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6일 주일. 엄마는 이 땅에서 마지막 공예배에 참석했다. 늘 그렇듯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예배당 입구 계단 앞에 바짝 주차했을 것이다. 대기하던 집사님들이 우르르 몰려와 조수석의 엄마 몸을 조심스레 빼냈을 것이다. 아슬아슬, 느리고 느린 걸음으로 예배당 앞자리까지 걷는 시간,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설렜을까. "아이고, 이제 도착했네" 그 가깝고도 먼 길을 걸어 털썩 주저앉으며, 안도의 숨과 기도로 "주여~"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자리, 그 시간을 위해 일주일을 살고, 그 한 시간의 힘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것이 엄마의 마지막 나날이었다. 아니 평생의 나날이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아침마다 의례처럼 묻는 엄마의 질문은 "주일까지 며칠 남았니?"라는 뜻이다. 엄마의 지남력은 주일 11시를 기준으로 유지되었다. 어두워진 눈과 귀에도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 만큼은 유지했던 비결은 예배를 향하는 정신이었다.

 

그 갈망, 그 절실함은  엄마 곁에 있는 누구라도 중풍병 환자의 친구들이 되게 하였다. 어떻게 해서든 주일 예배 자리에 엄마를 모셔다 놓아야 할 것 같다. 그 시간만큼은 지켜드리고 싶게 만들어 버린다. 한때 목사였던 동생이 목회하던 시절 못지않은 성실함과 사명감으로 주일에 엄마 전용 기사 노릇을 했다. 마지막 예배를 드린 그다음 주, 그러니까 2월 2일 주일에는 코로나 19라는 낯선 바이러스가 뉴스에 등장한 때이다. 전염력이나 위력을 인식하기 전이었지만, 동생은 조용히 주일을 그냥 지나갔다. 엄마에게 "주일이지만 교회에 못 간다"는 말씀을 드려 상실감을 안겨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요일 감각이 둔해져서 다행이기도 했다. 엄마도 모르게 빼먹은 주일 다음 날, 손주에게 물어보셨단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오늘요? 월...... 아...... 아니 오늘이요? 음....... 목요일이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하얀 거짓말이다. 주일 예배 드리지 못할 것으로 실망하실까 걱정하는, 할머니를 위한 배려였다. 사춘기가 한창인 아이이다. 누구를 배려하거나 타인의 감정을 보살필 시기는 아닌데. 이 정도이다. 곁에 있는 누구라도 침상을 들어 옮기고 지붕 뚫게 만드는 위력이다. 예배를 향한 엄마의 열정은 지붕 뚫고 하이킥이다.

 

뜬금없지만 예배와 엄마와 코로나 19를 생각하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 생각이 났다. 신라의 바닷가에 가난하고 부지런한 부부, 연오랑과 세오녀가 살고 있었다. 고기 잡고 옷감 짜는 솜씨가 뛰어난 이 부부가 어느 날 바위를 타고 왜나라로 건너가게 되었다. 바위를 타고 왔으니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 여겨 왕으로 추대된다. 두 사람은 어지러운 나라를 잘 다스려 평온하게 한다. 한편 고국의 신라는 해와 달이 사라지고 곳곳에 여우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며 도둑이 들끓었다. 이유를 알아보던 왕은 해와 달의 정기를 가진 연오랑과 세오녀가 왜나라로 떠났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다시 돌아올 것을 부탁했지만 둘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을 신라에 보냈고, 그것으로 제사를 지내니 해와 달이 다시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는 것이다.

 

돌아가신 엄마 신격화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의 해와 달이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코로나 19로 바뀐 세상, 교회, 특히 예배를 우리 엄마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일성수를 위해 온갖 불이익을 감수했던 엄마가, 예배 한 번 빠지면 지옥 가냐는 온갖 조롱 속에서도 "내가 죽어도 성전이 가서 죽는다"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던 엄마가 '자발적 예배 안 모이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문득 나는 연오랑과 세오녀처럼 엄마가 어떤 것을 가지고 떠나버린 것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어떤 예배, 이제껏 엄마가(우리가) 목숨처럼 지켰던 어떤 예배 말이다. 아니면 이런 세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코로나로 인한 예배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직전 사고를 당하고, 병원으로 격리되어 떠난 것은 아닐까. 비약이 심하다는 것 알지만 우리 엄마에게 예배는 그런 정도였다. 요양병원에 모시고 면회가 불가능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엄마, 보고 싶은데, 전염병 때문에 면회가 안 돼"라는 말을 몇 번을 했던가. 90 평생 엄마의 경험을 끌어와도 전염병으로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이 나를 버렸나, 오해하지 않을까 더 마음을 졸였었다. 하물며 "엄마, 전염병 때문에 교회에서 예배를 안 드려. 모여서 기도회 하고 그러다 전염병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한대" 설득할 수 있을까. 엄마의 시대는 이전의 한 시대의 예배와 함께 저물었다. 

