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나오라고,

가을 해가 떨어지기 전에는 나오라고

강이 목놓아 부른다. 못 이기는 척 나갔다.

망원초록길을 타고 강가에 서면 강이 묻는다.

"좌 할 것이냐? 우 할 것이냐?"

나는 좌 할란다.

오른쪽 성산대교 방향으로 잘 조성된 너른 잔디밭이 있고,

참 잘 해놨으니....

나는 왼쪽, 서강대교 쪽으로 가겠다.

 

 

 

 

좌 하길 잘했지.

잘했고 말고.

 

 

 

 

양화대교 아래를 통과하고

2호선 지하철 아래를 지나니 다시 강이 묻는다.

"쭉 갈래? 계단 타고 오를래?"

계단을 오르겠다.

계단을 올라 양화진 공원 앞에 서면 다시 갈림길이다.

왼쪽은 양화진 선교사 묘원, 오른쪽은 절두산 성지.

여기선 묻지 않아도 늘 오른쪽이다.

양화진 선교사 묘원은 번듯하고 세련되어 흠 잡을 곳이 잘 꾸며져 있으니

절두산 성지로 발길이 간다.

절두산 성지엔 뜬금없이 장독대가 있고,

나무와 화초에 촌스러운 이름표가 붙어 있고,

촌스러워 성스러운,

늘 발길을 잡아 끄는 매력이 있다.

 

 

 

 

양화진 선교사 묘원 vs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 성지 쪽으로 기우는 발걸음은

매사 세련되지 못한 내게 편하고 자연스런 선택이란 생각. 

그런데 그것만이 아닐지 모르겠다.

선교 vs 순교 

내가 믿는 바를 세상에 널리 알리겠노라는 다짐은 내게 가당치 않다.

내가 믿는 바를 목숨을 다해 믿는 그 믿음으로 착하게 잘 살고 싶다.

정말 그러고 싶다.

 

 

 

 

지난 여름 자주 가서 앉아 있던 큰 나무 아래 벤치이다.

기도초를 두는 곳 바로 옆인데

한 여름 대낮에도 활활 타고 있는 기도초가 늘 생경스러웠다.

굳이 기도초를 올리지 않아도 저 벤치에 앉으면 기도의 마음이 되었다.

저기 앉아 소설책을 읽어도 기도의 마음이 되었다.

가끔 누군가와 앉아 커피 마시며 조용조용 기도하듯 수다를 떨기도 했었다.

 

 

 

 

입시철이라서인지 초를 밝히고 기도하는 분들이 많았다.

웅성웅성 기도하는 분들 앞을 지나는데

아이 엄마들의 절절하고, 안타깝고, 세속적인 기도제목들이 느껴진다.

가슴이 뭉클하다.

아무 제목이든 그들의 기도에 내 영혼의 힘도 한 스푼 얹습니다. 주님.

외딴 구석에서

순례길을 걷는 복장으로 고개 숙인 분의 뒷모습 또한 뭉클하다.

 

 

주님, 당신의 뜻이 뭔지 모르지만

당신의 뜻이 모든 고통받는 자들을 향해 있다면

가난하고 촌스럽고 그러면서도 아는 것이라곤 세속적 욕망 밖에 없는,

그것이 다시 죄스러움으로 다가와 고개를 들 수 없는

무지한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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