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에니어그램 세미나 2단계를 마쳤고, 출간될 책의 서문을 쓰고 표지가 확정되었으니 만세! 시험 끝난 현승이와 비슷한 무게의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산책을 나섰다. 율동공원 가는 길에 참새 방앗간이 하나 있어서 말이다. 요한성당의 서점에 쑥 들어갔다. 칼 라너(Karl Rahner)의 소책자가 쉽게 숨겨진 보물처럼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왔다. 제목은 일상, 아니고 日常. 신학단상 아니고 神學斷想. 책 표지작업에 짧고 굵게 끙끙 골몰하고 난 터이다. 책표지 이렇게 쉬운 걸! 아무튼 보물은 보물이다. 오래 들여다 볼 틈도 없이 문 닫을 시간이라 나가라고 하니 사는 수 밖에. (여보, 충동구매 맞는데 소책자라서 싸. 진짜야 ) 표지만 봐도 얼마나 지루할지 가늠이 되는 저 소책자를 들고 걷는데 어울리지 않게 발걸음이 쾌활해졌다. 딱 마음에 드는 벤치를 찾아 자리를 잡고 천천히 끝까지 다 읽고 일어났다. 이렇게 누리고 떠나보내기에 아까운 좋은 날씨, 좋은 시간이다. 요한성당을 지나 율동공원까지의 산책길,  자꾸 다니다보면 합정동의 마포 강변과 절두산 성지에 버금가는 우정이 쌓일 기세이다.

       



분당에는 키 큰 나무들이 정말 많은데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게 된다.  하늘과 나무를 동시에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혀끝으로 이 가사가 맴돈다. '나는 기도할 때 나무가 된다. 그늘 되어 쉬게 하는 나무가 된다.' 요한 성당에서 나와 큰길을 건너 버스정류장쯤에서 되돌아 바라보니 나무와 하늘과 십자가. 심쿵 아니, 심찢하는 묘한 조화이다. 전에는 키 큰 나무를 보면 시인과 촌장의 노래가 떠올랐었다. '저 언덕을 넘어 푸른 강가에 젊은 나무 한 그루 있어. 메마른 날이 오래여도 뿌리가 깊어 아무런 걱정 없는 나무. 해마다 봄이 되면 어여쁜 꽃피워 좋은 나라의 소식처럼 향기를 날려 그 그늘 아래 노는 아이들에게 그 눈물없는 나라 비밀을 말해주는 나무' 이 노래 속 나무는 내게 천상 '김종필 나무'이다. 문득 생각해보니 이제 그는 더는 젊은 나무가 아니다. '마음만은 젊다고!' 우겨도 소용없다. 결혼하기 한참 전 연애를 걸 때부터 이 노래는 김종필 노래였건만. 그때 꽂혔던 가사는 '저 언덕 넘어 젊은 나무'였건만. 지금은 어쩌자고 '그 눈물 없는 나라 비밀을 말(해야만)하는' 중 늙은 목사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어쩌자고! 




앉은 자리에서 소책자 한 권 뚝딱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멀리 보이는 요한성당 뾰족지붕이 보여 카메라를 들었다. 그 순간 쏜살같이 새 한 마리가 지나가며 촬영권 안에 들어왔다. 새는 존스토트 목사님께는 선생님일지 모르나-'새 우리들의 선생님'이란 책이 있다.- 내게는 천상의 메시지이다. 언젠가 영혼의 어두운 터널을 헤매고 있을 때 침묵피정에 참석했을 때였다. 며칠 소리 없는 울음을 많이 울었고 집에 오는 날 아침 산책길이었다. 새 한 마리가 아주 가까이서, 자리를 옮겨 앉으며 짹짹 무슨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못 알아들었지만 알아들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이 정도로 알아들었고 내 마음은 그 새와 같이 기뻤다. 그때 이후로 새는 내게 천상의 멜로디이다. 정색하고 섰는 칼 라너의 '日常'처럼 많은 경우 일상 속 그분의 태도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막다른 길로 몰아대셔서 미추어버리겠는 때도 있다. 다행히 가끔 새를 날리신다. 엘리야에게 새를 통해 먹이를 보내신 것처럼 내게도 가끔 뭘 보내신다. 

   



아이들로 인해 고마운 날들이다. 4월 검정고시를 마친 채윤이는 요즘 알바 중이다. 김밥집 하시는 집사님 가게에 낙하산으로 취직이 되었다. 어릴 적에 그~러어케 메뉴판 만들고, 허공에다 대고 주문받고, 서빙을 하고, 영수증을 찍어대곤 하더니. 채윤이를 보내놓고 세 식구가 자꾸 킬킬거리게 된다. 꿈에서 그리던 그 일을 하면서 떠나셨던 그분이 다시 오실지 모른다. 겉으론 어리바리 무덤덤한 알바생이지만 혼잣말로 어떤 상상놀이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낄낄. 퇴근하면서 집사님이 만들어주신 삼각김밥과 김밥을 가져오곤 하는데. 현승이랑 둘이 좋아라 하며 먹다 또 킬킬거린다. '채윤 엄마,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김밥 가져와서 고마워. 혹시 오다가 호랑이가 김밥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해도 절대 뺏기지 말고 지켜와야 해' 어제는 알바 마치고 바로 교회로 가 금요기도회 반주까지 하고 온 장한 채윤이였다. 하루는 알바하고 와서 이런다. '엄마, 나는 진짜 감동했어. H 집사님은 집사님이 하시는 일을 정말 좋아하셔. 그리고 집사님이 **언니(집사님 딸) 다섯 살 때 처음 도시락 싸시던 그 마음으로 김밥 만드신대. 내가 보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애' 재즈 피아니스트, 디즈니 영화 음악감독, 뮤지컬 배우의 꿈을 또 흘러가고 '김밥집 사장님'이 장래희망 될 기세이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험을 봐 본 현승이. 물론 제대로 된 시험공부도 난생 처음이다. 영어 수학 열심히 공부해서 첫시험부터 100점 맞을까 걱정을 많이 하더니만. 불행히도 걱정대로 되지는 않았다. 열심히 공부한 후에 만족할 결과를 얻는 맛, 잠을 이겨가며 공부한 후에 날아갈 듯한 마음으로 자전가 타는 맛을 알게 되어 세상 사는 다른 맛을 알게 되었다. '나 공부해야 해서 못 놀아'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중딩. 너무 늦지 않게 공부라는 걸 한 번 해주시니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다. 산책을 마치고 오는 길에 라일락 꽃 잔치를 만났다. 고3 봄에 야자를 마치고 집에 오던 길, 캄캄한 길에서 어디선가 날리는 라일락 향기에 마음이 간질거렸던 기억이 있다. 라일락 꽃향기는 언제 어디서든 나를 고3, 성내동 골목길로 데려간다. 분당에 살지만 마음은 천당에도 갔다가, 지옥에도 내려갔다 오곤 한다. 고3이 신실이가 되기도 했다, 다섯 살 채윤이의 엄마가 되기도 한다. 이사 첫날의 각인이 무섭다. 실내 온도 23인데 나는 자꾸 춥다고 느낀다. 아침마다 한 번씩 손가락 들었다 내렸다 보일러를 켜고픈 유혹에 빠진다. 외출할 때마다 무겁다 싶게 옷을 입게 된다. 건물 현관만 나가도 꽃이 흐드러지고 초록 나무들이 따뜻한 바람에 흔들리는데 말이다.


분당의 일상, 또는 日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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