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제목을 스토리에 맞게 바르게 고쳐 쓰시오. (정답 : 기억을 틀리다)


원제 <The Sense of an Ending>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우리말 제목이 되었다. '혹시 내게도 저런 치명적인 기억의 오류가 있진 않을까?' 막 더듬어보게 하는 영화이다. 극장을 나서는(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관객(독자)의 머릿속에 '기억'이란 두 글자가 포인트 40으로 새겨질 것을 예상한 원저자가 더 멀리 던지는 화두일지도 모른다. 'The Sense of an Ending'은. "바보 관객들아, 기억 얘기가 아니야!" 기억의 왜곡으로 인한 충격적 반전으로 사람 놀래켜 놓고선 '기억'이 아니라 '예감'의 문제라고? 아무튼 나는 원제목(동명 소설)과 번역된 제목 둘 다 마음에 든다. 한참 전에 예고편과 함께 무엇보다 제목에 끌려 목록에 담아 둔 영화이다. 결국 영화 속에선 예감은 있었으나 기억은 틀렸다. 예감은 그러니까 결말에 대한 예고는 영화 곳곳에(원작인 소설에선 더더욱 정교하게) 흩뿌려져 있다. 다만 그것을 읽어낼 감각이 없어서 결말에 관해 잘못 짚은 것이다. '잘못 짚은'의 주어는 주인공이고 '나'이며 또한 우리이다. 말하자면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인생에서 제가 무엇을 뿌렸는지 모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짚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독(毒)을 뿌려놓고 선(善)을 뿌렸다고 착각할 수 있음이다. 착각점이 정확히 (기억의) 왜곡점이다.


친할 뿐 아니라 선망하던 친구 아드리안이 헤어진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구 아드리안이 직접 편지로 알려온다. 주인공은 '그러든지 말든지'라는 식의 엽서를 보냈다고 기억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영화의 반전이다. 지질하게 비아냥거리고 저주를 퍼붓는 내용을 주절주절 써서 답장을 보낸 것이다. 노년이 된 토니. 베로니카 엄마의 유언장이 등장하며 자연스레 수십 년 전 애정사를 복기하게 된다. 물론 추억 속 그녀 베로니카를 만나게 된다. 추억(기억)을 더듬고, 사실(나 아닌 상대의 기억)을 확인한다. 알고 보니 편지에 담은 저주처럼 친구 아드리안은 여친의 엄마와 섹스를 하고, 그리하여 여친의 동생을 낳았고, 그 때문인지 어쩐지 친구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주인공은 토니는 평생 쿨하게 보낸 엽서의 기억만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틀린 기억을 가진 주인공은 그 일과 무관하게 무난하게 살아왔고, 그가 잊은 기억을 사실(현실)로 살아야 했던 여자 친구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추측된다). 고교시절 전학생 아드리안이 수업 시간에 했던 인상 깊은 말들이 고스란히 영화의 명대사로 남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패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죠." 


영화든 현실이든, 영화같은 현실이든 갈등은 뿌린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튀우는 싹이다. 잘 짜여진 화에서는 반전이 있고 다소 충격적인 볼 만한 이야기가 되지만, 현실의 왜곡된 기억과 파괴적인 결과는 흔하디 흔하며 고통이다. 불편한 관계 풀자고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화는 얼마나 흔한가.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걸 그렇게 이해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아니야, 너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정말 그랬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무슨 소리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어린 시절 상처받은 기억으로 오래 아파하다 '미안하다' 한 마디 듣고 싶어 용기를 내는 딸들을 안다.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어린 애한테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어? 어저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어? 과연 사과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미안하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어. 그땐 엄마도 어렸단다. 정말 미안해. 엄마를 용서해주겠니? 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얼마나 될 것인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제 와서 트집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서, 사랑 밖에 준 것이 없다. 더 큰 상처로 끝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차라리 내 기억을 수정하는 것이 그 사람과 화해하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주인공 토니는 어쩌다 그런 (너무도 단순하여) 치명적인 왜곡된 기억을 가지게 되는가? 이 질문 끝에 영화 <윈터 슬립>이 생각났다. 착하고, 이웃에게 해 끼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면에서 두 주인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윈터슬립의 주인공 아이딘이 가진 것이 많아서인지 더 견고한 자기의(義)의 성을 쌓은 것 같기도. 토니는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사람, 충실한 사람이다. 임신한 (싱글맘) 딸의 출산교실에 함께 가주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불평 없이 하는 사람, 이혼했을 망정 전부인과도 그럭저럭 잘 지낸다. 그런데 딸과 부인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지금 내 앞에서 내게 일어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흔하디 흔한 자기 몰입의 사람이다. 고등학생, 대학생 때도 그랬을 것이다. 올바르고 친절하고 다소 소심하게 살지만 나무랄 것 없는 삶이기에 더욱 반성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바운더리 안에서 착하고 충실하지만 아침마다 만나는 집배원에게 보통의 사무적인 친절 그 이상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다. 영화 마지막에 집배원을 향해 말 한 마디 건네게 되는 변화는 전부인에게 사과하는 장면보다 더 큰 회심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의 독백처럼 그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상처를 기피하며 그것을 생존능력이라 부르는 사람'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승자도 패자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라 오직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억 위에 색을 칠하고, 덧칠하며 생존을 유지할 뿐이다. 


내적 성장을 위한 에니어그램 여정을 이끌며 '기억의 치유' 없이 성장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기억이 사실이서가 아니다. 기억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문제이다. 해석의 틀에 갇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찾아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틀, 어떤 경험도 묽은 밀가루 반죽으로 해체시켜 부어버리는 자기만의 붕어빵 틀을 발견해야 하는 문제이다. '기억도 그렇습니다. 옛날 일이라는 것은 벌써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라는 우치다 타츠루의 통찰에 동의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그야말로 개정판으로 다시 써가는 일이다. 토니가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확인하고 베로니카에게, 전 부인에게 진심의 사과를 건넬 수 있었을 때, 그의 일상이 달라졌다. 저주의 편지를 썼던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의 기억으로 살아온 존재 자체에 대한 회한일 것이다. 참된 자기성찰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수용으로 향함을 안다. 내 붕어빵 틀이 이토록 터무니없이 확고하다면 당신이 찍어내는 기억의 붕어빵 역시 견고한 고유함이리라. 내가 모르는 아픔과 기쁨이 담긴 화석 같은 것이리라. 당신도 나처럼 상처를 피하기 위해 한 조각 기억을 붙들고 그 위에 색칠하고 덧칠하며 살고 있구나. 황혼을 사는 토니 일상의 작은 변화, 집배원에게 건네는 커피 한 잔이 내게는 참 좋았다. 그 변화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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