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부터 <시니어 매일성경>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란 큰 제목을 걸고 중년 이후의 삶과 영성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요. 무엇이든 써야하는데 무엇을 쓸지, 쓰고 싶은지 모를 때면 꼭 혜성 같이 나타나셔서 "새로운 글을 써보라" 옆구리 찔러주시고 멍석 깔아주시는 iami님 덕입니다. 엄마 돌아가신 이후 죽음, 상실, 애도에 천착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을 준비할 때라는 생각을 하는 중 제안을 해주셔서 도전해봅니다. 중년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일단 손을 놓았고요. 생의 오후인 중년 이야기를 건너 뛰어 저녁놀이 물드는 시간, 황혼에 머물러 보려고요. 쓰려고 마음 먹으니 살아보지 않은 날을 언감생심 논할 수 있나 싶어요. 감 놔라 배 놔라, 편하게 가르치고 행세하고 싶어서 '부캐(최선생님)'를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럼 한 번 써보겠습니다.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

 

 

내 나이 쉰셋,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이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고, 배울 것은 많은 세상이다. 새로운 일을 자주 시도하는 편이지만 좀처럼 설레는 일은 없다. 일은 물론이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새로운 사람 만나봐야 거기서 거기니 조금 서글프다. 헌데 오늘 예상치 못한 만남이 낯선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솜털 피부에 말랑한 언어를 가진, 호기심 가득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아니다. 여든을 넘긴 어르신! 눈꺼풀부터 턱밑 피부까지 중력의 법칙에 온전히 순응하는 근육이며, 검버섯이 핀 얼굴의 최 선생님이다. 한 학기 강의를 들었고, 종강하던 날엔 수강생들 다함께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전에 출간하신 책 개정판을 내시는데 도움을 드리기로 했고, 그 일로 오늘 처음 개인적으로 뵙게 된 것이다. 교정작업을 도와드리겠다고 한 것은 선생님과 만남의 끈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인 것을 알지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자원하여 결정했다. 뭔가 끌림이 있었고, 그저 그 끌림에 따른 것인데 결론적으로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좋은 노인을 만나고 싶다

 

여든 넘기신 선생님을 뵙고 와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어쩐지 안 계셔도 조금 죄송하지만. 50대가 되고 갱년기를 통과하며 나는 늙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 좋은 노년을 준비하고 싶다. 그러자니 닮고 싶은 노인들을 찾아보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조금 좌절이 된다. “저런 노인은 되지 말아야지반면교사는 정말 흔하디 흔한데, 닮고 싶은 분은 없다. 또래 친구들과의 대화는 갱년기 증상으로 시작하여 서서히 찾아오는 노화의 증상들을 경유한 후 종착지는 나이 드신 부모님 이야기이다. 부모님의 고집으로 속 터지는 이야기, 가여워서 더욱 답답한 이야기. “우리는 그렇게 늙지 말자!”로 대화가 끝나지만, 나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 그런 노인이 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노인을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요즘은 노인이 눈에 들어온다. 학창시절에는 길을 가거나 버스 안에서 그렇게 또래 남학생만 보이더니, 청년 때는 그 나이대 남자만 보였다. 임신해서 다닐 때는 임산부만 눈에 띄어, 세상에 임산부가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아이 키울 때는 당연히 유아차 밀고 가는 엄마와 그 안의 아기가 어떤 차보다 크게 보였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에서도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내 나이대 남자 사람, 여자 사람이 아니라 노인들이 자꾸 보인다. 길에서 마주치는 불특정 노인은 물론이고, 뉴스에 등장하는 노인과 노인집단, 무엇보다 주변 친밀한 관계 안에서도 유독 노인을 바라보고 관찰하게 된다. 연세 드신 부모님 걱정과 겹쳐진 탓도 있지만, 나름대로 누구를 찾는 것이다. 좋은 노인을 만나고 싶다. 이것은 내 노년을 상상하며 미리 가불해 가져온 두려움과 닿아 있다.

 

"오늘 밥은 내가 살게요."

 

 강의에서 최 선생님을 뵙고 깜짝 놀랐다. 강사가 은퇴 교수님이신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연세 드신 분일 줄은 몰랐다. 어쩐지 실망스럽기도 했다. 느릿한 말투나 걸음걸이가 불안해 보였고, 강의 계획도 엉성했다. 모처럼 마음 먹고 시간과 돈을 투자한 건데, 성의 없는 강사를 만난 것 아닌가 싶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아, 엉성한 계획이나마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뭘 그렇게 잘 잊으셨다. 다음 시간에 나눠주겠노라 하셨던 자료는 까맣게 잊기 일쑤. 질문 하나에 답하시다 강의 주제를 벗어나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렇다. 강의가 강의 흐름같았다. 지적인 구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내게는 정말 불편한 방식이었다. 강의 계획에 따라 어떤 책을 읽어가면 전혀 다른 책 얘기를 하셨다. 그런데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강의 흐름이 편해졌다. 듣는 내 태도도 달라졌다. 노트북 앞에 놓고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는 필기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귀로 듣고 손으로 바로 받아쳐서 강의를 한글파일로 만드는 기계라는 평을 들을 정도이다. 최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점점 기계 작동이 느슨해졌다. 어쩌다 보면 키보드에 올려놓은 손이 스르르 멈춰 서 있기 일쑤. 강의 후반에 가서는 제목만 쳐놓고 아예 손을 내리고 있었다.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저 흘러가게 되었다고나 할까.

