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이 되는 해였다. 100 살을 살지 못할 텐데 '반'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생의 의미'를 붙들고 싶은 탓일 터이다. 쉰이라는 나이를 거의 한 번도 인식하고 살지 않았다. 연말이 되어 송년회란 이름으로 모여 돌아보니 이제야 나이가 보인다. 그 어느 해보다 좋은 시간을 보냈다, 말하기에는 외적인 조건은 좋지 않았지만, 좋았던 것이 사실이다. 요란하지 않거나 의례적이지 않은 송년모임들이 인증해준다.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곳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상처 받고 찔려 피흘리는 곳도 사람이 있는 곳이라 한다면, 그것도 인정!이다. 


아, 올해 내게 의미 있던 곳은, 다른 말로 하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목회자에게, 그렇다 그 누구도 아닌 목회자에 의한 성폭행 피해자들과 글쓰기로 만난 곳이다. 피해자, 또는 생존자라는 말로 당신에게 어떤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무엇이 됐든 틀렸다! 당신이 틀리기 전에 내가 먼저 틀렸었다. 첫 모임에 가면서 누구보다 긴장했다. 상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한 모든 것이 다 틀렸고,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빛을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빛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쓸 수는 없다. 8주 씩 두 번의 글쓰기 자조모임을 하면서 많이 울었고,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다. 


1,2기 함께 모여 송년회를 했다. 낭독회로 모였다. 낭독회 다녀와 페이스북에 남긴 소회를 다시 올린다.


글쓰기로 만난 사이였는데 이상하게 목소리와 말투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매 시간 써 온 글을 소리 내어 읽었고, 사려 깊은 수다(소리)가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글쓰기 자조모임 송년파티 낭독회가 있었다. 두어 시간 앉아서 눈물 찔끔거리고 웃었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참 좋다. 어쩌면 사람의 목소리가 저렇게 다른 빛과 결을 가지고 있을까. 눈을 감고 들으면 더 신비롭다.


며칠 약한 두통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겠다. 반가운 얼굴이 들어올 때 살짝 심장이 들썩거린 순간인지, 마주앉은 이의 눈물에 공명하던 순간인지, 와하하하 웃던 순간인지. 이 모임에 앉아 있으면 모두가 나 같다. 피해와 상처도 내 것 같고, 그것을 돕는 일에 치인 활동가의 피곤함도 내 것인 듯하고, 나는 당연히 나다. 오늘 낭독회에서 들은 글의 일부이다.


자조 모임. 막연하게 거부감이 들었고, 마음 깊은 곳에선 겁이 났다. 나는 자조 모임 초기에 자주 세상에서 공포를 느낀다고 썼다. 나는 내가 내밀하게 감각하고 오래도록 사유한 것들을 모래 속 자갈 골라내듯 투박하게 다루는 세상이, 실로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슬펐다’, ‘분노했다처럼 내 언어들도 단순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면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그러면, 판단 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조 모임을 통한 글쓰기는, 내가 방치한 기억들에 세세한언어를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뭉개놓았던 기억들을 끌어올려서 가만히 펼쳐놓고 조금씩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를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내 감정에 집중한 채로 내 기억을 쓰다듬고 매만지면서, 나는 무엇이 고통이었고 왜 고통스러웠는지를 직시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가해자의 그루밍에 길들여진 자아가 영혼에 가하는 자해. 그것이 내 부끄러움의 발로라는 것을 자조 모임을 통해 배웠다. 그 배움 덕에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최초의 기억따윈 없었다. 그 기억이야말로 가장 견고한 환상이었다. 내 고통은 모두 그냥 그 자체로 진실이었다. 나는 자조 모임이 끝나고 고통을 느끼기를 주저한 내 자신을 꼭 껴안고 어를 수 있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불가능성은 유한한 인간의 영원한 콤플렉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연결을 믿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일이 나를 들여다보듯 투명하게 타인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됐다.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공간이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믿는다. 고통이 언어가 되어 쏟아져 나올 때 최대한의 경청으로, 제 몸의 변화까지 겪어가며 있어 준 사람들 때문에. 나는 사실 지구의 밑동을 파고 들어가면, 이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사실 이 분이 써오는 모든 글이 좋았다. 이미 자기 소설을 출간한 분이다.  헌데 이 글이 유난히 큰 소리로 들리는 이유가 있다. 글쓰기 모임 초반에 신형철의 글을 인용하여 ‘타자의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글을 써오신 적이 있다. 그때의 이해불가능성은 건널 수 없는 강, 건널 필요도 없는 강 같았다. 냉소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지구 밑동을 파고 들어가면, 모두 연결되어 있다’니! 연결을 믿는다니! 아, 확실히 이 말에서 내 두통이 사라졌다. 이 문장을 듣는 순간 뇌가 확 열리면서 뉴런이 마구 밖으로 뻗어나가 둘러앉은 모든 이들의 뉴런에 접속되는 느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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