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2

 

 

 

“너희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소설 원작의 영화 『은교』에 나오는 대사이다. 노(老) 소설가 이적요의 독백이다. 그리 감명 깊게 본 영화도 아닌데, 저 대사만큼은 어쩐지 잊히질 않는다. 박완서 선생의 소설에 매료되어 출간을 기다리며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읽어댄 여러 소설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다. 이 역시 읽을 당시 그다지 큰 감동은 없었다. 선생의 소설 중 최고로 꼽는 작품은 따로 있다. 그런데 유독 기억나는 인물과 대사는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죄 모여 있다. 노인들이 주인공이고 노년의 쓸쓸한 나날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다. 나도 모르게 노년의 몸, 노년의 삶에 끌린다. 그런가 하면 실제 삶에선 이상하리만치 노인 대하는 것이 어려워 가까이 다가가질 못한다. 음악심리치료를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 학기마다 치료 실습이 있었다. 장애 비장애 아동부터 정신과 환자와 노인 질환자, 일반인까지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경험하는 것이 실습의 목표였다. 그러다 자연스레 적성에 맞는 대상을 찾아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대학원 내내 노인 대상 치료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핑계는 늘 있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피해 다닌 게 맞다. 졸업 후에는 학생들 실습 지도 일을 했었는데, 그때도 역시 노인기관은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것 같다. 이상하리만치 노인, 특히 노인의 몸에 대해 끌림과 거부 사이를 오갔다.

 

노인에 대한 양가감정

기억 저편의 소설 『은교』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 떠오른 것은 최 선생님 때문인 듯하다. 벌써 선생님을 여러 번 뵈었다. 일로 만나는 사이지만, 일 얘기는 헤어지기 전 몇 마디면 족하다. 책 작업과 관련 없는 수다로 몇 시간이 훌쩍 지나곤 한다. 주로 내 고민을 끝없이 털어놓는 격이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이 듣고만 계시는 건 아니다. 한 번씩 가볍게 질문 던지기도 하시는데, 그 때문에 내 얘기가 끝나질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줄줄 쏟아내게 하시니, 과연 평생 상담으로 살아오신 전문가답다. 이 만남이 참 좋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뵈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노인의 몸, 80을 넘긴 노구의 몸을 가진 선생님께 끌리면서 동시에 밀어내는 내 마음을 본다. 알 수 없는 내 마음이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끝없는 얘길 나누노라면 오후의 햇살이 거실 안쪽까지 깊게 훑고 지나가곤 한다. 빠져나가던 빛이 어쩌다 선생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볼 한쪽에 조각 햇살이 남아 그 부분만 환하게 도드라졌다. 그때 선생님의 피부가 유난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서둘러 눈길을 거두었다. 실은 마주하고 긴긴 얘기를 나누면서도 선생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바라보는 것 같은 모양새는 했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흐릿하게 보려 애썼다.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어우러진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어쩐지 죄송하고 민망하다. 선생님의 인격에 한없이 끌리지만, 그래서 자꾸 가까이 가고 싶지만, 한편 뒷걸음질 치게 되는 순간이다. 알 것도 같고 영 모르겠다 싶기도 한 노인에 대한 양가감정이다. 고백컨대, 처음 선생님과 가까이 마주 앉아 얘기 나누던 카페에서부터 작은 불편함이 있었다. 깊은 주름, 검버섯과 겉도는 밝은색 립스틱이 무척 버거웠다. 선생님은 좋지만, 선생님의 얼굴은 싫었다. 그런 마음을 들킬까, 도둑 제 발 저리는 심정으로 눈을 게슴츠레 떴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나쁜 짓 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선생, 내 얼굴이 좀 우습죠?” 나는 분명 재빠르게 거둬들였는데, 그새 내 눈길을 잡아채신 것인가. “네? 무... 무슨 말씀요. 서... 선생님 얼굴이... 왜요, 좋으신데요.” 당황해서 말이 잘 수습되지 않았다. “아, 글쎄 우리 아들 며느리가 저네들 다니는 병원에 데리고 가더니 얼굴에 주사를 놨지 뭡니까. 뭘 넣는다고 펴질 주름도 아닌데, 늘 이렇게 더 우습게 만들어놔요. 그래서 자꾸 쳐다보는 거죠? 우습죠?” 휴우, 안심이 되고 다른 한편 더욱 죄송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심정이 되었다. 어서 화제 전환을 해야지 싶은데, 웬걸. 직진을 하셨다.