 

수년 전 어느 주일, 예배 마치고 곧장 우리 집으로 모셔와야 했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를 오르고 내리는 것은 엄마에겐 한라산 등반 같은 일이다. 세월아 네월아 계단 오를 생각을 하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게다가 엄마는 치렁치렁한 치마 정장을 쫙 빼고 있었다. 그 복장을 하고 계단 앞에 섰는 엄마를 보니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치마를 잡아 매보기도, 속바지 안에 집어 넣어보기도 했지만 단출해지질 않았다. "아이고, 아이고, 헤에, 휴우........" 한 계단에 한 번씩 뱉는 숨찬 소리에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네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냐, 그러다 걸려 넘어지면 어쩌려고 하느냐' 한 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엄마가 먼저 치고 나왔다. "권사님들이 바지 입고 댕기라고들 혔샀는디…… 노인네가 근천스럽게(거추장스럽게) 치마 입는 것이....... 주책이라고 헐 깨미(할까 봐)부끄러. 그려도....... 나는 평생이 주일날 바지 입고 예배드린 적이 읎어서...... 헥헥...... 하나님 앞이 가는디...... 오뜨케 그르케 헐 수가 옶어. 나는 죄송혀서....... 히유우...... 미안허다. 내가 오래 살어서 이르케 자식들 고생시키고......." 계단을 오르는 기나긴 시간, '히유~우, 히유~우, 중얼중얼' 하는 소리에 스르르 마음이 풀렸다. 그리고 치마 입은 여자 엄마의 뒷모습이 예뻐 보였다. 엄마만의 예전, 예배에 대한 평생의 고집이 곱게 느껴졌다. 어쩌면 '난생 처음으로!'  

 

예배, 주일, 주일성수에 대한 엄마의 집착과 고집이 얼마나 나를 옥죄었던가. 우리 엄마 잔소리의 8할은 예배, 주일성수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살어. 지발 주일 성수 혀라. 주일날 돈 쓰지 마라. 너 가정예배드리니? 애들 기도로 키워야 혀. 기도 밲이는 옶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잔소리를 나이 50이 넘도록 들었다. 어릴 적엔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이젠 감각도 없어졌다. 그저 엄마 있는 곳에 깔리는 BGM이라고 생각한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나 역시 젊은 날 '주일성수'에 관해 엄마 못지않은 고집스러운 행각을 벌였다. 고등학교 때는 주일이 낀 수학여행을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포기했다. 직장 생활하면서는 주일에 있는 행사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썼다. 두 선택 다 '주일성수'를 위해서였다. "용은 용을 낳고, 범은 범을 낳는 법이여." 엄마 말대로 나는 엄마가 낳은 딸이다. 보고 배운 대로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다르다고 확신했다. 엄마의 주일성수는 종교중독이며 강박증이었지만 나의 그것은 지조 있는 신앙심이었다. 무참히 깨진 것은 중년의 위기와 함께 찾아온 영적 사춘기를 맞으면서였다. 

 

반골 기질이 강한 나는 어려서부터 일단 반발하고 봤다. 특히 엄마에게, 엄마의 모든 것에. 그러면서도 엄마의 삶과 신앙의 방식을 고스란히 내 것으로 가져왔으니 비극이다. 신앙생활, 특히 예배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머리로는 반발하며 몸으로는 따르는 것이다. 분열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와 엄마의 교회가 내게 가르친 것은 사랑 아닌 두려움이었다. 수학여행을 포기한 고1 때의 선택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었고, 그 왜곡된 행동의 결과는 바리새적 자아도취였다. 분열로 인한 고통을 오롯이 마주할 수 없었다. 내가 아니라 엄마, 엄마를 비롯한 부패한 교회의 구조와 권력, 맹목적 신앙, 보수적인 신학이 문제라고 싸잡아 비판하였다. 전형적인 그림자 투사이다. 그 분열의 시간을 지내며 징글징글한 엄마, 엄마의 교회를 뛰쳐나왔다. (물론 보여주는 신앙의 형식은 흔들림 없이 유지했다.) 말 그대로 사춘기 아이 가출하듯 엄마를 온전히 미워하며 떠나왔다. 10여 년의 방황이었다. 유년의 천진난만함에서 떠나 격정의 사춘기를 보낸 후에 여드름과 함께 눈빛의 독기가 사라지며 정신이 돌아오듯, 내게도 새로운 시간이 왔다. 떠나와 거리 두니 엄마가 새로 보이고, 엄마가 다르게 보이는 만큼 내가 제대로 보였다. 엄마에게 투사하던 내 어둠이 보였다. 그즈음, 엄마의 치렁치렁 치마가 예쁘게 보인 것이다. 

