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이가 이유식으로 두유를 먹던 시절이었다. 밥은 물론 뭐든지 잘 먹는 아가였지만, 출근하는 엄마와 안녕하고는 할아버지 댁에 가면 치르는 의식이 있었다. '푸빵'이라 불리는 인형용 유아차에 누워(물론 크기가 작으니 꼭 끼어 누워 유아차가 터질 지경)서 비디오로 '벅스 라이프'를 틀고 '쮸쮸'라 불리는 두유를 우유병에 넣어 빠는 것이었다. "쮸쮸 한 통을 코끼리 비스께트 먹는 순식간에 치워버려" 어머님 말씀이다. 꽉 끼는 코끼리처럼 유아차에 한 병 뚝뚝하고는 바로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새롭게 무너지는 장면이다. 아침마다 엄마랑 헤어지는 것 싫은데, 울어도 떼써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받아들이는... 아니 받아들이기는! 좌절하고 만 아기의 텅 빈 마음이다. 

 

마지막 남은 두유 얘기인데. 그렇듯 두유는 그저 이유식이 아니라 엄마를 대신하는 정서적 대용물이었다. 한 박스 씩 사다두고 먹었는데 다 먹고 한두 개 남으면 애가 불안해서 어쩌질 못한다고 부모님이 보고하셨다. "하부지, 쮸쮸 사러 노넙(농협) 가자죠. 하부지, 노넙 가요." 그리고 할아버지 손잡고 노넙에서 쮸쮸 한 박스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에는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고 하셨다. 그 말씀 전해주시던 아버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돌아보면 너무나 귀엽고, 한편 가슴 어디가 새롭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때 채윤일 보면서 젊은 시절 담배 피우는 친구들이 마지막 남은 담배 한 대를 향한 지나친 집착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걸 두고 놀리고 장난도 치곤 했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 

 

찌개로 찜으로 볶음밥 재료로, 정말 소중한 묵은김치가 끝났다. 한 포기가 덜렁 남아 있었는데, 아끼고 아끼며 몇 잎씩 떼서 먹다가 마지막으로 털어서 오리고기 넣고 김치볶음을 했다. 김치볶음, 김치찜, 김치찌개에 열광하는 사람은 현승이다. 집밥을 가장 충실히 먹는 구성원이기도 하고. 며칠에 한 번씩은 김치 들어간 음식을 복용해 주어야 하는 몸이기도 하다. 닭으로 하는 김치찜을 개발하여 '닭치찜' 작명을 한 것도 현승이다. "현승아, 오늘 김치찌개?" "오오, 좋아! 그러잖아도 갑자기 김치찌개 생각이 났었어." 

 

마지막 김치를 자르는데 옆에 있던 현승이가 "엄마, 정말 이게 끝이야? 어떡하지?" 제 딴에 반은 농담인데, 한 개 남은 두유를 확인하고 불안해 하는 아기 채윤이가 떠올랐다. "어, 이거 마지막 잎새야. 너의 행복한 김치찌개 식사는 끝이야. 낄낄." 놀리기 시작했더니 진짜 좀 불안해한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더니 묘책이 나왔다. "엄마, 제천 갔다 와. 선 이모한테 가서 김치 좀 얻어 와. 선 이모 만나러 안 가?" (선 이모야, 제천 갈게,ㅎㅎ)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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