 

필기할 내용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차라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워 담고 싶은 마음으로 필기하던 손을 내려놓았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저 마음으로 들어 젖어 들고, 물드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모르겠다. 맞다, 선생님의 강의는 악착같이 필기하여 어디 써먹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용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것도 아니며,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의가 강물처럼 나를 스쳐 가도록 두는 게 좋았다. 들을 땐 좋았는데 돌아서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필기한 것도 없으니 손에 남는 것도 없는 강의가 종강이라니 아쉬웠다. 다른 사람들도 내 마음과 같았는지, 선생님 모시고 식사로 인사 나누자고 했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가 오가고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며 최 선생님께서 오늘 밥은 내가 살게요.”라고 하셨다. 가당키나 한가. 여기저기서 아닙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요, 요란스럽더니 누군가 발 빠른 사람이 나가 계산을 해버렸다.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뒤쪽에서 선생님과 함께 섰다가 혼잣말처럼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 사람들, 노인 배려 없네. 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밥 사는 거밖에 없는데. 그걸 빼앗네.” 바람처럼 지나가는 말의 가벼움에 놀랐다. 말씀의 내용도 그렇고. 여태 15주를 가르쳐주셨는데,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밥 사는 일밖에 없다고?

 

드물게 만난 호감 노인

 

그 말씀이 마음에 콕 와서 박혔다. 무슨 말씀이지? 그냥 하시는 말씀인가? 노인이지만 80대라는 연세가 무색한 분 아닌가. 아직 가르칠 게 있는 분, 할 수 있는 게 없으시다니. 진정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까? 혼잣말처럼 하셨으니 누구 들으라고 예의상 하신 말씀 같지는 않다. 한 학기 동안 들었던 물 흐르듯 하는 강의는 다 빠져나가고 그 한 문장이 남은 듯하다. 어쩐지 그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카페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일부러 선생님 옆자리에 앉았다. 강의 들을 때와는 다른 새로운 호기심으로 선생님을 관찰했다. 호감 노인, 드물게 만난 호감 노인이었다. 내가 호감과 비호감을 구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가까이 다가가 앉고 싶은 사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은 호감. 저 멀리 나타나기만 해도 뒷걸음질 쳐지고, 되도록 피해가고 싶은 사람 비호감이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니 다가가 말 건네고 싶은 노인을 만난 건 거의 처음이다. 강의 때의 매력은 교수님으로서의 매력이지 한 인간, 한 노인은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 책 개정판 작업 얘기가 나왔고,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덥석 이 호감 노인을 붙들었다.

 

원고 받으러 간다는 명목으로 선생님 댁을 찾았다. 유난히 긴장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몇 주 전, 그 카페에서의 내 판단이 과연 옳았을까? 일을 도와드리는 문제가 아니라, 좋은 노인을 만났다는 판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만나 실망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게 걱정이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노인을 배려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식사비 계산하시도록 기꺼이 양보해드렸다. 일단 점수를 땄다. 하지만 실은 정말 점수를 딴 건지, 아닌지 잠시 확신이 흔들렸다. 지난 종강 식사 때처럼 얼른 나가서 계산하는 게 어르신 대접 아닐까. 예의 없다고 생각하시면 어떡하지? 라고 잠시 머릿속에 쓰던 소설이 사라진 것이, 식당을 나와 걷는데 어르신과 걷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파랗고 하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적당히 부는 바람에 취해서 감탄하느라. “선생님, 하늘 구름 바람은 아주 그냥 잘 어울리는 삼합이에요.” 했더니 하하 웃으셨다. 말도 참 재밌게 한다며 삼합, 삼합하며 웃으셨다.

