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훈련에서 몸의 훈련이 중요하다고 한다.
감정과 생각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날뛸 때 지금&여기를 우직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몸이다.
감정과 생각은 수없이 나를 속이지만 몸은 거짓말 하기가 어렵다.
몸을 알아차리는 것에 민감해질수록 내가 모르거나 모른 척 하고 싶은 마음 알기가 수월해진다.


설거지나 가사 일을 하면서 몸의 감각을 디테일하게 느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유익이 있다.
난 요리 전 시간을 많이 들여 재료 다듬는 일이 별로다.
가령, 김치를 위해 배추나 무를 다듬거나 한 다발의 차를 까는 일 등...
단순작업을 길게 해야하는 일들 말이다.


멸치를 다듬었다. 꽤 많은 양의 멸치를 다듬어 똥을 뺐다.
똥만 딱 빼고 머리며 뼈까지(그 알량한 멸치의 뼈! ㅋㅋㅋ)통째로 갈아두고 멸치 다시를 만들 때 쓴다. 가사 일 중에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된장국을 끓이거나 오뎅국 같은 걸 끓일 때 한 수저 푹 떠서 넣으면
왠지 식구들의 뼈가 튼튼해질 것 같아 뿌듯이다.


멸치를 다듬으며 꼬리리하며 비릿하고 짭쪼롬한 냄새와
손끝에 느껴지는 깔끄럽고 눅눅한 촉감들을 느낀다.
이 일이 매우 매우 의미있게 느껴진다.
40분의 음악치료 세션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
여덟 시간의 에니어그램 강의를 하는 것에 결코 견주어 밀리지 않을 의미이다.


로렌스 수사께서 평생 부엌일을 하면서 훈련하고 느꼈던 하나님의 임재연습은 이런 것이었을까?
나이가 들수록 몸으로 하는 일들을 더 의미있게, 귀하게 여기며 살고 싶고 싶다.
몸으로 하는 일상의 단순한 일들에 더욱 영원을 느끼며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멸치 똥 빼면서 멀리까지 왔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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