 

      내 얼굴을 보는 게 참 낯설어요. 내 사진을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죠. 나인가 싶지 않은 거지. 그렇다고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익숙해지지 않을 뿐이지.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있습디다. 내담자나, 젊은 선생들과 얼굴 맞대고 있는 시간이 많은데. 그분들 참 고역이겠구나. 마른 대추같이 쭈글쭈글한 얼굴 들여다보는 게 좋겠어요?

 

     아, 아니에요.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에이, 뭐, 그, 그런 말씀을...

 

    정 선생은 유난히 사람을 뚫어져라 보잖아요. 하하. 정 선생 눈빛이 강렬하다고 아주. 가끔 쭈그렁 망탱이 노인네 민망해요. 하하. 우리 아들이 제 엄마 늙는 것에 아주 질색팔색을 해요. 먹을 것도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 매일 운동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죄다 별 소용없는 일인 줄 알지만 못 이기는 척 따라 하고 있어요. 시키는 대로 하는 것밖에 해줄 게 없으니. 가끔 이렇게 얼굴에 뭘 넣어 주름이 펴지면 그렇게 좋은가봐요. 나도 마지못해 따라가는 건, 조금 팽팽한 얼굴이 젊은 내담자들에게 덜 부담스러우려나 싶은 마음도 있답니다. 그러니 주책스러워 보이겠지만 그러려니 해줘요.

 

    아, 선생님 저는 정말 전혀 몰랐는데요. 평소와 다르지 않으신 것 같아요. 아? 아닌가? 이건... 어, 그러니까 선생님 자연스럽다는 말씀인데...

 

끌리는데 멀어지고 싶은 마음

나는 사실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봐 드리지 못한 것이 오히려 민망했다. 이미 충분히 노회한 얼굴에 사로잡혀 시술과 관리로 달라진 변화가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노인인 선생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묻지도 않는 당신 얼굴 얘길 하실 때,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깨달아졌다. 나는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가. 선생님의 늙음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닌데, 난 왜 똑바로 보지 못할까. 똑바로 보지 않으려 애썼는데 어째서 선생님은 그 반대로 느끼신 걸까. 난 정말 선생님의 정신과 말씀은 모두 좋지만, 시술로도 어떻게 안 되는 노화로 가득 찬 선생님의 얼굴과 몸은 버겁기만 하다. 처음으로 닮고 싶은 어르신을 만났다. 나도 저렇게 나이 먹었으면 싶은 바로 그 노인을 만났다. 선생님께선 ‘우정’이란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세대의 간극을 넘어 우정이 두터워지는 것이 느껴져 황송하고 행복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생님의 몸을 마주하는 것이 버거웠다. 그래서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이 설레면서 동시에 무거웠다. 노인의 몸에 끌리면서 동시에 거부감이 드는 딱 그 지점이다. 피할 수 없다. 한 번쯤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설명해주실 것 같고, 무엇보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않으면 진실하게 대화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들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참 희한한 것이요. 저의 친정엄마가 90이 넘으셨거든요. 그렇죠. 선생님보다 한참 위이시죠. 저를 늦게 낳으셨어요. 거의 뭐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주 차이죠. 어릴 적에야 제 부모님밖에 경험하지 못하니 다른 집도 다 그런 줄 알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노인들이 아이를 키우신 거예요. 그래서 그럴까요. 저는 노인들, 특히 노인들의 몸에 본능적으로 끌려요. 그런데 끌리는 만큼 밀어내는 힘도 강렬해요. 너무 마음이 쓰이는데 그럴수록 멀어지고 싶달까. 무슨 말씀인지 모르시겠죠? 저도 제가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어, 나는 알 것 같은데. (웃음) 그래서요? 궁금하다. 정 선생 노인네인 나한테 끌려서 이렇게 친해진 거잖아요. 끌리는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뭘까? 우리 집에 그만 오겠다는 말은 아니죠? 하하.

 

     헤헤, 당연히요! 선생님 조금 전에 선생님 얼굴이 낯설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나이를 완전히 잊게 되는 것 같아요. 제 또래 모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세대를 뛰어넘어 이렇듯 편안하게 말씀을 나눌 수 있다는 게 가끔 믿어지질 않아요. 그래서 그런가. 뭐랄까, 아, 뭐랄까. 그게 너무나 감사하고 좋죠. 그러니까 선생님의 정신은 젊으신데, 연세 드신 몸이 좀 순간순간 낯설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잘 표현이 안 되네요.