 

하늘 구름 바람 삼합과 함께 선생님의 웃음에 무장해제 되었다. 선생님 댁 현관에 들어설 때는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사무실과 주거공간이 알맞게 분리된 넓은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시야가 뻥 뚫린 경관의 상담실이 있고 복도를 통과하면 거실이다. 거실이야말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는 탁 트인 하늘을 마주한다. 상담심리학 교수로 은퇴하신 선생님은 간간이 상담 일을 하시고, 마음에 관한 강의도 하신다. 혼자 사시는 넓은 집이 내담자를 받아들이는 선생님의 마음 같아 열린 공간 같이 느껴졌다. 용건인 선생님 책 얘기는 시작도 못하고 내 얘기를 털어놓아 버렸다. 묻지도 않으셨는데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선생님, 조금 오글거리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저는 제 나름 인생의 중요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저런 몸과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노년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거든요. 죄송해요, 선생님.

 

      (정색하시며) 뭐가요? 뭐가 죄송해요?

 

      (당황) 아, 선생님 앞에서 제가 노년이 가깝다느니 이런 말씀을 드려서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 앞이 어때서? 내가 늙은이라서? 정 선생 얘길 하는 거잖아요. 나는 내가 먹을 만큼 나이를 먹었고, 정 선생도 나이 먹는다는 얘긴데 그게 뭐? 노년이 몹쓸 시절도 아니고. 하하. 어려워하지 말아요. 하고 싶은 얘기 편하게 해요.

 

      실은 선생님, 저희 종강 식사 자리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이 남아 어쩐지 말씀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왜 식사 사려고 하셨잖아요. 노인이 되면 밥 사는 일 밖에 할 게 없는데... 하신 말씀을 들었어요. 저희에게 융(Carl Jung) 심리학을 가르쳐 주셨고, 여전히 상담도 하고 계시잖아요.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신데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 싶었고요. 그 말씀이 신선하게 들렸어요. 아까 제가 노년이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던 것은 좋은 노년의 삶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구요, 그러기 위해서 준비할 것이 있다면 준비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데 배울 곳이 없는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닮고 싶은 노년을 만나고 싶은데... 네, 뭐 그러던 중 선생님 말씀이 아주 크게 들렸어요. 밥 사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

 

      하하, 그 말이 정 선생에게 화두(話頭)가 되었구만. 내가 본의 아니게 공안(公案)을 던진 셈이고, 참구(參究)하던 정 선생을 오늘 우리집에까지 끌어들였네. 노인네가 어쩌다 흘린 말에 제대로 걸려들었어. 그나저나 나는 정 선생 나이 때 그런 생각 못했는데 어쩌다 그리 멀리 내다보는 고민을 해요.

 

그때 어디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 어디서 찬양이? 선생님의 휴대폰 벨 소리였다. , 그럼 선생님도 크리스천이신가. 그랬다. 이건 더 의외였다. 한 학기 만나면서 선생님이 종교가 있으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 종교를 가지셨다면 불교에 가까우실 분이었다. 조금 전에도 화두, 공안, 참구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의외였지만 선생님은 권사님이셨다. 말씀으로는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하셨다. 더욱 마음이 편해져 내 얘기를 늘어놓았다.

 

노인이 할 일은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

 

      선생님, 저는 이제 말로만 듣던 갱년기 증상을 겪는데요. 노안이 오고, 오십견에서 시작하여 몸 여기저기가 망가지면서 좀 많이 놀랐어요. 대부분의 증상 앞에는 ‘퇴행성’이 붙더라고요.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고치는 병이 아니라고 들렸거든요. 오십견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더라고요. 오십견이 낫는다 해도 노화는 진행될 것이고,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받아들이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하고요. 또래 친구들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이런 거거든요. 결론은 탄수화물을 끊고, 좋은 생각을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자!예요. 신앙이 있는 친구들은 천국 소망으로 훈훈하게 마무리하려 하기도 하죠. 그런데 어쩐지 저는 그럴수록 더욱 답답한 거예요. 젊을 때는 의지를 발동하고, 열정을 쏟아부으면 될 것 같은 희망이 있었죠. 실제로 되기도 했고요. 오십견 온 팔을 부여잡고 있으면 더는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리고 또 친구들 대화의 또 다른 주제는 ‘노년의 부모님’이거든요. 40년 한결같이 같은 문제로,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시는 부모님. 알코올 중독, 분노중독 아버지와 종교중독 어머니의 간극, 건강염려증에 애정결핍으로 늘 새로운 병원을 찾아 모셔야 하는 어머니도 계시고요. 늘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어머니에게 수십 수백 번 합리적 설명을 해야 하거나, 참다 참다 화를 내고 죄책감이 휩싸이는 일상 같은 것들이요. (이 지점에서 선생님의 표정에 살짝 먹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눈치챘으나, 발동 걸린 말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친구들 20년 후에는 자기 엄마와 똑같아지겠구나! 실은 이 친구들도 만날 때마다 하는 얘기가 똑같거든요.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오빠도 책임을 감당하시라고 해,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 아예 전화를 받지 말어. 쏟아지는 조언과 충고도 비슷해요. 이래서 소용없고, 저래서 소용없어. 되돌아오는 반응도 똑같고요. 뫼비우스의 띠 같아요. 그리고 헤어지며 하는 말은 늘 ‘야야, 우리는 정말 잘 늙자’예요. 그런데 저는 정말 잘 늙기는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만 드네요.

