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명의 배신

 

붕어빵엔 붕어가 없고 새우깡엔 새우가 없다. <웰컴 삼바>의 불법체류자, 세네갈 출신 '삼바'는 삼바춤을 추지 못한다. 일에 치여 번아웃 증후군을 앓는 여주인공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는 딴판의 앨리스이다. 동화적 모험과 환상과 생기라곤 찾을 수 없는, 밤에는 잠을 못자고 낮에는 덤덤하며 어리바리 하다 분노폭발하는 이상한 앨리스일 뿐이다. 프랑스 거주권이 삼바의 외적 관심이라면, 내적인 갈등은 구치소에서 만난 '친구의 여자 친구'를 찾으러 갔다 생긴 접촉사고 때문이다. 네일샵에서 일하는 '친구의 여자 친구' 그레이스가 조물락조물락 손맛사지를 해준다. 불법체류의 삶에 지친 외로운 삼바와 그레이스가 그냥 헤에질 수는 없었으리라. 하룻밤의 은혜였으며며 그밤 이후로 내내 죄책감의 고통이다. 구치소 친구의 이름은 요나.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니느웨에 전하라는 사명을 예언자의 이름이다. 이 요나는 '사명은 난 모르겠고!' 고집불통 아저씨 같이 생긴 얼굴로 단지 여자친구를 찾아 프랑스 건너왔다.  

 

 

로맨스의 배신

 

'사랑이 밥 먹여주냐' 그렇게 말하는 선배도 한때는 사랑에 목숨 걸었던 후배였단 말이지. 예고된 배신을 결코 믿지 않으면서 다들 한 번쯤은 로맨스를 섬기던 때가 있었다. 로맨스 앞에 한업이 약자가 되어 자존감 바닥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사랑이든 사랑을 빙자한 결혼이든 엔딩을 맞는다. 그 엔딩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에서 '이상한 앨리스'의 민낯을 보고 살아야하는 시작인 줄을 모르고. 그리고 아직 로맨스를 섬길 자격을 잃지 않은 후배들에게 말한다. '결혼해 봐. 따 똑같애.' 알고도 당하는 로맨스의 배신이다. 

 

삼바와 앨리스의 사랑과 우정 사이가 참 마음에 든다. 늦은 밤, 침 넘어가는 소리 크게 들리는 차 안의 삼바와 앨리스. 뜬금포 삼바가 고백 태세를 갖추자 고백하는 자를 배려한다고 먼저 김치국 마셔준 앨리스가 무색해진다. 앨리스 좋아한단 얘기 아님. 친구의 애인을 범했고 죄책감이 들고 친구에게 연락도 못하겠어서 힘들단 얘기. 맞다. 앨리스는 딱 봐도 고백받을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뜨겁게 좋아한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로맨틱한 열정이 살아있다면 번아웃신드롬 진단을 받았겠는가.

 

영화 내내 뚜렷한 애정라인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앨리스는 여성적 매력이 그저 그런 여자이고(개인적으론 앨리스의 무색무취 표정에 홀딱 반했다), 삼바는 상황이 노답이다. 우리나라 우리 교회 주변에서 흔히 보는 남녀이다. 부족한 건 없지만 딱히 매력은 없는 여자, 사랑이고 결혼으로 가자면 풀어야 할 생존 과제가 너무 많은 남자. 애정라인이 뚝뚝 끊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애정전선만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영화의 흐름이 뭔가 유려하지 못하단 느낌이다. 디테일이 주는 깨알 감동과 재미가 있지만 보는 내내 뭔가 굵직하게 불편하다. 일이 안 풀리면 가슴 떨려 죽을 것같은 사랑이 있든지, 아니면 일이라도 잘 풀리든지. 결국 고향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나? 삼바는?

