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 사이에 구전되는 '목회적 관계 맺기의 법칙'이 하나 있으니 이것이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한 두 해 목회질(?) 하신 분들의 노하우가 아닐 것이다. 교우들과 가까이 하면서 상처도 받을 만큼 받으신 분들이 후배들에게 주는 피가 되고 살이 된다며 나눠주시는 지혜일 터. 그러나 이 말처럼 교회의 본질, 예수님의 제자도를 따르는 공동체 정신과 위배되는 말도 없다 생각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는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보여줄 건 보여주고 숨길 건 숨기는 관계에서 어찌 신뢰와 사랑이 자랄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은, 신뢰는 친밀해져서 약점을 드러내고 상대의 찔려 피 흘리도록 아파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만 진.짜.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남편의 초임 목회생활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철학에 거스르는 방식이었다. 교회는 바뀌지 않고 평신도에서 목회자로 호칭과 약간의 역할만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계로 지내던 사람들이 목회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해도 선택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이제 와 돌이켜보니 젊은 부부들의 모임인 'AP목장'은 물론 청년부 TNTer들과의 만남은 진하고도 끈끈한 만남이었다.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그런 만남이었다.

특히 청년부와의 3년은 내겐 더욱 특별하다. 블로그에선 꽤나 징징거렸지만 아무리 징징거려도 다 표현되지 않을 정도로 지난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내던 3년 여였으니까. 지하 감옥 같은 마음 상태로도 이들과의 만남에선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돌이켜보니 그러하다. 이 점에 관한 한 감히 나 자신을 칭찬할 수 있으리.) 가끔 '하나님이 도대체 날 사랑하시는가?'라는 의문이 들어서 그 믿음조차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것은 청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역지를 옮기면서 어떤 의미로든 의식적으로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큰 틀에서 원칙을 지키고 있다. 헌데 <오우 연애> 책을 낸 이후로 내가 지금 어디를 살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책으로 인한 방송출연, 인터뷰 등이 연이어 있었다. 내가 거기서 하는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TNTer들과의 이야기다. 자꾸만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처럼 해야 하는 것으로 인해 마음 한 구석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다. 이걸 통해서도 내가 TNTer들과 얼마나 깊이 서로에게 영향받고 있었나를 확인하게 된다.

방송을 위해서 집에서 청년들과 노는 걸 촬영해야 했다. 멤버를 구성하는데 쉽지 않았고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곡절이 있었지만 갑작스레 캐스팅된 멤버들이 모여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모임이 되었다. 녹화 때 하지 못했던 꼭 필요한 말들이 얘네들 입을 통해서 나왔다. 무엇보다 내가 너무 즐거웠다. 즐겁다 못해 속으로 눈물 찔끔 나게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우연히 놀러 왔다가 인터뷰 당한 귀여운 커플과 결혼식장의 신부 모습이 그대로 느껴지는 새댁과 센스있는 동네 아가씨와 나의 커피 런닝 메이트 까지. 카메라 켜지자마자 긴장하고 벌쭘하던 모습 간 데 없고 깔깔거리고 낄낄거리는 시간이었다.

어제의 만남들이 오늘 내게 이렇게 힘이 되니 이 고마움을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다. 관계라는 것이 어제와 오늘을 어찌 구분지을 수 있으랴 싶다. 구분지으려 했지만 최소한의 형식에서만 가능한 일이겠구나 싶다.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고, 때문에 앞으로도 사랑하는 사람들일 터이니. 더불어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이 곳에서 현재의 사랑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내일의 사랑은 없다. 교회가 크다고, 숨어 있어도 모른다고.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오늘 여기서 깊이 연루되고 소통하는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되겠구나. 전에 그러했듯 사랑할 조건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일궈가야 겠구나.

 

(고맙고, 또 고맙다. 오늘의 만남이 된 어제의 너희들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