 

      허허, 거참 기분 야릇하네. 칭찬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늙은 얼굴이 부담된다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그.... 그게요. 선생님, 부담이 아니라.... 그....

 

      알겠어요.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믿길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도 그래요. 내 생각은 아직 한참 젊은데 몸만 늙은 것 같아요. 팔십 넘은 얼굴이 이래야지 어떠해야겠어요. 80년 넘게 쓴 몸이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머리로는 받아들이는데 나도 내 몸이 낯설어요.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정 선생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은 뭐 50 넘은 당신 몸이 적응이 되우? 몸이 가는 시간은 정직한데 마음이 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요. 그런데 정 선생은 그 말이 왜 그리 어려울까? 내가 어려워서 그러는 것 같진 않은데.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해봐요.

 

왜 그리 죽음에 끌려요?

몇 마디 말씀에 안심이 되었다. 영화 『은교』의 대사부터 시작해서 끙끙거리던 내적 갈등을 털어놓았다. 말을 할수록 금세 마음의 짐이 덜어졌다. 희한하게 선생님의 주름진 얼굴, 아니 의술의 힘으로 일부 팽팽해져 더욱 어색한 선생님 얼굴을 편안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내 얘기를 다 들으신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알 듯 모를 듯 웃음을 지으셨다.

 

      정 선생은 왜 그리 죽음에 끌려요?

 

      네? 죽음에 끌린다고요? 제가요? 그런 말씀 드린 적 없는데...

 

      나는 내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봐요. 아까 내 얼굴이 낯설다고 했는데, 이렇게 늙은 낯선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일부러 죽음을 생각해요. 노인의 몸으로 사는 것이 어떤지 물었죠? 죽음이 반쯤 덮친 몸이구나, 나는 이렇게 느껴요. 아기의 얼굴을 떠올려봐요. 다가가 어루만지고 싶고 입이라도 맞추고 싶죠. 누구랄 것 없이 아기의 몸에 끌려요. 노인에겐 어디 그런가요? 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봐요. 아기에게선 생명의 기운이, 노인에게선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탓이지. 정 선생의 말, 노인에게 유난히 끌리기도 하고 달아나고 싶기도 하단 말이 죽음에 대해 그러하다고 들려요. 정 선생, 가까이에서 경험한 죽음이 있어요?

 

      네? 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어릴 적이라 뭐가 뭔지 몰랐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엔 아버지 없이 사는 것이 태산 같은 일이라, 깊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같아요. 죽음 자체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늘 강렬했고, 그러는 한편 죽음은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은 공포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거울에 비친 모습에 죽음을 떠올리신다는 말씀이 놀랍네요. 아, 놀랍다는 게 신선하달까 그런 느낌이라 좀 야릇해요.

 

      정 선생 처음 우리 집에 왔던 날, 좋은 노인이 되고 싶다고 했죠? 갱년기 증상을 겪으면서, 고치고 운동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당혹스럽다고 했던가?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려 태도를 봤어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갱년기 증상은 죽음이 보내는 강력한 신호라고 생각해요. 정 선생이 자기도 모르게 그 신호를 알아채고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때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정 선생 나이 때 그런 깨달음이 없었거든. 힘쓰고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도 마음먹은 것을 결국 대부분 이뤄내고 말았고요. 갱년기니 뭐니 하는 것도 나약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해보면 강단에서 가르쳤던 것, 내담자 앞에 두고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았죠. 좋은 노년은 없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좋은 노년은 좋은 중년의 결과예요. 내가 생각하기엔 그래요. 내 뼈아픈 경험에서 얻은 생각이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좋은 노년을 사시고 계시잖아요. 말씀대로라면 그 이전의 삶의 결과 아닌가요?

