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새의 날개처럼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 宇宙는,
님을 향하여 춤추고 노래합니다.

나의 노래는

푸른 나무가 그늘을 만듦같이
깊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 마음은 나의 日常이며
내 삶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 바람 같은 나의 님.


가이없이 慈愛로우시고 잠잠한

그 분의 품으로 들어가 부르는 노래는
고요한 침묵의 노래입니다.

저 무명초에서 흐르는 침묵의 향이

곧, 진리의 제사요, 의 노래입니다.
아, 마지막은 침묵이니
소리 없이 하나님을 讚하는
그런 침묵이리니



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새의 날개처럼 자유로운 것입니다.
시인의 이 한 문장에 마음의 무릎을 쳤고, 이 노래를 얼마나 반복해서 들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이 '그 분의 품으로 들어가 부르는 노래는 고요한 침묵의 노래'라고 하였고 '마지막은 침묵'이라고 했습니다. 이 통찰을 얻은 시인이 자신이 깨달은대로 그 귀한 깨달음을 고이고이 '침묵'으로 간직했다면 이 시는, 이 노래는 내 가슴의 한 송이 들꽃으로 피어났을까요?

'새의 날개' 같은 자유로운 삶이 '침묵'임을 깨달은 시인이 깨달은대로만 충실했다면 말이지요. '자유'롭기 위해서는 '침묵'해야함을 알았지만 결국 침묵하지 않고 노래를 지어 부를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의 열정이 없었다면요. 그러나 그 열정은 시인의 깨달음에 반하는 것이지요. 그의 고백처럼 깊은 마음으로, 일상으로, 삶의 그늘로 흩어져 버리고 남은 것은 침묵이어야 하는데 시인은 노래를 합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게는 아픈 딜레마라고 생각합니다. 님의 세계에 사는 비밀, 침묵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그 비밀을 발견한 자가 그 비밀에 대해서 말하고 노래해야 하는 비루함이랄까요? 아이러니한 열정을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살기란.....

이 음유시인을 오랜 시간 좋아하고 들었지만 그를 먼발치에서 실제로 본 이후에 노래 그 이상으로 좋아하진 않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그 비루한 열정, 그것을 느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것이라기 보다는 내 것이겠지요. 침묵으로 두어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까발리는, 그래야 이름 값을 하는 것이라 여기며 달려온 날들을 접으려 노력 중입니다. 열정이 '시'가 되면 아름다운데 그 이상이 되면 비루해지는 것 같고, 그 이상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책상 위에 칼로 금을 긋는 것처럼 분명하게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 기준은 저마다의 '자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새의 날개 같은 자유로움 말이죠. 블로그를 제외한 모든 SNS를 끊고도 잘 살고 있음에 기쁜 날들입니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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