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같이 하는 걸 좋아하고 연결되기를 갈망하는 내 기질이 우리 부부를 서로에게 깊이 침투하도록 만들었다. 반면 늘 독립적이기를 원하는 남편의 성향은 적당히 거리를 두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우리 부부가 비교적 잘 지내는 비결 중에 하나는 둘이 하나되는 것에 거침없이 투신하고 각각 홀로 가는 것을 두려움 없이 응원할 수 있었던 덕이라 믿는다고 거창하게 깔대기 들이대보지만, 실은 남편 덕이 크다. 나는 결혼 전 살던 방식대로 살았고, 남편은 결혼 전 살던 방식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이를 선택한 셈이니까. 결혼과 동시에 '별걸 다 얘기하는 남자'로 변신하겠노라 결단하고 퇴근하자마자 '오늘 사무실에서....'로 시작하는 (그의 편에서는) 의미없는 '그냥 있었던 일'을 자발적으로 말하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 당시엔 남편 김종필씨에게 있어서 이것이 얼마나 애를 많이 써서 된 일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살면서 그를 더 알게 될수록 처절한 결단과 노력이었다는 걸 실감한다) 때문에 내가 남편을 먼저 사랑함이 아니요,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치 않아서 나를 사~아랑 하시니..... 그는 나보다 말할 수 없이 큰 자이다. (김종필씨, 보고 있나?)


한 달 쯤 전에 남편을 향한 나의 마음이 급속도로 얼어붙어서 '이거 해동이 되기는 할까?'하며 지내던 시간이 있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깜짝 선물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두어 달 남편이 정신력을 다 쏟아 준비하던 소임을 마치고 난 후이기도 했다. 남편 쪽에서 보면 '이 여자 또 왜 이래? 약 먹을 때가 됐나?' 정도였을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정말 깊은 빡침과 좌절의 시간이었다. 기도하고 나면 남편과 화해하게 될까봐 일부러 며칠 기도도 미루고 있었다. 사실 그때 내가 남편에게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당신의 감정을 돌아 봐. 내가 보기엔 아무렇지 않지 않아' 였다. 남편은 '감정을 돌아봤다. 화가 났다. 그런데 내가 삭힐 수 있는 정도다. 그러면 삭히면 되는 것 아닌가. 갈등을 일이키면서 감정을 다 표현해야 하나?' 이거였다. 이 지점에서 그다지 만족할 만한 합의점이 찾아지지 않았고, 왠지 나의 빡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융(Carl Jung)이 그려준 마음의 지도가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 다음으로 좋다. 어릴 때 이해도 못하고 읽었던 내용들이 중년의 고개를 넘으면서는 글자 한 한 한 자 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어 목디스크가 올 지경이다. 어찌 어찌 알게 된 저자에 꽂혀서 이 분이 지은 모든 책을 찾아 읽다 <우울한 남자의 아니마, 화내는 여자의 아니무스>를 만나게 되었다. 융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런데 오랜 세월에 걸쳐 남성과 여성에 대해 고정관념을 형성해 온 사회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별에 따른 역할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남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여성성을 억압하고 여자들은 자신 안의 남성성을 억압하게 된다. 물론 인간으로서 성숙해진다는 것은(융의 표현대로라면 '개성화') 남성은 자신 안의 여성성을, 여성은 자신 안의 남성성을 통합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을 아니마, 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포함해서 무의식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은 인격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강의에 참고하려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아니마 아니무스 어제 오늘 들었던 얘기도 하니고.... 그런데 이게 왠 일! 우울한 남자 김종필의 내면, 화내는 여자 정신실의 내면이 깨알 정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 안의 아니마를 만나지 않으려는 남자는 부정적 아니마 에 사로잡혀 우울한 감정 속으로 끌려 들어가서 심리적으로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남자다운 대범함은 사라지고 소심하고 방어적이 되어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오히려 마치 토라진 여자처럼 성마르고 야박한 태도로 비아냥 거리거나 딴청을 피운다. 내면의 아니무스를 무시하는 여성 역시 마찬가진다. 자신 안의 남성성을 지속적으로 무시해왔던 여성은 아니무스가 부정적인 모습으로 외면화 된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섣부를 단정을 내리거나 상투적인 구호를 외치며 비판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울한 남자, 화내는 여자 탄생! 우울한 남자는 토라진 여자처럼 행동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띠는 화내는 여자의 눈치를 슬금슬금 본다. 아, 부끄러워. 단적으로 이것이 한 달여 간의 우리 모습이었다. 융 할아버지의 처방은 단순하다. 자신 안의 여성성, 남성성을 제대로 봐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성은 자기 안에 있는 여성성을 폄하하지 말고 애써 통합시켜야 한다. 그저 자신 안에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 그리고 표현하면 된다고 본다. 여성도 마찬가지. 파괴적인 아니무스를 물리치기 위해 여자는 자신의 영혼을 더 강한 정신으로 채우고 진정한 사랑에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울한 김종필은 자신의 감정(특히 부정적인 감정)속으로 삼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적절히 표현을 (쫌) 하고, 화내는 정신실은 (제발 쫌) 남편 들어올 시간만 바라보며 의존하기를 멈추고 강한 정신으로 내면을 채워야 한다는 말씀.

 


 

오래만의 (놀월) 안식일 일기이다. 사실 여느 부부가 누리지 못하는 친밀한 관계, 질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믿는다. 월요일이면 걷기 좋은 길, 좋은 카페를 찾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각자 책을 보기도 하며 연인들 데이트 코스를 누빈다. 어제 월요일에 '당신은 월요일 이렇게 보내는 게 좋아? 나한테 맞춰서 애쓰는 거지?' 하니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어!'했다. 이 간 큰 남자! 그그렇지만 괜찮다. 나는 이대로 쭉 갈 거니까. 이 남자가 되도록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힘 쓸 것이다. 열심히 내달리지만 순간순간 멈춰서도록 발을 걸어 넘어뜨릴 것이고, 꿍꿍 속으로 참고 있지 못하도록 찌르고 또 찌를 것이다. 나? 나도 역시 내 안의 힘을 믿고 더욱 씩씩해질 것이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밖을 바라보는 자, 꿈을 꾸고 
안을 돌아보는 자, 깨어난다"

융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피차에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각각 성장할 것이다. 굳이 아니마, 아니무스를 운운할 필요도 없다. 각자 잘 성장해갈 때 둘의 하나됨 역시 더욱 온전해질 것이다. 목적 없는, 방향 없는 성장이 아니라 각자 안에서 살아 계시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다. 신혼 초, 갈등이 있을 때마다 어떤 경우에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갈등의 끝을 만지기로 결심하고 살아온 시간이 (적어도)나에겐 커다란 인격적 변화를 맛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 노력으로 이제껏 비교적 잘 사랑하며, 각자의 의식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잘 살아온 것 같다. 지금은 또 다른 전환점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부부의 사랑이 더욱 온전해지기 위해서 각자 안의 그림자를 더 정직하게 들여다돠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빡침은 깊은 성찰로의 초대장이라 받아들이려 한다. 밖을 바라보면서 허황된 꿈을 꾸는 중년이 아니라 안을 돌아보며 더욱 깊이 깨어나는 오늘을 살아야, 우리의 노년이 더욱 로맨틱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우아한 말로, 좋게 얘기할 때 우리 서방님이 잘 알아들으셨으면 한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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