 

      정 선생이 좋게 봐줘서 그래요. 그나마 이렇게라도 깨달은 것은 나이 60이나 되어 호된 고난을 겪은 덕분이지요. 덕분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네. 말 그대로 죽음에 욱여쌈을 당한 시절이었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죽음에 욱여쌈을 당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셨다. 60대 초반, 선생님의 남편께서 암 선고를 받으셨다. 예고 없이 찾아든 청천벽력이라고 표현하셨다. 공교롭게도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 부부가 어렵사리 아이를 가져 기쁨과 설렘으로 지내던 나날이었다고 한다. 항암치료로 야윌 대로 야윈 남편분께서 갓 태어난 손주를 안고 눈물지으시던 장면, 당신 인생에서 가장 아픈 기억이라고 하셨다. 설상가상으로 연로하신 선생님의 어머님 또한 노환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셨으니, 그야말로 생로병사가 눈앞에서 교차하고 있었다고.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몇 년 안에 남편과 어머님을 천국에 보내셨다. 무엇 하나 부족하다 느끼지 않았던 삶은 텅 비어버렸고,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인생 신념이 무너졌다고 한다. 몇 년 캄캄한 시절을 보냈고, 뒤늦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셨다고. 죽음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것으로 슬픔에 맞섰고, 미국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스캇 펙(M. Scott Peck) 박사의 소설이 In Heaven as on Earth: A Vision of the Afterlife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포이에마)이었다. 빨려들 듯 읽으셨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렴풋하게나마 의문에 희망을 찾았다고 하셨다. 평생 인간의 마음을 연구해 온 선생님이시다. 이즈음의 경험과 독서로 영적 세계에 눈이 떠졌고 자연스레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셨다고 한다. 그전까지 선생님의 신앙은 불교에 가까웠다. 죽음의 욱여쌈이 도리어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이 되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되었다니! 그러니 당신은 죽음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다며 창밖 멀리 시선을 보내셨다. 거실 깊숙이 들어와 앉았던 해의 꼬리가 물러난 지 한참이다.

 

      , 선생님, 이런 간증을 듣다니요! 죽음과 삶의 연결이 신비롭게 느껴져요.

 

     주름진 얼굴, 노화가 불편한 것은 죽음을 부정하고 본능일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것이죠. 사회가 젊음, 젊은 몸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죽음에 대한 거부 아니겠어요? 중년을 넘긴 우리 아들이 유난히 젊음에 집착을 해요. 늙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제 몸뿐 아니라 죽을 날이 가까운 지 에미까지 관리하느라 공을 들이죠. 저기 저 운동기구며 안마의자도 다 아들이 사다 놓은 거예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 것을 알아요. 제 아버지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왜 아니겠어요. 첫 아이를 낳고 아버지 되는 기쁨과 제 아버지를 잃는 슬픔을 동시에 겪어야 했으니까요. 게다가 혼자 남은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부담도 컸을 거예요. 제 몸 제가 지켜야 한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서 자기 관리가 철저해요. 그 집착이 나는 안타까워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만큼 건강한 몸에 집착하거든요. 그 두려움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기 때문에 더 안타깝죠. 이제라도 아들이 깨우쳤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제 삶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일 때 신앙이 들어갈 여백이 생길 텐데. 정 선생 보면서 우리 아들 생각을 자꾸 하게 돼요. 나이 먹어 늙고 죽게 되는 인생의 비극을 받아들이고 제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자리가 주님 만날 자리인데, 아직 그러질 못하고 있네요. 생각나거든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어스름한 한강 변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하는 소리가 가슴에서 울렸다. 노인의 얼굴에 다가가고 싶고 멀어지고 싶은 알 수 없는 마음을 ‘죽음’에의 태도로 해석해주신 것은 선생님만의 따스한 지혜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또렷하게 선생님의 목소리로 다시 들린다. 좋은 노인으로 사는 것은 결국 죽음과 친해지는 일인 것이다. 죽음과 친해지는 것은 노년의 일 아니라 지금 여기의 과제이다. 선생님을 따라서 해봐야겠다. 거울을 볼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디까지 드리워졌나 찬찬히 꼽아 봐야지. 눈가의 주름과 쳐지는 피부로 내 죽음을 마주할 때, 어쩐지 더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브레넌 매닝이 『아바의 자녀』에서 말했다.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 앞으로 더욱 거세게 밀려들 노화의 파도를 순순히 기쁘게 맞도록 해야겠다. 삶의 끝은 죽음이 자명하니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리. 죽음 이전에 삶, 오늘의 삶이 있으니 이 순간을 두려움 없이 누리는 것 또한 포기하지 않으리.

 

<시니어 매일성경> 2021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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