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강의가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휴일이라며 운전해주고 함께 가주기로 며칠 전에 섣부를 약속을 남발했었지요.
누구긴요, 남편이지요.
올해부터 20대 청년부를 맡은 남편은 일 중독 수준이 되어갑니다.
어제 11시가 넘어서 퇴근을 했으니 섣부른 약속은 역시나 섣불렀구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깨우지도 않고 강의 다녀왔습니다.

화장품 사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 좋은 시누이가 인심을 많이 얻어서 덩달아 덕을 보는데요.
좋은 화장품 샘플을 수시로 얻어다 줍니다.
결혼할 때 아주 조그만 화장대를 샀었는데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놀 자리가 변변치 않아서 치워버렸습니다.
화장대도 없이 장롱 문 열어젖히고 거기 붙은 거울에 샘플만으로 화장하는 아내.
불쌍 코스프레 쩔죠.

제가 원래 꼼꼼하게, 그때그때, 정리하는 기능도 안 되는 데다
코딱지만 한 샘플병들이 대부분이니까 화장품들이 제대로 서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굴러다니고,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고.

강의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컴퓨터 책상 한구석에 어지럽게 굴러다니던 화장품들이
착착착착 줄을 맞춰 서 있는 것입니다.
쇼핑백에, 비닐에 들어있던 놈들도 싹 나와서 상자에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있구요.
샘플병의 두 배는 족히 되는 굵직한 손가락에 떡두꺼비 같은 손등을 가진 이의 손재주였습니다.

같이 가기로 해놓고 눈도 못 뜬 죄를 사죄하는 마음이었는지,
화장대 없이 화장하는 걸 안타까워하던 마음이었는지.
여기에 덤으로 욕실을 또 어찌나 깔끔하게 손을 봤는지요.
세면대 분리하여 머리카락 제거하고, 청소하고, 정리하고.

며칠 전 공대 나온 남편의 손재주를 엄청 부러워라 하면서
철학 전공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공부나 하고 싶어하는,
남산골 선비 같은 이 남편을 막 씹어댔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철학과 남편이 갑입니다.
손들과 회개합니다.
컴퓨터 문제 따위 공대 나온 지인이나, 만물박사 동료 목사님께 삐대서 해결하면 됩니다.
김종필 만쉐이!


굿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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