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가능의 내일을 두고 중대결정을 했던 몇 개월 전부터 격변의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 치는 파도에 비해 마음의 일렁임은 그보다 훨씬 덜했다는 것에 난 내게 후한 점수를 준다. 그 와중에 마음 한구석 끝내 가시지 않는 검은 그림자 있었으니 다름아닌 애들 걱정이었다.

그 좋던 가족피정 중에도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내 맘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 불안감에 식구들이 잠든 밤 홀로 일어나 무릎꿇기를 여러 번 하기도 했다. 시간과 함께 또렷이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과도한 아이들 걱정은 구체적으로 전학에 관한 걱정이었고, 과도함이란 내 마음에 있는 것의 투사였다.

중 1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콩너물 장사를 혀두 서울 가서 애들가르쳐야 헌다'며 남매를 데리고 무작정 상경하신 엄마. 자리잡은 곳 둔촌동은 잠실 인근이라 그 유명한 8학군인지 그랬다. 때문애 중학생인 난 빨리 전학이 되지 않아 시골에서 혼자 몇 개월 남아 있어야했다.엄마가 어디선간 '위장전입'이란 고도의 전술 득해왔고 나는 상도동 모여중으로 전학하게 되었다.

전학 첫 날. 5교시였는데 영어시간이었다. 나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알파벳을 배우던 중1 때부터 영어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어서 영어 교과서 달달 외우기가 취미인 여학생이었다. 암튼, 전학 간 날 첫 시간. 영어시간인데 안경 낀 인상 차거운 선생님이 시크한 얼굴로 들어와서는 탁!하고 출석부를 교탁에 공격적으로 내려놓고 책덮어! 했다. 그리고 바로 오럴 프렉티스를 다같이 외우란다. 안타깝게도 진도가 빨라 난 배우지 않은 곳이었고(내 비록 영어신동에 가깝긴 했지만) 어버버버 할 뿐이었다. 바로 날 지적하여 혼자 해봐! 라는 선생님. 난 다시 어버버버..... 앞으로 나와! 나가서 상황설명 할 새 없이 날아든

싸.
대.
기.

몸이 저만큼 나가 떨어졌고 인간의 존엄성이 교실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진실로 그랬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아본 싸대기. 성인이 된 후에 가끔 이 선생을 찾아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르며 치를 떨 때가 있다. 이것이 전학에 얽힌 트라우마 중 하나다. 그리곤 사춘기 내내 시골학교의 선생님, 친구들과의 편지로 내 정서적 생명의 끈을 부지했었던 듯.....

우리 아이들 전학을 생각할 때마다 내 안의 트라우마가 작용해 사실보다 문제를 더 크게 느끼곤 한다. 내일 이사를 하고 금요일에 두 아이 함께 전학을 한다. 페친들께서 기도의 마음 보태주시면 두려워 떠는 엄마와 그 아이들에게 힘이 될 듯 하다(합니다. 왠지 존대말로 마무리 해얄 것 같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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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페북에 썼고 오늘 아침 새학교로 전학했습니다.
아이들 보다 엄마가 더 긴장하고 떨고 기도하며 학교에 남겨놓고 왔습니다.
첫 눈에도 안정되고 편안해 보이며 아이에게 눈을 먼저 맞춰주시는 선생님 한 분,
애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며 '왜 이 때 전학을 했냐'며
성적이랑 이런 거 어떻게 하냐고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시는 선생님 한 분,

이렇게 두 분의 선생님을 보고 비오는 날 짚신장사 아들 걱정, 맑은 날 우산장사 아들 걱정하는 엄마 맘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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