않겠어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단호한 명령에도 마찬가지이구요.
부모님으로부터 을 잘 떠나서 우리 가정의 남편과 아빠로 서 있는 당신께 이 글을 통해서 새삼 감사드려요. 그런 당신이 있기에 내가 감히 고부간의 ‘갈등’ 아닌 고부간의 ‘화합’과 ‘사랑’이라 말할 수 있고 ‘롯과 나오미’를 꿈꿀 수 있습니다. 오늘도 어머니 몰래 손빨래 해 줘서 고마워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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