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음악수업에서 만난 아가들에게 으막션생님의 매력이 통 먹히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글을 썼었다. 아, 좌절 금지. 3주차 수업에서 낚시질 끝. 5세 형님반은 물론이고 난생 처음 엄마를 떨어져 어딘가에 온 4세 아가들까지 죄 걸려들었다. 엄마한테 가겠다고 그렇게 울어대던 아가들의 눈동자가 제대로 보인다. 눈물을 그친 것이다. 어제 3주차 수업에 들어갔는데 '으막션샘미다..... 영어션샘미다.....' (1년이 지나도록 나를 영어 선생님으로 부르는 아이들도 있다.) 뜨거운 환영이었다. 기타를 들었더니 반짝반짝, 아구떼(악어떼), 아빠곰아빠꼼.... 신청곡이 쇄도를 한다. 그러면 그렇지. 쫘식들.

 

초롱초롱 눈망울, 놀라서 커진 동공, 까르르까르르.... 음악 수업을 빙자한 으막션샘미 자가 치료시간이 끝났다. '즐거운 음악시간 끝났네요' 굿바이송을 부르자 한 녀석이 '우막션샘미 가지마. 지베 가지마' 울기 시작한다. 얘네들은 동네 강아지들 같아서 한 놈이 짖기, 아니 울기 시작하면 다들 따라서 운다. 다는 아니고 딱 한 녀석이 따라서 울면서 '우막션샘미 가지마... 으앙.....' 아, 쫌 뭉클했다. 끝나고 우는 아이들 하나씩 안아주는데 너무 조그만 아기들이다. 아무튼 3주 만에 자존감 상승이었다.

 

수업을 다 마치고 점심시간. 화장실 앞에서 아까 울던 아가를 만났다. 으막션샘미는 반가워서 급 엄마 미소 지었는데 이 녀석, 으앙....... 움막션샘미, 으앙....... 으.......앙.......으.....막.......션......으앙....... 아니 왜 또 울어? 야, 선생님이랑 재밌게 놀았던 기억을 떠올려야지 마지막에 울었던 기억을 소환하면 어떡해? 지금 우는 타이밍 아니라 반가운 타이밍이야. 설득불가. 으앙..... 울면서 나에게 안기지도 않고 자기 반 담임샘을 찾아간다. 아, 막막해 진짜. 쟤 저러다가 다음 주 음악 시간에 십중팔구 나 보고 운다. 쟤.

 

아이들의 기억이란 이런 것이다.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인지, 정서, 신체적인 능력 때문에 상황을 통합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고통을 전존재로 느끼면서 몸으로 기억해버리는 것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생각이 났다. 모든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 치유라는 것은 어릴 적 기억을 어른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시작한다. 아이라는 무력함 때문에 그렇게 기억할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을 살고 있는 폴이, 반주하는 기계처럼 살며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던 폴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마담 푸르스트와 함께. 장소는 그녀의 비밀 정원. 어릴 적 잃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공간으로 철퇴한 폴이 차 한 잔에 취해 기억의 창고 문을 연다.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있고,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등장하여 기억의 심연 속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간다.  

 

엄마 대신 폴을 키우는 이모 둘은 폴의 현재형 엄마이다. 그리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  말하자면 그녀는 새로 등장한 또 다른 엄마이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죽고 없다. 현재의 엄마들은 폴의 반주에 맞춰서 춤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과거도 현재도 아닌 원형으로서의 엄마가 마담 프루스트일 것이다.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 여정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더듬어가다 보면 엄마에 대한 분노가 새롭게 올라오는 때가 있다. 마담 푸르스트의 차 한 잔을 마신 것처럼 거부할 수 없게 묻었던 기억이 피어 오른다. 몹시 힘들고 아픈 과정이다. 그럴 때 혼자 울고 불고 하다가  엄마를 찾아가기도 한다. '엄마 어릴 적에 나한테 왜 그랬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엄마들의 반응이 어떨까? 딸의 말에서 마음을 읽어내고 '미안하다, 너에게 그렇게 큰 상처가 될 줄 몰랐다. 그땐 엄마도 어렸어.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해주는 게 정답이겠지만 그런 엄마는 찾기 어렵다. 대부분 엄마들은  '그런 일이 있었냐? 별 걸 다 기억하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또는 '뭐 그런 걸 갖고 그러냐' 이다.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뭐냐. 니가 그런 소리 들을만 했다' 이러시면 딸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기괴한 거실 또는 정원은 기억의 정원이다. 마음의 수풀을 헤치고 묻어두었던 것을 더듬더듬 찾아가게 하는 신비의 묘약에 취한 곳. 차 한 잔과 마드렌 한 조각, 마담의 기괴한 목소리 한 두 마디에 폴은 마음의 수풀로 기어들어간다. 그리고 한 겹 한 겹 벗겨지는 기억들. 폴의 기억 여행을 따라가며 아빠에 대한 오해, 엄마에 대한 환상을 바로잡아가는 것이 (심지어) 즐거웠다. 단언컨데 우리는 모두 나름의 왜곡된 기억에 붙들려 산다. 그리하여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말과 행동 이면에 왜곡된 인식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비밀의 정원은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준비된(갈망하는) 자만이 이끌리는 곳이다. 마담은 미친 사람 같고, 그 정원은 말이 좋아 정원이지 야생의 숲, 아니 막 자란 식물들로 기괴하고 정신없는 이상한 곳이니 말이다.  

 

모든 영화에서, 소설에서, 널리고 널린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자기를 찾아갈 때 환영받는 일이 거의 없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까운 이가 성장한다는 것은 부담되고 심지어 두려운 일이다. 이제껏 맺었던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탓이다. 그럭저럭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 저쪽이 달라지면 나도 달라져야 하니까. 자기를 찾아 발버둥 치는 사춘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고,  상담을 통해 자기를 발견해 가는 아내의 성장이 못마땅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 폴이 왜곡된 기억을 치유해 나가자 두려워진 현재형 엄마들은 결국 비밀의 정원을 찾아내 쑥대밭을 만들고 만다. 정원을 잃은 마담 푸루스트는 자기처럼 오래되고 신비로운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분신과 같은 우크렐레를 들고 그 나무 아래 앉는다. 그리고 마담은 폴의 엄마처럼 죽음의 강 너머로 떠난다. 물론 폴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끊임없는 내적 순례와 외부의 구체적인 삶의 여적을 계속해야 할 우리 크리스천들은 먼저 과거의 아픈 여러 상처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쓸어 버림으로써 출애굽의 영성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라며 서문을 시작하는 마태오 린, 데니스 린 형제 신부님의 <기억의 치유>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기억의 치유에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상처들이 준 영향에 굴복하여 자기 중심적으로 생활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평화와 사랑이 우리 미래를 이꿀어 가도록 할 것인다. 기억을 따라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들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성령께 되돌려 놓는다면, 과거의 상처들은 더 이상 우리를 묶어 놓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지도해 나갈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발을 들여놓는 선택. 그런 선택 한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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