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몸살과 함께 끙끙 앓으면서 쓴 글.

감기가 와서 앓은 것인지,

글의 무게 때문에 앓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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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혁명> - 클리포드 윌리엄스 지음, 최규택 옮김, 그루터기 하우스



오버가 필요한 찬양 인도자

애써 좀 무덤덤해지려 노력하는 편인데도 나는 ‘찬양 인도자’에 대한 취향이 좀 까칠한 편이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기 때문에 직업상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고 배치하는 방식에 대해서 까다로울 수 있다고 스스로 진단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걸려서 넘어가지 못하는 문제는 단지 음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적으로 찬양 인도자나 싱어들의 ‘표정’ 이다. 아마도 찬양하며 받는 은혜가 충만하다보면 자연스레 나오는 감격에 넘치는 표정을 감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찬양 인도자의 멘트나 표정이 ‘오버다’ 싶을 만큼 심하게 홀리하거나 가사와 상관없이 한결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회중석에 앉아서 찬양을 할 때는 오히려 낫다. 내 맘 하나 잘 추슬러서 찬양에 집중하면 되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회중석에 앉아서 인도자와 싱어를 씹어대던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설 때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찬양의 가사에 마음을 쏟자’라고 다잡아먹지만 역시나 회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결국 어느 새 표,정.관.리.에 들어간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의 난감함이란.

게다가 찬양팀의 윗분이나 교회의 어르신들이 ‘아놔~ 앞에 서 있는 싱어들 좀 웃으라고. 표정 좀 밝게 하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찬양을 좀 하란 말이지. 그래야 보는 사람도 찬양할 맛이 나는 거 아닌가?’ 이러실 때 정말 난감하다. 개그맨도 아닌데 마음의 상태와는 상관없는 표정을 지으란 말인가? 무대에 선 희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연기를 보여 달라는 것인가?


고상한 행동, 불순한 동기

교회 주일학교 게시판에 초등부 아이가 글을 하나 올린 걸 보았다. 내용이라곤 별로 없는 짧은 글이었다. 그 내용도 없는 글을 올린 이유를 밝혀 놓은 것이 재미있다. ‘제가 이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요… 1번 달란트 받고 싶어서, 2번 칭찬받고 싶어서…예요’ 아이니까 가능한 자기표현이 아닐까 싶다. 보다 현명한(?) 방법이라면 달란트(이걸 모으면 나중에 큰 선물과 바꾸게 된다)와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 아니었겠나? 이렇게 바로 오토매틱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의 처세와는 달리 아이들의 꼼수는 치밀하지가 못하다.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어른인 내게는 어떻게나 빠른 시간에 어떻게나 교묘한 방식으로 자동화되어있는지… 나 역시 칭찬 받고 싶어서, 내가 하는 훌륭한 생각을 드러내고 싶어서, 이런 멋진 나를 사람들이 좀 부러워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에 ‘바울을 괴롭힐 요량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해야하는 그 살벌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괴롭히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 사람들은 뭐라 하며 복음을 전했을까?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살 길입니다. 제가 이렇게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1번 바울보다 더 유능한 전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2번 바울의 속을 최대한 뒤집어 놓기 위해서 입니다’ 라 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기에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는 않았을까?


분열된 마음의 통합혁명

내 속에서 결코 드러내고 싶지도, 나 스스로 인식하고 싶지도 않은 나의 불순한 동기들이 숨어 있는 방을 발견했다. 그 방에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안부를 물어보는 선한 행동과 짝을 이루어 ‘예수님을 닮은 자’처럼 보이고 싶은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었고, 찬양을 하면서 짓는 은혜에 취한 표정을 통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은혜를 끼치도록 해야겠다는 발칙한 동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방을 발견하고 영 마음이 찝찝해 어쩔 줄을 모를 때 내 손에 들려진 책이 『마음의 혁명』이다. 그렇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숨은 이기적인 동기를 인식하고 내 마음의 분열성을 인식하는 일은 ‘혁명’같은 경험이다. 감기 정도의 자각증상을 느끼며 藥이 되려니 하고 펼쳐든 이 책은 내게 ‘암’을 선고했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았다.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면 됐지 뭐 숨은 동기 까지 이 잡듯 뒤져야 하는 거냐고 물으니 바로 그거란다. 선한 행동으로 끼치는 유익과 그로 인해 오는 반대급부에 중독이 되어 있는 내 영혼의 엑스레이 사진을 내미는 것이다. 영원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영원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으로 살다가는 영혼이 죽는다며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처방전을 내주었다. 정말 나쁜 사람은 누구인가? 나쁜 뜻을 가지고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 아니다. 나쁜 뜻을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헌데 그 뜻이 딱히 나쁘다기보다 불.순.하.다.면 그것은 날이 갈수록 나를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의 혁명’을 통과하며 나는 결심했다. 분열된 마음, 다중성 속에 빠진 마음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빠져나와 ‘마음의 투명함’을 위해 매일 매일 내 속의 숨을 동기를 들춰보겠다고 말이다. 마음의 단일성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도 사람도 내 이기적인 동기를 위해 도구로 삼지 않겠다는 결심과 다르지 않다. 찬양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칭찬일 뿐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은혜 충만한지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설령 그것을 드러냄으로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겠다는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을 돌아보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지 ‘내가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찬양하는 찬양 인도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찬송가 204장)’ 찬양인도를 위해 앞에 설 때마다 끊임없이 이 찬양을 되뇌인다. 찬양 인도자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그들을 바라보며 내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수많은 자기중심적 단편 영화들의 필름을 잘라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저 찬양 시간에 투명한 마음으로 서서 찬양하는 것으로 인해 ‘자아’도 간 곳 없고, 영향력을 끼치고픈 ‘사람들’도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록 말이다.

찬양 시간에 찬양만을 목적으로 진실하게 찬양하는 인도자, 삶에서 사람과 사랑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여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통합된 마음과 자아로 이슬처럼 맑고 투명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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