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을 피력하기 위해 말이 필요 없는 인증서, 학위. 전공과 학위를 살짝 비켜나 있는 나를 설명하는 일이 늘 어렵다. 에니어그램 강의로 내면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자기인식 없는 신앙과 삶의 무의미를 넌지시 일깨우고, 연애 강의를 빙자하여 가장 큰 사랑과 내적 성장의 길을 안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듯 장황해진단 말이다. 이 모호한 정체성으로 늘 조금씩 불안하고, 나를 설명하는 말에 내가 먼저 피로감을 느끼며 귀찮고, 그러다 부끄럽다. 심리학과 신앙의 경계에 서서 이쪽 저쪽 모두를 취한다는 것이 양쪽에서 공격받을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운 마음도 있다. 그런데도 이 마음에 관한 공부, 강의를 놓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치유와 성숙, 자유를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하면서 가장 큰 혜택은 나 자신이다. 그리고 최고의 내담자이자 고객 중 하나가  내 동생이다. 아, 내담자이자 상담자 역할도 해주니 도반이라 하는 것이 낫겠다. 치유를 위한 자기인식은 먼저 스스로에게서 한 발 물러나는 일로 시작한다. 내적거리를 두고 나를 낯설게 바라보는 것. 에니어그램이 그 시작을 도와준다. 세상 누구도 아닌 나만의 독특한 인식과 이해방식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하며 어린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억을 떠올리고, 기억에 대한 해석을 다시 하는 것이 치유라고 늘 말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어린시절을 보낸 동생과의 대화는 큰 도움이 된다. 엄마 나이 마흔다섯에 나를 낳으셨고,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딱 들어도 너무 막막한 이 이야기에서 엄마가 마흔일곱에 낳은 동생의 존재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다. 유난히 듬직한 동생이 아버지 없이 자란 내게 의지처가 되었다. 동생에게 나는 세대 공감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늙은 엄마와 더불어 일정 정도 엄마 역할이었다. 돌아보면 그렇게 서로 아버지 자리, 엄마 자리를 채워주는 남매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동생이 세 아들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는 새로운 국면이었다. 아버지 역할에 대한 동생의 두려움과 죄책감을 들으며 내가 경험한 '아버지의 부재'와 아들인 동생이 경험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놀라웠다. 동생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아들의 마음은 내 상상력 밖이었다. 나 역시 엄마가 되고 현승이가 아빠와 맺는 관계를 지켜보니 더욱 그러하다. 좋은 아빠 되고 싶지만 자기 상처 주변을 맴돌며 자주 자책감에 빠지는 동생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책을 추천하고, 때로 눈물로 기도하며 동생 마음의 '아버지의 빈자리'를 새롭게 다루곤 한다.

 

어제 조카들 다니는 학교에서 아빠 캠프가 있었다는데 프로그램 중에 '아들에게 쓰는 아빠의 편지' 낭독 시간이 있었나 보다. 동생이 큰아들 수현에게 쓴 편지이다. 짧은 글이지만 여기 담기 긴 이야기를 안다. 쓰면서 울고 읽으면서 울었다는데 그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을 또한 안다. 동생의 치유가 또한 나의 치유이기도 하다. 가슴 아픈, 고마운 글이다.

 

 

샬롬아~
아빠가 왜 수현이를 샬롬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름, 그러니까 태명이 바로 ‘샬롬’이야. 샬롬은 헤브라이어로 ‘평화’라는 뜻인데,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랑 같은 단어야. 아빠가 수현이 태명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네가 솔로몬처럼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야. 그 이름 뜻대로 네 인생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랐던 거지.

그런데 얼마 전에 아빠가 네 행복을 깨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 몇 주 전 수현이가 학교에서 활동한 ‘우리 가족의 마음 표현하기’를 봤단다. 아빠를 동물로 비유한다면? ‘사자’, 날씨로 표현하면? ‘태풍’, 맛으로 표현하다면? ‘맵다’. 모두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더라. 그날 밤, 수현이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 혼이 날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더라.

샬롬아! 미안하다. 아빠가 혼을 내면서 너무 심하게 화를 내는 건 잘못 한 것 같다. 아빠 본심은 그게 아닌데, 그저 우리 수현이를 바르게 키우려고 그런 건데 너에게 상처를 준 것 같구나. 아빠가 다른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고 좋은 아저씨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정작 아들인 너에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생각이 든단다.

한편으로는 네가 쓴 걸 보고 안심이 되기도 하더라. 아빠가 무섭기도 하지만, ‘부드럽고’ ‘원래는 착해서 진달래’ 같고, 너희들을 ‘사랑해서 빨간색’ 같다는 내용을 보고, ‘아 그래도 우리 아들이 아빠 마음을 알아주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아빠 마음을 알아 줘서 고맙다.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아니? 아빠가 초등학교 4학년, 지금 네 나이 때였단다. 그때는 아버지가 없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었지. 할아버지는 살아계실 때에도 바쁘셔서 아빠와 시간을 보내신 적이 없단다. 여행을 갔던 추억도, 운동을 했던 적도 없어.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온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혼자서 터득했는데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안 계셨지. 수염이 자라고 나서 면도하는 법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어.

샬롬이가 태어나던 날, 왜 그런지 모르지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멈추지 않아 수건 한 장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단다.(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아빠는 그때 다짐했지. 우리 살롬이에게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목욕탕도 함께 가고,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같이 좋아해 주고, 면도하는 법도 알려 줄 거라고 말이야.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가? 윗집에 살던 아저씨가 술에 취해 우리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어. 그때 아빠는 무서워서 이불 속에 숨어 자는 척하고 있었단다. 그 이후로 ‘내 가족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결국 아빠는 이렇게 강한 사람이 되었지. 네가 감당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빠가 함께 해 주고 방패가 되어 줄게.

앞으로는 힘이 세고 강해서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든든한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2015년 11월 7일.

수현이의 샬롬과 행복을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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