 

 

긍정의 배신

 

첫눈에 반하는 사람을 만나는 만큼 어려운 일이겠지만 사랑을 하려거든 이런 사랑을 하라. 밋밋하고 가끔씩 이상할 뿐인 여자에게서 특별함을 발견해주는 눈을 가진 불법체류자 삼바 같은 사람 말이다. '당신은 참 특별해요' 관객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앨리스의 특별함을 발견해주는 삼바의 소처럼 크고 착한 눈. 영화를 홍보하는 문구 중에 '초긍정'이란 말이 있었다. 긍정도 불편한데 초긍정이라니. 앨리스에게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눈이 긍정의 눈이라면 나는 그 특별함 반댈세. 긍정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 있는 그대로 발견하는 눈이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든 장면을 말할 때가 됐다. 구치소 식당에서 삼바는 밥이 안 넘어가는 모양이다. 초면의 친구 요나가 통성명을 한 후에 '그거 안 먹을 거예요?' 하면서 죄 가져다 먹는다. 10년 경력의 요리사 배고프다고 맛대가리 없고 성의없는 밥을 먹을 일이 아니지. 암.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삼바가 화면에서 툭 튀어나와 내게 그러더라. '안 먹는 게 아니고 못 먹는 거거든요. 안 넘어가요.' 삼바의 진짜 매력은 착하고 맑은 눈이 아니다. 아닌 걸 끝까지 아닌 걸로 아는, 대충 설득당하지 않는 자존심이다.

 

푸쉬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결코 스킵하지 말아야 할 과정이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과정이다. 이민국에 거주권 신청을 하러 갔다가 덜컥 붙잡혀 불법이민자가 되어버린 삼바의 자존심이 좋다. 자존심을 세운다해도 지금 대단한 것을 할 수도 없고 부조리한 현실을 뒤집어 엎을 수도 없지만 말이다. 밥을 안 먹고, 삼촌이 보낸 마카롱을 전달하지 않은 앨리스에게 내내 쪼잔하게 구는 삼바가 참 좋다.  어구어구어구, 삼바의 밥까지 쓸어 먹은 요나는 구치소 탈출을 시도해보는, 저돌적인 것 같으나 정작 자존심 같은 건 없어 보인다. (오늘 명의 배신의 레전드 : 성경의 요나는 자기 민족을 괴롭힌 니느웨가 심판의 경고에 회개하는 것에 빡쳤다. 설마 회개할 줄 몰랐던 것이다. 저런 나쁜 놈들이 회개를 하다니, 회개한다고 용서를 하시다니!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들었던 핵존심의 선지자였다.)   

 

 

결말의 배신

 

결말이 좀 황당했다. 10년 거주권을 손에 들고 찾아온 요나와의 주먹다짐과 여차저차한 에피소드로 인해 말하자면 내적 외적 문제가 일거에 해소되고 만다. 결말이 맘에 들지 않아서 리뷰를 써줄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자꾸 생각해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 이런 판타지 같은 문제해결을 유난히 싫어하는 이유는 '한 방의 기도응답' 같은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그러나 사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내게도 이런 기도응답이 한 둘이 아니다. 유난히 싫어하는 이유는 너무 간절히 갈망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도응답 떡받으로 사기치는 목회자들에 질릴대로 질린 탓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삼바에게 프랑스 영주권이 떡하니 생겼으면 좋겠다. 아니 아니, 삼바 말고 내게! 삶의 배신에 지칠만큼 지쳤다. 내일에 대한 불안에 오만 가지 계획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삶도 지겹다. 판타스틱한 기도응답 좀 매일 빵빵 터졌으면 좋겠다. 런닝타임 내내 감동을 주고 고생한 삼바가 마지막에 어이없는 상을 좀 받았다고 해서 화내지 말자. 사실 나도 많이 받아본 상 아닌가. 그리고 부조리한 인생, 의문을 내려놓지 않고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복이 하늘에만 쌓이지는 않는다는 소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궁극의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없이 오늘의 일상,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 수 없다. 슬퍼하는 자 더욱 슬퍼지고, 약한 자 더욱 짓밟히며, 속이는 자들이 속임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을 말이다. 불법 이민자 같은 우리가 마지막에 들을 목소리,  웰컴 삼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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