 

엄마가 예뻐 보이니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젊은 날의 나와도 조금씩 화해가 되었다. 목회자의 거룩함으로 포장된 욕망, 교인들의 천진함을 가장한 탐욕이 구축한 교회가 이젠 분노보다 아픔으로 다가왔다. 엄마가 나이고, 엄마의 교회가 나였음을 깨달으니 참회의 눈물이 나왔다. 그 여정을 담은 고백이 졸저 『신앙 사춘기』이다. 그 책을 마무리할 즈음 노래를 하나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육성을 담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평생 엄마가 가장 많이 부른 노래, 손주들에게 수백, 수천 번 불러줬던 노래, 눈도 귀도 기억력도 흐려졌을 때 4절까지 외워 부른 찬송이 "예수 사랑하심은"이다. 내가 가사를 썼고, 남편이 곡을 붙여 주었고, 딸이 편곡과 반주를 해주었다. 마지막 간주 부분은 찬송가의 후렴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대목이다. 언젠가 나를 떠나서 자기 신앙, 자기 하나님을 만나야 할 딸이 마음을 담아 연주했다. 엄마의 마지막 생신 축하 자리에서 불렀고, 마지막 장례 예배에서 불렀다. 노래의 앞뒤에 엄마의 찬송과 찬송과 시편 23편 암송하는 육성을 담아 녹음했다. 제목은 "떠나서 다다른 사랑"이다. 

 

떠나서 다다른 사랑
                                     
                           작사 정신실 / 작곡 김종필

(엄마 노래)
예수 사랑허심은 성경이서 배웠네
우리덜은 약허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승경이 쓰셨네 아멘

(딸의 노래)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엄마의 눈물 엄마의 걱정 그건 엄마의 기도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엄마의 노래 엄마의 한숨 그건 엄마의 사랑
그 눈물이 나에게 더욱더 큰 슬픔이 되었고
그 걱정은 내게 와 더욱더 옥죄는 두려움 됐네
눈물 어린 찬송 걱정 담긴 기도
나 떠났네 나 버렸네 부끄런 그 사랑

(간주)

날 사랑하심 음음 날 사랑하심 음음
예수 사랑 그 사랑에 나 닿고 말았네

 

엄마 곁을 맴돌면서 미워하던 만큼 그대로 따라 하던 나, 그 엄마의 방문을 보란 듯이 쾅 닫고 나와 어두운 숲을 헤매던 내가 보인다. 박차고 떠나와 방황하다 결국 다다른 곳은 몸을 입고 오신 그 예수의 사랑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나를 휘어잡지 못한 약한 엄마에게 감사한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어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할 수 없었던 엄마가 고맙다. 평생 잔소리를 해댔지만 나의 결정적인 선택을 막지 않(못하)고, 그저 다시 기도하는 자리로 갔던 유약한 강직함에 감사한다. 떠날 수 있게 해 준, 떠나되 온전히 떠날 수 있게 해준 것은 엄마의 부족함이었다. 맹목적인 집착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예배, 욕망의 투사일 뿐이라고 비난했던 기도, 흠결 많았던 엄마의 신앙과 사랑을 더듬어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사랑에 다시 닿았다. 온전히 떠나고 끝까지 미워할 수 있어 새로운 땅에 닿았다. 

 

신앙 사춘기 숲을 빠져나왔나 싶지만 내 영혼의 냉기는 가시지 않았다. 온전히 사라지지 않은 분노는 여전히 냉소와 우울로 얼굴을 바꾸어 찾아오곤 한다. 현실에서 드려야 하는 예배는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메말라 있다. 예배, 엄마가 아닌 내가 한때 그렇게 사모하고 사랑했던 예배이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현실의 예배에 가 앉으면 냉소나 분노 대신 슬픔이 밀려온다. 엄마가 이 땅을 떠날 즈음 연오랑과 세오녀가 떠나고 해와 달이 사라지듯, 이전의 예배가 사라졌다. "내가 죽드라도 성전이 가서 기도하다 죽어야겄다." 하시던 엄마의 예배,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듯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더는 예배당으로 모이지 않아야 한다. 죽더라도, 다 죽어가는 몸을 끌고라도 예배당으로 가겠다던 엄마를 조롱하던 내게 온 징벌일까. 교회와 신앙에 대한 지식으로 머리만 커져 냉소와 비판으로 이전 것은 모두 허물려고 하는 우리에게 말이다. "그래, 한 번 흔들어 줄까? 제대로 무너져 볼래?" 그분의 경고의 손짓일까?

