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혼자 드리는 주일 예배였는데 나란히 함께 앉을 벗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본당사수를 했습니다. 좁고 옹색한 본당의 벽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나님 그분의 품을 떠올리고 그 근처에 가까이 가면 가슴 한 구석이 늘 띵하게 아픕니다.

예배의 자리에 가면 아픔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나란히 앉은 벗의 고통까지 내게로 와 모양을 바꾸어 냉소가 됩니다.

'하나님, 저 삐졌다구요.' 이렇게 예배가 시작됩니다.

마음이 나긋나긋해지지가 않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부르는 찬송.

'다찬양 하여라 전능왕 창조의 주께 내 영아 주찬양 평강과 구원의 주님....'

찬송마저 저와 주님 사이를 우주만큼이나 갈라놓는군요.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 당신 제겐 너무 먼 거 아시죠?

평강과 구원의 하나님이라니요! 지금 제 옆의 이 아이를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시죠?


어느 새 나는  2절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아 주님의 뜻 안에서 네 소원 다 이루리라'

소원을 다 이루어주신다고요? 냉소의 클라이막스에서 눈물이 터져버렸습니다.

언제요? 언제 성도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실 건데요?

눈물이 터진 이상 본심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고통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화와 구원이 옵니까.


연일 들려오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아픔에

마음이 주저앉고 또 주저앉습니다.

기도했더니 어쩌면 그렇게 딱딱 인도하셨다, 감사하니 감사한 일만 생기더라.

빠르고 강한 기도응답을 간증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아요.

저 자신을 더욱 거지같이 느끼게 할 뿐이에요.

흥하고 잘 되고, 더욱 편해지는 이들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느끼는 내 친구들은,

나는,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확신에 차 흔들림 없이 당신을 전하는 이들 앞에서 더욱 작아지는 제 마음은요.

그리고 저는 일렁이는 슬픔과 분노없이 뉴스를 볼 수 없어요. 

제 안팎은 왜 이렇죠? 하나님.  


월요일 아침 [메시지]로 읽는 열왕기하의 마지막은 더욱 캄캄합니다.

유다는 멸망하고 맙니다.

솔로몬 때에 그 찬란했던 영광이 무너지는데 이보다 더 처참할 순 없군요.

그렇군요. 열왕기서의 마지막 장을 읽고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짓밟혀 무너진 성전의 폐허 속에서 희망의 단서 하나라도 찾아볼 요량이었는지

페이지를 앞으로 넘겨 유진 피터슨의 열왕기서 서문을 찬찬히 읽어봅니다.


열왕기서를 읽는 유익은 실로 엄청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통치는 힘 있고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된다고 생각했던 억측이 무너지면서, 그분의 주권을 한층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게 된다. 온갖 유토피아적 계획이나 망상들의 현혹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에 따라, 아무리 문제 많고 죄 많은 지도자들(왕들)이 우리 사회와 교회를 농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무효화될 수는 없으며, 그 어떤 현실과 상황 속에서도 (은밀히) 행사되는 하나님의 주권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다'니! 지금 제게 가당치도 않지만, 단서를 찾았습니다. 단서를 찾았기에 키보드 두드릴 힘이 나서 이 아침, 타닥타닥 몇 자 남기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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