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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정

버릴 게 없다

larinari 2016. 9. 20. 10:39



자타가 공인하는 필기의 여왕이다. 정직하게 돌아보니 '여왕'이 다 뭐야. 여왕 그 이상, 거의 필기 중독에 가깝다. 이번 학기에는 두 개의 강의를 듣고 있는데(어디서? 무림에서) 노트북은 머스트해브아이템이다. 강의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받아 쳐와서는 제목 달고, 글자 색깔 바꿔서 강조하고, 나중에 글이나 강의에 써먹을 것 따로 카피해서 모으는 게 일이다. 강박적으로 필기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여름 초입에 들었던 어느 강의에서는 뒤에 앉아셨던 수녀님이 몇 주를 지켜보다 어렵게 말씀하셨다. '저..... 정말 죄송한데..... 필기하시는 거 이메일로 좀 주실 수 없어요. 나도 너무 너무 좋아서 다 받아적고 싶은데 그게 어려워요' 얼씨구나 좋다고 보내드렸다. (내 중독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노트 드려요~)


이번 주에는 유아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구몬 선생님들에게 강의하는 일이 있다. 강의 주제는 '수업 중 아이들의 돌발행동에 대처하는 방법' 캬캬. 유아들이 수업 중에 하는 돌발행동이 너무 많단다. 문제행동에 대처하는 방법을 강의해달라고 하였다. (유아들의 행동 중 돌발행동이 아닌 것이 어딨어요?그 맛에 유아교사 하는 건데.ㅎㅎㅎㅎ) 아무튼 이 강의 준비하려고 행동주의에 대해 정리하다 대학원 시절 노트를 꺼내 보았다. 완전 셀프감탄! 감동! 이렇게 깔끔하고 정성스러운 노트정리라니. (노출본능 발동. 사진 찍어, 찍어, 찍어. 만방에 알리지 않을 수 없따!) 강의 시간에는 연습장에 거의 속기수준으로 받아 적고 집에 와서 다시 저렇게 노트에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그 자체가 복습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렇게 늘 우수한 성적이었군요) 대학원 시절 응용행동분석, 즉 행동주의에 관한 한 달달 외우고 섭렵했었다. 내가 배운 음악치료가 행동주의를 이론적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내 몸에 착착 붙는 이론이었다.


인간을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행동주의의 인간관이다. 가장 고전적인 실험이 파블로프의 개 실험 아닌가. (개실험! ㅎㅎ)  쉽게 말하면 원하는 행동을 했을 때 우쭈쭈쭈로 강화시키고, 원치 않는 행동을 감소시키는 전략을 찾는 것이다. 대학원 시절이나 음악치료사 초년병 시절, 회의 없이 잘 활용하였다. 장애 비장애 할 것 없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아주 잘 먹히는 상담 전략이기도 하다. 헌데, 임상이 쌓여갈수록 기본적인 철학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자극과 행동, 그 이상의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마음에 커지면서 행동주의식 접근의 음악치료가 재미 없어진 것이 사실이다. 기술로 쓸지언정 철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세 살 어린 아이라도, 중한 장애를 가진 아이라도 나와 다를 것 없는 무엇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경험 자체로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학습된 것이고 후속 자극의 체계적인 조작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게 되었다. 음악치료에 대한 애정이 식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 강의요청을 받고 시간을 두고 숙고하면서 어린 아이들에게는 행동주의식 강화, 즉각적인 강화가 필요하고 효과적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대학원 시절 치료 혹독하리만큼  훈련받은 것이 지금 내게 얼마나 큰 자산이 되고 있는가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아이들의 일상 자체인 돌발행동에 즉각적으로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도 역시 그 시절 실습 때마다 받은 수퍼바이저의 지적질 덕분이다. 강의에서 해야할 얘기가 이것이구나 싶어 그 시절 노트를 꺼냈다가 '추억은 방울방울' 놀이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필기 중독자인 나를 다시 발견하고, 정말 하고싶은 공부를 만나서 난생 처음 공부의 맛을 알았던 순간들, 내 인생 가장 잊지 못할 대학원 합격을 확인해주던 전화 통화. '이것이 사는 것의 전부일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정말 좋아하는 일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그 간절함을 포기하지 않을 때 전에 없던 학과가 생기고, 상상하지 못했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을 확인했던 시절.


그러고 보니 버릴 것이 없다. 깨알같이 필기하고 외우고 발표하고 치료에 적용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것이라 여겼던 것들. 저급한 인간관이라 하찮게 여겼던 행동주의 심리학이 새롭게 다가오고 당장 이번 주 강의의 뼈대를 잡아주니 말이다. 그나저나 추억은 방울방울 놀이에 블로그 놀이까지, 오전을 다 보냈으니 강의 준비는 언제 하나? 에잇, 괜찮다. 노는 시간이 꼭 버리는 시간은 아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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