 

요즘 주일 예배 입례송으로 부르는 찬송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는 곡이다. 엄마 떠나고 두어 달이 지나 오프라인 주일 예배가 재개되었다. "이 곳을 지나소서 이 곳을 만지소서 내 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이 대목을 부르다 목이 막히고 연이어 가슴이 턱 막혔다. 예배 내내 '내 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이 가사가 무한반복으로 재생되었다. 그다음 주일, 또 그 다음 주일. 다시 이 찬양을 부르는 시간 막혔던 목에서 서서히 소리가 나오고, 가슴에 온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주 한 주 지나며 나도 모르게 조금씩 더워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내 목소리에 내가 놀란다. "이 곳을 덮으소서 이 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냉기와 슬픔, 외로움에 죽어가던 예배, 무너졌던 소망이 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일일까? 온라인 예배가 일깨운 현상일까?

 

언제 어디서 떨어진 불씨인지 깨달았다. 엄마의 마지막 사흘. 면회조차 되지 않는 요양병원 중환자실의 엄마와 휴대폰으로 불렀던 찬송이다. 하루 한 번 동생에게만 허락된 면회 시간에 통화로 연결되어 피를 토하듯 찬송을 불렀다. 코로나로 막히고, 주렁주렁 달린 콧줄과 호흡기로 막혀 단절된 엄마 영혼에 닿을 유일한 끈이었다. "예수 사랑하심은 성경에서 배웠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찬송 소리에 달싹이는 입술로 화답했고, 주르르 흘리는 눈물로 마음을 전해주었다. 울음 반 찬송 반 제어되지 않는 울부짖음이 새어 나갈까, 드레스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노래했다. 슬픔과 안타까움에 압도되어 미친 듯이 불렀다. 돌이켜보면, 그 노래들이 내 마음에 불을 댕겼다. 성가대 지휘자로, 찬양 인도자로, 음악 치료사로 살아오며 불렀던 어떤 노래보다 내 영혼의 바닥까지 내려가 모든 것을 끌어올려 부른 찬송들이다. 엄마의 의식을 조금이라도 붙들기 위해, 엄마를 위해 부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엄마에게 불러준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구나! 엄마 영혼이 내 영혼을 향해 불러준 마지막 노래였다.

 

20대 불렀던 찬양과 예배가 다시 떠오른다. '거룩한 땅에 우리 여기에 서 있네 주님 계신 이 곳 거룩한 땅이라' 예배를 위해 성가대석으로 입장하는 순간 늘 이 대목이 마음에 울렸다. 교회의 어두운 그늘과 부조리들을 모르지 않았다. 청년부 신입생 교육을 위해 읽던 책을 좌파적이라 읽지 못하게 하는 목사님이 있었고, 그에 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목사 사람과 상관없이 예배 앞에 선 나는 가슴이 떨렸었다. 언젠가부터 서서히 죽어가던 예배가 여기까지 왔다. 예배가 죽는다는 것, 경외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거룩한 땅에 서 있다는 의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사람에 대한 경외로 드러난다. 경외가 사라진 곳에 혐오, 배제, 편 가르기가 난무한다. 그런 세상, 그런 사람을 향해 혀를 끌끌 찼지만 냉소, 혐오, 배제는 예배가 죽은 내 가슴이 만든 세상임을 인정한다. 다시 지펴진 이 불을 꺼트리지 말라는 것이 엄마가 삶으로 남긴 유언이다. "야야,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살어" 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른다. 엄마 덕분에 지옥불에 던질 하나님 두려워하며 살았다고, 벌 받을 것이 두려워 하나님 눈치 보다, 사람들 눈치 보며 왜곡된 신앙을 살았다고. 두려움이란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거룩한 것 앞에서의 경외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입을 닫고 머리를 조아리는 두려움이다. 엄마의 인생,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더듬으며 나는 이제 입을 닫으려고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그곳에서 왕으로 사는 삶이 있기에 다시 신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다만 세오녀가 짜서 보낸 비단 한 필로 신라의 해와 달은 다시 빛을 찾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전의 예배는 지나갔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나는 이제 엄마가 남긴 비단 한 필을 붙들고 예배의 삶을 살려고 한다. 냉소 대신 경외로 예배하려 한다. 하나님과 사람을 경외함으로 사랑하려 한다.  떠나고 버렸던 교회, 그 부끄러운 교회에 머물며 부끄럼 당하고 모욕당하고, 복수당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며 나의 예배를 지키려 한다.좋은 나라에서, 아무 슬픔 없는 그곳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 함께 예배할 때까지다. 엄마가 남긴 비단 한 필이 여기 있으니. "야야,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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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8.11 14:17

    비밀댓글입니다

  2. 나그네 2020.08.29 11:15

    "야야..하나님 두려운줄 알고 살어... 이 음성이 저에게도 들리는 듯합니다..
    어머님 같이 저를 이끌어주실 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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