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 주 울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몸서리치지 않는 엄마가 있을까요? 열어보고 또 열어보는 포털 사이트 초기화면에는 아까 그 뉴스, 몇 시간 전 그 뉴스뿐입니다. 열어보고 또 열어보고, 울고 또 분노하고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들 그렇겠지요. 한 기독교 언론으로부터 엄마의 심정으로 기도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기도문은커녕 댓글 할 줄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의 언어를 잃었는데 무슨 기도문을 쓸 수 있겠습니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기도를 잃은 가슴 속에서 그나마 기도에 가장 가까운 말은 이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이 외에 다른 어떤 기도의 말은 길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아침 일찍 채윤이 보내고 기사를 보다 말고 한글창을 열었습니다. 기도문이 써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흐려져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향해 감정을 쏟아 붓듯 써내려갔습니다. 대략 써놓고 수영을 하러 갔습니다.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도 죄스러워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코치는 '폼 생각하지 말고 걷다가 물에 뛰기' '수직으로 그대로 물에 떨어지기' 등을 시켰습니다. 평소 배우는 스타트 자세는 안 해도 되니까 자연스럽게 떨어지라고 했습니다. 그걸 시키는 선생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왜 모르겠습니까. 그걸 따라 하면서도 죄스럽고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마치고 샤워장에선 아줌마들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합니다. 중고등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5, 60대도 계십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얘기들이지만 너무 듣기가 싫었습니다. '선장 XX 잡아 죽여야 한다' '그 엄마들은 앞으로 어떻게 사냐' '그거 봤냐. 이 와중에 보상금 뉴스가 나오더라. 미친 XX 지 애가 당했다고 생각해봐라'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난 또 왜 이러는 걸까요?

 

집에 와서 썼던 기도문을 모두 지웠습니다. 그 어떤 말을 내놓아도 아픈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들 자기 안의 슬픔을 이 사건에 빗대고, 자기 안의 분노를 이 사건에 빗대어 쏟아놓고 풀어놓는 것 같습니다. 기도문이라는 허울 좋은 형식을 빌어온다 해도, (아니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조차도) 그저 내 감정을 해소할 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낙서조차도 조심스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어른 말에 어디다 대고 말대꾸야. 어른이 말하면 들어' 이런 말을 주야장천 해댄게 누구란 말입니까. 그래서 자신이 하는 생각은 쓸데없다고 배운 아이들이 그 위급한 상황에서 어른 말 듣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 엄마의 강요에 등 떠밀려 수영을 배운 아이들이 허다할 것입니다. 접영도 하고 잠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라고 수영도 가르쳤을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여야 하고, 소신대로 뛰어들어야 하는 순간에, 가만히 있는 착한 아이로 만는 건..... 바로 저 자신, 엄마입니다.

 

구명보트가 턱없이 부족한 걸 알고 일빠로 타고 도망간 선장이 나쁜 놈이라구요? 하나밖에 없는 1등 자리에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전력질주 시키는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엄마, 나 시험 잘 봤어' 기분 좋게 들어오는 아이에게 '다른 애들은 몇 점인데' 하면서 친구를 이겨야 진정 시험을 잘 본 것이라늘 걸 아무렇지 않게 삶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저 자신입니다. 네, 지금 이 글을 쓰는 옆에서 우리 채윤이 몸을 비틀며 시험공부 하고 있습니다. 쉬고 싶고 자고 싶지만, 엄마가 무서워서 앉아 있습니다. 지금 여전히 이렇게 '말 듣는 아이'로, '시험 경쟁에서 어떻게든 앞에 서는 아이'로 기를 쓰고 만들고 있습니다.

 

엄마 말 딱딱 듣지 않았다고 얼굴 붉히고, 때로 냉랭하게 등교시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수학여행 가는 아이와 따뜻하게 인사하지 못하고 보낸 엄마,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면서 발을 동동 구를 엄마를 생각하면...... 그냥 돌아버릴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슬퍼하느라 곁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스할 수 없습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슬픔에 합당한 열매, 반성에 합당한 열매 없이 단지 이 감정에만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나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져야 할 죄책의 짐이 있다면 이 땅의 엄마들이 함께 나눠서 져야 합니다. 일주일 고난주간 설교를 통해 인간이 느끼는 가장 처참한 감정을 다 느껴보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모멸감, 수치심, 배신감, 그리고 그로 인한 자괴감과 우울증까지 다 겪으셨다고 배웠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이 고통의 때에 그분이 어디 계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이 처참한 심정을, 저 엄마들의 고통을 먼저 겪어 보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공포와 추위로 식어가는 아이들과 함께 배 안에 갇혀 계실지도 모릅니다. 울고 있는 엄마들 곁에서 함께 울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손길이 연약한 몸을 입은 우리에게 느껴지도록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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