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사랑> 리뷰이다. 정성들여 길게 쓸 생각은(자신이) 없다. 영화보다는 관람 후 뒷풀이(사실 앞풀이 뒷풀이 뒷뒷풀이)의 여운이 진했던 날이라 영화와의 만남은 실제 만남에 묻힐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좋은데 언니들 만나서 더 좋네'로 끝났다. 관람 후 일주일, <덩케르그>를 봤는데 관람 후 한두 시간은 스크린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바닷속에 잠긴 듯했고, 전투기를 조종하느라 창공을 헤집고 다니는 듯했다. 저녁 먹고 앉아서 (아들) 현승이가 '엄마, 덩케르그 영화 좋아?' 하는데 '그냥 그래' 하는 대답이 나왔다. '아까는 나도 보라며?' '어, 처음에는 뭔가 강렬했는데 지금은 엄마가 그 영화를 봤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나. 오히려 지난 주에 본 영화 <내 사랑>이 자꾸 떠올라. 그 영화가 좋았나봐. 엄마한텐 이런 게 좋은 영화야'라 말하고 보니 그제야 <내 사랑>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도 리뷰 쓸 에너지는 없었다. 교회 수련회며 강의 일정도 많았고, 읽어달라는 책이 유난히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그런데 못내 이렇게 어설픈 끄적임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홍보문구 때문이다. [한 여름 밤의 사랑 이야기, 에단 호크*샐리 호킨스] '아닌데, 로맨스 영화 아닌데'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극장과 뉴스 밖에 안 뜨는 페북 뉴스피드에서 '한 여름 밤의 사랑, 한 여름 밤의 사랑......' 자꾸 보니 신경질이 났다. '아니라고오! 로맨스 영화 아니라고오!' 하다 결국 블로그 글쓰기를 클릭했다. 고아 출신의 괴팍한 외톨이 남자와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신체적 핸디캡을 가진 천재 예술가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뭐, 그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한 발 양보하여 결과론적 로맨스 영화라고 하자. 


모드의 얇고 틀어진 다리, 그 다리를 삐칠삐칠 걷는 뒷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가정부 일자리를 찾아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로 에버릿의 작은 집을 찾아가고, 거절 당하고 돌아서 삐걱삑걱 또 걷는다. 그 성치 않은 다리가 편히 쉴 곳이 있었으면 싶은데 내내 그러질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마지막 에버릿이 했던 말처럼 나는 내내 모드를 '부족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감독의 낚시질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고 가며 동시에 모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열어 나가고 궁극적으로 에버릿을 다른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그녀의 부족해 보이는 걸음이다. 그러니까 에버릿이(우리가, 내가) '부족함'이라고 보는 모드의 부족함이 그녀 자신에게는 치명적 핸디캡(부족함)이 아닌 것이다. 영화 초반부 고모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사는 중에 클럽에 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장면은 엄지 척이다. 손에 손을 잡은 커플들 사이에서 어눌한 몸 그대로, 흥에 겨워 흔들거리는 슬프도록 당당한 모습이라니. 파트너가 없거나 자유롭게 춤출 수 없는 몸 같은 것들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 클럽의 밤이다.


고모의 핍박, 친오빠와 고모의 파렴치한 계략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발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모드. 시키는대로 하면 편안히 앉아 밥 얻어 먹을 수 있는 고모집을 떠나 가정부로 들어가는 모드. 그런 모드는 (아무리 딱해 보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모드'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내 사랑'이 아니라 '나 사랑' 모드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처절한 이야기,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해피앤딩인 듯 새드앤딩인 듯 해피앤딩 같은 먹먹한 결말의 이야기이다. 서서히 모드를 대하는 모드가 바뀌는 에버릿의 모드는 모드 자신의 자기 사랑 모드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에 굴하지 않고 느릿느릿 가정부 일을 하며, 인간적인 모욕에 굴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자존심을 지켜내는 모드의 '나 사랑'이 결국 에버릿을 구원하는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사랑'이라는 기반을 가지지 않은 에버릿에게 사랑의 실재, 사랑의 가능성, 사랑의 희망 같은 것을 전염시키는 것. 





'자기사랑'이라는 기반 없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정희진 선생은 '나를 경유하지 않은 타자의 시선은 없다'라고 한다. 같은 얘기이다. 나를 수용하는 만큼 타자 수용이 가능한 것이고,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타인을 품어 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부족하고, 누가 온전한 사람인가. 영화에서 죽음에 임박한 고모가 말한다. '네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잘 되었구나(잘 살고 있구나? 행복하구나? 온전하구나?)' 젊은 시절, 모드가 낳은 아이를 모드의 동의없이 입양시켜 버린, 모드의 존재 자체를 부족함으로 규정했던 고모의 말이라니! 


'나는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 했을까' 에버릿의 회한 가득한 고백에 나의 마음도 담는다. 모드는 예쁜 구두를 좋아한다. 예쁜 구두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한다. 틀어진 다리, 볼품 없는 걸음 걸이에 '예쁜 구두'를 욕망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눈길로 바라봤던 것을 고백한다. 보이는 것의 '번듯함'에 매인 나로서는 시각적 부족함 너머를 보는 것이 어렵고 부끄러운 숙제이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사랑하기, 엄마하기, 신앙하기) 동어반복을 하며 강의하고 떠들고 다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자주 실패한다. '보이는 번듯함'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모드의 걸음걸이가 자꾸 떠오르는 이유이다. 싫고 거북하여 자꾸 그리로 향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다고며, 엄지 척이라며 추켜세웠지만 한편으론 거북하고 싫었던 장면. 삐뚜룸한 몸으로 흔들어대던 클럽에 간 모드를 자세히, 오래 바라볼까. 예쁘게 보일 때까지? 그러다보면 '너도 그렇다. 부족하지만 너도 예쁘다' 내게 말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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