 

      (엄마 미소 지으시며) 틀린 말이 없네. 맞아요. 갈수록 어디 아프냐고 묻는 것보다 안 아픈데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빨라요. 나도 노인네지만 노인이 되어 고착된 생각, 특히 신앙 같은 것들은 변화나 성장이 거의 불가능해요. 나부터도 이렇게 늙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저 조금 민망하고 오글거리지만, 선생님 뵈면서 닮고 싶은 어르신을 제대로 처음 만났다 싶고요. 그래서 책 작업이든 무엇이든 도와드리면서 배우고 싶어요.

 

      하하, 사람 잘못 봤는데. 나 고집쟁이 노인네야. 우리 아들한테 물어봐요. 융 심리학에서 말하잖아.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나한테서 발견한 좋은 모습이 있다면 그건 선생님 안에 있는 것이에요. 무엇보다 좋은 노년을 꿈꾸는 마음을 잘 품고 지금처럼 배우고자 하면 정 선생이 그런 노인 될 거예요. 그렇게 되세요. 나는 아니에요.

 

      네, 선생님 그러면요, 이건 좀 답해주세요. ‘밥 사는 일밖에 할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어떻게,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이세요?

 

      꿈보다 해몽이네. 허허. 결국 나이 먹어 늙으면 알게 될 일, 미리 알 필요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어요. 나도 내 나이 믿어지지 않고, 이렇게 늙은 나이, 말 안 듣는 몸이 나 같지 않고 힘들어요. 내가 나이롱이라 성경은 잘 모르지만, 노인에게 아주 적실한 말씀이 하나 있어요. 어디 나오더라. 베드로 얘기예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일 거예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내 생각에 노인의 할 일은 주도권을 내려놓는 거예요. 무조건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 남이 누구든 나를 주도하도록 내어주어야 편하다니까. 가까이는 자식들에게 그렇고, 제자들에게 그러려고 해요. 나도 젊을 때는 무척 깐깐한 선생이었어요. 수퍼비전 줄 때는 울지 않았던 학생이 없었어. 지금은 내가 그렇게 해봐요. 누가 나를 만나러 오겠어.

 

유레카! 내가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선생님께서 다 설명할 수도 없으시지만 그런 삶의 기쁨이 있다고 하셨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는 행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책 작업을 하는 동안 베드로의 노년을 따르는 선생님의 노년을 많이 듣고 기록해야지 싶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유난히 보랏빛, 붉은빛의 오묘한 조합으로 아름다웠다.

 

      이 시간이면 소파에 앉아 해가 넘어가는 걸 봐요. 혼자 살기 때문에 참 쓸쓸한 시간이기도 해요. 내 인생의 시간이겠지. 아니다! 해가 넘어가고 노을이 물드는 시간은 정 선생의 시간이겠다. 나는 이제 밤이에요. 정 선생이 부럽네. 나는 5, 60대 늙음의 신호가 왔을 때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성공과 성취에 취해서 젊을 때 살던 그대로 살았지. 조금 더 일찍 노화를 받아들이고, 팔을 벌리는 방향으로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뭐, 그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어. 지는 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 빛으로 생기는 저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팔을 펴는 연습하라고 오십견이 오는지도 몰라. 정 선생 강의 들을 때 보니까 어깨 힘주고 정신없이 노트북 두드려대던데. 그렇지, 나중엔 손을 놓더라고. 하하. 노화의 강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요. 이야, 오늘 노을 정말 예쁘네. 정 선생같이 예쁘네.

 

새벽으로부터 동이 트고 정오를 향해 높아지는 해, 그리고 오후가 되어 부드러워지는 빛과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인생 주기와 빗대어 한참 이야기 나눴다. 선생님은 당신의 시간은 밤이라고 했다. 영원한 잠이 들기 전 마지막 시간으로 정리가 된다고. 그러며 좋은 노년은 없다, 고 하셨다. 좋은 노년은 좋은 중년의 결과일 뿐이라고. 어둠이 내리기 전, 하루 중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인 이 시간을 겸허하게, 나 자신을 진실하게 대면하며 지내면 좋겠다고 하셨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셔서 아쉽다고. 앞으로 뵐 때마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밤이 오기 전에 돌아봐야 할 진정한 나, 진정한 삶에 대해 얘기 나눠보자고 하셨다. 가슴이 뛴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지만, 남은 것은 늙음 뿐인 나날이라 생각했는데. 전에 느껴보지 못한 아주 고요한 새로운 설렘이다. 다음 만남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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